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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불편한 진실
kwangchul

▲창원시민단체 등이 지난 2019년 8월 6일 마산음악관 앞에서 친일 음악가 조두남 기념물 철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1980년대 대학생들이 애국가 다음으로 많이 불렀다는 선구자,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노랫말의 장엄함과 함께 곡에 나오는 한 줄기 해란강가 말 달리던 선구자 대목이 나오면 왠지 콧등을 시큰하게 하며 독립투사를 연상하게 된다. 로맨틱하면서도 절로 일어나는 나라사랑의 마음이라 할까. 
그런데, 국민 노래로 매김되며 사랑 받는 ‘선구자’가 될 수 있게 일조한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이 날조된 것이라면 이 노래를 사랑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대한민국 국민을 우롱하였다 할 수 있다.

 

윤해영의 시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선구자는 1960년대 이 노래가 각광받기 시작하자 조두남은 그의 회고록 그리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32년, 내가 목단강 여관에 기거하고 있던 당시 한 동포청년이 찾아와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는 밀사라고 하면서 시 한편을 건네 주었다. 내가 이름을 묻자 윤해영이라 하며 그 말을 끝으로 바람과 같이 종적을 감추게 된다. 그 짧은 만남이 내가 윤해영이라는 이름의 청년과 만난 처음과 마지막이 되며 그 가사를 받은 나는 곡을 붙여 선구자를 작곡하게 된다. 그 후, 그 청년의 소식을 탐문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하며 아마도 독립운동 투신 중에 희생된 것 같다고 하였다. 곡과 노랫말이 워낙 장중한 데다 조국을 위해 몸을 헌신한 독립투사와의 에피소드까지 있어서 이 노래는 더욱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조국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며 선구자의 시를 전해주고 훌쩍 사라진 독립시인 윤해영을 그 후에는 만난 적이 없다고 조두남은 분명 말하였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증인이 등장하게 된다.

 

그 증인은 중국 길림성에 거주하는 현지 음악가 김종화씨이다.(1990년)
김종화씨의 증언: 나는 조두남이 단장으로 있던 고려악극단의 기타리스트였다. 1944년, 만주 흑룡강성의 녕안시의 녕안극장에서 조두남의 신작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때 윤해영이 나타났다.
그날 발표된 곡들의 대부분이 윤해영이 작사한 것들로써 그 중에는 그의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목단강의 노래’ 등과 선구자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왜 조두남은 윤해영을 1932년 여관에서 만난 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윤해영이 당시 만주에서 그 누구보다도 노골적이며 악질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활동을 하였던 친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만주 최대의 친일단체인 ‘오족협의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일본제국의 만주침략으로 세워진 괴뢰정부를 찬양하는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하게 된다. 이 가운데 하나가  ‘낙토만주’이며 이 시에서 선구자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선구자는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괴뢰 만주국을 위해 애쓰는 친일파를 지칭한 것이었다. 조두남 또한 그 스스로 ‘스파이와 오드르’라는 악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내용이 스파이가 설치니 일본인들은 조심하라는 친일 악극이었다 한다. 

 

결국, 조두남은 자신의 친일 행보를 숨기기 위해 윤해영과의 관계를 은폐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더해서 해방 이후 자신과 윤해영 행적까지 미화하게 된다.(선구자의 발표 시점은 1932년이 아니라 1944년 녕안시의 녕안극장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다"-윤동주-(1917.12,30~1945,2.16)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인을 대상으로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한 일제는 창씨개명과, 학교에서 한글교육을 없애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일본제국주의 한글 사용금지 정책에 온 몸으로 저항하며 한글로 시를 써 내려간 시인 윤동주는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28세 나이에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자면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용정은 연변의 어느 지역보다도 조선족의 비율이 높다. 북간도의 역사는 용두레골이라 불려지던 용정에서 시작되었고 그 용정에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명동촌이 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다. 더불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북간도 용정하면 친근감을 갖게 된다.

 

건국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토론토와 오타와 등 캐나다와 인연이 있는 "목사 정대위 박사"는 고향이 용정이다. 선구자의 무대 또한 용정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의하면 그렇게 노래까지 읊어질 만한 아름다운 곳이 아니고 말달리던 선구자가 뛰어 놀던 곳은 더더군다나 아니라 한다. 그곳이야 말로 일본이 자기나라 섬들인 본토보다 40배나 더 큰 땅덩어리인 중국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라 한다. 1905년에는 이등박문이 우리나라에 세웠던 통감부 출장소가 용정에도 동시에 설립되었고 더불어 일본군대의 헌병부대가 용정에 주둔하게 된다. 5년 후 1910년 경술국치 후 총영사관이 세워지게 되며 경찰관과 헌병이 주둔함은 물론 용정에서 일본제국은 치외법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용정은 선구자들이 해란강가에서 말을 달리던 곳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애국투사 선구자들이 일제에 체포되어 와서 고문의 곤욕을 치르다 송장이 되어 나오던 곳이라 한다. 선구자의 노래처럼 해란강변에서 마음 놓고 말을 달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만일 있었다면 그것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잡이를 하던 한국인 장교 몇 사람이었다 한다. 당연히 "선구자"의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평생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한다.(그분들 중에 한 명이 용정이 고향인 문익환 목사였다.)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던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과 작사가 윤해영은 존경 받아서는 안 될 친일 매국노일 뿐이다. 초야에 묻혀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추앙의 대열에 모시지는 못할망정 친일 예술인을 독립투사의 반열에 세울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2023년 12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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