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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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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연산군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27명의 조선 임금 중에 누가 자신이 가장 억울한 임금이라고 생각할까요? 억울한 임금이라면 아무 죄없이 죄인이나 폭군으로 몰려 자리에서 쫓겨난 임금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로마의 네로 황제도 옛날에는  폭군으로 불렸으나 피니(M. Fini)를 위시한 몇몇 진보역사학자들이 폭군으로 불러야 할  행적이 없다는 끈질긴 주장으로 앞에 이제 폭군이란 말은 없어지고 그냥 네로로 부른다는 것처럼, 조선에도 폭군 연산이라 했으나 그를 폭군으로 부를 정도의 행적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몇몇 역사학자들이 애쓴 결과 이제는 폭군 연산군이 아니고 그냥 연산군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딴에는 조선 역사, 특히 조선 초기와  중기 역사는 부지런히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몇 주 전에 신동준이 쓴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신동준은 날카롭고 논리적이고 사실위주의 유려한 필치로, 마치 역사학자 피니가 네로는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었음을 주장하듯, 480쪽이나 되는 책에 조목조목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물’을 내놓았습니다. 나는 이 책에 무한한 감동을 받아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내 개인적인 아집에 불과하지만 조선임금 27명 중에 임금다운 임금은 제4대 세종과 제22대 정조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머지 임금들, 이를테면 선조나 인조, 효종, 숙종이나 영조 같은 임금들은 애민정책이나 임금다운 줏대나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못되고 ‘그저 그렇고 그런’류의 임금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 임금 중에 선조는 가장 낮은 점수가 마땅한 어리석은 군주의 하나였습니다만 물론 내 의견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요-.

 억울하게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임금을 꼽아보라면 물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 이 셋을 꼽을 것입니다. 이들 세 임금 중에 누가 제일 억울한가, 혹은 누가 제일 원통할까를 결정하려 드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짓. 그래서  나는 오늘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신동준의 ‘연산군을 위한 변명’ 뒤를 꽹과리 치며 따라가는 지지행렬이란 말이지요.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입니다. 광해군이나 태종, 세조, 성종, 중종 같이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에 어지간히 말들이 많았던 것과는 달리, 연산군이 임금 자리에 오를 때는 아무 말썽이 없었던 사람이지요. 연산군은 치적 면에서 그다지 큰 실정(失政)을 한 임금이 아닙니다. 그는 임금으로 있을 때 신권(臣權)을 누르고 왕권(王權)을 늘리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연산군은 그의 재위 중 두 번이나 사화를 일으켰다는 과오가 그를 폭군으로 모는 계기가 됩니다. 제일 처음 일어난 무오사화란 진보세력의 우두머리 점필제 김종직을 위시하여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같은 젊은 선비들이 세조의 왕위를 부정하는 태도가 빈번하니 이를 그대로 뒀다가는 왕권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연산군이 그들에게 철퇴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 무오사화는 연산군 편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자기 방어였다고 볼 수 있지요.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개국공신파 자녀들과는 달리, 제 실력으로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선 진보세력들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은 세조의 찬탈을 곱게 볼 리가 없었습니다. 김종직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항우에 죽임을 당한 회왕에 비유하여 임금 자리를 빼앗은 세조의 행위를 비웃는 것을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연산군 자신도 세조의 증손자, 그러니 세조의 왕위 찬탈이 없었으면 자기도 오늘날 왕위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지요. 이와 같이 진보 신권(臣權)이 왕위계승에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 철퇴를 내린 것이 바로 무오사화입니다.

 연산군이 억울한 것은 그가 폭군의 누명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진보적인 사가들에 의하면 대부분이 턱없는 과장, 날조, 조작된 허위라는 것입니다. 조선 임금에 대한 실록은 그 임금이 죽으면 그 뒤를 잇는 임금이 실록을 씁니다. 연산군과 같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집필을 할 때는 그 임금을 쫓아낸 사실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마구 과장하여 꾸며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지요. 내 생각으로 연산군도 이들의 터무니 없이 과장, 날조된 허위의 희생양이라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혁명파들은 강희안, 박원종, 유순정 세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들은 모두 연산군이 극히 신임하고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이었지요. 그러나 이들도 결코 깨끗한 인물들은 아니었음을 말해둡니다.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집권세력들은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연산군의 모든 행동을 악의적으로 날조, 과장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역사책입니다.

 사람들은 왕조실록에 적혀있다 하면 모두가 사실로 믿고 정사(正史), 정사 하는데  정사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고려에서 일어난 정치적 현실을 알기 위하여 ‘삼국사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눈치보며 쓴 글은 신뢰를 덜 하는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세조실록에서 단종이 어떻게 죽었다고 묘사되어 있는지 한 번만 읽어보면 알것입니다.

 예로, 연산군이 자기 숙모를 겁간해서 임신을 해서 수치심이 극도에 달한 숙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연산군이 패균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쇼케이스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학자 한 사람이 그때 두 사람 나이를 추정해보니 겁간 당했다는 숙모 나이가 쉰 셋에서 쉰 다섯, 연산군 나이가 서른 셋에서 서른 다섯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백성들의 평균 수명이 50을 넘지 못하던 시절에 쉰 살이 넘은 여인이 임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연산군은 그의 아버지 성종처럼 색(色)을 밝히는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임금 중에 성종이야말로 3위 안에 드는 색골(色骨)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는 4명의 왕후와 8명의 후궁 등 12명의 여자에게서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조, 옹주를 낳았습니다.

