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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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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WWI 배경 영화(VIII)-'여로(旅路)'(The Voyage)(상)

 

 이제 1차 대전 배경 영화 시리즈의 여덟 번째로, 시대적으로 190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섭렵하는 멜로드라마인 '여로(旅路·The Voyage, 원제 Il Viaggio)'를 소개한다.

 1974년 이탈리아 인테르필름 배급 컬러 작품. 러닝타임 102분. 주연 리처드 버튼, 소피아 로렌.

 

 그런데 이 작품은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 감독이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인 만큼 어딘지 운명적인 상징이 전편에 감돈다. 어쩌면 데 시카는 이 작품을 만들 때 이미 스스로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註: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에 대하여는 '무기여 잘 있거라'(398회 2020.12.4) 참조.]

 

 아무튼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04년, 성당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시칠리아 섬의 부호 브랏지가 두 아들을 남기고 죽자 변호사 돈 리보리오(다니엘 바르가스)가 가족, 친지들 앞에서 유언장의 내용을 공개한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동생 안토니오(이안 배넨)는 양복점의 딸 아드리아나 디 마우로(소피아 로렌)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그의 형인 체사레 브랏지(리처드 버튼)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다.

 

 아드리아나의 어머니 시뇨라 디 마우로(바바라 필라빈)는 찌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별볼일 없는 체사레보다 안토니오가 더 낫다고 딸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

 

 칼라브리아, 메씨나에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다는 호외가 길거리에 뿌려진다. 이 영화는 이렇게 이탈리아 안팎의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깔아가며 시대적 흐름을 조명하고 있다. [註: 이 지진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및 칼라브리아에서 1908년 12월28일 진도 7.1 규모로 발생했는데 12만3천 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지진이다. 주요 도시인 메씨나(Messina) 및 레지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고향을 등졌던 체사레가 아드리아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찾아온다. 그러니까 고향을 떠난지 4년만이다.

 

 드디어 아드리아나가 사내아이 난디노를 출산하는데 산파의사가 체사레에게 심장이 약해서 난산이었다고 은밀히 말해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충실한 안토니오의 아내이며 평화로운 가정의 주부로서 겉으로는 나무랄 바 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일상은 마냥 권태롭기만 하다.

 

 그로부터 5년 후, 객지에서 농장사업을 시작하여 크게 성공한 체사레가 동생 부부를 방문한다. 다섯 살이 된 난디노(파올로 레나)에게 카메라를 선물하고 그를 데리고 항구로 간다.

 

 거기엔 군인들이 '아름다운 사랑의 땅, 트리폴리로!'라는 노래를 부르며 리비아의 트리폴리로 가는 배에 승선하고 있다. [註: 이 장면을 통해 1911~1913년 이탈리아가 터키 오토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북 아프리카

 

 리비아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일련의 리비아 전쟁(Libyan War, 1911년 9월29일~1912년 10월18일)과 제1차 발칸 전쟁(First Balkan War, 1912년 10월8일~1913년 5월30일) 시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부두에 안토니오에게 선물할 자동차가 도착한다. 체사레는 자동차 운전법을 가르쳐주며 다소 의기소침해 있는 동생 안토니오에게 "나는 행운아다. 나는 행복하다. 인생은 아름답다!"라고 매일 아침 거울을 쳐다보고 외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어느날 형의 조언대로 인생을 기뻐하며 그 자동차를 타고 운전을 하던 안토니오는 운전 실수로 가파른 벼랑길에서 굴러 떨어져 어이없이 죽는다.

 

 졸지에 과부가 된 아드리아나는 난디노가 학교에 첫 입학하는 날에도 대신 체사레를 보내며 두문불출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

 

 체사레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옥상 테라스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 햇살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와 그 속을 거니는 아드리아나의 검정옷이 마치 삶의 명암(明暗)을 묘하게 대비시키는 듯 실루엣으로 잡은 카메라웍이 돋보이는 한폭의 파스텔화 같은 장면이다.

 

 이때 체사레가 "아이가 있는 엄마이지만 아직도 젊고 아름다운 여인인데 마치 수도원에 있는 것처럼 지내는 것은 무모하다"고 충고한다. 이에 한껏 고무된 듯 아드리아나는 체사레의 떨어진 양복단추를 시종인 클레멘티나(올가 로마넬리)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꿰매주는데….

 

 아드리아나가 홀몸이 된 일에 일말의 책임과 가책을 느끼는 체사레는 애인 시모나(아나벨라 인콘트레라)에게 가족사업을 핑계로 결별을 선언하고 밤늦게 아드리아나 집으로 돌아온다.

 

 병에 시달리지만 아니라고 고집을 부리는 아드리아나를 설득하여 두사람은 팔레르모의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기차여행에 나선다. 병원측의 검사 결과, 그녀의 심장은 이제 얼마 더 견디지 못한다는 냉엄한 진단이 내려진다. 이때 청진기가 없던 시절이라 긴 대롱을 귀에 대고 심장을 진찰하는 장면이 이채롭다.

 

 내친 김에 더 정밀한 검사를 위해 나폴리에 있는 전문의를 찾아간다. 아드리아나는 남겨둔 아들 난디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성깔을 부리지만….

 

 정밀 진단 결과 병명은 '심근팽창증'으로 심장의 우심실(右心室)이 부어있다는 것. 의사는 "불치의 병이므로 약은 없고, 믿음과 용기와 사랑만이 유일한 처방"이라며 "젊고 미래가 있으며 아들까지 두었으니 인생을 유리병 안에 가두지 말고 걷고 또 걷고 여행하라!"고 조언하는데….

 

 그 사실을 깨달은 아드리아나는 남은 삶을 못다 이룬 사랑의 불길에 불사르려 한다. 나이트클럽에서 캉캉쇼를 즐겁게 보는 사이 그녀가 또 어지럼증이 일어나 둘은 먼저 자리를 뜬다. 이때 시숙(媤叔)과 제수(弟嫂) 사이인 관계를 알고 있는 몇몇 관객들이 입방아 거리가 생긴 듯 수근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불과 1세기 전이지만 사회적·도덕적 관념이 이렇게 달랐다. (다음 호에 계속)

 


▲ '여로(The Voyage·1974)' 영화 포스터

 

▲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안토니오(이안 베넨)는 아드리아나(소피아 로렌)와 결혼하지만 그녀는 그의 형인 체사레와 사랑하는 사이다.

 

▲ 아드리아나의 외아들 다섯 살짜리 난디노(파올로 레나)는 체사레 삼촌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받고 기뻐한다.

 

▲ 안토니오(이안 베넨·오른쪽)는 형 체사레(리처드 버튼)가 사준 차를 선물받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외치며 삶의 의욕을 불태우지만 그만 사고로 죽는다.

 

▲ 햇살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 속에 비치는 검정상복을 입은 아드리아나(소피아 로렌)의 실루엣이 한폭의 파스텔화 같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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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WWI 배경 영화(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6·끝)

 

(지난 호에 이어)

 '닥터 지바고'를 보고나면 역시 오마 샤리프의 눈동자 연기가 인상에 남는다. 그는 이집트 풍의 용모를 바꾸기 위해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쓰고, 피부에 왝스를 바르는 등 분장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의 말없는 눈빛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白眉)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인용해 본다. "도덕성과 열정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우수(憂愁)에 찬 눈동자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스며있는 눈동자, 전선에서 떠나는 라라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던 눈동자와 마지막 이별하는 라라를 얼음궁전 유리창을 통해 애틋하고 안타깝게 지켜보던 눈동자, 비밀경찰의 감시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끼면서 라라와의 마지막 나날들을 절박하게 보내는 초조한 눈동자"… 이러한 눈빛과 웃음기 없는 연기로 악착같이(?) 살아남은 생존자 유리 지바고를 마치 그를 위해 태어난 듯 훌륭하게 연기하여 오마 샤리프는 골든 글로브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마 샤리프(Omar Sharif, 1932~2015)는 유명한 이집트 여배우 파텐 하마마(1931~2015)와 1954년 결혼했다가 1974년 이혼한 뒤엔 재혼하지 않았다. 하마마는 절대로 키스하지 않는 배우로 유명했는데, 오마 샤리프가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 'Struggle in the Valley(1954)'에서 그와 키스를 하였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

 

 하마마는 2015년 1월에 만83세로, 오마 샤리프는 같은 해 7월에 알츠하이머로 병원에 입원해 투병 중 심장마비로 역시 만83세로 타계했다. 슬하에 타렉 엘 샤리프(64)라는 외아들이 있는데 그는 이 영화에서 8살의 어린 유리 지바고 역을 깜찍하게 연기했다. 타렉과 캐나다인 데비 샤리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오마 샤리프 2세(37)도 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하는 인물이 지조 있고 애정 넘치는 유리의 아내 토냐였지 싶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이를 묻어두고 혁명 직후 불우해진 환경 속에서도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멜라니 해밀턴(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가정을 지키는 품위와 기품이 있는 여성! 아마도 남편 유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올곧은 사람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잘 알기 때문에 그 마음을 존중하고 믿어 준 탓이 아닐까….

