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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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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아버지의 술잔

 

Editor’s Note

-모진 세월 헤치고 살아온 삶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 이름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나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이 거의 없다. 아니 아버지라는 용어 자체가 어색하다. 그 이름을 불러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0…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다니거나 아버지 덕택에 잘 된 것을 보면 무척 부러웠다. 한편으론 “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나.” 속으로 원망도 많이 했다. 
 내가 지금도 부친의 후광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계층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이 나이토록 아버지라는 이름을 아예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빛바랜 사진첩들을 뒤적이다가 노랗게 색이 변한 옛날 사진들을 보노라니 새삼 눈에 띄는 장면들이 몇개 있었다. 바로 내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0…갓난아기 때부터 너댓 살 무렵까지인 것 같은데 너무도 새삼스러워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면서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나는 그동안 아버지 생각을 안하고 살아왔을까? 아버지라는 존재가 전혀 없었던 것 마냥… 그것은 아마도 먹고 사는데 열중하느라 옛 생각을 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0…사진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멋진 신사숙녀였다. 아버지는 예전 구세대답지 않게 하이칼라 머리에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맨 세련된 모습이셨다. 
 언젠가 친구들과의 계모임에 참석할 때 어머니와 나를 함께 데리고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호탕하게 웃으시는 얼굴에서 쾌남아 인상을 짙게 풍긴다. 단아하신 어머니는 내 평생 보아온 모습과 똑같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세탁소 일을 하시다가 해방 후 귀국하셔서도 그 일을 하셨다고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0…아버지는 내가 여섯살 때 집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너무 고통스러워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 진단 결과 급성 복막염인데 시간이 너무 지나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다시 돌아오셨다. 그 몇시간 후 아버지는 참으로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요즘같은 시대엔 병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질환으로 40대 중반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아버지 상여(喪輿)가 나가던 날 나는 깡충깡충 뛰어 놀았고 어른들은 그 모습에 눈시울을 훔치셨다.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급하시어 젊고 고운 어머니와 철모르는 다섯 남매를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셨는지. 

 

0…아버지는 대청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한적한 산기슭에 어머니와 합장돼 있다. 선산(先山)의 묘는 수몰(水沒)지역이라 호수에 물이 차면 조각배를 타고 가야 한다. 
 산소는 또 왜 그리 외지고 먼 곳에 썼냐고 성묘를 갈 때마다 투덜대기도 했다. 그나마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있다. 이런 불효가 없다. 
 아버지가 오래 살아계셔 효도하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 우리 아버지가 좀더 오래 사셨더라면 나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0…나는 막내로 태어난데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족들의 측은심 때문인지 형님 누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내 천성이 마음이 여리고 인내심이 부족한 것은 그런 성장 환경 때문이라 생각된다.   
 내가 나이들수록 건강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내 자식들만큼은 아버지가 오래 함께 있어 좋은 추억거리들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0…‘아버지’란 말엔 왠지 외롭고 고달픈 이미지가 스며있다. 한잔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의 모습은 측은해만 보인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힘이 드실까.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 직장에서 무시당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와선 내색 않고 그저 미소만 지으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오로지 가정과 자녀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의 온갖 굴욕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한국의 아버지 상(像)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때론 자식들이 무시하고 대화에 끼여주지 않아도 그냥 허허 웃어넘기는 우리의 아버지.

0…6월 세번째 일요일(올해는 16일)은 캐나다에서 정한 아버지의날(Father’s Day)이다. 어머니날은 선물이다 외식이다 하여 떠들썩하지만 아버지날은 대충 넘어간다. 
 그래도 이날만큼은 아버지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드리는 것이 어떨까. 
 무기력하고 초라해 보이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 그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다.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용기를 주자. 그들의 기(氣)를 살려드리자. 가장(家長)의 빈자리는 없을 때 더 큰 법. 살아계실 때 잘 해드릴 일이다.  

 

0…‘아버지는 태산 같은 존재/ 나이가 들수록 작은 동산의 둔덕/ 흔들림 없는 아름드리였다가/ 누구보다 연약한 갈대/ 수많은 감정들을 가슴에다 채우고/ 가장이라는 짐을 지고 휘청대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인 것을!’   (김향숙 ‘아버지’)        (주필)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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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6
거인을 만나다

Editor’s Note


-경계인으로 살다간 고종옥 신부님 
-삶의 방식엔 정답이 없음을 일깨워줘  

 

                                                                   고 고종옥 마태오 신부(1930~2004)
 

“아내가 있다는 적군의 말에 종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1년 남짓 전쟁터를 누비고 있지만 역시 전쟁은 할짓이 못되었다. 특히 동족간의 전쟁은 더욱 그랬다. 단란했던 한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날 종옥의 품에서 숨을 거둔 인민군도 말하지 않았던가. "동무,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동무의 눈에는 내가 극악무도한 공산주의자로 보일지 모르나 나는 조국의 배반자도, 반역자도 아니오. 나는 다만 명령에 복종하는 인민군일 뿐이오.”

 

