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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Luthe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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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 세상을 바꾼 획기적 사건

 

 

 

 

 올해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 비리 내지는 모순을 지적한 선언문인 '95개 논제(Theses)'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성자교회의 문에 내걸어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꼭 500주년 되는 해이다. 


 비록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16세기 당시 하늘보다 더 높고 무서웠던 로마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한 용감한 인간의 승리사이며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인쇄술 발명에 버금가는 세상을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전직 카톨릭 수사(修士)이자 사제(司祭)였고,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생애 중, 1505년 그가 수사가 된 이후부터 1530년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되기까지의 생애를 그린 영화가 있다. 


 루터교회의 비영리 재정자문기구인 쓰리벤트 파이낸셜(Thrivent Financial)의 부분적 재정 지원을 얻어 2003년 영국의 에릭 틸(Eric Till•88) 감독이 독립영화로 제작한 '루터(Luther)'이다. 출연 조셉 파인스, 앨프리드 몰리나, 조너단 퍼스, 피터 유스티노프, 브루노 간츠, 클레어 콕스 등. 러닝타임 124분. 


 영화의 시작은 1505년 7월 2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엄격한 아버지 한스 루터(마이클 트레이너)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있던 21세의 루터(조셉 파인스)가 만스펠트(Mansfeld)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뵙고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에서 뇌우(雷雨)를 만나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진흙탕에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여, 살려주세요!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주님께 바칠 몸입니다. 당신께 헌신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장면은 바뀌어 1507년 7월 17일. 루터는 뇌우를 하느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 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 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된다. 

 

 

 


 그러나 그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한다. 루터의 멘토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브루노 간츠) 신부는 그에게 자신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에 의지하라고 말한다. 

 

 

 


 그러던 중, 루터는 슈타우피츠 신부의 주선으로 2주간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성스러운 도시' 로마는 매음굴과 예수님을 팔고 받은 유다의 은화 복제품을 파는 등 사악한 시궁창 도시였고, 세례 요한의 두개골이라며 전시해 놓고 관람료를 받는가 하면, 면죄부를 판매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본다.


 독일로 돌아온 루터는 1509년 슈타우피츠 교수의 배려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게 된다. 이는 루터의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카를슈타트 교수(요헨 호르스트)가 "로마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강의하자 루터는 "그리스 정교회 신도에게는 구원이 없는가?"라고 묻고, 부연하여 마태복음 16장 16절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에서 신앙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는 로마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註: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Andreas Karlstadt, 1486~1542)는 나중에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요한 에크를 비판하는 등 동료 교수인 루터를 적극 지원한 인물이나 무력에 의한 급진 종교개혁가였다.]


 1512년 루터는 박사 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어 하느님은 증오•복수•심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 임을 가르친다. 루터는 로마서, 시편, 갈라디아서 강의를 통하여 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이른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이다. 대표적으로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루터는 삭소니(Saxony)의 선제후(選帝侯)인 프리드리히 '현자'(Friedrich der Weise, 1486~1525)의 절대적인 후원을 얻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註: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황제에 오르지 않고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설립하여 삭소니의 '현공(賢公)'으로 불리었으며, 이때 신학부 초대 학장이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0~1524) 사제였다. 이들은 열렬한 구교도였지만 암암리에 루터를 적극 보호하여 종교개혁을 진전시킨 쌍두마차였다.]

 

 

 


 이때 로마에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모금운동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우베 오흐센크네흐트)는 루터가 있는 곳에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대사령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을 보낸다. 테첼(앨프리드 몰리나)은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천국을 향해 올라가리라."고 순진한 신자들을 기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타락에는 교인들의 무지(無知)도 한몫을 했다. 16세기에 성서를 접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하느님께 잘못을 뉘우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교황청의 주장대로 죄를 면하고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손쉬운 신앙생활을 좋아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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