 

 한편 이 불륜은 '프라하의 봄(1984)'을 떠올리게 한다. 체코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인텔리 외과의사 토마스(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두 여인 사비나(레나 올린)와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사이를 오가며 오로지 사랑의 탐닉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참담한 현실과 닮았기 때문이다.

 

 유리도 토냐를 깊이 사랑했다. 토냐가 임신했을 때 라라와 절교하는 것이 그 한 예다. 토냐는 유리에게 아내이자 친구이고 후원자이자 동지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엄마였다. 유리는 라라를 '여성'으로 사랑했지만 토냐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덕목을 갖춘 이상향의 어머니'같이 그를 사랑했다. 여기서 토냐가 울고불고 하면서 둘의 불륜을 비난했더라면 또다른 전쟁(?)이 일어났겠지만 의연한 토냐 덕분에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미화된 게 아닐까. [註: 제랄딘 채플린은 토냐 역을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를 롤모델로 삼아 연기했다고 술회했다.]

 

토냐 역을 연기한 제랄딘 채플린(Geraldin Chaplin·77)은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영국 희극배우이자 제작자이며 작곡가인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과 노벨문학상 및 퓰리처상 수상자로 유명한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3)의 딸인 우나 오닐(Oona O'Neill, 1925~1991) 사이에서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제랄딘이 8살 때 아버지가 매카시즘 열풍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스위스로 망명의 길에 오르는 바람에 그녀는 학교기숙사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 통달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미국보다는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에서 더 잘 알려진 배우이다.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제랄딘은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영어권 첫 데뷔작인 '닥터 지바고'에 캐스팅되어 골든 글로브 신인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고, 그 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내쉬빌(Nashville·1975)'에서 두 번째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 리처드 아텐버러 감독의 전기영화 '채플린(Chaplin·1992)'에서 (그녀의 할머니인) 한나 채플린 역으로 세 번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유리의 이복형 예프그라프 지바고 역의 알렉 기네스(Alec Guinness, 1914~2000)는 1959년에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예술공로상으로 기사 작위가 수여되어 경(卿·Sir)으로 불린다. 그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총아로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위대한 유산(1946)'에서 허버트 포켓 역, '올리버 트위스트(1948)'에서 파긴 역, '콰이강의 다리(1957)'에서 니콜슨 중령 역,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아랍 파이잘 왕자 역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토록 절친한 관계였던 둘 사이가 '닥터 지바고' 촬영 때 생긴 불화 때문에 단절되고, 2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1984)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로드 스타이거(Rod Steiger, 1925~2002)는 말론 브랜도와 공연한 '워터프론트(1954)', 시드니 포이티에와 공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1967)', '워털루(1970)'에서 나폴레옹 역, '사막의 라이온(1981)'에서 무솔리니 역 등으로 기억되는 배우다. '닥터 지바고'에서는 아마도 유일한 미국 배우였지 싶다.

 

 끝으로 '닥터 지바고'의 촬영감독 프레디 영(Freddie Young, 1902~1998)은 데이비드 린 감독과 호흡을 같이 하여 '아라비아의 로렌스', '라이언의 딸(1970)' 등 3편에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영국의 저명한 촬영기사이다. 영국에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그는 130여 편의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 중 몇 편을 소개하면 '굿바이 미스터 칩스(1939)', '아이반호(1952)', '모감보(1953)', '원탁의 기사(1953)', '열정의 랩소디(1956)', '로드 짐(1965)', 007시리즈 5편 '두번 산다(1967)' 등이다.

 

※ 데이비드 린 감독, 모리스 자르 음악감독에 대하여는 2015년 8~9월 칼럼 '라이언의 딸' 참조. (끝)

 

▲ 장갑을 낀 손을 호호 불며 얼어붙은 잉크를 녹여 잠을 설치며 라라를 위한 시를 쓰는 유리 지바고. 그러나 영화속에서 그의 시를 접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 시를 짓는 작업도 포기하고 비밀경찰에 붙잡혀 서로 헤어질 운명을 기다리며 불안 초조해 하는 유리와 라라.

 

▲ 운명을 기다릴 때, 다시 찾아온 코마로프스키를 보고 놀라는 유리와 라라.

 

▲ 지바고는 라라와 딸 카챠를 빅토르와 함께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은 곧 뒤따라 가겠다며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발랄라이카를 그녀에게 건네준다.

 

▲ 라라가 탄 썰매가 눈덮인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기 위해 얼음궁전 2층의 창문을 깨고 바라보는 안타까운 유리의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다.

 

▲ 모스크바에서 유리를 발견한 이복형 예프그라프(알렉 기네스)는 동생에게 새옷 한 벌을 사주고 병원에 일자리까지 주선해 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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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5)

 

(지난 호에 이어)

 라라가 탄 썰매마차가 눈덮인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기 위해 얼음궁전 2층의 창문을 깨고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는 유리의 안타까운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다. 기차는 떠나고 유리가 오지 않을 것을 이미 예견했던 라라는 빅토르에게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긴 회상의 장면은 다시 첫 장면의 타냐 코마로바로 돌아온다. 그녀는 극동 지방 어딘가에서 태어난 사실은 기억하지만 실종된 곳이 몽골리아인지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프그라프의 회상과 더불어 장면은 다시 플래시백.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흘러 스탈린 시대가 오고, 장군이 된 예프그라프는 어느 날, 가족이 있는 파리로 가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의 모스크바에 남아있는 유리를 발견한다. 그는 초라한 행색의 유리에게 새옷 한 벌을 사주고 병원에 일자리도 알선해 준다.

 

 어느 날 전차를 타고 가던 유리가 저만치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라라를 발견하고 황급히 다음 역에서 내려, 그녀를 부르려 하나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허공에 안타까이 헛손질하며 쫓아가지만 그녀는 점점 멀어져 간다. 비틀비틀 따라가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유리…. 그것도 모르고 유리와의 사이에서 난 딸을 찾기 위해 기웃거리며 사라지는 라라의 뒷모습…. 안타깝고 처절하고 어쩌면 또 다른 잔인한 순간이다!

 

 유리의 장례식에는 놀랍도록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다. 그의 시 작품이 정치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었다. 그 장례식장에 참석한 라라는 예프그라프에게 도움을 청한다. 유리의 딸을 낳았는데 그 후 몽골리아에서 백군이 이끄는 정부의 실각으로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서다. 그의 도움으로 수백 명의 고아들을 둘러보았지만 다 허사였다.

 

 그런데 라라는 그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때 사라져 버린다. 예프그라프의 말에 의하면 노동자수용소에서 죽었거나 어디론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의 잔혹한 비극사이다.

 

 이 얘기를 듣던 타냐 코마로바는 눈물을 흘린다. 예프그라프는 그녀가 어쩌다 길을 잃었는지를 다시 묻는다. "폭격에 집이 무너지고 불바다가 된 거리를 아빠와 함께 달리다가 그만 손을 놓치고 말았다."고 말하자, 예프그라프는 '아빠'가 아니고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라며 진짜 아버지는 시집의 사진에 나와 있는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라고 힘주어 말한다.

 

 예프그라프는 타냐가 유리와 라라 사이에서 난 딸이라는 믿음은 가지만 아직 확신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타냐가 떠날 때 발랄라이카를 갖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것은 유리의 어머니가 즐겨 연주하던 악기로 유리가 라라에게 준 바로 그 악기였다.

