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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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일기’(9)
knyoon

모래 위의 발자국

어느 날 밤, 그의 딸이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전쟁은 끝날 거에요. 아빠를 위해서 3월 초순이면 끝나요.”

그는 동료 포로들에게 이 말을 하고 아주 기뻐했다. 똑같은 꿈을 한 달 후에 또 갖게 되었는데, 그 것은 그가 진료소에 일주일 간 입원하고 나온 뒤였다. 그 진료소에서 그는 매일 밤 침대에서 빠져 나와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그가 여러 해 동안 작곡하고 있던 오페라, “창조자 하느님”을 찾아 다녔다.

같은 꿈을 다시 꾼 것을 기뻐하면서 그는 동료들에게도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를 위해서도 전쟁은 3월 초순에 끝난 답니다.” 하고.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944년 3월 2일에 뮤셀라 대위는 죽고 말았다.

뮤셀라 대위는 체격이 작고 허리가 꾸부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수용소 주위를 돌아다닐 때는 마치 끝없는 폴란드 하늘이 꾸부정하고 슬픔에 찬 그의 어깨를 온통 짓누르는 것 같았다.

포로로서만이 아니고 음악가로도 보이는 그가 “창조자 하느님” 같이 무게 있는 테마에 열중해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그의 어깨가 아틀라스(Atlas-註: 지구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신인(神人)의 어깨처럼 온 세상을 지고 가는 듯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자신보다 더 위대한 것에 대처해 나갈 능력이 있었지만 포로로서의 그는 가없는 남빛 하늘에 짓눌려 있었다. 그는 정월 초순에 데블린(Deblin)에 있는 수용소에서 옮겨왔다.

그곳에서 바하(Bach)와 그리그(Grieg) 의 작품을 편곡했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동료 포로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음악회도 주선했다. 그는 작은 몸집에 사교적이며 수다스러워 보였으나 실제로 그가 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창작, 작곡, 또 작곡하고자 하는 것뿐이었다.

마치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음악과 언어를 쓸만한 시간 여유가 너무나 충분치 못한 것만을 걱정하는 듯 했다. 그는 베니아마 노보(Beniaminovo) 외 조그만 극장에서 우리와 함께 작업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뭇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3월 초순에 전쟁

이 끝났기 때문이다.

       

 

***

 

1944년 3월 3일 오후 늦게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어붙은 운동장에 포로들은 진료소에서 칸타네(Kantine) 입구까지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초라하고 이상한 옷차림과 긴장한 얼굴의 행렬이었다.

제일 먼저 구슬픈 찬송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겁먹은 듯, 위협을 주는 듯, 조용한 밤 하늘에 찬송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흙탕 야영지 뒤쪽에 적색, 백색, 녹색의 깃발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그 깃발은 우리가 두 번째   보는 색깔이었으며 그것을 보게 된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첫 번째는 2월 9일에 콜롬바니  대위가 이 수용소를 제일 먼저 떠난 날이었다. 그것은 자기본위가 아니게 수용소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날 아침엔 눈이 내렸다. 그 밝은 눈 빛은 3월 오후에 그랬던 것처럼 하얗게 빛났지만 대조적으로 뭔가 비논리적이며 수긍이 가지 않는 듯이 보였다. 시간과 계절이 어떻든 간에 우리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우리의 꿈과 모순이 될 정도로 각자의 마음 속에 예리하게 현실로 나타났다.

상여를 멘 사람들의 어깨 위에서 관(棺)이 조금씩 흔들림에 따라 포로들은 익숙하지 않은 인사라도 보낼 만큼 기운을 차렸다. 마치 관이 얼어붙은 좁은 운하를 건너갈 것처럼, 그 앞에서 얼음을 깨면 길이 열릴 것처럼, 나막신이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빠드득 났다.