0…인생을 사는 방식엔 여러 길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 굳이 신앙적으로 얘기한다면 주님이 하라시는대로 순명(順命)하다 갈 뿐이다.     
0…고종옥(高宗玉•마태오.Matthew) 신부의 평전을 감명깊게 읽었다. 나는 사실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이민을 왔고, 또한 다른 성당을 다녔기에 토론토 교민사회에 대해 잘 몰랐고 신부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신부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 분에 대해 접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최근 지인분께서 <고 마태오 평전>이란 책을 건네주셔서 읽기 시작했는데, 시종일관 무슨 영화 대본을 보는 기분이었다. 한때 피터보로 한인성당에 봉직했던 최종수 신부와 한국의 중견문인 박영희 시인이 공저한 것인데, 고인에 대한 섬세한 기술은 물론, 세련된 문장과 표현력이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0…신부님은 태생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황해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일제의 온갖 잔학상을 몸소 체험했고, 해방을 맞았으나 다시 양분된 조국에서 동족간 좌우 이념 대결을 목격했으며, 이어 발발한 6.25 한국전쟁에 해병대로 참전해 인민군과 싸웠다. 
 그의 정규 학력은 일제시대 초등학교 5학년 졸업이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농사를 시작으로 땔감장수, 석회운송 등 그의 청소년기는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어머니(독실한 천주교 신자)로부터 보고 배운 기도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0…신부님의 사제 성소(聖召: vocation) 씨앗은 한국전쟁 참전 중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에서 싹텄다. 해방 후 3.8선 경비대를 거쳐 해군(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그는 상사로 제대한 후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를 위해 신학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간다(학력이 부족했기에). 하지만 기초지식이 모자라 동료학생들을 따라가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온갖 악조건 속에 가까스로 편입학이 되긴 했지만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방학 때는 학교에 남아 잔심부름을 해야 했다. 외로운 밤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0…그러다 찾아온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바로 프랑스 유학(Nancy, 낭시 신학대) 기회였다. 하지만 불어라고는 ‘농(non)’이 아는 게 전부였던 그에게 프랑스 생활은 감당하기가 너무도 벅찬 시련이요 장벽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병신 취급’을  받아가며 온갖 굴욕을 버텨내야 했다. 
 피눈물나는 고생을 해가며 그는 남들이 다 자는 밤에 변소에서 홀로 불을 밝히고 도둑공부를 해야 했다. 이런 사투 끝에 그는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았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거둔 눈물겨운 결실이었다.  
0…천신만고 끝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그리운 고국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로 발령이 났다. 왜 그랬을까?
 사제가 된 이상 다른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해외동포와 교회와 민족을 위한 도구로 쓰시려고 이국땅으로 파견하셨던 것이다. 
 신부님은 이때부터 하느님의 소명인 신자와 동포, 교회와 민족을 위한 무한한 희생과 사랑에 혼신을 다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 사랑 앞에 그 어떤 제동장치도 통하질 않았다. 제동장치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작동시켰다. 

 

0…프랑스 유학과 오타와 수도원 생활 후 꿈에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꿈이 다시 깨지고 몬트리올로 부임하는 소회를 김삿갓에 비유해 이렇게 노래했다.  
"조국과 민족 위해 신부가 되었건만/ 이국에서 살아야 하는 이 마음 외로워라/ 제대(祭臺) 위에 제물 바쳐 천주께 기구(祈求)하며/ 고향땅 별 하늘을 그리워하는 고삿갓" 
0…그의 드라마틱한 교포사목은 몬트리올 도미니꼬 수도원에서부터 시작됐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의 무용담은 한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 
 한 술주정뱅이를 하느님 품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으나 그는 생쥐가 들어간 국을 들이밀며 신부님을 마음껏 조롱했다. 하지만 신부님은 (속이 뒤집힐 듯한 구역질을 참고) 그 국을 후루룩 마셨다. 
 뿐만 아니라 국맛이 좋으니 한그릇 더 달라고 했다. 개망나니는 결국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부님, 이 짐승같은 놈을 용서해주세요… 흑흑…”
그는 이내 독실한 신자가 되어 신부님과 함께 기상천외의 가두 ‘딴따라 미사’에 나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9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알현

 

0…그런가 하면 마피아들이 우글거리는 몬트리올 부둣가의 선술집에서 두목과 단판 술내기 시합을 벌여 제압한 일화는 영화보다도 더 스릴이 있다. 그때 만약 술내기에서 졌더라면 온몸이 칼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채 부둣가에 버려졌을 것이다. 
 해병대 출신답게 선이 굵고 배짱이 두둑한 신부님의 이런 스토리는 수두룩하다. 

 신부님은 삶의 고비 때마다 이를 회피하려 들지 않고 정면승부를 펼쳐 기필코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십자가의 길만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특히 우리같은 이민동포들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불법체류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공항을 내집 드나들 듯했다. 수많은 동포 독신남녀들에게 짝을 찾아주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도 했다.   

 

0…하지만 그들로부터 돌아온 것은 고맙다는 공치사보다 험담과 손가락질이 많았다. 때론 그들로부터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도 욕을 먹었다. 신부가 강단을 안지키고 나돌아다닌다고…
 북한선교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 자신이 온몸을 바쳐 헌신한 신자들로부터 ‘간첩’이라는 모함도 들려왔다.                 
 특히 민족 분단의 아픔은 신부님 삶의 십자가와도 같았다. 이북 출신으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랬던 그였다. 이는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한 사제로서의 소명이기도 했다. 

 

0…토론토에서 사목하던 1976년 북한의 초청을 받고도 교회분열을 염려해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2년 토론토를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부임한 후 사제로서는 한국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다. 
 이때부터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교민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남과 북 모두로부터 의심과 감시를 받는 것이었다.  
0…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특히 사제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 봉헌하라고 선택된 사람이다. 신자와 나, 동포와 나, 교회와 나, 민족과 나라는 관계 안에서 매순간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사제도 사람이다. 매순간 인간으로서 겪는 갈등이 왜 없겠는가. 약혼녀와의 장래를 단념하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이겨내기 힘든 일이었다.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이국여성(쟌느)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숱한 밤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럴 때 그는 조국에서 들고간 돌맹이 하나를 프랑스 신학교 책상위에 올려놓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두 손에 부여잡으며 극기의 힘을 간구(懇求)했다. 

 

0…외로운 타국에서 만난 그녀는 예수의 성면(聖面)을 씻어드리며 위로한 베로니카와 같은 수녀가 되어 고 신부의 사제생활을 기구(祈求)로 돕겠다고 결심하고 수도원에 입회한다. 
 훗날 신부님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예비 수녀인 쟌느를 찾아가 새 신부의 강복을 주는 장면에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0…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은 특별하다. 하지만 고종옥 신부님처럼 삶의 온갖 풍랑을 헤치며 살다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파리로 다시 돌아온 태오(고 신부님의 영세명인 마태오)는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보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몸 둘 곳이 없었다. 한그루 나무처럼 한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돈 탓인지도 몰랐다. 
 우울한 날엔 무작정 한국으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지인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차갑고 업무적이었다. 북한선교를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는 태오로서는 하루아침에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평전 본문 중)        