 

 예프그라프가 타냐에게 연주할 줄 아느냐고 묻자, 그녀의 젊고 잘 생긴 댐 엔지니어(마크 에덴)인 약혼자가 타냐의 발랄라이카 연주는 '예술가의 경지'라고 치켜세우며 '혼자서 배웠다'고 대답한다. 이에 예프그라프는 "아, 그럼 타고난 재능이구먼!"이라고 말하면서 그때서야 타냐를 정말 유리와 라라의 딸임을 확신하게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註: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댐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있는 알데아다빌라 댐(Aldeadavila Dam)이다. 그런데 댐 하류의 물보라에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장면이 롱샷으로 나오는데, 이를 두고 소비에트 연방의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댐은 2019년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마지막 장면에도 나온다.]

 

 '닥터 지바고'는 800명의 기능공을 동원, 2년에 걸쳐 당초 예산보다 두 배가 넘는 1,400만 달러를 들여 완성했지만, MGM사 사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이후 두 번째로 많은 흥행수입을 올린 작품으로 기록된다. 196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록 감독상과 작품상을 '사운드 오브 뮤직(1965)'에 뺏겼지만, 다른 5개의 상을 휩쓸면서 린 감독 생애 최고의 대표작이 되었다.

 

 18개월에 걸쳐 크렘린 궁과 거리 그리고 전차 레일까지 세밀하게 재현해 낸 마드리드 인근의 카니야스(Canillas) 세트장, 그리고 왝스로 얼음궁전을, 대리석 가루로 설원을 창조한 소리아(Soria) 세트장 등을 만든 미술감독 존 박스(John Box, 1920~2005)가 미술감독상, 토냐의 분홍색 코트, 라라의 진홍색 드레스 등을 선보인 의상디자인상(필리스 달튼), 촬영상(프레디 영), 작곡상(모리스 자르), 그리고 592쪽 분량의 원작소설을 224쪽으로 각색한 로버트 볼트가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5개 부문 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는 러시아의 대평원과 설원을 배경으로 혁명기가 만들어내는 여러 유형의 인간군상을 통해 마치 러시아 혁명의 현장 속에 있는 것 같은 실감을 불러 일으킨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전쟁과 혁명의 격동기 가운데 주인공 닥터 지바고의 기막힌 인생유전과 비련(悲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리 지바고와 라라 안티포바 사이에 여러 번의 이별과 만남이 있다. 간호사와 의사로 만나 전장을 누비다가 헤어지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서관에서 만났지만 빨치산에 붙잡혀 또 헤어진다. 탈출 후 다시 만났지만 비밀경찰의 추적 때문에 다시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에서 걸어가는 그녀를 뒤쫓다가 쓰러져 죽는다.

 

 한편 라라는 아름답고 열정적이며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으로 빅토르 코마로프스키의 욕망의 대상이었고, 파샤(스트렐니코프)의 아내, 그리고 유리의 정부(情婦)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운명적 사랑을 불태웠다. [註: 그런데 영화에서 라라의 어머니와 딸 카챠의 운명에 대한 얘기는 없다.]

 

 라라 역의 줄리 크리스티(Julie Christie·81)는 1960~70년대에 이름을 날렸던 영국 배우로, 화가인 아버지가 차(茶) 플랜테이션을 경영하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아삼의 차부아(Chabua, Assam)에서 태어났다. 크리스티는 1965년 '달링(Darling)'에서 상류사회를 꿈꾸는 자유분방한 여성 다이애너 스캇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한 해 두 번 수상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 때문에 같은 해 제작된 '닥터 지바고'에서는 수상을 못했다.

 

 최근에 캐나다 영화 'Away from Her(2006)'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피오나 앤더슨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다음 호에 계속)

 

▲ 좌파 빨치산은 종군 의사가 필요해 무고한 유리 지바고를 강제 연행하여 입산시킨다.

 

▲ 2년 뒤, 지바고는 탈출에 성공하여 눈 덮인 설원을 걷고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유리아틴의 라라의 집에 당도하는데….

 

▲ 유리는 비밀경찰을 피해 라라와 딸 카챠를 데리고 유리아틴을 떠나, 버려진 얼음궁전 같은 바리키노 별장으로 옮긴다. 이 장면은 왝스와 대리석 가루로 재현했다.

 

▲ 서로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생을 즐기며 의미있게 살자면서, 오직 사랑의 열기로써 서로를 데우는 유리와 라라. 그러나 비밀경찰에 쫓기는 그들의 표정은 초조하고 어둡다.

 

▲ 온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밤, 한 무리의 늑대가 밤새도록 울어재끼는 얼음궁전은 음산하기만 한데… 둘에게 닥칠 어두운 운명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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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4)

 

(지난 호에 이어)

 이윽고 일행들이 탄 기차가 악명 높은 볼셰비키 사령관 스트렐니코프의 무장열차에 의해 호송되고 있으며 분쟁 지역인 우랄산맥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차가 완전 정지하자 유리가 기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던 중 중무장한 열차를 발견하는 순간 체포되어 스트렐니코프(톰 코티네이)에게 끌려간다.

 

 유리는 단박에 그가 바로 실종됐다는 '파샤' 안티포프임을 알아챈다. [註: 여기 등장하는 무장기관차는 버트 랭카스터 주연의 '대열차 작전(The Train·1964)'에서의 중무장 열차를 연상시킨다. 1, 2차 대전 때 실제 사용했던 열차의 완벽한 복사품으로, 애초의 목적은 트럭이나 탱크가 진입할 수 없는 폭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개인의 삶은 역사에 의해 죽었다."며 집중 심문을 하던 스트렐니코프는, 유리가 6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날 부인(라라)의 총격 사건 때 '사내다운' 그를 봤다고 말하자 어떻게 아내를 아느냐고 묻는다.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같이 복무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는 유리. 전쟁 후 아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그녀가 한때 반공산주의 백군(白軍)이 점령했던 유리아틴 마을에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 스트렐니코프.

 

 유리는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본 폐허의 '밍크' 마을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사내다움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용감하게 지적한다. 그럼에도 유리를 다시 가족품에 돌려보내는 스트렐니코프. 사령관의 오른팔인 장교가 "억수로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심문 받은 사람은 모두 총살 당했다는 암시를 주면서….

 

 우여곡절 끝에 바리키노 역에 도착하는 일행. 역장인 페챠(잭 맥가우런)가 알렉산데르를 알아보고 넙죽 "주인님!"하고 인사를 한다. 페챠가 끄는 마차를 타고 바리키노 별장에 당도하니 현관 입구에 '유리아틴의 혁명위원회가 인민의 이름으로 징발했다'는 팻말이 붙어있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별채를 거처로 정하는 지바고 가족. 어렵사리 구해온 밀가루, 소금, 커피 등과 함께 스트렐니코프가 만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페챠. 그가 구해준 신문에 니콜라이 2세 황제와 그 가족이 총살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 거대한 혁명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알렉산데르…. 아, 옛날이여…! [註: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14번째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Nicholai II Alexandrovich Romanov, 1868~1918)와 그의 가족은 1917년 2월 혁명으로 세워진 볼셰비키정부에 의해 폐위되고 투옥됐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된 후 1918년 7월에 총살되었다.]

 

 바리키노 산골에서 궁핍하지만 전원 생활을 통해 평화를 만끽하는 네 식구. 유리가 가까운 마을 유리아틴에서 라라를 찾을 때까지는…. 성에가 두껍게 낀 겨울 유리창 그리고 계절은 바뀌어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 [註: 네덜란드에서 4천 송이의 수선화를 수입하여 스페인 산악지대 소리아(Soria)에 설치한 세트장에 심었다고 한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유리아틴에 있는 도서관을 찾은 유리. 거기서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때부터 유리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밀회를 지속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토냐가 임신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은 유리가 라라에게 '관계 단절'을 단호하게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좌파 빨치산에 붙잡혀 강제 입산을 당해 종군 의사로 일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막힌 인생유전(人生流轉)이다.

 

 2년 뒤, 지바고는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여 눈 덮인 설원을 걷고 또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유리아틴의 라라의 집에 당도하여 쓰러진다.

 

 의식을 회복하자 라라는 토냐가 유리를 찾는 중에 집으로 찾아와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며 가족은 지금 모스크바에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토냐가 6개월 전에 유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편지를 건네준다. 토냐는 딸을 분만했고 이름은 안나, 아버지 알렉산데르와 아이들은 추방 당해 파리에 가서 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라라 안티포바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추신이 있었다. 다시 만난 유리와 라라는 그들의 관계를 새로이 시작하는데….

