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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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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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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2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3)-자카리 테일러(2)

  ▲부에나 비스타 전투(멕시코 전쟁)

 

 

준장 진급(1837)

미국은 1837년 세미놀 원주민과 흑인 병들의 연합공세로 플로리다에서 제2차 세미놀 전쟁에 들어갔다. 테일러는 가디너 요새와 배싱거 요새를 구축하고 제섭 준장이 이끄는 미군의 공급망을 형성한 후 원주민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12월 25일 1100명의 테일러 군은 늪을 전투지로 만들고 기다리는 아바카의 400명 전사와 치열한 격전에서 양군은 서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54세의 테일러는 군 생활 29년 만에 준장으로 승진하고 플로리다 지역 총사령관이 되었다.

정치 연줄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강직한 군인정신으로 장기간에 걸쳐 장군이 된 테일러는 1841년 미시시피강 서부 총사령관이 되었다.

 

소장 진급(1847)

포크는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 매입을 위한 협상이 결렬상태에 이르자 1846년 3월 텍사스와 멕시코의 분쟁지역의 중심지인 리오 그란데강 북쪽에 테일러 준장을 보내 멕시코군이 미군을 선제 공격하게 계략을 새웠다.

이 유인작전에 말려든 마리아노 파라데스 멕시코 대통령은 마리아노 아리스타 북부 사령관을 임명하여 6천 명의 군을 동원했다.

 4월 25일 아리스타는 1500명의 군사를 강북으로 보내 80명의 쏜튼군을 공격하여 20명의 살상자와 59명의 미군을 생포했다. 테일러는 이 사건을 포크에게 알렸고 미국은 각본대로 멕시코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5월 8일 테일러는 팔로 알토 전투에서 2288명의 미군을 이끌고 3709명의 아리스타군을 격퇴했고, 5월 9일 델라 팔마 전투에서 1700명의 미군을 이끌고 4000명의 이리스타군을 강 남쪽으로 격퇴했다.

 5월 13일 포크는 멕시코와 선전포고를 했다. 이 2 전투의 승리로 테일러는 6월 소장으로 진급되었고, 미국 언론사들은 테일러를 워싱턴, 잭슨의 용맹 서열에 올리고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테일러는 자신은 미 대통령 직과 거리가 먼 군인이라고 일축했다.

 

몬트레이 전투(1846)

1846년 9월 21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리오 그란데강 남쪽 558KM 떨어진 몬트레이 전투에서 테일러는 6220명의 군사로 페드로 암프디아의 7303명의 멕시코군과 각축전을 벌였고, 23일 시가전을 다음날로 미루는 중 24일 오전 암프디아는 2달 안에 몬트레이시를 떠나겠다는 내용의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이 전투로 미군은 120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400여 명의 희생자를, 멕시코군은 367명의 전사자와 미지수의 희생자를 내었다.

 9월 30일 암프디아는 약속한 휴전선보다 훨씬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 보고를 받은 포크는 멕시코군의 항복을 받지 않고 휴전협정을 맺은 테일러를 비난했다. 멕시코 본토에서 1만 명의 증원군이 도착하면 보급문제 등으로 전세가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테일러를 이해 못했다.

 포크는 테일러를 새로 점령한 몬트레이시를 수비하게 하고 윈필드 스캇 소장을 베라쿠르즈를 통해 멕시코시를 점령하는 전략을 세웠다. 테일러의 승전에도 멕시코는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3천만 달러에 팔기를 거부했다.

스캇은 포크의 지시대로 테일러의 노련한 명장들을 자신이 지휘하는 멕시코시 공격군에 가담시켰다. 전령을 사로잡아 이 소식을 낚아챈 안토니오 로페즈 샌타 애나는 약해진 테일러군을 공격하여 몬트레이시를 탈환하는 작전을 세우고 2만 명의 군을 동원했다.

 테일러는 몬트레이시를 수비하라는 포크의 명령을 어기고, 70KM 남부의 사티로시를 점령했다.

 

부에나 비스타 전투(1847)

1만 5천 명 이상의 샌타 애나 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접한 테일러는 계속 남하하여 1847년 2월 14일부터 4650명의 미군을 멕시코시 북쪽 32KM 거리의 부에나 비스타에 집결시켰다.

 2월 21일 샌타 애나는 공격 날짜를 2월 22일로 잡았다. 그날이 조오지 워싱턴의 생일인 줄 모르고 결정했지만 이로 인해 애국심에 고취된 미군들의 사기는 충천 되었다.