0… 고 신부님은 ‘사랑의 지도' 등 20여 권의 자전소설과 수필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예수 없는 십자가’는 79년 프랑스어로 출간된 것을 다시 한국어판으로 번역됐다. 한국인이 불어로 책을 쓴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적은 ‘아,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와 파리에서의 북한선교 임무를 중심으로 엮은 ‘조국과 교회 사이에서’ 등 고뇌어린 작품이 많다.
0…민족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 신부님은 선이 굵고 개척정신이 투철한 성직자이셨다. 명절엔 한복에 갓을 쓰고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래서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캐나다의 한인이민 대부’ ‘캐나다 동포사회의 정신적 지도자’… 
 그런가 하면 선교를 위해 북한을 다녀왔다고 ‘빨ㄱㅇ’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0…토론토 한인 천주교회사에서 고 신부님은 지대한 업적을 남기셨다. 1969년 8월 한맘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신 후 피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번듯한 성전을 갖게 됐다. 
 캐나다 한인이민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기신 고종옥 마태오 신부님. 한국, 프랑스, 캐나다, 미국을 떠돌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사신 신부님은 2004년 12월 31일 토론토의 한 병원에서 향년 74세로 선종(善終)하셨다. 
 지금은 토론토의 한맘성당 묘지에 고이 잠들어 계신다. 신부님은 캐나다, 특히 토론토 한인사회에 영원한 십자가로 길이 남을 것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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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3
‘빵’을 찾아서

Editor’s Note

-취업 걱정하는 젊은이들  
-자기계발 기회 갈수록 멀어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 

 


 예전 어릴적 우리집 사랑채엔 한 대학생 형이 세를 들어 자취(自炊)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허구한날 학교에도 안가고 마냥 빈둥대며 놀고만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형이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모습은 거의 본 기억이 없다. 가끔 예쁘장한 여학생이 놀러와 노닥거리다 가곤 했다. 
 그런 형을 보고 어머니는 “저 청년은 먹고 대학생”이라 하셨다. 늘상 먹고 노는게 일이라는 의미셨다. ‘먹고 대학생’이란 말은 아직도 나의 머리에 각인돼있다.

 

0…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일단 대학만 들어가면 실컷 노는 게 일이었다. 고교 때의 입시지옥 고생을 한풀이라도 하듯 공부와는 담을 쌓고 놀 궁리만 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심심하면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고 하루 종일 당구장에서 죽치기도 했다. 통기타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되는, 그런대로 낭만이 있던 시기였다. 
 전공학과 공부에 쫓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대충 해도 학점은 나왔고 웬만하면 졸업도 다 시켜줬다. 그렇게 ‘놀고 먹어도’ 학교를 졸업하면 웬만하면 취직자리도 있어 그런대로 사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한국에서는 대기업과 공기업 등에서 매년 직원 공개채용 제도가 있어 전공학과와 관계없이 대체로 누구에게나 시험의 기회가 주어졌다. 

 

0…한편으론 전공 공부에 쫓기지 않으니 문학, 철학, 역사 등 다방면의 교양서적을 읽을 기회도 많았다. 가방만 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도 나름 시대를 고뇌하고 책도 많이 읽으니 인간적으로 폭이 넓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필자의 학창시절은 군사정권이라는 시대배경으로 인해 거의 매일 ‘군사독재 퇴진’ 데모가 벌어지고 걸핏하면 학교문이 닫혔다. 
 그런 와중에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공부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별종 ‘취급을 했다. 그런 ‘놈’들은 시대의 고민을 외면하고 저만 잘살겠다고 애쓰는 이기주의자요,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고시에 합격한 친구들에 대해서도 별로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 막걸리 퍼마시고 시대를 한탄하며 분기탱천(憤氣?天)하는 모습이 더욱 떳떳한 모습이었다. 

 

0…지금 생각하면 쑥스런 웃음이 나지만 그런 성장통을 거친 사람은 그래도 인간적인 면모가 풍부한 것이 사실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대학을 졸업해도 일할 곳이 없으니 모두들 죽어라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사정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다. 학과공부에 찌들어 있는 대학생들을 보면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입학은 쉽게 하지만 죽어라 공부하지 않으면 중도 탈락하기 십상이니 차안에서나 어디서나 그저 공부만 하고 있다. 그러니 교양서적 읽을 기회는 별로 없는 듯하다. 

 

0…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인생의 황금시기에 학과공부에만 골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특히 언젠가부터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해지는것 같다. 문학, 사학, 철학을 일컫는 ‘문사철’ 출신은 졸업 후 해먹을 일이 별로 없으니 모두들 기피하고 있다. 
 주변 친지의 자녀들이 이런 분야를 공부한다면 걱정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0…교민들 자녀 중에도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으로 성공한 사례는 많지만 문학, 사학, 철학 등을 전공해 성공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니 순수 인문계통 공부를 한다면 ‘그거 해서 밥 먹고 살겠나’ 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졸업 후 비교적 진로가 확실한 분야는 의대, 약대, 상경계 및 이공계, 법대, 회계분야 정도이고 그 외엔 별로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럼 나머지 수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0…세계적으로 인문학과 기초학문 분야가 쇠퇴하고 경영학과 등 현실적으로 취업이 잘되는 과목에만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대학에서 인문학 위기가 운위된 지는 이미 오래다. 취직 관련 전공이나 학과는 경쟁률이 치열한 반면, 일부 인문학과는 ‘시장성’을 지닌 다른 학과로 속속 간판을 갈아 달기도 한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대부분  복수전공(경영학 등)을 택하고 있다. 
 극심한 취직난 속에 전공분야와는 무관한 단순직에 종사하는 대졸자도 많다. 대학졸업장이 ‘빵’을 보장해주지 않는 냉엄한 현실에서 무수한 청춘이 좌절당하고 있다.