 이들 아들딸들이 결혼을 할 때는 많은 재산과 토지를 줘서 내보내니 나라의 재정이 어떤 꼴이 되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비해 연산군은 본부인 외에 가까이 한 여자는 단 둘(장록수와 전전비)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흥청망청이란 말을 할 정도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황음을 즐겼다는 것은 당시 신세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허위로 만들어낸 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정권에 아부하는 세력들은 정보를 조작, 억울한 시민을 사형에 처해버리는 세상임을 생각하면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하기가 더 쉽지 않았겠습까.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일하던 정부의 고등 관리들은 걸핏하면 무고한 시민들을 얽어매어 경찰서에 구속하고 겁박하던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지 않습니까.

 백모와 간통, 흥청망청, 장록수와 인연 말고도 연산군의 죄목으로 꼽히는 것은 정씨와 엄씨를 때려죽였다는 서모장살(庶母), 대비의 가슴을 들이받아 대비를 죽게 했다는 불효불손(不孝不遜), 왕실의 공간 확대를 위해 설치한 기내금표(畿內禁標), 이 모든 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연산의 뒤를 이은 혁명파 무리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얘기는 지면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500년 전에 간신배와 아첨배들로 우글거렸을 조선 조정을 상상해봅니다. 불행하게도  그 간신배나 아첨하는 무리들은 오늘날에도 컴퓨터와 손전화 등에 의지하여 그들의 간신 짓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시절, 독립을 위해서 만주 등지로 가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청춘을 불사르던 애국지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들 중에는 이들 독립투사들을 일본경찰에 밀고하고 앞잡이 짓을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해방이 되자 이들 중에서는 독립투사로 변신하여 사람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고 출세한 흉측한 인간들이 많았지요.

 인간의 역사는 이같이 사람의 탈을 쓰고 버젓이 사람 아닌 짓을 하고 다니는 부조리가 있기 때문에 인간사는 복잡해지고 역사의 구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폭군 네로는 몇몇 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폭군이라는 누명을 어느 정도 벗었다고 합니다. 이 누명을 벗는데 약 2,000년이 걸렸습니다. 연산군은 어떨까요? 연산군은 이제 500년 조금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L씨를 비롯한 몇몇 진보학자들은 연산군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무척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나와 같습니다. 연산군이 정치를 썩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나쁘고 추악한 임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소련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단편을 읽다가 본 다음 제목이 생각납니다.

 “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을 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좀 기다려야 한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s)”. (2019. 6)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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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6
거짓말

 

 거짓말은 어떻게 정의되어 있을까요? 민중서관에서 펴낸 ‘국어대사전(우리말 큰사전이 아니고 국어대사전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거짓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믿게 하려고 사실인 것처럼 꾸미어 하는 말’.

 이렇게 정의하니 얼른 알아 듣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본인이 이것을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다면 거짓말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본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거짓말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지혜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맨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이 거짓말이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종교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를 거짓말로 보아야 하는지 경계선을 긋는 것도  보기보다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최상묵에 따르면 지브라(Zebra) 같은 보호색 무늬, 여자나 남자 앞에서 부리는 교태, 남자가 자기가 얼마나 직장에서 유능한 직원인가를 자랑하는 것 같은 삥짜, 즉 허풍도 거짓말 범주에 들어가는 넓은 의미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쓰는 거짓말은 이보다 훨씬 좁은 의미의 거짓말 같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신중현이라는 대중가요 가수가 있었는데 ‘거짓말이야’하는 제목의 노래를 내놓았습니다. 그 노래에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모두 18번이 나왔다지요. 그 노래가 그 시대(1972년)의 불신풍조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기정되고 말았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정직, 정직 떠들어도 사회생활을 하라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맛있게 먹었습니다(실제로 맛이 없어서 겨우 먹었지만)”로 인사를 하지 “음식이 왜그리 싱거운지 목구녕으로 넘기는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따위의 인사는 사실일 경우도 있지만 그냥하는 말일 때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사교성 거짓말은 대단히 필요한 거짓말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따위의 사교성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면 상대방에 불쾌감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도 그리 ‘큰’ 거짓말이 아니고 비교적 ‘작은’ 거짓말에 그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주 큰 거짓말, 예를 들면 나이, 결혼여부, 출신학교 같은 것이 포함된 큰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교수가 아니면서 자기가 교수라는 사람, 결혼을 했음에도 아직 미혼이라고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거짓말을 할까요? 내 생각으로는 자존감(자기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높게 가지려는 마음)을 유지하거나 더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말을 하지 싶습니다.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허물어져 내려앉은 자존심을 보존해 보겠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이지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존심이 높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던 안하던 누구나 높은 자존심을 유지하려는 의욕은 있는 것이지요.

 거짓말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 탐지기(Polygraph)로 알려진 기기(機器)가 있지요. 이 거짓말 탐지기는 문자 그대로 거짓말을 잡아내는 기기는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의 호흡, 맥박, 혈압, 땀 등의 신체적 반응을 측정하여 이들의 변화를 보고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를 추정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거짓말 탐지기는 지금까지 경찰이나 국가안보에 많이 쓰였고 직원들의 회사 경비나 물건도용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쓰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신뢰도나 타당도가 없기 때문에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단계에 온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실험단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 남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하다는 이유로 인간사회에 설 자리도 없이 말끔히 추방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 있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활기를  띄고 재미가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했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있는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 말이 거짓말이니 아니니 큰소리만 치고 다닌다느니 아니니 이 얼마나 우리들의 대화가 싱그러워지고 재미있습니까. 이게 바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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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9
감장새 작다 하고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에서 키가 제일 작은 아이였습니다.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키가 작아서 팔을 들어 앞에 선 아이 어깨에다 조준을 해서 줄을 마치는 ‘앞으로 나란히’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키는 대학교 들어와서부터 어른의 키, 지금의 키로 부쩍 컸지요.

