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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퀘벡 만세(Vive le Quebec Libre) (2)
kwangchul

 

"진정한 북쪽의 강력함과 자유로움이요! 저 광활하고 넓은, 오! 캐나다!(The True North Strong and free! From far and wide, O Canada!)

 

청 태조 누르하치의 고향은 길림성 오동성, 돈화지방이었다. 두만강에서 북방으로 300리 지점에 있었다.

1644년, 청 태조 누르하치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한 해이다. 본래 명나라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주변의 부족을 아우르기 시작한 것은 1583년이었다. 그 사이의 수십 년간 두만강 변경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수하의 정병을 삼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같은 족속인 만주족에서 뽑았기 때문이다. 그 청나라의 중흥기인 강희, 건륭 두 임금은 이 지방을 청조 발상의 성지라 하여 통치 하에 있는 타민족 외에는 이민을 허용치 않았다. 우리나라 조정 또한 두만강의 월강을 금지했고 이를 범하는 자에게는 월강죄를 적용해 극형으로 처했다. 그로부터 2백여 년, 두만강 이북의 만주 땅은 나무가 자랄 대로 자라고 그 잎이 떨어져 썩은 잎 때문에 땅은 기름진 옥토로 변해 있었다.

 

1866년(고종 3년) 천주교인 대학살이 자행되던 병인 대 박해 당시, 한반도의 북쪽 끝에선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함경북도 육진 지역을 휩쓴 대기근은 굶주리고 헐벗었던 많은 한민족으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가게 하였다. 기막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생존수단으로 도강하였던 그들은 그 후 나라가 망하면서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국적 불명의 유랑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1604년, 프랑스 탐험가 샴플레인(Samuel De Champlain)이 이끄는 120명의 프랑스인은 퀘벡주에서 동쪽으로 향해 대서양 연안인 노바스코사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샴플레인은 이곳을 포트 로얄(Port Royal)이라 명명하며 유럽과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 150여 년 후 아카디아의 프랑스계 개척자들은 1만5천 명가량으로 불어났으며 자연히 이들은 영국계 정착민들의 눈엣가시가 된다. 선두주자였으나 식민지 패권전쟁에서 밀린 프랑스계 주민들은 자신들이 개척한 땅에서 추방되어 방랑자 신세가 된다.

 

숙종 38년, 서기 1712년, 청의 강희 임금은 특명 사절단을 조선에 보내 두 나라 사이에 국경선을 획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두 나라의 특권대표단은 백두산 천지에서 두어마장 내려온 모래밭에 정계비를 세우게 된다. ‘동위 토문, 서위 압록’ 즉 정계비 동쪽은 토문강이요, 서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는 뜻이다. 그때는 숙종 38년, 강희 51년 5월15일이었다. 여기서 백두산 정계비에서 흘러 나온 물 줄기의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만주 내륙으로 흘렀던 송화강이다. 이 정계비를 근거로 당시 서북경략사 어윤중의 노력에 의하여 한민족의 두만강 도강이 허용되었고, 그 후 국경문제는 경술국치(1910년) 전까지 중국과 미묘한 문제로 남게 된다.

 

본래 만주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였다. 1천여 년 전의 고구려가 있었고 그 뒤를 잇는 발해 때까지는 우리 민족 판도의 중심지였다. 만주가 넓은 땅이라면 퀘벡 또한 거대한 지역이다. 토지의 규모로 보아서는 하나의 독립된 나라를 건설할 수도 있는 거대한 지역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13개 주는 미국의 동북쪽인 뉴잉글랜드에서 플로리다 북쪽까지 내려 뻗친 대서양 연안지대를 발판으로 하였다. 아직 독립되기 전 미국은 호돈(N. Hawthorne)의 유명한 ‘주홍글씨’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완고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세계였다.

 

반면 퀘벡은 프랑스계의 천주교 신부들이 정신적인 지도자들이었다. 물론 조지 워싱턴이 이끌었던 미국의 독립전쟁은 전 세계를 향해서 발호하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일 수 있다. 허지만 미국의 퓨리타니즘의 완고한 독선주의의 이면성 즉 해방과 자유를 높이 구가하면서도 여전히 흑인 노예들을 짐승처럼 부리고 팔고 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싫어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2백여 년 전, 이러한 사람들이 대거 캐나다로 건너오게 된다. 이들은 약 6만여 명으로 추산되며 주로 이미 영국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온타리오 지역으로 오게 된다. 이들을 로얄리스트(Loyalist)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캐나다 건국의 밑받침이 된다. 미국이 독립한 해가 1783년이다. 영어계 캐나다인들과 퀘벡의 프랑스계인들은 미국이 점차로 무거운 압박을 가해 오는 것에 대비해 북쪽의 넓은 지대를 지켜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Upper Canada(온타리오주와 기타 영어계의 새로운 주들)와 Lower Canada(퀘벡)로 서로 협력하고 발전시키는 연방체계를 형성하게 된다.(영국 국회는 이 연방체계를 받아들여 대영제국 내에서의 자치국가임을 인정하였다.)

 

경술국치는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일본의 강압적 조치로 인해 한반도가 국권을 상실한 일이다. 경술년에 벌어진 민족적 치욕이다. 그 후 북간도는 용마루골이라 불려지던 용정을 중심으로 많은 의사, 열사들을 배출하며 민족얼의 재생산지가 된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패배한 일본군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이들을 토벌하게 한다. 이로서 만주의 한인독립군 결집체와 연대는 해체되고 만다. 결국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만주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은 배가본드(Vagabond), 국적 없는 유랑인이 된다.

 

하지만 퀘벡의 프렌치인은 다르다. 비록 프랑스가 영국과의 식민지 기득권 경쟁에서 패배를 하였다 할지라도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개척한 이 땅에서 캐나다인으로 남아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설사 분리를 하여 독립한다 해도 득보다는 실이 많다. 불모지처럼 보였던 동토의 대지를 옥토로 만들어낸 500여 년의 역사의 프렌치 캐나다 정신을 이어 받아 저력을 보일 때다.

분리가 아닌 캐나다 내에서의 번영의 추구 그것이 진정한 자유퀘벡의 만세다.

-"진정한 북쪽의 강력함과 자유로움을 위해, 저 광활하고 넓은 오! 캐나다를 위해"-

2023년 11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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