 

0…인문학 기피 현상은 취직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은 분명 문제가 있다. 
 기계적으로 경영학을 공부하고 법을 전공한 사람이 인간의 다양한 세계를 어찌 이해하고 올바른 기업활동을 하거나 정당한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영혼 없는 인간들이 모두 눈에 불을 켠 채 돈만 추구한다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0…세상은 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경제성장과 개발, 재테크 등 극단적 물질주의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빵만으론 살 수 없다. 물질문명 속에 황폐화되고 피로해진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인간 내면의 영혼과 가치이며, 그것을 살찌울 문화적 환경이다. 
 인문학적 토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철학과 사상이 없는 사회, 영혼없는 시민들을 양산해내는 사회는 결국 자멸적 사회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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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6
봄날은 간다

Editor’s Note

-지나고 나면 모든게 추억
-내 인생의 봄날은 바로 지금

 

                                                 
                                                           수채화 같은 대청호반의 봄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
 이 ‘봄날은 간다’는 한국 가요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진다. 특히 가사의 절절한 서정적 표현과 애끓는 곡조의 호소력이 일품이다. 

 

0…언젠가 한국의 시인 100명에게 자신의 애창곡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 ‘봄날은 간다’를 제일 많이 꼽았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이 노래만 들으면 괜스레 목이 멘다”고 했다. 
 정선(精選)된 단어만을 골라 쓰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로 예전 대중가요 가사를 선정한 것은 그만큼 이 노래가 품격이 있다는 뜻이리라.
0…6.25전쟁 직후인 1953년 가수 백설희씨에 의해 발표된 이 노래는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며 애창되고 있다. 
중장년층 사이에서 주로 불리던 이 노래는 가왕(歌王) 조용필과 이미자, 장사익, 심수봉 등이 잇달아  리메이크했으며, 동명(同名)의 영화와 악극으로 만들어져 히트하기도 했다.
 나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시대(군사정권 시절)가 암울해서 그랬는지, 부질없는 허무주의에 빠져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애상(哀傷)적인 곡조가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0…이 노래는 요즘 같은 계절에 잘 어울리거니와, 나는 한층 더 시적(詩的)인 2절 가사를 특히 좋아한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노랫말이 어쩌면 한 폭의 그림이요, 가슴 뭉클한 서정시다. 
 오가는 차 안에서 홀로 이 노래를 듣노라면 마음이 착 가라앉고 아련한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처연하고 구성진 곡조도 그렇거니와 노랫말이 애잔하기 그지 없어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0…이 노래가 특히 가슴에 아린 것은 27년 전 이맘때 어머니와 큰형님을 1년 간격으로 잇달아 저 세상으로 보낸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봄은 환희보다는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부모님과 큰형님이 묻혀 계신 대청호반엔 지금쯤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다. 어머님을 묻고 오던 날 황혼녘에 걸린 초승달이 처연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세상만사가 뜬구름 같구나/ 묘지에 성토하고 장례객 다 떠나니/ 쓸쓸한 산 위에 황혼달만 처량하네(空手 來空手去 世上事如浮雲/成墳土 客散後 山寂寂 月黃昏)

 

0…오는 듯 가는 듯 모르게 봄날이 지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듯, 봄은 오는 듯 마는 듯, 존재하는 듯 마는 듯하다 가버리기에 더 아쉽다. 
 순간처럼 왔다 속절없이 피었다 지고 마는 짧은 생명이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 잠시 피었다 지고 마는 것이 어디 꽃 뿐일까. 세상사 모든 일이 계절 따라 세월 따라 흘러가고 만다.
 우리는 흔히 근심걱정 없이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봄날이었다”고 한다. 봄날은 그렇게 포근하고 감미롭고 근심걱정이 없는 계절의 이미지다.

 

0…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옛날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아련한 봄날의 꿈결처럼 느껴진다.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봄날, 밭일 나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시냇가에서 개울 치고 가재를 잡던 어린 시절, 이상과 꿈도 많았던 사춘기를 거쳐 청춘이 만개(滿開)했던 대학시절, 예쁜 아내를 만나 달콤한 사랑에 빠져 지낸 신혼시절… 이제 그런 날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비록 물질적으론 빈한(貧寒)했지만 그런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았고 마음은 마냥 평화로웠던 시절.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하면 부족할 게 별로 없건만 언제나 끝없이 욕심을 내면서 스스로를 불만족 속으로 몰아넣는다.     

 

0…생각해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 아리게 그리운 것은 그런 날들이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 힘들고 어려운 지금 이 순간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게 그립고 ‘그때가 봄날이었다’고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이 화사한 봄날을 감사하고 여유있게 음미할 일이다.  

 

0…‘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1988년, 당시 나이 열여섯, 중학교 2학년 학생이던 박용주 시인이 쓴 이 시는 언제나 나를 겸허히 되돌아 보게 한다. 
0…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마냥 푸르고 아름다워야 할 5월이 모국에선 언젠가부터 눈물과 회한의 계절이 되고 말았다. 
 벌써 44년째, 광주의 그날 참극은 아직도 진상규명이 덜 된 채 갑론을박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나마 국가기념일 지정까지 온 것을 보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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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9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Editor’s Note
 
-난생처음 체험한 성지순례 
-잠시나마 속세 탈출의 청량제 

 

                                                           외부에서 본 알람브라 궁전
 

 

 남유럽에 위치한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에 걸쳐져 있으며,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와 육지상 국경이 있는 나라다. 

 서유럽과 유럽연합(EU)에서는 영토가 두 번째로 넓으며 유럽 국가 전체에서는 네 번째로 넓다.

0…스페인의 역사는 35,000년 전 이베리아 반도에 호모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페니키아, 고대 그리스, 켈트, 카르타고 문화와 이베리아 고유의 문화가 발달했고, 기원전 200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히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여러 왕국들이 건국과 정복, 멸망 등을 반복하다가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됐다. 
0…그 후 약 7세기 동안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가 일어나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르 왕국 같은 기독교국가들이 등장했고, 1492년 이 국가들 대부분이 마침내 가톨릭 군주라는 이름 하에 스페인으로 통합됐다.

 스페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콩키스타는 711년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뒤 약 800년간 기독교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왕조를 축출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재정복 과정을 뜻한다.  

0…근대에 이르러 스페인은 세계 최초의 제국(帝國)이 되었고 많은 문화적, 언어적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 스페인어 사용자는 약 5억 7,000만 명에 달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됐다.

 스페인 문화의 황금시기엔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뛰어난 예술가들이 등장했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이때 출판되었다. 