 키가 작아서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그만 놈이 공부도 잘하니 귀엽다면서 반 뒤에 키 큰 녀석들이 어른스럽게 굴려는 녀석도 간혹 있었지만 괴롭히거나 시비를 걸어온 적은 꼭 한 번, 고등학교를 대구에 가서 새 학교에 입학했을  때 반에서 제일 쬐끄만 녀석이 시비를 걸어온 것 말고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불이익이라고 한다면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불어갈 때 반에 큰 녀석들  이야기에 끼여들려고 하면 “어른들이 말씀하고 계시다. 너같은 아(아이)들은 가서 숙제나 해라”면서 하던 이야기를 뚝 끊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셋째 누나와 같은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셋째 누나는 키가 작아서 키에 컴플렉스가 있는지 육상부에 들어가서 선수도 하고 대대장 감투도 쓴 것 같은데 나는 옆집 푸들강아지처럼 키는 작아도 귀엽게 구는게 나의 생존책이었습니다. 셋째 누나가 결혼할 때는 키가 큰 전봇대를 원했는데 결국 낙찰된 것은 키가 조그만한 남자 아담 사이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일에 큰 것을 좋아합니다. 낚시도 월척(越尺) 큰놈을 좋아하고 학교도 큰학교, 신랑감 키가 가물가물 전봇대를 좋아하지요. 한번은 내가 아내를 보며 “내가 중매로 결혼했으면 키가 커서 인기가 있었을텐데…”하며 자랑을 했더니 “당신같은 사람은 키라도 커야지요”하는 짧은 대꾸를 해왔습니다.

 크고 장대한 것을 좋아하다 보니 새(鳥)나 개 같은 동물은 물론 산이나 강도 큰 것을 좋아합니다. 나이가 500년, 600년이 된 큰 나무 앞에 서면 어릴적에 존경하는 어른  앞에 선 양 외경(畏敬)과 존경심이 갑니다. 강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미시시피나 중국의 양자강 앞에 서면 왠지 몸가짐이 근엄해지고 엄숙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옛시조에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어서 적어 봅니다.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에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 비조니 네오 귀오 다르랴

 

 이동렬의 시조풀이 ‘꼭 읽어야 할 시조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적혀 있습니다. 굴뚝새가 몸집이 작다고 하여 한숨에 9만리를 난다는 대붕새야 비웃지 마라. 구만리 넓고 넓은 하늘을 너도 날고 감장새도 날아다니지 않느냐. 다같이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인데 너나 굴뚝새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지은이는 숙종 때 무인 이택이라는 사람입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해학적으로 옮겨놓은 시조로 볼 수도 있고 문인만 떠받들고 무인은 멸시받던 당신의 시대풍조를 빗댄 노래로 볼 수도 있겠지요. 아마 후자의 경우일 것 같습니다.

 서울 강남 청담동 같은 부자 동네에 사는 사람들아 달동네에 사는 우리같은 사람을 비웃지 말아라. 너나 나나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냐.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35살 나이에 자살을 한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귀족들이 젠체 못하는 것은 그들도 측간(변소)에 오르기 때문이다”는 말과 같이 굴뚝새의 배짱과 패기만 있다면 금력과 권력이 판치는 세상인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1999년 가을 학기부터 2006년 봄까지 한국 E여대에 가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강서구 등촌동 어느 작은 콘도미니엄에 방을 얻어 소꿉놀이 같은 살림을 새로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물고 들어 왔습니다.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니 동창들이 “어디 사느냐”고 묻기에 등촌동 봉제산 밑에 산다고 했더니 친구들 말이 대번에 “딴데로 옮겨라”고 하더랍니다. 등촌동은 새(鳥)로 치면 굴뚝새니 그런데 살면 사기(士氣)와 자존심이 해를 입는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내가 E여대에 있는 동안 강서구 등촌동에 산다고 적은 학생은 그 많은 학생 중에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강서구에 산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못해서 밝히기가 싫어서 그런가 봅니다.

 굴뚝새건 대붕이건 이 세상은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습니다. 마음 먹은데 따라 이 세상은 지긋지긋한 지옥일 수도 있고 극락일 수도 있습니다.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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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2
다정불심(多情佛心)

 

 고향산천을 떠난 지가 벌써 반 백년이 지났습니다. 여름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면서도 그 사이 한 시도 그 정든 산천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내  고향이라고 무슨 별다른 경치야 있겠습니까. 그저 한국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산봉우리들이 빙둘러 서 있고 그 사이로 강물이 비집고 흘러가는 풍광이 내가 고향이라고 일컫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무심한 산하(山河)가 늘 그립습니다. 거기 가서 이 세상을 작별하는 눈을 감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왜 고향산천이 이다지도 그리울까요?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정(情)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情)이 생겨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지각심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무슨 자극이든지 자주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친근감이 생긴답니다. 예로, 아무 의미가 없는 자극도 자꾸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난 뒤, 나중에 그 자극을 다른 낯선 자극들과 함께 섞어서 보여주면 먼저 되풀이 보여준 자극이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이든 자꾸 만나면 호감이 생기고 호감이 싹트면 정(情)이 붙게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곰보도 자주 보면 미인”이란 속담이 생각납니다. 세월의 이끼, 그것이 곧 정(情)이라는 말이지요.