2월 21일부터 양일간 샌타 애나는 미군들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경험 많은 고급장교들을 스캇군에게 보낸 테일러는 군대 수가 3배 가량되는 멕시코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22일 샌타 애나의 총공세에 부랙 대위가 미 포병을 지휘하여 구름처럼 몰려오는 멕시코군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테일러는 말을 타고 부랙에게 산탄포를 퍼부으라는 명령을 내려 멕시코군을 일시 격퇴할 수 있었다. 용맹한 미군 명장들은 총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지휘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고취했다.

23일 후방에서 지휘하는 샌타 애나는 도망병이 계속 늘고 보급도 시원치 않아 승산이 없는 전투로 판단하고 작전 회의를 열고 후퇴를 결정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투가 하루만 더 계속되었다면 테일러의 미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전투로 미군은 267명이 전사하고 387명이 부상을 당하고 6명이 실종됐지만 멕시코군은 591명이 전사하고 1048명이 부상을 입고 1894명이 실종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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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5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2)-자카리 테일러(1)

 

 

영어 이름: Jackary Taylor

출생: 1784년 11월 24일 버지니아주 오랜지 카운티

사망: 1850년 7월 9일 워싱턴 DC

부인: 마가렛 스미스(1788-1852)

특성: 가장 긴 군 복무(43년)로 정치 경험 없이 대통령 당선

대통령 순위 및 임기 연도: 12대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32/44

소속정당: 위그당

업적: 멕시코 전쟁 승리

인용구: 의상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성장과 교육(1784-1810)

자카리 테일러는 1784년 11월 24일 버지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미 독립 전쟁에 참전한 부친 리처드 테일러 중령과 모친 세라 데브니의 5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메이플라워를 타고 이주한 윌리엄 브르스터로 알려졌고, 미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과 남북전쟁 시 남부의 총사령관 라버트 리가 먼 친척으로 포함된다.

 

 자카리가 태어난 해에 부친 리처드 테일러는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버지니아주에서 켄터키주 루이빌로 이주하여 26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리는 1만 에이커의 농장주가 되었다.

 

 자카리는 모친의 가정교육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엘리셔 에이어 선생의 초등교육과 미들타운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결혼(1810)

마가렛 멕콜 스미스는 1788년 9월 21일 메리랜드주 켈버트카운티에서 농장부호인 부친 월터 스미스와 모친 앤 멕콜 페기 사이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1809년 켄터키에 거주하는 언니를 방문했다가 휴가 나온 자카리 소위를 소개받고 둘은 곧 열렬한 사랑에 빠져 다음해 1810년 6월 21일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자녀 6명을 두었는데 둘째 딸 세라 넉스 테일러는 테일러의 부하인 제퍼슨 데이비스와 1835년 결혼식을 올리고 석달 만에 말라리아로 사망하는 비극을 초래하여 자카리와 세라의 슬픔을 자아냈다.

 

 후에 제퍼슨 데이비스는 남북전쟁 시 남부연맹의 대통령이 되었고 막내아들 리처드 딕 테일러는 남군의 장성이 되었다.

 

장교임관(1808-1810)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군 복무 얘기를 들은 자카리는 군인이 되는 꿈을 키웠다. 1808년 5월 3일 그는 켄터키 7보병단 소속 중위에 임관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10년 결혼 후 대위로 진급했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업능력이 탁월한 자카리는 루이빌에 큰 농장을 사들이고 200명 이상의 노예를 부렸다.

 1811년 해리슨 인디에너주지사의 요청으로 자커리는 넉스요새를 인디언 공격으로부터 방어하여 해리슨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812년 전쟁(1812-1815)

1812년 9월 테일러는 테컴서로부터 해리슨 요새를 방어하여 명성이 알려져 소령으로 임시진급 되었다. 1812년 말 테일러는 홉킨스 준장의 부관으로 일리노이 전투와 티퍼캐누전투에서 전투경험을 계속 쌓아갔다.

 

 1814년 하워드 준장사단에 편입되었다가 하워드 준장의 신병으로 군 지휘를 맡게 된 테일러는 430명의 군을 이끌고 미시시피강 북쪽 크레딧 아일랜드전투에서 원주민 전사들을 격퇴했으나 영국군과 합세한 원주민 공세에 밀려 후퇴하였다.

 

동년 10월 잔슨요새를 구축하였으나 하워드의 사망으로 후퇴명령을 받고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왔다.

