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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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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관시인 윤치호의 영문일기1897년~1906년(1)<대한제국의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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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 사절단의 모든 임무가 끝났다. 민영환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귀국하고, 윤치호는 사절단과 결별한 후에 불어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들과 더 이상 함께하고 싶지않은 심정에서 파리 행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예술의 도시’, ‘꽃의 도시’, ‘빛의 도시’, ‘혁명의 도시’’대학의 도시’인 파리에 처음 찾아 온 윤치호는 황홀한 그 문화에 현기증을 느낀다. 러시아와 아주 다른 현란한 문화 속에서 많은 유혹을 받으며 또 성자 어거스틴처럼 깊은 참회에 잠기기도 했다. 


   석달 동안 프랑스어 공부를 하는 동안,  웨슬리 감리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독립교회, 레토일 교회, St. Chapel, 세실피스 성당, 그리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만성절  미사에 참석한다. 


  윤치호의 파리 체류는 그의 앞날의 인생의 종합적인 기본계획 같았다. 그의 문학-역사-철학-기독교사상-정치적 역량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학부참의(학무,편수국장 격)시절에 이미  윤치호 주관으로 “법률칙령을 다 국문을 本으로 삼고 한문번역을 붙이며,국문과 한문을 혼용한다”는 칙령1호((1895년 5월 8일 자)가 반포된 것은, 조선개국 이래 최초로 모든 공문서를 한글표기하는 역사적인 일이었으며, 한글의 아래ㅇ.자를 없애고 3종류의 아자를 ‘아’로 통일하는 캠페인을 독립신문 시절에 시작하여 (1897년5월5일), 1930년 한글학회 태동의 주류가 된 개혁적인 정치가이기도 했기때문이다. 


   니체는 독일의 문학가이며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괴테를 “그는 한 사람의 작가라기보다 하나의 문화이다.”라고 극찬했다.   괴테처럼 발라드 시인이며 찬송시 번역가였으며,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윤치호(1897년 8월 13일) 역시 이 모든 분야를 통털은 ‘조선의 문화’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온 생애가 담긴 그의  일기는 스페인 톨레도의 화가 엘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의 전경 View of Toledo’ 을 드려다 보는 것만 같다. 엘 그레코는 그의 그림 속에서 톨레도 문화전반의 계획과 요한의 묵시록을 떠 올리는 새 예루살렘같은 마을 톨레도의 설계도를 들어보이고 있다. 실제로 한 가운데 그린 톨레도 대성당엔 그의 가슴 떨리는 성스러운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그 옆에 흐르는 타호 강도 꿈결같이 흐르고 있었다. 나도 톨레도 여행할 때 특이한 그 전경을 타호강 가에서 내 사진에 담아 왔다. 윤치호가 60년을 두고 적어내린 일기 속엔 엘 그레코의 설계도 같은 그의 거대하고 신비스런 우주가  담겨있는 듯 했다.  


 러시아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영문판을 탐독한 그는 파리에 머문 동안 여러가지 교리서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으며,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트 백작> 영문판에 심취했다. 석달 동안 머문 파리를 떠나 상해로 가는 도중에 마르세이유 항구에 머문동안, 그는 ‘몽테크리스트 백작’처럼 행복의 절정에서 쫓겨나 방랑하는 처지에서 결심한  몽테크리스트 유형의 복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정신의 사회환원으로 조국에 복수를 대신 하겠 다는 결심을 한 게 아니었을까? 

 

 

     윤치호는 파리를 떠나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귀항하는 길에 샹하이에 들린다. 샹하이는 그가 갑신정변 실패의 여파로 망명한 곳, 영 알렌 박사의 도움으로 중서학원에서 3년동안 유학한 곳,  밴더빌드 대학과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중서학원의 보조교사가 된 곳, 그리고 소주 여인 마수진과 결혼하고 첫딸 로라와 아들 영선 알렌을 낳은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석달 만에 재회한  사랑하는 식구들을 이곳에 남겨두고 홀로 귀국해야만 했다.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회가 설립한 샹하이의 중서학원에서 1887년 4월2일에 한국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이 된다. 윤치호의 신앙의 모태인 중서서원에 십 년만에 돌아왔지만,  선교부 내부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평생의 은사인 영 알렌박사와 헨드릭스 감독 사이의 격렬한 다툼을 보면서, “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보다는 설교하는 쪽이 얼마나 더 쉬운 일인가 말이다! 나는  천사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만  보았으며, 사망 부고란에서도  완벽한 인간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한탄한다. (1월7일자 일기)선교부와 토착교회의 갈등을 예상하면서도 진정한 하느님의 교회의 모습을 그리며 한국에 남감리교회를 도입한다. 


남감리교회가 윤치호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경위는 이러하다. 그는 에모리 대학과 밴더빌트 대학 시절에  방학과 주말마다 가까운 시골교회를 순회하면서 선교의 사명에 불타는 강연과 설교를 하고, 농장에서 일하며 푼푼이  모은  $200을 에모리대학  졸업식날 1893년3월11일에 캔들러 총장에게 맡긴다. 조선에 기독교학교를 세우는 선교기금의 종잣돈으로. 


