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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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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궁의 옛날옛적 이야기(18)-무어인의 유산이 묻힌 칠층탑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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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어빙 지음 / Yunice 윤경남 옮김 & 사진

 


옛 야곱의 우물같이 층층이 흘러내리는 알함브라궁의 브엘 세바(성읍의우물=야곱의옛날 샘터)

 

 

(지난 호에 이어)

신체가 건장하고 등판이 튼튼하고 안짱다리에 키가 작달막한 가예고 사람, 페레힐도 당연히 이곳 단골이구요. 스페인에선 물지게꾼이나 짐꾼은 거의가 다 건장한 갈라시아 사람들이었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짐꾼을 불러라” 하질 않고, “가예고(스페인북서부의 갈리시아 사람)를 불러라” 했다니까요.

 

이 페레힐이라는 가예고는 어깨에 메는 큰 오지 항아리 하나만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사업이 번창해지자, 그의 보좌관으로 쓸만한 털북숭이 당나귀 한 마리를 사들였지요. 귀가 긴 이 보좌관의 양쪽옆구리에 물독을 넣는 장바구니를 걸쳐 놓고, 항아리 위엔 햇빛 가리개로 무화과 잎을 덮어 놓구요. 그라나다 온 지역을 통틀어 그보다 더 부지런하고 명랑한 물지게꾼은 없었어요.

 

거리에서 그가 당나귀 뒤를 따르며 신나게 부르는 여름철의 노래가 스페인 마을의 골목마다 울려 퍼져요. “눈 보다 더 시원한 물 사-려! 알함브라의 샘에서 길어온 차가운 물 마실 분? 어름처럼 차갑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요!”

 

그가 유리잔에 찰랑거리는 시원한 물을 손님에게 건넬 때면, 웃음 짓게 하는 얼굴에 즐거운 말 한마디를 잊지 않고 곁들였어요. 만약에 신분 높은 여성이나 볼우물이 패인 소녀라도 만나면, 슬그머니 윙크를 던지며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구요. 페레힐은 이제 그라나다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유쾌하고 행복한 사람의 하나로 알려졌지요.

 

그러나 그가 큰 목소리로 노래하고 농담을 잘한다고 해서 마음도 가벼운 건 아니었어요. 명랑한 분위기 속에 그에게도 근심과 걱정이 감추어져 있었거든요.

 

그는 먹여 살릴 대가족이 있었고, 아이들은 둥지 속의 제비새끼들처럼 그가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어요. 그의 내조자인 마누라도 별로 도움이 안 되었구요. 아내는 결혼 전엔 캐스터넷을 치며 벨레로 춤을 잘 추는, 마을에서 유명한 미녀였어요. 아직도 옛 버릇이 남아 있어서, 정직한 페레힐이 뼈빠지게 벌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고는 그 많은 축일이나 주일이면 바로 그 당나귀를 타고 마을의 잔칫집마다 돌아다니는 거에요.

 

하지만 매정하지 못한 페레힐은 그의 어깨에 진 무거운 짐 덩이 같은 마누라와 아이들의 벅찬 요구들을 그의 당나귀가 물독의 무게를 견디듯 순순히 받아주었지요. 비록 단정치 못한 아내에게 속으로는 좀 미심쩍은 데가 있긴 해도 주부로서의 미덕만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거든요.

 

그는 올빼미가 새끼올빼미를 사랑하듯 자식들을 사랑했어요. 그를 쏙 빼 닮아 억세고 긴 등판과 안짱다리까지 물려준 것에 흡족해 하면서 말이지요.

 

성실한 페레힐이 가장 행복한 때는 그에게 흔치 않은 축일에 주머니 안에 돈을 가득 집어넣고 식구들을 거느리고 나들이 가는 날이에요. 그런 날은 한 놈은 팔에 안고, 다른 놈은 옷자락에 매달고, 나머지는 그의 뒤를 터벅터벅 따라 오게 해서 베가에 있는 과수원 사이에다 풀어 놓은 새끼양처럼 뛰놀게 하는 거에요. 그럼 마누라는? 물론 다로강 골짜기에 놀러 나온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춤추게 해주고요.