 

 1815년 전쟁이 끝나면서 소령 임시진급이 인정되지 않아 대위로 예편했다가 1년 후 정식소령으로 재임관하게 되었다.

 

먼로 대통령의 초청(1819-1825)

 1817년부터 2년간 테일러는 미시간지역의 하워드 요새를 방어하고 루이빌로 돌아왔다.

 1819년 4월 그는 중령으로 진급하게 되었고 잭슨 준장과 함께 먼로 대통령 백악관 만찬에 초청되었다.

 

 1821년 먼로의 신임을 받은 그는 7 보병단을 이끌고 제섭 요새를 구축하였고

 1822년 루이지애나주의 미시시피 강변의 바톤 루지로 전근되었다.

 1824년까지 군 징병 임무를 맡고 먼로의 지시로 시작한 미군 재편성 조직을 1826년에 완성했다. 그리고 바톤 루지에 농장을 사서 새 집으로 이사했다.

 

 대령 진급(1828-1832)

 1828년 5월 테일러는 미시간지역의 스넬릴 요새와 미시시피강 상류의 크로퍼드 요새를 2년간 방어하며 틈틈이 농장을 사들였다.

 

 1832년 4월 대령으로 진급하고 무능한 에킨슨 준장의 지휘로 불리하게 된 미군을 이끌고 블랙 호크 원주민 추장을 제압하여 미 서부개척의 통로를 열어 공을 세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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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8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1)-제임스 넉스 포크(4)

 

 

독립적인 재무성(1846)

잭슨의 연방중앙은행 폐쇄로 1837년 경제대공황을 맞은 밴 뷰런은 1840년 차선책으로 연방정부의 재무성을 독립운영체제로 바꾸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1년 만에 상원의 다수당이 된 위그당의 반발로 독립적인 재무성 체제는 취소되었다.

 

포크는 독립적인 재무성 체제 복귀를 선거공약으로 세우고 취임 후 1846년 8월 6일 선거공약대로 재무성을 독립체제로 환원시켜 연방정부의 국고를 주 은행이나 유럽의 금융기관에 예금시키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재무성이 보존 관리하게 하였다.

 

관세삭감(1846)

포크는 1842년 통과된 관세를 선거공약대로 1846년 7월 30일 32%에서 25%로 삭감했다. 그 당시 미국의 이민증가로 미국 인구가 2천만을 넘어 영국 인구와 비슷하게 되어 양국의 자유무역이 양국 경제발전에 필요한 정책이 되었다.

미국은 농산물이나 공업제품을 영국에 수출하여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고, 영국은 식민지에서 생산한 농산품을 미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선거공약 완수(1845-1849)

포크는 미 역대 대통령 중 선거공약을 가장 잘 지킨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선거공약은 물론이고 재임도전을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하여 1848년 선거에 출마할 경우 연임이 가능했지만 대선에 참가하지 않고 단임 기간에 최대의 미 영토를 확장한 역사를 장식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쉬(1848-1863)

1848년 1월 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 계곡 근처 아메리칸 강변에서 사금이 발견되어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금의 크기가 다양하여 가장 큰 사금의 크기는 109.2 파운드나 되었다. 이 소식은 미국동부뿐 아니라 먼 중국까지 퍼져 금을 찾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캘리포니아 인구는 1848년 11만에서 1864년 금광이 폐광될 때까지 30만 이상으로 급증하였고 캘리포니아는 미국연방의 31번째 주로 승격되었다.

 

이로 인해 동서 대양을 잇는 철도사업과 금융산업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 산업을 지원하는 철강, 전보는 물론 오일, 전화, 자동차 사업을 일으키게 되어 미국이 20세기 이후 세계경제대국이 되는 기초를 만들었다.

 

과로로 인한 사망(1849)

1849년 3월 6일 영부인 세라와 함께 백악관을 떠난 포크는 대서양 남쪽 연안을 여행하며 지역사회의 환대를 받았다. 엘러바마에 도착했을 때 포크는 지난 4년간의 무리한 과로로 탈진된 상태에서 긴장이 풀려 심한 독감에 걸렸다.

 

4월 2일 리버 보트로 테너시주 네쉬빌 자택에 도착했을 때 콜레라 증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6월부터 증상이 악화되어 6월 15일 자택에서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했다.

 

매사에 착실하고 가정에 충실한 포크는 부인에게 ‘여보,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의 시신은 네쉬빌 멕켄지 감리교회에 안장되었다. 42년 후 세라 영부인은 1891년 87세의 나이로 남편을 따라갔다. 1893년 포크와 세라의 시신은 테너시주 의사당 묘지로 이장되었다.