 

 어느 날 몹시 추운 겨울밤, 뜻밖에 빅토르 코마로프스키가 찾아와 두 사람에게 비밀경찰 체카가 미행하고 있다고 알린다. 그 이유는 라라는 스트렐니코프와의 혼인 관계 때문에, 그리고 유리는 빨치산 5사단에서 탈영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은 파리의 망명자 조직과 연루됐고, 또 그가 쓴 반혁명적인 시작(詩作) 때문이라며, 둘을 도와 러시아를 떠나도록 돕겠다는 빅토르. 사실 그는 자치주 극동 공화국의 법무성 장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에 유리아틴을 들렀던 것이다.

 

 그러나 둘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빅토르는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에서 수많은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약삭빠른 사람일 뿐만 아니라 라라를 겁탈한 자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구하기 힘든 설탕을 주고 돌아가려던 빅토르는 그것마저도 거부하는 두 사람에게 "사람은 모두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며 "고상한 채 굴지 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사라진다.

 

 둘은 다시 바리키노로 돌아가, 버려진 얼음궁전 같은 집을 거처로 정하고 거기서 서로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생을 즐기며 의미있게 살자면서, 오직 사랑의 열기로써 서로를 데운다.

 

 어느 겨울밤, 온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는데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장갑을 낀 손을 호호 불며 얼어붙은 잉크를 녹여 라라를 위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유리. 그 시로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부로서는 눈엣가시였다. [註: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의 시를 접할 기회는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비밀경찰이 언제 두 사람을 붙잡아 처형장으로 보낼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들. 운명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순간을 예감하는 절박한 삶속에서 이제 시 쓰기도 포기하고 운명을 기다릴 때, 다시 코마로프스키가 찾아온다.

 

 그는 스트렐니코프가 라라를 만나러 오다가 8㎞ 전방에서 체포되었는데 심문 중에 끝까지 자기는 파벨 안티포프라고 고집했고 스트렐니코프라는 이름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며, 사형장으로 향할 때 보초의 총을 뽑아 자기 머리를 쏴 자살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그동안 체카는 스트렐니코프를 체포하기 위한 미끼로 쓰기 위해 라라를 자유롭게 놔두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라라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절박한 설명이었다.

 

 마침내 지바고는 라라와 딸 카챠를 빅토르와 함께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은 다른 썰매로 곧 뒤따라 가겠다며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발랄라이카를 그녀에게 건네준다. 하지만 결국 자기가 싫어하는 자와 함께 떠나지 않겠다며 혼자서 그의 운명과 맞닥뜨리기로 결심하는 유리!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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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0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3)

 

(지난 호에 이어)

 라라가 쏜 총이 코마로프스키의 왼손에 가벼운 총상을 입힌다. 그러나 그는 라라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말고 경찰도 부르지 말 것을 부탁하는데, 이때 뒤따르던 파샤가 용감하게 들어와 그녀를 부축해 데리고 나간다.

 

 라라를 마주친 것이 유리에게는 두 번째였고, 토냐는 처음이었다. 이 인연은 나중에 유리 지바고가 맞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의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빅토르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유리는 그가 이복형 예프그라프와도 연락이 닿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볼셰비키가 맘에 들진 않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한다며 그 이유는 그들이 이길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유리 부친의 임종을 지켜본 친구로써 특히 부친이 유리 어머니에게 헌신적이었다고 귀띔해준다.

 

 둘 사이의 화제는 라라의 얘기로 바뀐다. 빅토르가 그녀와의 관계 얘기를 소문내지 말라는 뜻으로 유리에게 빙 둘러 말하자 "그런 여자를 버리면 어떡하냐?"고 되묻는 유리에게 "관심이 있다면 자네한테 넘겨주겠네. 결혼 선물이야."하곤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리는 코마로프스키. 여자를 마치 성노리개쯤으로 생각하는 그의 비뚤어진 여성관을 엿볼 수 있다. 하기야 당시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보편적인 시대였다.

 

 한편 새벽까지 라라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라라가 털어놓은 과거사에 괴로워하는 파샤. 이즈음 유리는 라라의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순수함과 요염함, 성숙함과 천진함,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두루 갖춘 여인으로 한껏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장면은 바뀌어 1914년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예프그라프 지바고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의해 제국주의 볼셰비키 육군을 타파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이즈음 토냐는 유리의 아들 사샤를 낳고, 라라는 파샤와 결혼하여 딸 카챠를 낳는다.

 

 라라의 과거사에 상처받아 군에 입대한 파샤는 독일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다 실종되고, 라라는 그를 찾기 위해 종군간호부로 자원한다. 유리 지바고는 군의관으로 참전했는데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우연히 간호사가 된 라라와 해후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총격사건 이후 4년 만이다. [註: 영화 시작부터 1시간 20분이 지나서야 둘은 처음으로 대화한다.]

 

 1917년 모스크바에 10월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혁명정부가 수립되면서 러시아 전체가 좌파, 우파로 나뉘어져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전선(戰線)에서 유리가 토냐에게 보낸 편지에는 구구절절 토냐와 양부모님에 대한 안부와 사랑이지만 라라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토냐의 어머니 안나는 이미 사망했다.

 

 라라와 유리가 함께 6개월 동안 야전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둘은 사랑을 느끼지만, 토냐를 속일 만한 일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라라는 남편 파샤를 찾지 못한 채 어린 딸 카챠가 있는 그라도프로 떠난다. 전선에서 라라를 떠나 보내며 홀로 남은 유리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다.

 

 '라라의 주제곡'과 함께 화병에 꽂혀 있는 해바라기꽃의 잎사귀가 시들어 하나 둘 떨어지는 장면은 유리의 마음속 애틋한 이별의 아픔을 상징한다. 하지만 유리는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아내 토냐와 아들 사샤가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그러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알렉산데르의 집은 새로운 소비에트 혁명정부의 인민위원회에 의해 접수되어 13가구가 함께 사는 집단수용소로 변해 있었다. 모스크바 귀족집안의 품위있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인 토냐의 아버지는 그 사이에 정권교체와 사회적 변혁에 의해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제 '체카'의 비밀경찰이 된 예프그라프가 처음으로 이복 동생 유리를 만난다. [註: 체카(CHEKA)는 KGB(소련 국가안보위원회)의 전신으로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만든 첩보수사 기관. 냉전시대의 유물인 KGB는 1995년 4월 이후 연방보안청(FSB)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예프그라프의 긴 내레이션이 나온다.) 변한 시류에 적응을 하지 못해 고생을 하고 있는 동생 유리에게, 그가 쓴 시가 검열에서 '부르주아의 방종'같다는 악평을 받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고 알려 준다. 예프그라프는 유리를 배려하여 그의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 수도인 모스크바를 떠나 머나 먼 우랄 산맥의 오지인 바리키노 마을로 피신시키며 그에 필요한 통행허가증과 증명서 등 서류를 만들어준다. 유리는 감사의 표시로 그의 시집 한 권을 주고 서로 헤어진다. [註: 이 시집이 첫 장면에 타냐에게 보여준 바로 그 시집이다.]

 

 유리, 토냐, 사샤 그리고 장인 알렉산데르는 우리의 6·25전쟁 때 피난민을 방불케 하는 가축 운반 열차에 가까스로 몸을 싣는다. [註: 이 열차 장면 시퀀스는 캐나다 알버타주에서 촬영했다.]

 

 이때 알렉산데르가 '멋진 시설이군.'하고 비아냥거리자 동승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 죄수인 코스토예드 아무르스키(클라우스 킨스키)가 맞장구를 치며 자기는 '지식인이지만 막노동꾼'이라며 왼팔에 차고 있는 붉은 완장을 가리킨다.

 

 차장이 올라타서 위생규칙 등을 설명하고, "열흘 간에 걸쳐 외국의 지원을 받는 반동범죄자들인 우파가 출몰하는 위험한 우랄 산맥을 통과하지만 좌파 적군(赤軍)의 지도자인 인민사령관 스트렐니코프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듣던 아무르스키가 '스트렐니코프 사령관'이라는 이름에 존경의 박수를 치며 '나 만이 자유의 몸이며 나머지는 모두 가축'이라며 수갑찬 손을 허우적거리며 절규한다. [註: 클라우스 킨스키는 혁명에 관해서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는 이 장면에만 등장한다.]