 이런 배경 등으로 오늘날 스페인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다.
0…스페인은 한때 무적함대(Armada)를 앞세워 바다를 정복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후 넘쳐나는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흥청대던 때도 있었다.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영국보다 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황금시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영화(榮華)는 오래 누리지 못했다. 

 넘쳐나는 부를 산업역량 배양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소비와 귀족들의 향락 수단으로 소모해버렸다. 식민지에서 쉽게 들여온 재화는 그저 행운이었을 뿐이고 그래서 고맙고 소중한 줄을 몰랐던 것이다.     

 스페인 곳곳에 산재한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들을 짓는데 재물을 탕진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지금은 그 덕에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후손들이 먹고 살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0…스페인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문화가 지배하는 유럽 국가이면서도 이슬람 문화가 진하게 혼재(混在)돼 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Granada)지역에 위치한 알람브라 궁전이다. 보통 알함브라 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Alhambr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알람브라’라고 읽는다.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던 이슬람계 무어(Moor)인들이 지은 이 궁전은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아랍어로 ‘붉은 곳’이란 뜻이다. 

0…이곳은 특히 ‘통일 스페인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사벨라 1세 여왕이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이슬람 세력의 항복을 받아낸 곳으로 유명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극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받는 건물이며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의 건축이 절충된 예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형적인 기독교 문화권이 된 도시에서 이슬람의 흔적이 듬뿍 담긴 궁궐을 보는 기분이 묘하다. 
0…르네상스식 건물이 카를로스 1세 때 추가됐고 현재는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밤이 되면 건물 외벽에 불이 켜져 더욱 아름답다.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이 궁전을 여행한 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음악을 작곡해 더 유명해졌다.

 “영토를 빼앗기는것보다 궁전을 떠나는 것이 더 슬프다.” 나스르 왕조 마지막 왕이 페르난도 2세에게 항복한 후 궁전을 바치고 떠나면서 남겼다는 독백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0…그동안 말로만 듣던 스페인 성지순례(聖地巡禮)를 다녀왔다.

 열흘여의 짧은 기간에 무엇을 얼마나 보고 느끼고 왔을까만, 잠시나마 머리를 비우고 고고한 정신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성지순례는 일반 관광과 차이가 있다. 단순히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찾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과 수도원 등을 찾아 미사와 기도를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나처럼) 신앙심이 깊지 못한 사람은 조금 지루할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니 방문지의 역사와 문화, 현대적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일반관광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0…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번 순례여행의 성격도 제대로 모르고 따라갔다. 처음 가는 나라이니 알람브라 궁전이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 대성당 같은 곳에만 호기심이 있었다. 

 특히 시간여유가 없어 스페인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인 산티아고(El Camino de Santiago) 순례에 참여하지 못한 점은 핵심을 빠트린 것이다.        

 하지만 함께 간 성당 교우분들과 특히 성지순례 30년 경력의 노련한 가이드 덕분에 점차 순례의 본질을 깨닫게 됐다.  

0. 아무튼 엉겁결에 따라 나선 순례길이었지만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해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은 딱 아는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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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2
인생 수업

Editor’s Note

-지금 이 순간을 살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당장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 죽어가는 이들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최근 곰곰히 되새겨가며 읽은 <인생수업> (Life Lessons)은 나에게 여러 생각을 갖게 한다.
 지난 2006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은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hospice: 말기 환자 보호치료)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빗 케슬러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인터뷰해, 삶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정리한 책이다.

 

 

0…1926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한다. 
 이후 미국 각 병원에서 말기환자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는데, 의료진이 환자의 신체기능에만 관심을 가질 뿐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이에 그녀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죽느냐는 삶을 의미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깨달음에 이르고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 중 <인생수업>은 2004년에 타계한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책이다. 

 

0…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크든 작든 질병에 걸렸을 때 이 병만 나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처럼 느낀다. 
 이 몸만 나으면 주변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아내나 남편을 위해 잘해줄 것이며 멀리 여행도 갈 것 같다. 욕심 안 내고 매사에 순응하며 살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몸이 낫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런 각오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또다시 현실에 연연해 아둥바둥 살게 된다. 

 

0…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병이 심각하다면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던 것을 실컷 해보고 싶은 욕망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몸이 말을 안 들으니 할 수가 없다. 몸이 성할 때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할 걸, 하고 후회한들 때는 늦었다.    
 우리는 흔히 내일을 걱정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 그러나 내일은 오늘 이 순간이 이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내일과 훗날을 미리 걱정하며 지금 이 시간을 보낸다면 오늘 이 순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하라. 죽어가면서 후회하고, 하고 싶어 몸부림 쳐도 때는 늦었다.         

 

0…누구나 생의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그런데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거듭 말한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라'.
0…살아가는 데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 여기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지상에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이 기간엔 행복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숙제가 없다. 행복은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다.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한다. 이런 부모, 이런 가족, 이런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한번만 더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자. 지금 그들을 보러 가자.

 

0…우리는 어떤 특정한 일이 일어나면 행복해질 것처럼 미래의 나라에서 살려 한다. 새 일을 시작하면, 나에게 맞는 짝을 찾으면, 아이가 크고 나면.  
 하지만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후에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한다.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다. 
 승진하고 나면, 첫아이를 갖고 나면,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얻는 기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미래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 행복할 때는 지금 이 시간이다.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다. 
 삶은 생각보다 짧다.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 그때다. 

 

0…이젠 밖에서 행복을 찾는 일은 그만 하자.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진정한 부를 발견하자. 그러면 더 이상 내일만 기다리며 오늘을 희생하는 삶은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백만 년이 흘러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어느 누구도 나와 똑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진 않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소중하다.  
0…인생에서 실패하고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정말 나에게 중요한게 무엇인지, 그리고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삶에는 배워야 할 것들이 있고, 한번의 삶으로 전부 배울 수는 없지만, 진정으로 살아 보기 전에는 죽지 말아야 한다. 살고(Live), 사랑하고(Love), 웃으라(Laugh). 그리고 배우라(Learn)’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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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8
우리동네 최 과장

Editor’s Note

-어린 시절 동경했던 인물들   
-세월 따라 이미지도 바뀌어가 

 

 어린 시절, 시골 이웃동네엔 관청에 근무하는 최 과장이란 사람이 있었다. 충남도청 위생과장인가였던 그는 인근지역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동네 어르신들이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과 달리 그는 관청에 근무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특별하게 여겨졌다. 

