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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교수
leed2017

 

 P교수는 나와 동갑네기입니다. 그의 고향은 태산준령의 경상도, 산 높고 물 맑은 지리산자락, 예로부터 지조 높은 선비가 많이 태어난다는 S고을이지요.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수필집 ‘꽃피고 세월가면’ 한 권이 연결고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가 은퇴한 K대학교 명예교수 휴게실에서 우연히 집어든 내 수필집 ‘꽃피고 세월 가면’을 읽고 내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시내 서점에 가서 나의 다른 수필집 ‘청산아 왜 말이 없느냐’를 사서 읽고 난 후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 후 내가 그에게 인편으로 보낸 수필집 ‘꽃다발 한 아름을’을 읽고 난 후 그가 쓴 책 ‘세계지리산책’ 두 권을 보내왔더군요. 그는 내가 서예를 하는 줄 알고 그의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묘비를 써 달라고 부탁하여 내가 용비어천가체로 써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는 지리학자입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 어디고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은 선비이지요.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길에 대구에 가서 P교수를 만났습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소탈하고 허름한 청바지 차림이 꼭 과수원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는 분. P씨는 자기 모교에 교수로 있었는데 몇 년 전에는 그 대학 총장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총장 임기가 끝났는데도 학생들이 총장직 앙코르를 끈질기게 요구해서 K대학 역사에 전례가 없는 총장직을 두 번 연임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을 할 때 화려한 장식이나 격식을 차리는 법도 없고 꾸밈도 과장도 없는 직선적 화법을 쓰는 사람이니 학생들이 안 좋아할 이유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내게 다음과 같은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가보지 못한 무학 농사꾼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S군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을 대도시 대구로 보냈답니다. 대도시로 전학을 온 P는 도시환경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는군요. 학년 말 성적표에서 소년 P는 반에서 맨 꼴찌를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한테 꼴찌를 했다는 얘기는 차마 못하겠고 고민고민 하던 P는 통신부(오늘의 성적표)를 손질해서 꼴찌를 1등으로 고쳐버렸다고 합니다(간은 무척 큰 놈이지요). 이들이 1등을 했다는 것을 알리는 성적표를 거머쥔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 자랑을 하며 한 마리 밖에 없던 돼지를 잡아서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러 어른이 될 때까지 성적표 조작을 고민하던 P씨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하여 나중에는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 되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미국 유학의 코스를 거쳐 모교의 교수가 된 것입니다. K대학의 총장이 되고 나서 아버지에게 72명 중 꼴찌한 것을 1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나는 벌써 옛날에 알고 있었다”고 짧게 대답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년 P는 왜 꼴찌를 1등으로 고쳤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소년 P의 어린 마음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아들이 1등을 했다고 기뻐하는 아버지를 본 어린 P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요? 겁도 나고, 발각되면 어떻게 하나에 대한 걱정, 죄책감, 미안함, 후회, 죄스런 마음 등이 뒤죽박죽 제멋대로 마구 쏟아져 나왔겠지요.

 지나가는 말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평생을 두고 가숨에 못 박혀 있게 할 말이 될 수 있는 것.

 딱 한 번 겪은 일에 가슴 저려오는 감동을 받아 이 감동이 남은 인생행로에 등댓불 구실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인생은 풍요롭고 흥미진진한 것도 아닐까요.

 프랑스의 소설가 위고(V. Hugo)가 쓴 ‘Les Miserables’의 주인공 (Jean Valjean)도 그가 젊은 시절 천주교 사제관에 들어가 은촛대를 훔쳤다가 잡혀서 경찰이 그 범인을 신부 앞에 데리고 갔을 때 신부가 경찰관에게 “촛대는 내가 준 것이다”는 말 한마디가 그 범인을 감동시켜 일생을 다른 방향의 길로 가게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감격스런 일 때문에 우리는 절이나 교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적표를 고친 아들의 행위를 알았거나 몰랐거나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 수십 년을 말 않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이 침묵은 경찰관에게 “이 촛대는 내가 준 것이다”라고 변호해준 신부의 말씀과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어린 P에게는 무언의 은혜인 셈이지요.

 우리 인생에는 사랑이나 은혜란 사건에 대한 논리적 전개를 벗어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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