 

 모두가 곤히 잠든 중에 일어나 눈곱만한 크기의 여닫이 창을 열어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유리. 보름달이 중천에 떠있고 기차가 눈 덮인 끝없는 대평원을 가로질러 하얀 연기를 숨가쁘게 내뿜으며 철로에 쌓인 눈을 헤치고 달리는 장면은 한 폭의 그림같이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자신들에게 또 어떤 일이 닥칠 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기차 안에서는 춤사위가 벌어지는데, 이때 갑자기 열차가 서행을 하기 시작하고 바깥에 비치는 마을 풍경은 깡그리 불에 타고, 사람들은 학살 당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공포에 떠는 아비규환 그 자체다. 달리는 열차에 겨우 올라탄 한 마을여자(릴리 무라티)가 스트렐니코프가 저지른 짓이라고 항변한다. 과연 혁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여기까지가 1시간 58분. 약 3분의 중간 휴식시간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남편 파샤를 찾기 위해 종군간호부로 자원한 라라와 군의관으로 참전한 유리는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우연히 해후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총격사건 이후 4년 만이다.

 

▲ 라라와 유리가 6개월 동안 함께 야전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둘은 사랑을 느끼지만, 라라는 어린 딸 카챠가 있는 그라도프로 떠난다.

 

▲ 비밀경찰이 된 예프그라프가 처음으로 이복 동생 유리를 만난다. 그는 유리의 가족에게 필요한 통행허가증 등을 만들어주며 오지인 바리키노로 피신시킨다.

 

▲ 눈 덮인 끝없는 대평원을 하얀 연기를 품으며 달리는 열차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아날로그 영상의 진수다.

 

▲ 볼셰비키 사령관 스트렐니코프가 탄 중무장열차. 이 열차는 실제 존재했던 열차로 이 영화에서 완벽하게 복원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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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2)

 

(지난 호에 이어)

 홀어머니마저 죽자 고아가 된 8살의 유리 지바고(오마 샤리프의 외아들 타렉 샤리프가 실제 8살 때 출연했다)는 어머니가 즐겨 연주하던 발랄라이카를 물려받고, 부모님의 절친한 친구인 알렉산데르(랄프 리차드슨)와 안나 그로메코(시옵한 맥켄나) 부부에게 입양되어 그로메코가(家)의 7살 고명딸 토냐(메르시데스 루이즈)와 사이좋게 지내며 모스크바에서 양육된다.

 

 한편 1912년 어느 겨울 밤, 라라 안티포바(줄리 크리스티)는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사업을 도와주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나이 많은 저명인사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와 함께 사교계 연회장에 어머니가 독감에 걸려 대신 참석한다. 연회장 바깥 광장에는 라라의 애인인 이상주의적 혁명가 파벨(파샤) 안티포프(톰 코티네이)가 이끄는 시위대가 붉은 깃발을 흔들며 요란하게 '마르크스주의 찬가'를 합창한다.

 

 무도회가 끝나고 눈썰매 마차를 타고 귀가하는 중에 빅토르는 라라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다.

 

 한편 이 무렵 코사크 기병대가 나타나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는 현장을 발코니에서 지켜보던 닥터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오마 샤리프)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본능적으로 밖으로 뛰쳐나가 부상자들을 치료하려고 하지만 기병대의 제지와 알렉산데르의 만류로 발길을 돌린다.

 

 이즈음 집으로 돌아온 라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파리에 긴 여행을 갔던 토냐(제랄딘 채플린)가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프랑스에 소개된 젊은 러시아 시인들 중 유리가 첫 번째로 난 신문을 보여주는 토냐는 예쁜 분홍색 털모자와 코트를 걸치고 엄청 세련된 숙녀가 되어 나타난다. 어머니 안나는 여성의 직감으로 둘의 사랑의 감정을 남편보다 먼저 감지한다.

 

 한편 그날 밤 파샤가 라라의 집으로 도망쳐 들어온다. 라라가 그의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그는 시위 때 주웠던 총을 감춰달라고 부탁한다.

 

 빅토르와 라라의 밀회가 계속된다. 빅토르가 사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호텔방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던 라라는, 뒤늦게 나타나 강제로 술을 먹이려는 그의 빰을 때리지만 17세의 처녀성을 잃은 육체의 기억은 강하다….

 

 이윽고 딸과의 관계를 눈치 챈 라라의 어머니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한다. 한 남자에게 모녀가 한꺼번에 농락 당한 사실에 분노와 수치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당황한 코마로프스키는 사람을 보내 그의 주치의 보리스 쿠르트 교수(죠프리 킨)를 급히 부른다.

 

 그때 토냐와 함께 유리의 집에서 개최한 살롱 콘서트에 참석하여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쿠르트 교수는 급히 제자 유리를 데리고 라라의 집으로 간다. [註: 유대인 중산층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당시 라흐마니노프와 톨스토이와도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두 의사는 위세척을 하여 그녀를 살려내는데 그녀는 무의식 중에 라라를 찾는다. 빅토르가 어머니가 살았다고 라라에게 알리러 가려고 하자 교수는 단호히 유리더러 가서 전하라고 명한다.

 

 유리가 라라를 찾으러 집안을 두리 번 거리는 데 처음으로 '라라의 주제곡'이 은은하게 흐른다. 의상실의 희뿌연 창을 통해 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운명의 여인 라라를 어렴풋이나마 보게 되는데, 마침 촛불을 들고 라라의 방에 들어온 코마로프스키와 눈이 마주친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유리와 교수의 대화를 통해 빅토르는 유리 아버지의 친구로서 부친의 유언을 집행하면서 얼마 안 남은 유산을 가로챈 사기꾼이었지만, 한편으로 수단 좋은 사업가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유쾌한 친구로 묘사된다.

 

 장면은 허술한 노동자 식당. 빅토르와 라라가 앉아있는데 파샤가 들어온다. 파샤는 대뜸 "혁명은 라라보다 더 중요하다"며, "황량하지만 조용한 우랄 산맥에 있는 그라도프에 교사직도 구했다"고 말한다.

 

 코마로프스키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나이가 들면 나아지느냐?"고 되묻는 파샤. "인내심과 경험이 늘어난다."고 대답하는 빅토르. 파샤는 "인내심이 늘어난다고 늙어서 결혼을 해야 하느냐?"며 자기는 26살, 라라는 17살, 둘은 내년에 결혼할 거라고 용감하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식당문이 '꽝'하고 닫히자 등 뒤에 대고 "젊은 십자군이군. 훌륭한 젊은이야."라고 말하는 코마로프스키.

 

 그리고 라라에게 할 말이 있다며 가게로 돌아온 빅토르는, 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는데 첫째는 고매하고 순결하여 세상의 존경을 받는 듯 하지만 사실은 멸시를 받는 부류로 특히 여자에게 불행을 잉태하는 남자로, 파샤가 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라라는 이 첫 번째가 아니라며 '매춘부'로 폄하하면서 따라서 이 결혼은 재난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 말에 그의 빰을 때리는 라라! [註: 여담이지만 이때 로드 스타이거가 같이 그녀의 빰을 때리는데 이것은 대본에 없던 즉흥연기였고, 놀라는 줄리 크리스티도 연기가 아닌 자연적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윽고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는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고는 "강간이라고 생각지 마시오. 둘 다 즐긴거니까!"라고 내뱉고 떠난다.

 

 복수심에 불타던 라라는 파샤를 위해 감추어둔 총을 갖고 스벤티츠키 저택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장으로 간다. 걸어 가는 중에 파샤를 만나지만 편지를 보냈으니 그걸 보면 다 알 거라며 한사코 뿌리치고 혼자 가는 라라.

 

 한편 파티장에는 토냐와 유리도 참석하여 코마로프스키를 만난다. 불이 꺼지고 모두 크리스마스 트리에 촛불을 밝힌 후 화려한 무도회가 벌어진다. 유리와 토냐도 행복한 춤을 즐기는데 토냐가 "(라라를 처음으로 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봤다"고 하자 "그 여자가 바로 코 앞에 있잖아!"라고 말하는 유리.