당시 200불은5,000냥에 해당하는 돈이다. 그후 1893년 9월에 30불을 추가해서 캔들러 박사에게 맡긴다. “이 계획이 3년내에 이루어 지지 않으면 이와 유사한 사업에 충당하도록 한다. 아주 개략적인 구상이지만 언젠가는 조선에 기독교 학교가 설립되기를 바란다.”는 계획서와 함께.


 캔들러총장은 아무리 귀한 종잣돈이지만 선교비로 택도 없는지라, 미국 코카콜라 사장인 그의 형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2,000불을 후원받는다. 드디어 한국에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상륙한다.


 그후 1897년 2. 24. 일기에, 윤치호가 캔들러에게서 받은 편지 내용은, 밴더빌드 대학 재학시에 융자한 학비 240.15불을 캔들러가 지불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물론 선교비와는 별도의 돈이다.  1895년 10월 18일에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고,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그 열매로,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를 선두로, 묵시록의 거룩한 일곱 교회처럼 종교교회, 자교교회, 석교교회, 수표교교회, 광희문교회, 신항리감리교회 설립을 후원하여 큰 교회로 성장한다. 


그후1899년2월 1일엔, 윤치호에게 개화의 눈을 뜨게 해주고,  일생의 후원자가 되어준 그의  아버지 윤웅렬 장군이 남감리교 선교부에 $1,000을 보내어 개성 송도에 직업학교를 개설한 것이 한영서원이다. 선교부 운영이 어려워지자, 윤치호는 힘들게 마련한 그의 작은 보금자리인  정동집 ($1,500, 1899.2.2)마저 기증해서 선교사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1897년 2월 24일에 캔들러 총장이 윤치호의 밴드빌트 대학 융자금 $240.19를 갚게 해준 것을 적어두는 이유는, 어떤 역사학자는 이 금액이 윤치호가 캔들러 총장에게 맡겼던 헌금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러시아  공사관의 김홍륙이 횡포를 부리며 매관매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웨베르 러시아 공사 부부가 아직도 김홍륙을 사도 바울보다 정직하다고 옹호하면서 윤치호가 자기들의 호의를 저벼렸다고 불평한 일이다. 결국 김홍륙은 매관매직의 횡포에 임금을 독살하려고 한 혐의로 사형을 받는다.

 

 


1월 1일 (음력 丙申年 11월28일) 금요일. 구름 낀 날씨. 샹하이

 

 아내가 누워 있는 병실을 방문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본넬 교수님과 리이드 박사님에게 편지 쓰다.


 “저는 화가가 되어 중국인 마돈나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의 모델은 시엔숭이라야 할 것입니다.”


 어제 밤에 레이놀드 선생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지나친 찬사는 과찬이 되기 쉽지만, 시엔숭만은 나에게 모범적인 현모양처이다. 보다 아름답고, 보다 믿음직하고, 보다  씩씩한  이런 여인은 어디 서도 찾아보기 힘들 게다. 무어라 더 찬양의 말을 해야할지 알 수없구나. 전혀 불평하지 않으면서  상냥함과 아름다움을 늘 간직한 여인. 그 아름다움이 그녀의 외로움을 잘 이겨내 준다. 조용하면서도 위험한 상항에 대처할 줄 아는 용기는 이미 조선에서 경험하고 보여주었지. 이렇게 어여쁜 보석같은 아내를 내게 주신 주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6시 30분 쯤에 내 방으로 돌아오다. 7시 30분에  중국어를 가르치던 추선생이 나를 방문하다.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우리는 밖으로 나와 찻집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말하기를, 이홍장이 샹하이에 있을때 “중국인의 요구사항”이란 논문을 들여보내려고 했단다. 그런데 이홍장의 졸개들이 50 테일을 집어준 자들만 통과시켰기 때문에, 그 논문이 전 총독의 수중에 들어갈 기회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추 선생 말에 의하면,   샹하이 항만의 통관사가 정부에서 받는 월급은 500불도 안되는데,  그들의  부수입은 적어도 1년에 40만 테일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샹하이  통관사 는 사람들이 몹시 탐내는 직업 이란다. 그 돈은 주로 세관에서 얻는 수입이며, 생일 선물로, 상인들의 집에서, 그리고 정당하게 장사를 하건 부당하게 장사를 하던  상납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북경과 동맹을 맺으면 좋겠어요. 다시 말해서, 중국 관리들은 전쟁에서도 배울 게 없다니까요.”


그 악명 높은  통관사 성씨는 3테일 짜리를 정부에다 9테일에 팔아넘겼다. 녹슬어 못 쓰게된  소총을. 이렇게 뻔뻔한 매수행위는 전쟁 중에 빛을 보았고, 그 사람은 지금 제국 통신업체와 푸츄-북경 간선 열차 사업 제안, 제국의 철강산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수장노릇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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