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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아름다운 사람-고 김창화 선생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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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창화 선생

 

 다음은 15년 전 한인원로 김창화 선생에 대해 쓴 글이다. 엊그제 집에서 예전의 칼럼 파일들을 뒤적이다 이 글을 발견했는데 한 달여 전에 돌아가신 고인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다시 지면에 옮겨 본다.    

 

0…“한인원로 한 분이 건네준 CD 한편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이제 미래의 꿈보다 과거의 추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직장일이 끝나고 피곤할 때 이 테이프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길…’ 라고 쓴 영문 메모와 함께 김 선생이 그동안 활동해온 토론토 재향군인회, 한국전참전용사회(KVA) 등의 모습을 18분짜리 슬라이드로 만들었다.

 

 CD에는 전선야곡, 전우야 잘자라, 가거라 삼팔선, 그리운 금강산 등 옛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면서 추억의 영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낯익은 노병들 모습도 잇달아 비친다. 화면은 브램튼 ‘위령의 벽’ 옆에 선 그 분의 발 아래로 ‘나의 영원한 안식처’라는 자막과 함께 끝난다. 다 보고 나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김창화 선생. 그는 올해 75세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하다. 이분을 보고 누가 노년이라 할까. 빠릿빠릿한 그의 언행은 애늙은이처럼 행세하는 젊은이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항상 웃는 인상에 활달하기 그지없는 그를 보면 덩달아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의 건강비결은 무얼까.   

 

 한인사회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듯 김 선생은 은퇴 후를 더 바쁘게 사는 분이다. 수첩에 법정통역 스케줄이 빼곡하고 컴퓨터와 카메라 솜씨도 능란하다. 그 나이에 컴퓨터가 능통한 것은 군 경력(육군 전산실장) 덕도 있지만 언제나 부지런한 생활자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선생은 6.25한국전과 1960년대 월남전에 참전했다. 전산장교로 군생활을 하던 중 동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월남전에서는 통역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다 1972년 캐나다로 이민 온 선생은 운동기구 제조회사에 근무하며 욕대학에서 파트타임으로 캐나다학을 전공, 60세 때  마침내 학사모를 썼다.

 

 선생이 주경야독을 한 연유를 묻자 낮에 직장생활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소일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51세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특히 재향군인회 활동에 애착을 갖고 향군 캐나다동부지회장을 역임하며 향군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히 뛰어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캐나다용사들과의 유대관계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가 하면 온타리오 공인 법정통역관으로 활동하며 통역협회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남들은 은퇴 후 손자손녀나 돌보며 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데 그는 통역일 만으로도 수입이 넉넉하다며 활짝 웃는다. 그가 청년같은 젊음과 열정을 간직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노력이 따른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에 늘 바삐 살아가니 늙을 새가 없다.

 

 선생은 CD와 함께 자신의 사진이 박힌 메모지에 ‘늙어서 날뛰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법정통역에 바쁘다. 참전용사회 일은 더 바쁘다. 나를 한가하게 놔두지 않는다. 다행히 건강이 유지되어 하루도 쉬지 않고 법정에 나가고 있으니 고맙다. 아직도 이 사회에서 쓸모 있다고 대접받으니 늙어서도 자긍심을 느낀다’고 적었다.

 

 메모에는 한인사회를 향한 듯한 고언도 담겨있다. ‘캐나다 사회는 배가 아파 시기하는 것도 없고 열등감에 의한 모략 같은 것도 없다. 매우 속편한 세상이다…’  

 

0…이상이 15년 전에 쓴 글인데, 지금이나 그때나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 선생을 생각하면 인생, 특히 노년을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삶인가를 엄중히 깨닫게 된다.       

 

 나와 같은 성당에 다닌 선생은 언젠가 내게 전화를 걸으셔서 “이형, 혹시 교통위반 티켓 받은 것 있어요?” 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껄껄 웃으시면서 “그럼 동명이인이구먼. 그게 이형이라면 내가 법정에 안 나가려고 그랬지. 통역이 안가면 티켓이 무효잖아”라고 하시어 우리는 함께 웃었다.               

 

 또 한번은 주일미사 후 만난 자리에서 “법정통역은 귀가 밝고 두뇌회전이 빨라야 한다. 아직도 법조계에서는 나를 선호하고 나도 정신이 멀쩡하니 앞으로 5년은 더, 즉 80세까지는 통역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선생은 수년 전 부인을 먼저 앞세우고 쓸쓸한 노년을 보냈으며, 생의 마지막은 참전용사 전문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렇게도 두뇌가 명석했던 고인이건만 흐르는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듯 말년엔 치매로 고생하셨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정다감했던 고인은 2년 전 한인여성합창단이 병원에 위문공연을 가서 추억의 음악을 들려주자 감동에 벅차 흐느꼈고, 이를 본 합창단원들도 한동안 노래를 잇지 못했다.

 

0…내가 타국에서 만나 롤모델로 정한 몇 안 되는 분 중의 한 분. 동포사회에 남긴 공적을 생각하면 장례라도 후하게 치러드려야 도리였을 터인데 코로나 때문에 그러지도 못해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돌아가시고 며칠이나 지나 가족끼리 조촐한 장례식까지 마친 후 뒤늦게 별세 소식을 접하매  더욱 죄송스럽기만 하다.

 

 그나마 당신께서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마련하신 한국전참전용사 묘지에 묻히셨으니 다행이랄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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