 

 이때 호스트인 스벤티츠키 부인(루아나 알카니즈)이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유리와 토냐를 무대에 세우고 "모스크바 굴지의 명문가 닥터 유리 지바고와 결혼할…"이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방의 총소리가 들린다. (다음 호에 계속)

 

▲ 파리에 긴 여행을 갔던 토냐(제랄딘 채플린)가 예쁜 분홍색 털모자와 코트를 걸치고 엄청 세련된 숙녀가 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 뒤늦게 나타난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가 강제로 술을 먹이자 라라(줄리 크리스티)는 그의 빰을 때리지만….

 

▲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파샤(톰 코티네이)가 빅토르를 만나, 혁명은 라라보다 더 중요하다며 자기는 26살, 라라는 17살, 둘은 내년에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 크리스마스 이브날 파티에서 토냐가 "(라라를 처음으로 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봤다"고 하자 "그 여자가 바로 코 앞에 있잖아!"라고 말하는 유리(오마 샤리프).

 

▲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총을 쏘는 라라. 그러나 왼손에 가벼운 총상을 입은 그는 라라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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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1)

 

 무려 3시간 20분의 대서사극인 '닥터 지바고(1965)'를 날 잡아 보는 것은 컴퓨터 그래픽(CG) 기술도 없던 반 세기 전의 아날로그 시대로 떠나는 긴 시간여행이었다.

 

 아마 네다섯 번째 보는 것 같은데도 눈덮인 대평원 속에 화려했던 제정(帝政) 러시아 말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귀족과 민중이 대립각을 세우던 혁명의 시기까지 거대한 역사의 시간 속에 내던져진 한 순수한 영혼의 행적을 그린 대서사극은 지금의 감성으로 봐도 감동의 울림이 있다. 이것이 아날로그 고전 영화의 진수가 아닌가 싶다. [註: 그런데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 같이 70mm 수퍼 파나비전이 아니라 실제는 스탠더드 35mm 파나비전으로 촬영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출신 거장 데이비드 린(David Lean, 1908~1991) 감독과 바늘에 실 가듯 호흡을 같이 한 프랑스 출신 작곡가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 1924~2009)가 작곡, 러시아 전통민속악기 발랄라이카로 연주한 '라라의 주제곡(Lara's Theme)'은 여전히 아름답고 달콤하다. 그래서 명작을 더욱 명작답게 만든 것이리라. 이 악기는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중요한 장면에 몇 번 등장한다. [註: '라라의 테마'는 영화 개봉 후, 'Somewhere My Love'라는 제목으로 레이 코니프 악단(Ray Coniff & The Singers)을 비롯하여 앤디 윌리암스 등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부른 인기 팝송이 되기도 하였다.]

 

 1965년 MGM사 배급. 제작 카를로 폰티. 러닝타임 197분. 원작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1960)의 동명의 유일한 장편소설. 그러나 원작 소설은 정작 소련에서는 출판되지 못했으며, 1957년 이탈리아에서 발간 되자마자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듬해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으나 소련 당국의 거부로 인해 원작자인 파스테르나크는 수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닥터 지바고'는 소비에트 연방의 리더이자 소련 공산당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에 힘입어 1988년에서야 출판이 허용되었고, 다음해인 1989년 파스테르나크의 장남이자 문학연구가인 예프게니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을 대리 수상했다. [註: 예프게니는 "아버지는 이 상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 때문에 괜한 고통만 안겨주었다."며 의미심장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러시아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것은 1994년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제작 후 13년이나 지난 1978년에 개봉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제정 러시아 말기인 1912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 혁명(Russian Revolution)과 오랜 내전을 거쳐 1925년에 이르는 10여 년의 격동의 시기이다.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들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빵을 요구하며 일으킨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어 제정 러시아는 종지부를 찍는다.

 

 같은 해 10월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 세력인 볼셰비키(다수파)에 의해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10월 혁명의 진정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이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즉 레닌과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주도하던 혁명파 '적군(赤軍, 좌파)'과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던 반혁명파 '백군(白軍, 우파)'이 싸우던, 이른바 '적백내전(赤白內戰)'이 일어나, 결국 1922년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蘇聯)이 탄생한다. [註: 필자는 여기서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연거푸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조선무장독립군은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전략상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여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 약 3,500명 규모의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 그때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그들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여 결국 적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적군은 승리 후 1921년 6월27일 독립군을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하도록 한 후 무장을 해제시키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되는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동토의 제국 러시아는 역사상 아무도 제압하지 못한 땅이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막강한 군대조차도 러시아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러시아도 거대한 민중의 힘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권은 배요, 국민과 민심은 물이라고 한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에 과거의 유산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다. 이 격동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개인의 존재와 삶과 사랑의 이야기가 영화 전편을 통해 파란만장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는 약 4분 여의 서곡으로 시작한다. 차이콥스키의 '1812'의 소절과 러시아풍의 행진곡 및 라라의 주제곡 등이 절묘하게 변조돼 흐른다. [註: 1950~60년대에 서곡을 삽입하는 것은 하나의 정형처럼 유행했다. 이 영화와 '벤허(1959)', '스파르타쿠스(1960)',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등 대서사극에는 중간휴게시간도 있다.]

 

 얘기의 서사 구조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소련첩보수사기관(KGB) 중장 예프그라프 지바고(알렉 기네스)가 그의 이복 동생인 유리 지바고와 라리싸(라라) 안티포바 사이에서 난 딸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프그라프는 수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타냐 코마로바(리타 터싱햄)가 조카딸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그녀에게 유리의 시집(詩集)을 보여주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과거회상 형식으로 들려준다. (다음 호에 계속)

 


▲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1965)' 영화포스터

 


▲ 예프그라프 장군(알렉 기네스)이 타냐 코마로바(리타 터싱햄)가 조카딸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이복 동생 유리의 시집을 보여주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면서 영화는 회상형식으로 전개된다.

 

▲ 유리 어머니 장례식 장면 - 가운데 왼편이 8살의 유리 지바고(타렉 샤리프), 바로 우측은 알렉산데르(랄프 리차드슨), 그 옆에 토냐가 어머니 안나(시옵한 멕켄나)의 손을 붙잡고 있다. 유리는 이 그로메코 가(家)에 입양된다. 

 

▲ 라라(줄리 크리스티, 왼쪽)는 어머니(오른쪽)가 독감에 걸려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와 함께 사교계 연회장에 대신 참석한다. 

 

▲ 1912년 겨울밤, 크렘린궁 앞에서 혁명가 파샤 안티포프가 이끄는 시위대가 코사크 기병대에게 쫓기는 모습. 이 살육 현장을 지켜보던 유리 지바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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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WWI 배경 영화(VI)-'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하)

 

(지난 호에 이어)

 찰스는 중재 타결을 축하하는 노동자들의 열광 속에 멜브리지 시내에 이르는데, 뭔가 주변이 익숙하게 느껴지자 자기도 모르게 택시를 잡아 타고 옛날 수용소로 가는 게 아닌가. 거기서 내려 옛날처럼 시내를 향해 걷고 있는데 마침 담배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골목끝 모퉁이에 있는 담배가게로 곧장 가자 그의 수행 비서 해리슨(브램웰 플레처)이 놀란다. 왜냐하면 찰스는 멜브리지에 그 전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바로 그 가게를 찾아갔는지 영문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다음날 마거릿이 남미 여행을 떠나기 전 부탁해 둘 일이 있어 디본의 옛 여관에 들렀다가,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전 주인을 묻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작고 예쁜 집과 한 여자에 관해 물어보고 갔다는 얘기를 듣는다. 즉각 그가 찰스임을 직감하고 냅다 옛집으로 달려가는 마거릿!

 

 작은 냇물 위로 돌다리가 있는 아담한 그 집 앞에서 찰스가 사립문을 밀치자 '삐걱' 소리가 나면서 여닫히고, 현관에 이르는 사잇길을 몇걸음 걸어가니 복사꽃이 만개한 나뭇가지가 머리에 걸린다…. 모두가 옛날 그대로이다.

 

 드디어 현관문에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열쇠를 꽂으니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그의 기억이 걷잡을 수 없는 홍수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때 마거릿이 도착해 "스미디!"하고 부르자 뒤돌아서며 "폴라!"라고 부르는 '찰스 레이니어' 아니 '존 스미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것이다. 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한 키스와 포옹을 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막을 내린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자신의 먼 과거를 다시 되찾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대가로 한 여인과 사랑했던 가까운 과거는 모두 망각하게 되는 찰스 레이니어의 운명은 폴라에겐 너무나도 불행한 사건이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스미디를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줄곧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헌신하면서 살아온 마거릿의 지고지순한 순애보! 그녀에겐 찰스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거의 30년 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이 연출한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Sunflower·1970)'도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마음의 행로'가 우리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요인은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이미지와 모성애를 짙게 풍기는 고전적인 미모의 그리어 가슨의 열연 때문이었지 싶다.

