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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 뿐
leed2017

 
 2021년 초, 코비드 19 때문에 문밖에도 나가지 말라는 정부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도 답답해 미칠것 같아 독방 감옥살이가 이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때마침 반갑게 한국에 있는 은퇴한 중국문학교수 L로부터 ‘한국 한시 감상’이란 500쪽이 넘는 책이 한 권 왔습니다.
 L은 나와 동갑내기. 그의 부인은 내가 6.25사변 전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나와 절친하게 지내던 옛 친구의 여동생입니다. L교수의 형은 이북간 나의 형님 동갑친구로 S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한 사람으로 우리 종가로 장가를 왔으니 도저히 그를 괄시해서는 안될 사람이지요.
 L이 보내준 책을 뒤적이다 보니 내가 존경하는 선비요, 조선의 천재로 알려진 읍취헌(?翠軒) 박은의 시 ‘복령사’도 눈에 띄었습니다. 맨 마지막 구절 ‘만사야 한바탕 웃음거리지 / 영겁(永劫)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뿐-(萬事不堪供一笑 / 靑山閱世自浮埃)하는 시구는 내가 무척 좋아하고 아끼던 시구(詩句)지요.

 이 시를 지은 읍취헌(?翠軒) 박은은 성종-연산군 때의 학자로 경북 고령 사람입니다. 어릴 때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문장에 능(能)하여 대제학 신용개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지요. 홍문관 수찬, 경연관을 역임하였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파직, 갑자사화에 걸려들어 사형된 아까운 선비입니다.
 23살에 파직, 25살에 그의 아내가 죽고, 26살에 사형당했습니다. 그의 시에는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칠언절구 싯구를 두고 한문학자들의 번역은 제각기 다 달랐습니다. L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9년 한국고전번역원 김달진의 번역은 “모든 일은 한 번의 웃음에 이바지할 뿐이요 /푸른산의 세상을 겪는 것은 다만 뜬 먼지이네”로, 2006년 한국고전 번역원 이상하의 번역은 “만사는 한 번 웃음거리도 못 되는 것 / 청산도 오랜 세월에 먼지만 자욱하구나”로, 1992년 손종섭은 그의 ‘옛 시정을 더듬어’에서 “만사야 한바탕 웃음거리지 /영겁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 뿐”으로, 마지막으로 2021년 반농(伴農) 이장우는 “세상만사가 한바탕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 푸른 산에서 지난 세월을 둘러보니 다만 뜬 티끌일 뿐”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싯구 하나를 두고도 여러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문(漢文)의 강점도 되고 동시에 약점도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한문 해석의 모호성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정민 교수의 ‘한시 미학 산책’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추려 볼까요.
 한(漢)나라 원제 때의 궁녀 왕소군은 절세미녀였다. 원제는 궁녀가 많아 일일이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궁중화공 모연수에게 궁녀들의 얼굴을 그려 바치게 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골랐다. 궁녀들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며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그려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도도했던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한번도 임금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한 번은 흉노의 왕이 한(漢)나라의 미녀로 왕비를 삼을 것을 요청해 왔는데 원제는 궁녀 중에서 못생긴 왕소군을 흉노왕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원제가 오랑캐의 땅 흉노로 떠나려는 왕소군을 보니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빼어난 미녀가 아닌가. 왕소군이 화가인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을 안 원제는 격노하여 모연수를 죽여버렸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많은 역대 시인들은 胡地無花草 / 春來不似春(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하며 많은 시상을 낳았다.
 조선 때 어느 향시에서 시제(試題)가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다섯 글자였습니다.  응시자들은 한결같이 왕소군의 슬픈 신세를 시상(詩想)으로 풀어 제출을 했답니다. 그 중 장원에 뽑힌 어느 선비의 작품은 왕소군의 슬픈 신세는 말도 않고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 하나),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을까?),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만),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도다)라고만 되풀이 해서 4번을 적은 것이었다 합니다. 화초가 ‘없다 하나’, ‘없을까?’, ‘없으랴만’, ‘없도다’ 글자 3개를 놓고 이렇게 풀이를 달리하며 제출한 작품이 장원을 장지한 것이지요.

 ‘세월에 시정을 더듬어’를 쓴 손종섭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다투어 기억하려는 경인구(驚人句: 사람을 감탄하고 놀라게 할 만큼 빼어나게 잘 된 시구) 한 두 줄만 있으면 전편은 저절로 명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萬事不堪供一笑 / 靑山閱世自浮埃(만사야 한바탕 웃음거리지 / 영겁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 뿐)하는 구절 또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경인구(驚人句)가 되지 싶습니다. (20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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