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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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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5)-잔 타일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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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이름: John Tyler

출생: 1790년 3월 29일 버지니아주 찰스 카운티

사망: 1862년 1월 18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부인: 초혼 레티셔 크리스틴(1790-1842) 자녀 8명

 재혼 줄리아 가디너(1820-1889) 자녀 7명

특성: 흑인 노예제도 옹호, 남북전쟁시 남부연맹구성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0대, 1841-1845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37/44

소속정당: 민주공화당(1811), 민주당(1828), 위그당(1834), 무소속(1844)

업적: 텍사스주 영입(1845)

인용구: 직권남용은 인간의 심리작용이다.

 

성장과 교육 결혼(1790-1808)

잔 타일러는 1790년 3월 29일 버지니아주 찰스카운티에서 농장주인 부친 잔 타일러 시니어 버지니아 주지사와 모친 메어리 암스테드의 8남매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7살 때 모친을 잃은 잔은 집에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고 17세에 윌리엄 앤드 메어리 칼리지를 졸업하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익혔다. 1808년 법률학도인 잔은 18세 나이에 레티셔 크리스천과 결혼을 하고 19세에 변호사가 되었다. 양가는 모두 버지니아주에서 잘 알려진 농장주로 흑인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정계입문(1809-1835)

1809년 버지니아주 19세의 타일러는 리치먼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고

1811년 21세 나이에 찰스 카운티 의원에 당선되었다.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타일러는 리치먼드 방위를 위한 민병중대를 소집하였고 전투경험 없이 대위로 예편되었다.

 

1813년 부친의 사망으로 농장과 13명의 흑인노예를 유산으로 물려받아 타일러는 24명의 노예를 부리는 농장주가 되었다.

1816년 버지니아주 상원출마에 당선되었고 주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치력 제한을 주장했다. 부친과 친분이 두터운 토마스 제퍼슨의 영향을 받은 타일러는 연방정부의 통치력을 증가시키는 연방은행제도를 폐지하고 노예제도 결정은 주정부 관할에 맡겨야 한다는 정치적 도구를 만들어 미 남부의 지지를 받았다.

 

1817년 타일러는 버지니아주 대표 미 하원에 당선되었다.

1821년 워싱턴정부의 연방체제화 정책에 불만을 가진 타일러는 정계를 떠나 리치먼드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계속했다.

1826년 지인들의 권유로 버지니아주 주지사에 당선되어 버지니아주 자치를 위해 노력했다.

 

1827년 버지니아주 대표 미 상원에 당선되었다.

1828년 대선에서 민주공화당은 잭슨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당과 애덤스 중심의 공화당으로 분리되었다. 타일러는 민주당에 가입하여 연방중앙은행 폐지를 주장하는 잭슨을 지원했다.

 

1834년 잭슨의 정책에 이견을 가진 타일러는 특히 주정부의 분리반대법에 반감을 느껴 민주당을 탈당하고 클레이와 해리슨 중심으로 창당한 위그당에 입당했다.

 

1836년 대선(1835-1836)

1835년 타일러는 정계를 떠나려 했으나 지인들의 권유로 버지니아주 위그당 부통령후보에 등록되었다. 위그당은 조직이 잡히지 않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위그당 후보들이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 등록하였다.

 

1836년 대선결과는 선거인단의 과반수 이상의 선거인단 표를 받은 밴 뷰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 후보 중 과반수 이상을 받은 후보가 나오지 않아 미 상원에서 다수결로 잔슨이 당선되었다. 타일러는 47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아 탈락했다.

 

1840년 대선(1839-1840)

1836년 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된 타일러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귀향했다.

1839년 펜실바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첫 번째 열린 위그당 전당대회에서 해리슨을 당대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부통령 후보는 노예제도를 주정부정책에 일임해야 한다는 타일러를 후보로 선출하여 남부의 몰표를 기대했다.

 

1840년 선거결과는 해리슨과 타일러가 234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60개의 표를 받은 밴 뷰런팀을 압승으로 패배시켰다.

 

부통령 재임(1841)

부통령직을 맡은 타일러는 3월 4일 9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한 후 윌리엄스빌 자택으로 돌아와 해리슨의 내각구성 소식을 듣고 있었다.

 

성격이 우유부단한 해리슨은 내각구성에 심한 압력을 받고 4월 4일 급성 감기 폐렴으로 재임한지 31일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해리슨 사망 3일전 웹스터 국무장관은 타일러에게 해리슨의 중병사실을 알려 주었고 4월 5일 새벽 그의 아들 골레처는 윌리엄스빌 타일러 자택을 방문하여 해리슨의 사망을 알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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