 

 그리어 가슨(Greer Garson, 1904~1996)은 원래 아일랜드 출신으로 런던 킹스대학교를 나온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에서 유학한 지성미를 갖춘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MGM사와 계약하여 활동하다가 1939년 샘 우드 감독의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 출연하여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랐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로버트 Z. 레너드 감독의 '오만과 편견', 1941년 '먼지 속에 핀 꽃(Blossoms in the Dust)'으로 매년 계속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다 1942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미니버 부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같은 해에 '마음의 행로'가 제작되어 한 해 두 번 수상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 때문에 아쉽지만 제외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머빈 르로이 감독의 '퀴리 부인'으로 또 후보에 올라 연속 다섯 번 후보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1938~1942년 베티 데이비스가 세운 기록과 타이 기록이다.

 

 그런데 그리어 가슨이 '미니버 부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강인한 영국 아내 및 어머니 역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수상 소감을 장장 5분 30초 동안 장황하게 연설한 것은 기네스 북에 오를 만큼 유명한 일화다. 이 이후로 아카데미상 수상소감에 시간 제한을 두게 되었다.

 

 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클라크 게이블이 전쟁 복무를 마치고 스크린에 복귀하여 '모험(Adventure·1945)'이라는 영화에서 그리어 가슨과 공연하게 되었을 때다. 포스터 광고의 캐치프레이즈에 "게이블이 돌아오자 가슨이 그를 낚아챘다!"라고 냈다. 이에 대해 게이블이 "내가 가슨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He put the Arson in Garson!)"고 치고 나오자 가슨은 "내가 게이블을 숙련시켰다!(She put the Able in Gable!)"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가슨은 세 번 결혼했는데 마지막 남편이 1949년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함께 한 텍사스 오일 백만장자 '버디' 포겔슨(1900~1987)이었다. 독실한 기독장로교 신자였던 그녀는 댈러스의 남부감리대학교에 '그리어 가슨 극장'을 지어 1991년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녀는 1996년 91세로 댈러스 장로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죽자 남편 버디 옆에 묻혔다.

 

 로널드 콜맨(Ronald Colman, 1891~1958)은 1947년 조지 쿠커 감독의 '이중 생활(A Double Life)'로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국 배우이다. 특히 그는 감미롭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와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로 유명했다.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마음의 행로'에서 그는 최우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찰스 레이니어 배역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늙어 보인다는 비평을 받았다.

 

 이 영화 출연 당시 그는 51세, 그리어 가슨은 38세였고, 15~18세 키티 역의 수전 피터스(Susan Peters, 1921~1952)는 21세였다. 수전 피터스도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혼에 의한 조울증과 만성신장염의 합병증으로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 머빈 르로이 감독과 허버트 스토다트 음악감독에 대하여는 2021년 1월15일자 '애수' 하편 참조. (끝)

 

▲ 드디어 작은 개울 위로 돌다리가 있는 그림 같이 아담하고 예쁜 옛 신혼집을 찾아온 '스미디'.

 

▲ 활짝 핀 복사꽃 가지가 머리에 걸려 이를 젖히는 찰스. 드디어 옛 기억이 걷잡을 수 없는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한다

 

▲ 옛집을 찾은 찰스를 보고 기뻐서 "스미디!" 하고 부르는 폴라 릿지웨이(마거릿 핸슨).

 

▲ 잃어버린 기억을 온전히 되찾은 찰스가 뒤돌아보며 "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장면.

 

▲ 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한 키스와 포옹을 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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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2
WWI 배경 영화 (VI)-'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중)

 

(지난 호에 이어)

찰스가 개인 비서 마거릿 핸슨과 일한지도 2년이 지났지만 그녀가 폴라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어느 날 찰스가 키티와 런던의 한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멜브리지 수용소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했던 조나단 베네트 박사(필립 돈)였다. 그러나 찰스는 잠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늘 그렇듯이 그 기억은 붙잡기 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사무실로 돌아온 찰스가 키티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마거릿에게 선언하듯 말한다. 키티가 성년이 될 때까지 3년간 찰스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낸 것이 주효하여 둘은 약혼을 했던 것이다.

 

 마거릿은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날 밤, 좋은 친구로 지내던 베네트 박사에게 찰스에게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네트 박사는 찰스는 그 스스로 '스미디'를 찾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기억이 되돌아오기는커녕 이제 키티와 결혼까지 한다니!…

 

 한편 마거릿은 남편 '스미디'가 떠난 후 7년이나 되었기에 법원에 법적인 사망신고를 하여 결혼을 무효화시킨다.

 

 키티와 찰스가 교회에서 그들의 결혼식 때 사용할 음악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한 음악의 멜로디가 찰스가 어디서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아 ― 사실은 폴라와의 결혼식 때 사용했던 "오 완전한 그 사랑"이라는 곡이었다 ― 희미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그때 순간적으로 키티를 쳐다보는 눈이 마치 낯선 사람 대하듯 싸늘하자 키티가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찰스는 또 현재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키티는 찰스가 과거에 사랑한 사람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며 파혼을 선언한다.

 

 어느 날 찰스가 과거의 단서를 찾기 위해 말없이 리버풀로 떠난 후, 마거릿은 자유당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그가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리버풀로 찾아간다. 리버풀에 있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실마리를 유도하기 위해 찰스가 묵었던 그레이트 노던 호텔로 함께 간다. 하지만 거기서 찾은 '존 스미디의 가방'을 보고도 그의 기억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찰스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선거캠페인에 헌신적으로 도와준 마거릿에게 감사하고, 또한 새로운 역할에 맞는 내조자가 필요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리고 마거릿에게 그가 종종 옛날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사업상의 '합병(merger)' 같은 것으로 단지 '성실한 우정'을 유지하기 위한 청혼에 불과했다.

 

 마거릿은 찰스의 청혼에 대해 베네트 박사와 상의한다. 베네트는 사실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는 만일 찰스와 결혼을 하면 그녀가 상처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찰스의 청혼을 수락하는 마거릿.

 

 찰스와 마거릿이 극장 공연을 보러 간다. 장면은 무대는 보여주지 않고 음악만 들려주는데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인 것 같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찰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상적인 커플로 소문났고 마거릿은 완벽한 사교계 호스티스로 군림했지만 기실 결혼생활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찰스는 둘 다 느끼는 허전함과 고독을 서로 달랠 수 있기만을 바라고, 마거릿은 그 뜻에 따라 찰스의 둘도 없는 자산이요 가장 경애하는 친구였을 뿐이었다.

 

 둘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가끔씩 상의한다. 어느 날 그녀는 찰스에게 그녀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얘기해 준다. 물론 그가 찰스였지만 그렇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얘기를 듣고 있던 찰스가 말한다. "죽은 자에게 마음을 묻어버린다는 것은 좀 병적이지 않을까?" 마거릿이 말한다. "당신이 그렇게 얘기하니 이상하네요. 당신이야말로 사랑의 오묘한 능력, 인생의 기쁨을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의 공간 속에 묻어두고 있으니까요." 찰스가 "뭔가 희미하지만 난 아직도…" 마거릿이 "희망을 갖고 있다는 말씀이죠?"하고 그의 뒷말을 거든다.

 

 "그래요 그거라고 생각해요." "진짜 그래요, 찰스? 정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이 드세요? 그리고 언젠가 그 여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느끼고 있어요? 아마도 당신은 그 여자와 가까이 하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거리에서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고 이미 만났을지도 몰라요. 그 여자를 만났지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일 거예요. 당신이 찾는 그 누군가가 찰스… 혹시 저인지도 모르고요!"

 

 얼마 후 찰스가 기사 작위를 받고 결혼한지 3년이 되는 1935년 5월24일, 그는 그녀에게 값비싼 에머럴드 목걸이를 선물한다.