 

0…그는 ‘관용(官用) 지프차’를 타고 출퇴근했는데 나와 동갑내기였던 그의 딸 역시 그 차를 자주 이용해 학교를 오갔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나도 크면 반드시 ‘도청 위생과장’이 되리라 굳은 결심을 했다.
 더욱이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처지였기에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이 희미한데, 저 딸아이는 얼마나 복이 많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에 애꿎은 돌부리만 차댔다.         

 

 

0…지금도 ‘관용차(官用車)’만 보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또 한편으로, 최 과장 하면 지금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그의 툭 튀어나온 배다. 덩치는 중간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는 차에서 내리면 불룩한 배를 자랑이라도 하듯 쑥 내밀고 어기적거리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의 얼굴엔 언제나 개기름이 번들거렸다. 
0…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동네사람들은 그가 잘사는 부자라서 저렇게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배가 나온 것이라며 모두들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몸이 뚱뚱하고 배가 나온 사람들이 대체로 부유한 것으로 인식됐던 시절이었다. 
 부자들은 하나같이 디룩디룩 살이 찌고 배가 나왔으며 일반 서민들은 뱃가죽이 허리에 붙을 정도로 홀쭉했다. 

 

0…사는게 고만고만했던 동네사람들은 몸이 뚱뚱한 사람을 보면 ‘돈이 따르게 생겼다’고들 찬미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좀 이상했다. 
 국가의 봉급을 받는 공무원이 어떻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우리 형님들도 공무원이었지만 정말 봉급은 알량했던 것이다. 그 무슨 ‘검은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최 과장처럼 살 수는 없었다.       
0…그런데, 온동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최 과장이 정년퇴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이 거들먹거리며 잘 살던 그 사람이 왜 갑자기 죽었을까? 동네사람들이 수근거리던 말을 곁에서 들은 바로는 “그가 너무 잘 먹어서” 그리 됐다는 것이다. 

 

0…그땐 어려서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최 과장에겐 아마도 대사질환(metabolic disease) 같은 것이 있었지 않나 싶다.    
 즉 기름지고 열량(calory)이 높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한없이 튀어 나오고 비만해졌던 것이다. 
 거기에다 평소 그가 운동하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그는 ‘부자병’에 걸렸던 거라고 사람들은 수근댔다.  
0…최 과장네에 비하면 우리집은 잘먹고 잘살지를 못해서 그런지 살찐 사람이 없었다. 나의 어릴적 모습은 비쩍 마른 갈비씨였다. 그런 체형은 대학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내가 한때 몸에 살이 찌고 배가 나온 때가 있었다. 바로 군에서였다.
 섬에서 해병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야간 해안방어선 순찰을 마치고 벙커에 돌아오면 배가 출출했다. 그때 전령에게 라면 한냄비를 끓여오게 해서 막소주와 함께 훌훌 들이키는 기분은 기가 막혔다.  
 이런 생활이 수개월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몸이 불어 움직이기가 귀찮고 틈만 나면 졸리웠다.    

 

0…그때 나의 풍채(風采)는 무슨 장군 같았다. 멀리서 보면 소위 계급장이 별 하나 준장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내가 군에서 살이 찐 것은 아마도 ‘아무 생각없이’ 그저 먹고자고 하니 마음이 편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단순하고 지루한 군생활에서 무슨 낙이 있겠는가. 틈만 나면 회식할 궁리나 했으니 살이 찔 수밖에.      

0…한때 부자들의 상징과도 같았던 똥배와 비만.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비만(obesity)은 살기 어려운 계층의 징표가 돼가고 있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살을 빼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0…과거 한때는 군에서도 비만한 장교들이 풍채가 좋다며 ‘장군감’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내가 전속부관으로 복무하며 모시던 사단장님도 풍모가 당당해 그가 연병장 사열대에 오르면 카리스마가 넘쳤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정반대다. 뚱뚱한 장교는 진급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래서 백발이 성성한 장군들도 운동을 하느라 안간힘이다.

 

0…지금 선진국을 중심으로 소위 ‘살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다이어트 산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다. 동네 피트니스 클럽엔 땀 빼는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린다.
 지구촌 한편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다른 한편에서는 살을 빼려고 기를 쓰고 있으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0…언론의 건강기사 중 상당부분도 살빼기에 할애돼있고 인기도 높다. 
 하지만 매사는 과유불급(過猶不及). 평소 운동을 전혀 안 하다가 갑자기 무리한 운동을 하면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는 육군간부 2명이 체력검정을 받던 중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0…갑작스런 운동으로 인한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선 평소 자기관리가 중요하다. 
균형잡힌 식사와 적절한 운동, 절제있는 삶의 방식 등 매사를 물 흐르듯 순응하며 살아가면 건강도 따르지 않을까 한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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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2
고국 생각

Editor’s Note

 

-잊을래야 잊을 없는

-모든 일이 풀리길 바랄 뿐   

 

                                          한국의 아름다운 봄날

 

 시골출신인 저는 어릴적 주로 자연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어른들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곤 아주  단순 소박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이 출세하려면 판.검사, 또는 군인(장군)만 있는 줄 알았고 나도 크면 그런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당연히 이순신 장군이요, 그때로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야말로 최고의 영웅이요 우상이었지요.      

 

0…이래서 나의 꿈은 장차 군인(장군)이 되는 것이었고, 고교부터 일찌감치 진로도 사관학교로 정해졌습니다.

 공부는 어느정도 했기에 육사에 상위권으로 입학했고 출발은 순탄했습니다.

 멋진 제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올리는 저를 보고 면회 오신 어머니와 형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0…그런데 그때는 제가 막 사춘기에서 벗어날 무렵이었지요. 말하자면 내면의 자아(自我)가 깨어나기 시작할 때였던 것입니다.       

 사관생도 시절 주말외출을 나갔는데,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불과 수개월 사이에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더라구요.