 내 서재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사진첩 여러권이 꽂혀 있습니다. 한국 E여대에서 은퇴하던 해에 은퇴 기념으로 샀다고 적혀 있더군요. 오늘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안에만 갖혀 있으니 너무 갑갑해서 서가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는 그 사진첩을 꺼내서 여기저기 펼쳐보았습니다. 그 책에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그런 사진 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이가 지긋한  어머니 한 분이 전선(戰線)으로 가는 아들을 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들을 죽이고 살리는 그 전쟁터에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들을 바라보는 그 경건한  눈길, 평생을 쏟아부은 사랑, 영 이별이 될 수도 있는 이 순간의 슬픔과 두려움, 문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의 처절한 염원, 이 모든 것이 용해되어  만들어낸 눈빛이었습니다.

 아무리 인물묘사에 뛰어난 화가나 배우라 할지라도 그 눈빛을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혼자 단정짓고 말았습니다.

 다정불심(多情佛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착한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아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보내는 그 어머니의 눈빛을 나는 다정불심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정(情)이란 것도 이 다정불심의 하위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주위사람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합니다. 우선 엄마를 위시해서 자기가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몇몇일테고 자라면서 맺는 인간관계는 점점 더 많아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이 아이가 크면서 겪는 정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내 생각에는 정(情)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정이란 자기 생존에 도움을 주는 몇몇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침저녁 늘 보고 지내는 것들, 이를테면 데리고 노는 강아지나 밭을 가는 누렁이, 숨바꼭질하고 놀던 뒷동산 같은 무생물에게도 정(情)이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산천이라 하더라도 그 산천에 오래 노출된 사람, 즉 그 산천에 정(情)을 준 사람들에게는 마음 속에서 떠날 날이 없는 산천이 됩니다.

 정(情)이 부리는 요술 중에는 그 속에 있을 때는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하다가도 작별할 때가 되면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고향이 그렇지요. 막상 고향을 떠나려면 어디서 정(情)이 불쑥 나타나 소매를 잡아 당깁니다.

 이호우라는 청도 출신의 시조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시조 ‘이향사(離鄕詞)’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선영 모신 산도 이미 멀리 돌아지고 / 산협을 울어예는 귀익은 시냇소리 / 모르고 살아온 그 정, 빙 눈물이 돌구나”

 여명기의 시인 김소월도 그의 시 ‘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불귀 불귀 다시 불귀 산수갑산 다시 불귀 / 사나이 맘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부부 사이가 일그러져서 서로 다투고 싸우지 않는 날이 일년에 하루도 없다시피 하는 부부도 막상 이혼장에 도장을 찍고 돌아설 때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미운 배우자라 해도 오랜 시간에 걸쳐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에 대한 정은 어쩔수 없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자주보는 것이 정(情) 형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고운 정(情) 뿐만 아니라 미운 정(情)도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지요. 일단 정이 생기면  전등 스위치처럼 켰다 껐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情)이란 땅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온천수 같은 것. 그렇기 때문에 이호우는 “모르고 살아온 그 정 빙 눈물이 돌구나”라고 읊었고 소월은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정 때문에 울고 정 때문에 웃습니다. 정 때문에 가까와지고 정 때문에 멀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반 백 년 넘게 낯선 곳에서만 이리저리 헤매면서도 아직도 그 산천을 그리워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정(情)이란 다정심불(多情佛心)의 정토(淨土)에 자리잡은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20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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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춘몽(春夢)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 늘 입버릇처럼 “인생은 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경상북도 칠곡 왜관읍 매원동 광주이씨 집성촌, 딸 둘 집에서 태어나서 16살 되던 해에 안동 예산 부포동 역동집으로 시집왔습니다. 모두 8남매를 두었으나 넷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매는 넷, 그중 하나는 요양원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학교교육은 받아보지 못한 분. 이야기로는 할아버지가 서울, 그러니까 한양가는 길에 외가 매원에서 손님으로 하루 묵어가는데 아침에 세살된 딸 아이(어머니)가 마당에서 아장아장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외할아버지에게 “우리 며느리가 지금 태중인데 만약 아들이면 저 아이를 내 손부(孫婦)하세” 하여 그 자리에서 구두 “약혼”을 했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3년 연상의 여인이지요.

 어머니는 큰 집에 며느리로 들어와서 이 어른 눈치 보랴 저사람 어른으로 모시랴, 언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로 한국의 옛 시조, 가사, 춘향전(당시는 금서)은 물론 소동파의 적벽부, 향산의 장한몽 같은 시가도 외웁니다. 어릴 때 자기가 신동이어서 학교를 안보냈다 하나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라는 동안 트라우마(trauma)는 전혀 없없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높아서 그런지 무척이나 감상적이었습니다. 기쁘기 보다는 슬픈 사연을 더 좋아하신 어머니, 다 큰 아들을 둘이나 잃어버리고 토지개혁, 6.25를 겪고 말년에 와서는 허무감의 절정에서 허덕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말하는 일장춘몽이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이해는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 귀로 듣는 것이고 이해 한다는 것은 체험이 내재화(內在化) 되어 가슴으로 듣는 것입니다. 내가 은퇴를 하고 70, 80에 가까워 왜 이 말은 그 전에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들려왔습니다.