 

어느 날 긴 여름 해가 지고, 성당과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묵직한 종소리가 울렸어요. 길을 가던 사람이나 밭에서 일하던 사람도 모자를 벗고 멈춰 서서 그날의 일들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어요. 유난히 후덥지근한 여름 밤이라 사람들은 달빛 아래 자정이 넘도록 즐기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 생기는군요. 따라서 물을 찾는 손님들이 많을 수 밖에요.

 

성실하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인 페레힐은 굶주리는 자식들을 생각했어요. “한번만 더 우물에 다녀오자. 그러면 어린 새끼들이 주일엔 찐빵을 실컷 먹을 수 있을거야.” 중얼거리면서 그는 알함브라의 가파른 골목길을 노래 부르며 씩씩하게 올라 갔어요.

 

그가 우물가에 이르자, 무어인 차림을 한 사람이 달빛 아래 돌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어요. 페레힐은 한 순간 걸음을 멈추고 놀라고 황당한 가슴으로 그 낯선 나그네를 바라보았어요. 그 무어인은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힘없이 손짓하네요.

 

“난 기운이 없고 몸도 아프답니다. 내가 성읍으로 돌아가게 도와준다면, 그 물독으로 당신이 버는 돈의 두 배를 주겠소.”

 

성실한 물 지게꾼은 낯선 사람의 호소에 동정심이 우러났어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보수를 받다니 말이 안 되지요.” 하면서 그 무어인을 그의 당나귀에 올라타게 한 뒤에 그라나다로 천천히 떠났지만, 그 불상한 무어인이 너무 기력이 없어 당나귀등에서 땅으로 떨어질세라 잡아주느라고 더디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이 성내에 들어서자 물지게꾼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물었어요.

“아, 슬프도다! 집도 갈 곳도 없는 이 몸이여, 나는 이 땅에 낯선 사람이외다. 오늘 밤 당신 집 지붕 아래 이 한몸을 눕게 해주신다면, 갑절로 사례하겠소.”

 

정직한 페레힐은 뜻밖에 이교도를 맞이 해야 할 곤경에 빠졌지만, 의지할 데 없는 이방인이 하룻밤 재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인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 병든 무어인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갔지 뭐에요.

 

아이들은 평소대로 당나귀의 발굽소리를 듣고 재잘거리며 뛰어나왔다가 터번을 쓴 이방인이 당나귀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어머니 치마폭 뒤로 숨어버렸어요. 마누라는 떠돌이 개가 자기 새끼들에게 다가 올 때 깃털을 곧추 세우고 나서는 어미 닭처럼 대담하게 앞으로 걸어나오며 소리쳐 말했어요.

 

“웬 이교도요? 이렇게 한밤중에 데리고 들어오면 종교재판관이 뭐라 안 할까요?”

“여보, 조용히 좀 해요. 친구도 집도 없는 불상하고 병든 이방인이오. 그를 길에서 죽게 내 몰아야 하겠소?” 페레힐이 말했어요.

 

아내는 그래도 맹렬하게 항의하는군요. 비록 오두막 집에 살아도 자기집을 지키려는 명예심이 굉장히 끈질긴 여자니까요. 하지만 땅딸보 물 지게꾼도 이번만은 자기 주장대로 아내를 설복했어요. 불쌍한 무슬림을 나귀에서 내리게 해서, 단 하나뿐인 돗자리 침대와 양털가죽을 펴서 집안에서 가장 시원한 데다 눕혔어요.

 

얼마 동안 그 무어인은 심한 경련을 일으켰어요. 순박한 물지게꾼이 해 줄수있는 어떤 응급치료도 소용 없었어요. 불상한 환자의 눈이 그의 친절한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을 보내는군요. 경련을 일으키다 진정하는 틈틈이 페레힐을 자기 옆으로 불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두렵지만 내 종말이 다가온 것 같소. 내가 죽으면 당신이 내게 베푼 자비심에 보답하여 이 상자를 당신에게 물려주겠소.” 하면서 그의 웃저고리를 풀어 헤치고 그의 몸에 묶어둔 조그마한 백단 향나무 상자를 보여주었어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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