 

 그러나 찰스의 호의와 우정에도 불구하고 마거릿은 15년 전 '스미디'가 선물했던 구슬목걸이를 꺼내보며 그와의 옛사랑을 그리워하다가, 그의 돌아오지 않는 기억을 되살리러 그토록 오랫동안 노력했건만 다 허사로 돌아가자 회한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다. 소리 내어 엉엉 운 다음 결심한다. 그를 떠나 혼자 몇 주간 디본을 들렀다가 남미 여행이나 다녀오겠다고….

 

 찰스가 그녀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차역에 배웅해주고 돌아오니 자회사인 멜브리지 케이블 회사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중재 목적으로 멜브리지로 출장 가서 노사분규를 원만히 해결한다. (다음 호에 계속)

 

▲ 법원에 스미디의 법적 사망신고를 하여 사실혼을 무효화시키는 마거릿 핸슨(그리어 가슨).

 

▲ 키티(수전 피터스)는 찰스가 과거에 사랑한 사람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있음을 알고 파혼을 선언한다.

 

▲ (왼쪽) 찰스가 묵었던 그레이트 노던 호텔에서 찾은 '존 스미디의 가방'을 보고도 그의 기억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오른쪽) 마거릿이 찰스에게 '멜브리지 케이블 회사'에 대해 사진을 보여주며 브리핑하지만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 국회의원에 당선된 찰스는 마거릿에게 청혼을 하며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업상 '합병' 같은 것이었다.

 

▲ 결혼한지 3년째 날, 찰스는 부인 마거릿 핸슨에게 값비싼 에머럴드 목걸이를 선물하지만, 그녀는 15년 전 '스미디'가 선물했던 싸구려 구슬목걸이를 꺼내보며 오열한다.

 

▲ "당신이 찾는 그 누군가가 찰스…혹시 저인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더 이상 기억을 더듬지 못하는 찰스! 답답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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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WWI 배경 영화 (VI)-'마음의 행로(行路)'(Random Harvest)(상)

 

 머빈 르로이 감독의 '애수(哀愁·Waterloo Bridge·1940)'에 이어 그의 또 다른 멜로드라마의 걸작을 꼽으라면 단연 '마음의 행로'이다. 두 작품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남자주인공은 군인, 여자주인공은 무용수로 등장시켜 전쟁의 참화 속에서 피어나는 두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소재로, 제작 당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고, 마스코트와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애수'는 비극적 결말이지만 '마음의 행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점이 다르다.

 1942년 MGM사 배급 흑백 영화. 출연 로널드 콜맨, 그리어 가슨, 필립 돈, 수전 피터스. 음악감독은 '애수'의 허버트 스토다트. 러닝타임 125분.

 원작은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1933)' '굿바이 미스터 칩스(Goodbye, Mr. Chips·1934)' 등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 1900~1954)의 동명소설 'Random Harvest'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뜻밖의 수확" 쯤 되겠지만 우리말 타이틀을 '마음의 행로(行路)'로 붙인 것은 칭찬할 만하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군 장교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는 참호 속에서 포격쇼크를 받아 기억상실증과 언어장애까지 겪게 되어 멜브리지 수용소에 몇 달째 수감되어 있다.

 1918년 11월11일, 1차 대전 종전을 축하하는 파티가 가까운 멜브리지에서 열려 정문보초마저 축하연에 참석하고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자, 스미스는 발 닿는대로 수용소를 빠져 나와 시끌벅쩍한 안개 낀 멜브리지 시내를 걷는다.

 그는 골목 끝 모퉁이에 있는 담배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폴라 릿지웨이(그리어 가슨)라는 아름답고 친절한 아가씨를 만난다. 그의 어눌한 말씨와 이상한 행동에 처음에는 의아해 하지만 바로 그에게 묘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수용소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그녀는 그녀의 친구 비퍼(레지널드 오웬)가 운영하는 조그만 바로 데려간다.

 폴라는 가수 겸 무용수였는데 그녀의 공연에 그를 초청하고 조심스럽게 위층에 데리고 가 혼자 관람토록 주선한다. 폴라가 그를 애칭으로 '스미디(Smithy)'라고 부르는데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니 독감에 걸린 스미디가 쓰러져 있다. 폴라는 비퍼와 함께 극진하게 간호하여 그가 회복되자 그녀가 소속돼 있는 유랑극단에 일자리를 알선하려 한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스미디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폴라는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스미디와 함께 도망치러 짐을 꾸린다. 한데 집을 나서다가 스미디가 그를 제지하는 쇼단장 샘을 밀쳐 기절해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시간이 촉박해 쓰러진 샘을 그대로 두고 둘은 디본에 있는 작은 마을로 도피한다.

 그들이 작은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폴라는 비퍼에게 전화를 하여 샘의 안전 여부를 묻는다. 다행히 경미한 사고여서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한다.

 둘은 여관에 머물면서 폴라는 타이피스트 일을 구하고 스미디는 문학적 재능이 있어 생계유지를 위해 글을 쓴다. 드디어 스미디의 첫 작품이 리버풀의 머큐리 신문사에 팔리게 되자 그는 폴라에게 청혼한다.

 둘은 결혼하여 작지만 그림 같이 아담하고 예쁜 집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1920년 11월6일 폴라가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자 스미디는 싸구려 구슬목걸이를 선물한다. 하지만 둘은 더 바랄 것 없이 마냥 행복해 보이기만 한다. 이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스미디에게 그녀는 유일한 행복의 원천이자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표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가져다 준다. 일주일 후인 11월13일 스미디는 머큐리 신문사로부터 내일 오전 10시에 정규직 채용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폴라가 난산 후 몸조리 때문에 그는 처음으로 폴라와 떨어져 혼자서 리버풀로 1박2일 출장을 간다.

 그런데 '그레이트 노던' 호텔에 투숙한 후 스미디가 신문사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다 택시에 들이받쳐 의식을 잃고 만다. 근처 약국에서 그가 깨어났을 때 다행히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그만 폴라와 함께 한 지난 3년의 기억은 사라지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스미디의 본명은 '찰스 레이니어'로 서레이 카운티의 랜덤홀 시에 있는 부유한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혼란스럽지만 찰스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 그 날이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전사했다고 포기한지 오래된 가족·친척들의 놀라움은 컸다. 거기서 누이동생의 새 남편의 의붓딸인 15살 된 키티(수전 피터스)가 외삼촌뻘인 찰스에 반하는데….

 찰스는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하지만 기울어져 가는 가족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생각을 바꿔, 해고 대신 고용보장을 통해 많은 고용자들을 끌어안고 사업을 회생시킨다.

 그러나 찰스는 교통사고 후, 왜 리버풀에 갔는지 그리고 그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열쇠가 어떻게 1917년 프랑스 전선에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고 늘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고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 한구석은 항상 허전하기만 하다.

 몇 년이 지나자 신문들은 그를 "영국 산업의 왕자"로 대서특필한다. 한편 폴라는 어린 아들이 죽은 후 어느 직장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가 신문에 난 찰스의 사진을 보고 그의 회사에 마거릿 핸슨(폴라 릿지웨이는 무대 예명이었다)이라는 본명으로 찰스의 개인비서직으로 채용돼 일하면서 혹시나 그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기대를 걸고 있다.

 어느 날 마거릿이 찰스에게 새로 합병·인수 하는 '멜브리지 케이블 회사'에 대해 브리핑하면서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에게는 그냥 사진일 뿐 그의 기억을 되돌릴 아무런 단서가 되지 못한다. (다음 호에 계속)

 

▲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1942)' 한국 포스터

 

▲ 안개 낀 수용소를 빠져 나와 시끌벅적한 멜브리지 시내로 걸어가는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

 

▲ 가수 겸 무용수인 아름답고 친절한 '폴라 릿지웨이'(그리어 가슨)는 쫓기는 '스미디'를 도와 함께 도피한다.

 

▲ 스미디의 첫 작품이 리버풀의 '머큐리' 신문사에 팔리게 되자 그는 폴라에게 청혼한다.

 

▲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와 폴라 릿지웨이(그리어 가슨)의 결혼식. 이 때 "오 완전한 그 사랑"이라는 곡이 연주된다.

 

▲ 스미디와 폴라가 이사한 그림 같이 아담하고 예쁜 신혼집. 활짝 핀 복사꽃 가지가 머리에 걸려 이를 젖히는 이 장면은 나중에 기억력 회복에 큰 몫을 한다.

 

▲ 폴라가 사내아이를 낳자 스미디는 구슬목걸이를 선물하지만 곧 예기치 못한 비극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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