 한번은 우리 동네에 사는 H형, C형, 나 이렇게 세 집이서 우리가 죽으면 묻힐 묘지를 사러 함께 갔습니다. 묘석에 적어두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직원에게 나는 “Life is but an empty dream”이라는 롱펠로(H. Longfellow)의 싯구를 묘비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냈고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시인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라 무슨 심오한 의미라도 담겨 있으려니 여기니까 그렇지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근처도 못 가본 사람도 이 글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양(洋)의 동서가 다른 것 같고, 나라마다도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은 허무한 꿈이라는 말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요새 와서 행복하게, 즐겁게, 내가 하고 싶은대로, 기운차게, 희망을 갖고 살자고 하도 외쳐대니까 그렇지 나처럼 황혼에 모든 것이 가물거리기 시작하는 사람이 “인생은 하나의 긴 봄 꿈”이라는 말에 가슴을 치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당시 이름을 날리던 소설가 정비석의 ‘산정무한’이라는 수필이 있었습니다. ‘산정무한’은 천하명산 금강산에 유람을 가서 느낀 감회를 유려한 필치로 쓴 글입니다. 정비석, 이은상, 양주동은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무척 좋아하던 문장가들이지요. 길고 어려운 한문 투성이의 글이나 여기 인용한 것은 대학입학시험에 하도 자주 나오는 대목이라 달달 외워서 지금도 입에서 술술 흘러 나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것은 이보다 더나은 문장이 없다 싶어서 여기에 인용을 해볼까 합니다. 금강산으로 숨어버린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 무덤앞에 선 감회를 적은 것입니다.

 

 천년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런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웅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然)히 수수(愁愁)롭다.

 

 대학입학 시험 때문에 이 명문을 어제 배운 것처럼 아직까지 쉽게 외우고 있습니다.  남가일몽, 영겁, 수유, 각축, 부토, 암연 같은 단어는 한문으로도 알아야했습니다.

아무리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읽은 글이 명문이니 어쩌니 해도 인생이 유장한 변천과 행운유수()를 노래한 다음의 흔해빠진, 그러나 천하명구를 지나칠 수야 있겠습니까.

 

태어남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에 사라짐이라

(生也一片浮雲起 / 死也一片浮雲滅 )

 

 백년인생도 이렇게 명료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인생의 태어남에도 기뻐할 것 없고 죽음 앞에서도 겁낼 것 없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한 말입니까.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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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여자로 태어났으면

 

 나는 가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봅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 이를테면 전공이라든지 학문의 길을 걷는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 싶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자식은 지금처럼 둘만 두는게 아니라 11명쯤 두었을 것입니다(문제는 내 신랑이 그럴 힘이 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흥부처럼 가난한 집에서 자식은 왜 그리 많아…” 하는 동네 사람들의 탄식은 피하기 어려웠겠지요.

 조선 역대 임금 중에 8남 4녀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의 부인 소헌왕후의 기록을 넘지는 못하지요. 그러나 세종의 8남4녀의 기록은 소헌왕후를 빼고도 미인 궁녀 다섯사람의 자궁을 빌렸지 않습니까. 나는 한 배에서 11자식을 생산했으니 소헌왕후의 기록보다 나은 것도 없지마는 못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11=12라는 어처구니 없는 등식이 성립되지요.

 요새는 온몸을 짜깁기 하는 성형수술은 물론 성(性)까지 남자에서 여자로, 혹은 여자에서 남자로 바꾸는 성전환 수술도 한다니 놀랍기도 하고 겁도 납니다. 여권(女權) 신장이다 뭐다 하며 여성의 권리를 외치는 고함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데 앞으로 몇 백년 더 있으면 남성보다도 여성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여자로 수술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지 않겠지요.

 옛날 조선때처럼 어른들이 함께 살 짝을 찾아 인연을 맺어주던 시절에는 개성이란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함께 지낼 사람은 자기 취향에 맞게 자기가 직접 고르는 요새 세상에는 남자건 여자건 그가 풍기는 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게 되었지요.

 이 개성이란 것도 요새는 돈만 있으면 성형수술도 있고 ‘코디(맞나요?)’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화장은 어떻게 하고 옷은 어떻게 입고, 손톱에 칠하는 매니큐어, 목에 거는 넥타이에 대해서도 전문적 충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도 여자였으면 성형의사나 코디 직업의 사람에게 전문적 의견을 물어 내 자신을 아주 포장이 잘된 상품으로 만들어 놓지 싶습니다.

 나는 여자로서 나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몇번 했다고 이혼을 제의하거나 부부싸움 한번 했다고 친정으로 달려가는 그런 여자는 아닐 것입니다. 신랑한테 뺨이라도 한대 맞으면 나도 같이 한대 올려 붙이는 그런 용맹무쌍한 무인정신은 내게 없습니다. 아내에게 손을 대는 남편은 가장으로서는 가장 천박한 남편이니 내가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얻어맞으며 살 필요는 없지요.

 이혼 말이 났으니 말인데 조선시대 남녀관계 율법이던 칠거지악을 들먹이는 것은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이 허황스러울 것입니다. 요새 구 칠거지악(七去之惡) 대신 신 칠거지악이 있다 해서 컴퓨터 키를 두들겨 봤더니 다음과 같은 우스개 칠거지악이 눈에 띄어 여기 옮겨봅니다.

 첫째, 따로 따로 노는 부부, 둘째 계속 밖으로 나도는 부부, 셋째 서로 험담만 하는 부부, 넷째 돈돈 하는 부부, 다섯째 달달 볶는 부부, 여섯째 퉁명스런 부부, 일곱째 말이없는 부부. 내 생각으로는 이런 칠거지악에 걸려들지 않는 부부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여성으로 태어나서 장담을 전혀 못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은 천운(天運)에 달려있는 것으로 봅니다. 다행히 좋은 사람 만나 나를 신혼 때처럼 변함없이 사랑해주면 다행, 첫 아이 낳고 남편의 눈길이 초점이 없고 사방으로 흩어지면 나는 어떡하지요? 이것만은 내가 100% 통제권을 가질 성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에는 며느리를 두 사람이나 번갈아 쫓아낸 세종대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종 아들 문종의 첫 번째 부인 김씨와 두번째 부인 봉씨를 말합니다. 이들 며느리 둘 다 문종과는 소원한 관계였다지요. 문종이 부인을 멀리 했다고 다른 여자들한테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남편 되는 사람이 자기에게 무심하게 대해주니 첫째 부인 김씨는 ‘사랑의 묘약’을 쓰다가 발각되어 쫓겨나고(사랑의 묘약이란 뱀이 교미를 할 때 흘린 정액을  수건에 받아 허리에 차고 있는 것) 둘째 부인 봉씨는 남편이 자기한테 오는 발길이 뜸해지자 여종 소쌍과 동성애의 추행을 벌이다 쫓겨났습니다.