 법과 정의와 역사가 어떻고, 문학과 철학이 무엇이며, 장차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까지 얘기를 하는데 나는 별로 끼여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0…내무반으로 돌아온 나는 그때부터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할지 무수한 번민의 시간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당시만 해도 많은 젊은이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관학교를 1년 만에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재수를 하여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책도 많이 읽기 시작했죠.   

0…하지만 1970년대 중반 당시의 대학은 낭만과 토론이 흐르는 상아탑만은 아니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상화되다시피한 전쟁터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마침내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았던 ‘각하’의 이면을 알게 되면서 모든 우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개발 이면에 가려진 무수한 노동자들의 희생과 어린 여공(女工)들의 눈물이 너무도 무심히 간과되고 있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0…이때 청계천과 전태일과 YH와 조영래를 알게 됐고 세상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자랑스레 달고 다니던 대학 배지도 이때부터 떼어 던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도시의 화려한 불빛과 거대한 빌딩 숲을 보면 멋지다는 감탄보다 저런 건물을 짓느라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을까, 이런 생각이 떠올라 하나도 즐겁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하질 않아 외국의 거대한 유적지를 가보면 절대군주의 폭정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참 유치하고 순진한(naive)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0…아무튼 세월은 흘러 어찌어찌 대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군에 입대했습니다.

 한때 사관학교까지 다녔는데 사병으로는 가기 싫어 해군장교 시험을 보았는데 문과출신인지라 해병대로 떨어졌습니다.

 말만 들어도 무서운 해병대! 저에게 다른 건 몰라도 해병대의 의리와 충성심만은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0…여기서 충성심을 잘못 해석하면 안됩니다.

 충성이란 상관의 정당한 지시와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뜻이지 부당한 지시에 무조건 따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도 한창 진행중인 ‘채상병 사건’의 중심에 선 박정훈 대령이 있잖습니까. 그야말로 모든 일처리를 정석대로 처리하고 상관(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충성스런 해병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항명죄라는어마무시한 죄를 씌워 옭아매려는 행위가 올바른 것인가요.  

 

0…아무튼, 군 제대 후 대기업 생활도 해보았고 그후 언론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그놈의 알량한 정의감과 의리 때문에 수난도 꽤 겪었습니다.  

 특히 직업의 특성상 비판의식이 더 깊어졌습니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비판의식이 없으면 들어서서는 안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0…저는 인천의 지방신문 기자로 일하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청와대를 출입하다 이민을 떠나 왔습니다.

 올해로 이민살이 24년째를 맞습니다.

 타국에 살고 있으니 이젠 이곳 삶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아직도 왠지 남의 옷을 걸친 것 같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국 뉴스부터 체크합니다.

 

0…엊그제 총선을 전후해선 더욱 그랬습니다.  제발 나라가 정상화되면 좋겠는데…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마침내 결과가 나오고 저는 “역시 국민들 뜻은 무섭구나!”란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0…외국에 나와서까지 고국 지도자를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현 지도자는 정말로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겠지요. 현명하신 동포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실테니까요.

 

0…차제에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잘못한 행위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진보니 좌파니 함부로 매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행태를 지적하는 것이 보수, 진보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한국민의 절대다수가 선택한 이번 민심도 ‘좌빨’의 득세로 몰아갈 건가요.

0…이제 한국민은 그리 무지하지도 우매하지도 않습니다. 잘못한 행태에 대해서는 아주 현명하게 회초리를 들줄 아는 선진국민입니다. 

 야권 192석. 참 절묘한 숫자입니다. 지도자가 잘못 했으되 아주 쫓아내지는 않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뜻 아닌가요.

0…꿈결에도 떠오르는 고국의 산하. 아무 것도 기여할 길이 없는 해외동포이기에 그저 모든 일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만 간절합니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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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0
사월이 오면

Editor’s Note

-지고지순한 순백의 계절

 

-아픈 상처 딛고 화사한 꽃으로 

 

                                                      고창 선운사 동백꽃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네…)

 

 난해하기로 유명한 T.S. 엘리어트의 ‘The Waste Land’(황무지). 위의 첫 구절은 ‘The Burial of the Dead’(죽은 자의 매장)로 4월이 오면 많은 이들이 즐겨 인용한다. 
0…희망과 꿈으로 부풀어야 할 사월이 왜 잔인한 계절로 인식되었을까. 
각자 속으로 느낄 나름이겠지만, 추운 겨울 끝에 봄이 오면 무언가 좋은 일만 있을 것처럼 기대가 넘쳤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기에 그런 것 아닐까. 
특히 한국에서 4월은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4.19학생혁명(1960)을 비롯해 제주 4.3 비극(1948)을 거쳐 4.16 세월호 참사(2014)까지, 봄을 찬양만 하기엔 처연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이래서 한국 청년들 사이에서 4월은 특히 잔인한 달로 여겨졌다. 

 

0…추억컨대, 매년 이맘때 캠퍼스 언덕에 흐드러지게 피던 하얀 목련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시인 묵객(墨客)들이 가장 많이 소재로 삼은 계절은 봄, 월별로는 4월, 꽃으로는 목련이 아닐까 한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박목월 시인의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4월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0…봄의 전령사 목련(木蓮)은 이른 봄 하얗게 피는 꽃이 마치 나무에 피는 연(蓮)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눈보라와 찬바람을 견디며 봄을 기다린 목련은 단아한 유백색(乳白色)의 꽃을 피운다. 하얗고 커다란 꽃잎은 화려함을 내세우지 않기에 고결한 기품이 더 돋보인다.
0…목련은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옥같이 깨끗한 나무라 해서 옥수(玉樹), 꼭 오므리고 있는 꽃망울 모습이 붓을 닮았다 해서 목필(木筆),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 해서 영춘화(迎春花), 보라색의 자목련은 봄이 끝나갈 무렵에 핀다 하여 망춘화(亡春花)라 한다. 
 대부분의 꽃들이 태양을 바라보며 남쪽을 향해 피는 것과 달리 목련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북향화(北向花)라고도 한다. 
꽃봉오리 아랫부분에 남쪽의 따뜻한 햇볕이 먼저 닿으면서 세포분열이 반대편보다 빠르고 튼튼하게 자란 탓에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게 된다고 한다. 