죽음의 껍질이 흔들거리며 지나가고 내 발 밑에선 얼음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바람은 얼어붙은 채 숲 속에 몸을 감추고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달빛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고 온 세계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꼼짝하지 않았다.

이젠 죽음이 수용소를 성큼 빠져나갈 때다. 아무도 죽음이 들어서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그것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 사람에게 오는 유일한 권리다. 죽음은 그날

밤 막사를 돌아다니면서, 깨어있는 이들에게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칸타네(Kantine) 마을에 관(棺)이 하나 있었다. 그 옆엔 미사 때 연주하는 피아노가 한 대 있다. 갑자기 조그만 사람이 기적같이 나타나 투명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사람은 자신이 작곡한 것을 연습하려는 것이다. 아, 이제야 그가 진료소에서 유령처럼 찾으려다 못 찾은 자신의 악보를 찾은 것이란다.”

그날 밤에 주검은 수용소 안을 돌아다녔다. 아직 잠들지 뭇하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 모래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와 멀리서 은은히 울려오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육 개월, 3월 9일

육 개월, 육천 일. 권태가 우리의 시간 개념까지 바꿔놓았다. 일 분, 일 분의 순간은 한 시간의 단위가 아니라 영원의 단위다. 국 바스켓을 닦으려고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내 두 손을 들여다 본다. 내 두 손은 그 전과는 알아볼 수 없게 달라졌다.

추위로 퍼렇게 변했으며 팽팽한 근육과 울통불퉁 튀어나온 혈관들이 그물처럼 뻗쳐있다. 피부는 거름이 덕지덕지 끼었고 손가락 끝은 끝까지 태운 담배꽁초 때문에 새까맣게 타 있었다.

펌프 물을 길으러 갈 때 두 개의 바스켓은 내 양팔을 잡아 빼는 것 같고, 물의 무게 때문에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손을 씻고 있으면 뼈만 앙상한 내 손은 남의 살 같기만 하다.

물웅덩이를 드려다 보면, 내 머리 위로 너무나 멀고 너무나 무심한 구름이 떠 있어서 그 구름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세계의 한편에서 잊혀진 우리는 무익하고 저주받은 삶을 계속할 뿐이다.

식탁에 앉아 글을 쓰려고 하면 등이 쑤셔오고, 쓰려는 말들도 국 바스켓처럼 나를 짓누른다.

육 개월, 육천 일. 나의 달력은 죽은 날들로 가득 차 있다. 하루 하루를 연필로 십자가 표시를 해둔다. 나는 기숙사에서 지낸 불우했던 세월과 사관학교에서 보낸 몇 달 간의 생활을 돌이켜 본다.

정확하게 5년 6개월 전이었는데 거기서도 달력에 십자 표시를 했지만 끝나는 날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선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마치 시멘트 가루를 밑 빠진 구멍에 쏟아 붓는 것만‘ 같다. 그 구멍을 메우려면 몇 포대나 더 있어야 할까? 한 포대, 혹은 만 포대도 더?

모든 게 다 끝나면 어떤 사람들은 가슴에 메달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다 낡은 저고리 위엔 죽음의 날들을 그린 십자가만이 꽂히게 될 것이다.

 

짧고도 짧은 이야기, 3월 12일

철조망 너머로 투르케스탄(Turkestan) 출신의 키 작은 남자가 푸른 웃저고리를 입고 달리고 있다. 내가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국 바스켓을 닦고 있는 곳에서 울타리 밖에 있는 세 개의 막사가 보인다. 두 개의 막사는 오른편에 있고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다.

그 위로 1914년부터 1918년대와 똑같은 잿빛 하늘이 드리워 있다. 투프로케스탄에서 온 작은 남자가 푸른 웃저고리를 입고 달리고 있다. 쉬지 않고 달리면서 “이봐요.” 하고 나를 부르는 듯하더니 내게 빵 반쪽을 던져준다. 그는 약간 웃음짓는 듯한 모습으로 계속해 달려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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