 시조 시인 백수(白水) 정완영에 의하면 결혼생활은 3단계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즉 20대 갖 결혼해서 애정(주로 성적인 사랑)에서 출발하여 50대의 정(情)으로 70대의 낙(樂)으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은 20대 애정단계에서 남편의 성적 사랑을 더 받으려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세종도 그런 아들을 달래고  닥달했지만 별 수가 없었던지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합니다.

 

‘금슬이 저리 좋지 않으니 아무리 부모라 해도 침실의 일까지 어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글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생각은 지금 21세기에 하기 보다는 22 혹은 23세기에 가서 해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2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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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1
굿과 점(占)

 

 우리 부부가 사는 콘도미니엄에서 한 300m만 가면 오른편에 초중학교과 도서관이 나오고 그 뒤로는 험버강이 흐릅니다. 도서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무쇠와 나무를 섞어서 만든 아담한 무지개 모양의 다리 하나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습니다. 맑은 날이면 우리는 산책을 다니다가 그 다리 위에서 오리들이 헤엄치며 노는(일하는) 것도 보고 다리 아래쪽의 경치도 구경하곤 합니다.

 이 강물이 히말라야 산맥 어느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느끼는 신비감은 몇 배가 더 할것 아니냐는 말을 하고는 웃지요. 그러나 경치라는 것도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닌가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다리 근처 강가에 사람들이 음식과 꽃을 버린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근처에 하나밖에 없는 강에 이렇게 마구 버리는 법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몇 달에 한 번 꼴로 드문드문 있다보니 그 음식과 꽃이 인도 사람들이 우리처럼 무슨 의식 같은 게 있나 본데그 의식이 끝나면 음식과 꽃을 험버강에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강에 버린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는 강에 바치는 것으로 바꿔서 생각했습니다. 버렸다면 그렇게 싱싱하고 건강한 꽃송이들을 마구 내버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한번도 꽃과 음식을 버리는(혹은 바치는)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꽃을 강에 버리는 행위는 반드시 자기네들의 복을 비는 의식, 즉 우리의 굿이나 제사와 마찬가지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무당을 얘기하자면 샤머니즘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에 대한 책을 4권이나 쓴 송기호에 의하면 굿이란 ‘행복’ 혹은 ‘행운’을 뜻하는 북방아시아 민족들의 말이랍니다. 무당은 신과 교통하는 종교인인데 우리나라에도 원본에 가까운 샤머니즘의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요새도 서울 주택가에는 간혹 나무 솟대에 이상한 깃발이 날리는 무당집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런데 송기호의 지적대로 무당이 굿도 하고 운수도 보기 때문에 점(占)만 보는 점쟁이와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처녀보살이니 애기보살, 선녀보살이니 하는 데가 무당집인지 점집인지 구별이 안갈 때가 많지요. 옛날에는 무당과 점쟁이가 엄격히 구별되었는데 요사이는 구별이 사라져 버렸답니다.

 굿이라는 것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신에게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위해서 하는 의식입니다. 신은 인간들이 뭘 바란다고 공짜로 척척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드리고 나서(뇌물)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어야지요.

신에게 무엇을 드리는게 좋겠습니까?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이면 신도 좋아하겠지요.  

 이런 점에서 춤과 노래보다 더 나은것이 있을까요? ‘조선 풍속사’를 쓴 강명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굿은 오락, 신기한 구경거리였다고 합니다.

 점은 선사시대부터 보아왔다고 합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궁금증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에 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송기호에 의하면 점치는 것도 고대에는 국가의 중요한 큰일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개인차원으로 변해왔다고 주장하지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우리가 어렸을 때 왼손 바닥에 침을 뱉어 오른손으로 그 침을 탁 쳐서 침이 튀는 방향을 보고 그쪽으로 가거나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공연히 두 손을  비비 꼬면서 공중으로 난 구멍을 들여다 보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어렸을 때 점쟁이 아닌 사람을 없었을 것입니다.

 왕실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점 같은 것은 금물이었으나 황실에 우환이 있거나 큰 일이 터질 때는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6대 임금 고종과 민비는 점쟁이를 수도 없이 궁궐에 불러 들이고 어떤 때는 나라일을 결정할 때도 점쟁이의  충고를 따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도 점괘 뽑은 이야기가 여러번 나옵니다. 퇴계(退溪) 이황도 식구들에게는 “점같은 것은 멀리하라”고 했지만 먼 길을 떠날 때는 점괘를 보고 좋은 날을 정하겠다느니 하는 말이 나옵니다.

 요새는 북극으로 제트 여객기가 날아다니는 세상. 신이고 귀신이고 보이지 않는데 오래 있을 수는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우리 인간들은 꿈을 찾아 행복을 찾아,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그 신에게 복을 달라고 행운을 달라고 제사를 드립니다.

 우상숭배는 하지 말라지만 우리 인생에 눈물이 있고 한숨이 있는 한, 또 아무것에서도  위안을 얻지 못할 바에야 우상숭배라도 해서 한 줌의 위안이라도 얻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행복을 빌어 나서는 길에 한국사람만이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인도 사람이건  중국, 일본사람이건 저멀리 남미 칠레, 페루 사람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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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아침 산책

 

 미국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오는 2020년 8월 어느 맑은 여름날 아침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침을 먹기 전에 습관대로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 뒤 험버강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 나섰다. 산책길은 자동차 한대가 너끈히 다닐 수 있는 넓이의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양쪽 옆으로는 숲이고 오른편 숲이 끝나고는 험버강이 흐른다.