 

0…‘선운사 고랑으로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이민 떠나오기 전, 고국의 자연산천을 머릿속에 담아가겠다며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나 하는 감상(感傷)에 젖어 가는 곳마다 예외없이 술에 젖어 어줍잖은 싯구절을 읊조리곤 했다. 
 취한 눈으로 바라보는 봄날 섬진강의 복사꽃과 매화, 산수유는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웠다. 

 

0…특히 고즈넉한 산사(山寺)에 피어나는 빨간 동백꽃은 나의 마음을 읽는 듯 핏빛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과 함께 동백은 대표적인 봄꽃 중 하나다. 
 겨울이 지나는 자리에 피어나는 붉은 빛의 동백은 강렬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그래서 시인과 묵객들은 봄이 오면 동백꽃이 피어나길 손꼽아 기다린다. 
 동백꽃은 붉은 ‘색’이라 하지 않는다. 붉은 ‘빛’이라 표현한다. 그만큼 처연하고 강렬하다. 개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과 동백(冬柏)으로 나뉘는데, 한국의 대부분의 동백꽃은 2월 중순에서 3월초 개화하는 ‘동백’인데 비해 고창 선운사의 동백은 4월 중순에 피는 ‘춘백’이다. 

 

0…동백나무는 좀처럼 불에 타지 않는 강한 성질을 지녔다. 그래서 산사에서는 동백나무를 법당 뒤에 즐겨 심는다. 혹시 모를 산불이 전각(殿閣)에 옮겨 붙지 못하도록 심은 방재림의 일종인 셈이다. 
 초봄이면 붉은 꽃을 피워 사찰을 ‘장엄(莊嚴)’(불교용어로 ‘꾸미고 장식한다’는 뜻)하는 역할도 한다. 

 

0…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듯, 봄은 오는 듯 마는 듯, 존재하는 듯 마는 듯하다 가버리기에 더욱 아쉽다. 순간처럼 왔다 속절없이 가고 마는 짧은 생명이 인간사 모습과 닮았다.
 어쩌면 삶이란 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인지도 모른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최영미 ‘선운사에서’
0…고국에서 총선거가 치러졌다. 결과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다. 
애써 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고국. 이제는 사월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련과 동백의 계절로만 기억되면 좋겠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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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3
군중 속의 고독

 

Editor’s Note

 

-이러저리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누구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먼(David Riesman:1909~2002)의 저서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에서 유래한 말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업사회 속의 현대인은 자기 주위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 이유는 그들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다. 즉 겉으로 드러난 사교성과 다른 내면적인 고정감과의 충돌로 번민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고독하다.”

 

0…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와 교류하며 가깝게 지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자기 내면의 외로움이 근본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자기 혼자라는 고독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0…인간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나 역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쌓고 있다.  하지만 나 또한 군중 속의 고독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속성으로 인해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0…많은 이들이 나 보고 아는 사람도 많고 발이 넓어서 외롭지 않겠다며 항상 분주하게 사는 줄 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언론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리저리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마음 터놓고 얘기를 나눌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대부분이 피상적으로 알고 지내기 때문이다.          

 

0…이민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현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속내까지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일테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이민 1세는 언어 소통과 문화 차이로 인해 더욱 그렇다. 이래서 결국은 동족사회로 돌아와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다.

0…나도 24년 전에 이민 와선 전원도시에 살면서 현지 이웃가족과 어울리며 정을 쌓아가곤 했다. 하지만 속 깊은 인간관계에까지 이르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생계문제로 도시로 나오면서 그나마 현지인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내 동족끼리 어울리는 생활이 시작됐고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인생살이가 펼쳐졌다.

0…동족과 어울리며 주변에 나이가 비슷한 동년배(同年輩)끼리 친구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란 것이 그렇다. 친구란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진정으로 따스한 말 한마디라도 해줄 그런 사이인데 이민사회에서는 이런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사람마다 성장과정이나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특히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0…동족끼리 어울리면 일단 말이 통하니 마음이 편하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간에 허물이 없어지고 그것이 더 진전되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예의가 사라지면서 사람을 막 대하게 된다.

 나의 경우 꽤 많은 한인모임에 참여했었지만 이런 이유들로 인해 결국엔 다 해체되고 말았다. 남은 건 마음의 상처 뿐.         

0…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처음엔 간이라도 빼줄 듯 가까이 지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존경심이 사라지고 흠결만 보이면서 이내 관계가 소원해지고 만다.

 이래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체는 서로에 대한 예의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0…내가 평생 잊지 못할 친구가 셋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학교 동창도 아니고 같은 고향친구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내 일생에 너무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내 고교 친구의 중학교 동창인데 언젠가 모임에서 한번 만난 후 급격히 가까워졌다.     

0…그는 소위 ‘고졸’의 대기업 말단직원이었다. 장차 직장에서 승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의 최강 무기는 인간성, 그것 하나였다.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는 한결같이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겼고, 궂은 일엔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섰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정석인지 몸으로 보여준 전형이었다. 

 

0…다른 친구들과 함께 어딜 놀러가면 그 친구는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밥을 짓고 상을 차려놓고 우릴 기다렸다.

 “넌 잠도 없니?” 하고 물으면 그저 싱긋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밖에 더 있나?” 라며 자신을 낮추었다.      

0…친구는 결국 학력 장벽에 막혀 대기업을 퇴사해야 했고,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는 고교친구가 경영하는 주유소의 매니저로 일하게 됐다.

 내가 수년 전 한국에 나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그 친구였고 그는 여전히 활기차고 의연하게 일하고 있었다.       

 친구는 나의 데미안이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는 아픔과 충격을 안겨준 나의 우상…

 

0…나는 가끔 ‘이런 상황이라면 그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친구가 행동하는대로 하면 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인생을 다시 태어나는 기분일 것이다.

0…그 친구가 갈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이민사회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뜻맞는 친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젠 인간관계가 무섭게만 느껴진다. 또 언제 어떻게 상처를 받을지 두렵기 때문이다.

이래서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더욱 쓸쓸한지 모르겠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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