 그날도 별다른 일 없이 길을 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우리쪽으로 걸어오던 중동사람인 듯한 부부가 우리 앞에 다가오더니 우리를 막아서며 “오른쪽으로 걸어라”는 지시를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속으로 “세상에 이런 무례한 놈이 있나”는 생각이 들어 내가 얼마 전 바로 이 길에서 순시하는 교통순경에게 ‘이런 길에서 왼쪽으로 걸어야 하느냐, 오른쪽으로 걸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순경의 대답이 어느쪽으로 걸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으니 네 마음대로 걸어라’ 하더라는 말도 했다. 규정이 없다는 것이 나의 대답. 그래서 왼쪽으로 걸으면 앞에서 오는 자전거 같은 것을 더 쉽게 피할 수 있어 나는 왼쪽으로 걷는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덛붙여 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설명 따위는 이 중동에서 온 부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런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걷는 것이 규범이란다. 어느쪽으로 걸어도 된다고 해도 “오른쪽으로 걷는 것이 규범이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네 기준은 어디서 나온 규범이냐”고 물어도 대답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걸으니 너도 오른쪽으로 걸어야 한다는 말 뿐이었다.

 나중에는 서로의 감정이 격해져서 나는 “내가 어느쪽으로 걸어야 하는 것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보고 어느쪽으로 걸어야 한다고 지시할 권리가 없다. 너는 너, 나는 나다. 너는 네 할 일이나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산다”는 요지의 주장을 해도 상대방은 오른쪽으로 걷는 것이 규범이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싸우다가 정든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나중에는 서로 웃으며 자기 주장만 하다가 헤어졌다.

 이 일이 있은 며칠 후 나는 중동 부부의 규범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규범이란 무엇인가? 규범이란 한 문화에서 정상적으로 기대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규범이란 문화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예로 한국이나 일본 사람은 길거리에 걷고 다니던 신을 그대로 신고 집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북미 문화권에서는 신을 신고 집안에 들어간다. 이것이 규범의 차이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에 있을 때 어떤 파티 자리에서 어느 낯선 외국 교수가 아내를 소개하는 아내 뺨에 키스를 하려는 바람에 아내가 몹시 당황해 하던 기억이 난다.

 길을 왼쪽으로 걸어라 오른쪽으로 걸어라 하는 시비는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옛날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 아래서 법의 획일적 해석과 복종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들은 이 길 걷는 규범도 일종의 법이니 내가 오른쪽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법에 저촉되는 일만 아니면 누구에게나 이래라 저래라 간섭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 규범의 해석도 그 사회 구성원의 과거 경험에 따라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니 사실 규범이란 것도 이제는 몇 개 안 남기고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캐나다 같이 제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는 “이것이 캐나다 사회의 규범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나보고 오른쪽으로 걸어라 지시를 하던 중동계 부부는 요사이도 가끔 마주친다. 나는 아직도 왼쪽으로 걷고 그들은 오른쪽으로 걷는다. 나와 마주칠 때는 우리는 반가운 척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댄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는 “아침부터 재수없게 저런 부부와 마주치나”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아침부터 저 차이나맨(Chinaman) 만나서 재수 없겠다”는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대며 지나간다. (202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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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8
무릉도원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니

산 경치 해질녂이라 아름답고

날아다니던 새는 짝이어 돌아간다

(…採菊東籬下 / 悠然見南山 /

山氣日夕佳 / 飛鳥相興還 / …)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고향으로 돌아온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이 ‘술을 마시다’라는 제목으로 지은 다섯번째 시(詩)입니다. 위에 인용한 것은 시의 시작이 아니라 시의 중간부터 4줄만 따온 것이지요.

 그로부터 10여년을 고향산수에 발 담그며 살면서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된 쉰 세살의 도연명이 내놓은 이 작품은 그의 평생 지은 120여편 시를 통틀어 가장 많이 애송되는 구절입니다. 그가 남긴 시 대부분은 전원생활의 한적하고 고요함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도연명은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그린 시 말고도 그가 동경하는 도원경(桃源京: 유토피아)을 그린 ‘도화원기(記)’로도 유명하지요. 이야기는 한 어부와 복숭아꽃으로 시작합니다.

 동진시대 때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곱게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보니 갑자기 복숭아 나무로 뒤덮힌 숲이 나타났다. 어부는 그 아름다움에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 숲을 따라 올라갔다. 한참 올리가다 보니 복숭아 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산이 가로막혀 있고 굴이 눈에 띄였다.

 어부는 배를 버리고 굴 속으로 들어갔다. 굴 입구는 매우 비좁고 어두웠지만 수십보 걸어 들어가다 보니 갑자기 환해지면서 별천지가 나타났다. 넓은 들, 가지런히 세워진 건물, 논두렁 밭두렁이 보이고 비옥한 전답과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가 보기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장닭이 울고 삽살개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어부는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사람들은 각자 생업에 열중하며 해가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와 쉬는 요순 시대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선조가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옮겨왔다는 것이며 그후 오랫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오늘날까지 지내왔다는 것이다.

 어부는 그곳에서 며칠동안 머무른 후 작별을 고하였다. 어부는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에 와서 살아볼 생각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군데에 표시를 해놓았으나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어부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사람들이 그곳을 찾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도원경은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두말할 것도 없이 그런 곳은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곳. 착한 마음을 가진 시인이 어지러운 세상의 괴로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붓으로 그리워하던 이상향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예로 아름다운 경치만 보면 “와, 무릉도원이다”라는 일곱글자를 내뱉습니다. 그러니 나는 무릉도원=빼어난 경치로 봅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선비로 불리는 퇴계(退溪) 이황도 그의 ‘도산 십이곡’에서 청량산의 빼어난 경치를 두고 “도화(桃花)야 떨어지지 마라, 어주자(낚시꾼) 알까 하노라”고 읊었고, 퇴계와 쌍벽을 이루고 퇴계의 동갑내기 학자 지리산 산천제(山天祭)의 남명(南冥) 조식도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 /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 아이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하여 지리산의 비경을 자랑하였습니다.

 퇴계나 남명 말고도 조선의 선비들은 좋은 경치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무릉도원을 그의 시 어느구석에 끌어 앉히려고 애를 썼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도 봄이면 꽃피고 새우는 청량산 자락. 청량산 무릉도원에서 떨어진 복사꽃이 우리집 앞을 떠내려 갈 법도 하지만 실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복사꽃이 떨어져 떠내려 온다는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활짝 핀 얼굴은  커녕 삶에 가난에 찌든 얼굴들만 보였지 무릉도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들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는 3년 내지 4년마다 한국을 다녀오곤 합니다. 벌써 10번은 넘었지 싶습니다. 갈 때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명승지 한 곳은 보고 오지요. 내가 찾아간 무릉도원 혹은 명승지라 불리는 곳도 자세히 살펴보면 요사이 와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큰 변화는 무릉도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인 것 같습니다. 내 방문의 초기(1975년대)에는 삶에, 가난에 지친 표정들이 많이 눈에 띄였는데 4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 지친 표정들은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무릉도원의 풍광을 통째로 바꾸어 버리는 불도저 개발 패거리들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들 불도저 패거리들은 무릉도원이고 아니고를 가리지 않고 단 며칠 안으로 무릉도원이나 그 근처를 폐허로 만들어 버립니다.

 퇴계가 “도화야 떨어지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를 읊조리던 청량산 입구에는 모텔, 노래방, 식당 등 각종 유흥시설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지요.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한들 어떠리”로 끝을 맺은 율곡(栗谷) 이이의 고산구곡도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두 무릉도원 승경 모두가 불도저에 할퀴고 새로운 장식과 분장에 옛날의 분장들은 터를 잃고 말 것 같습니다. (20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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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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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1
노벨 경제학상

 한 언론기사에 따르면 노벨경제학상으로 불리는 상은 알고 보면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노벨의 유언장(1895)에는 경제학이 없답니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1968년 창립 300주년 기념상으로 만든 상이라는 것입니다. 노벨재단이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웨덴 은행이 상금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벨상이 아니라 스웨덴 은행의 경제과학상이라는 것이지요.

노벨상에서 경제학상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노벨 가문의 후손인 페데르 노벨로 부터도 나왔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형 루드비히 노벨의 증손인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경제학상의 3분의 2는 미국 경제학자들에게 돌아갔다. 특히 증권이나 옵션이 투기를 하는 시카고 학파에 주어졌다. 이는 인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뜻과 아무 관계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노벨 문학상을 심사하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도 경제학이 인류복지에 기여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1997년 스웨덴 은행에 이 상의 폐지를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주려면 “스웨덴 은행 경제과학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제학 책을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닙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 때 아담 스미스(Adam Smith)라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무시와 경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와 덕이 아니라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나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와 권세를 얻으려는 허영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경제학을 개창한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방법을 일러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이명박도 국민에게 새해 인사 드리는 말로 “국민 여러분 부자되세요” 했다지 않습니까.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보낸다는 메시지가 기껏 “부자 되세요” 했으니 그의 정신연령이랄까 수준도 알아볼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자기 사랑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데 자기사랑이란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기심은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무분별한 탐욕이랍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잘 잠 덜자고 노력한다고 부가 나비처럼 우리 곁에 와서 살짝이 내려앉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남보다 노력을 더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일이 척척 풀려서 ?어느덧 경제적으로 부유한 위치에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이 있는대로 가는게 아니라 돈이 마치 자석처럼 사람에게 달라 붙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예로 제주도 어느 양갓집에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기생집에 맡겨진 ?김만덕이라는 사람은 장사를 시작해서 큰돈을 버는 대상(大商)이 되어 있었는데 정조 때 어느해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자 천냥의 돈을 내어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답니다. 정조는 이 말을 듣고 김만덕을 의녀로 임명하고 그녀의 소원인 대궐 구경과 금강산 ?유람을 허락해 주었답니다.

당시에는 섬에 사는 여자가 섬 밖으로 나가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파격적 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영의정 채제공은 ‘김만덕전’을 썼다고 합니다.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경제학이 돈을 벌기 위한 학문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경제학에서는 왜 사람들은 부(富)를 그렇게 노리는지 왜 가난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지 가질 것 다 가지고도 행복감은 못 느끼고 더 가지려고 하는지 같은 주변적 요소도 고려해야 합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富)를 싫어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돈을 제일 바랬던 시절은 장학금으로 공부하던 유학생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나오는 장학금 1,500불이 내 수입의 전부였습니다. 그 돈을 여덟 달로 쪼개어 살자니 실로 빡빡하고 ?여유라곤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때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유학생들의 표준생활이었으니 숙명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학에 기반을 둔 이론이건 성경말씀에 기반을 둔 이론이건 부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이 살아있는 한 인간사회는 언제나 부자와 가난뱅이가 나란히 삶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인간사회에는 여전히 부와 빈곤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보내주는 경제학자들은 연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2020.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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