 

메니페스트 데스티니 임무(Manifest Destiny, 1848)

‘서부개척’은 신의 계시로 미 개척민의 숙명이라는 메니페스트 데스티니는 조오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미합중국 건국국부들의 정신유산을 이어받아 11대 대통령 포크에 의해 미합중국의 영토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게 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개척정신’의 유산을 받은 사업가들은 세계 100대 기업을 일으켜 현재 미국의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이 정신유산은 계속 대부호들을 배출하고 있다.

 

참고로 박정희 경제국부의 정신유산 ‘우리의 적은 가난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잘 살아 보세’ 구호는 국민의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게 했던 사농공상의 정신유산을 바꾸었고, 한국판 메니페스트 데스티니가 되어 기업인들이 속출되어 한국이 전세계에 군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정신유산은 미래 한국산 상품뿐 아니라 연예계와 음식을 포함한 한국문화가 세계를 제패할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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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1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0)-제임스 넉스 포크(3)

 

 

(지난 호에 이어)

 

오리건 조약(1846)

1819년 애덤스-오니스조약 이후 러시아의 남부 이하 오리건 지역은 미국과 영국의 공동구역으로 사용되었다. 정착인이 몰리면서 미국은 이 지역의 국경을 북위 49도선으로 제안했으나 영국은 받아드리지 않았다.

 

1845년 알래스카 남부 북위 54도40분까지 오리건 전 지역을 차지하자는 미국의 여론이 발표되면서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포크는 국경을 북위 49도로 제안하며 이를 위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파케넘 미국 주재 영국대사는 계속 받아드리지 않고 거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버딘 영국 외무성 장관은 미국과 오리건 지역 분쟁보다는 자유무역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여 파케넘은 밴쿠버섬을 제외한 북위 49도선을 수정 제안하여 포크는 상원의 지지를 받고 1846년 6월 15일 오리건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오리건주 북쪽은 현재 캐나다 B.C주가 되었고 미국은 태평양으로 첫 디딤돌을 만들었다.

 

멕시코 전쟁(1845-1848)

1845년 3월 1일 잔 타일러가 텍사스 영입을 서명한지 3일 후에 취임한 포크는 동년 7월에 재확인 회의를 거처 12월 29일 텍사스를 29번째 미연방 주로 등록했다.

 

이로 인해 텍사스주 독립을 반대했던 멕시코는 리오그란데강 지역에서 분쟁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고, 이를 감지한 포크는 자커리 테일러 육군준장과 데이빗 커너 해군준장을 멕시코만에 파병하여 무력을 과시하며 12월 말 잔 시들 미 대사를 멕시코에 파견하여 뉴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지역을 3천만 달러에 구입요청을 했으나 호세 헤레라 맥시코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협상 중 헤레라는 마리아노 파라데스 군부 쿠데타로 쫓겨나고 정권을 잡은 파라데스는 텍사스 독립을 파기하는 성명서를 내어 멕시코 전쟁에 불을 지폈다.

 

멕시코만으로 흐르는 뉴세스강에서 북서쪽으로 487km 떨어진 리오그란데강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멕시코와 미국은 텍사스 영입 이후 토지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1846년 1월 13일 포크는 테일러 군을 동원하여 리오그란데강 지역을 점령하여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846년 7월 포크는 알렉샌더 멕켄지를 쿠바에 파견하여 망명 중인 안토니오 산타에나 전 멕시코대통령과 협약을 맺게 하였다.

 

협약내용은 미국이 쿠바의 지원으로 산타에나를 멕시코에 귀국시키면 군을 장악하고 대통령직에 복귀하여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지역을 미국에 매도하는 것이었다.

 

이 제의를 받아드린 산타에나는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의병을 일으켜 협상추진 대신 미군을 맹공격했다. 협상에 무리수를 쓴 사실을 인정한 포크는 멕시코 점령계획을 세우고 군을 동원하여 멕시코만의 베라쿠루즈를 점령하고 서북쪽으로 404km 떨어진 멕시코시를 향한 진군준비를 했다.

 

1846년 10월 텍사스에서 남쪽으로 진군하던 테일러는 멕시코 북쪽 910km 떨어진 만트레이에서 멕시코군을 패배시켰으나 항복대신 도주하게 만들었다. 포크는 테일러를 만트레이에 머물게 하고 스캇 장군이 베라쿠루즈를 통해 멕시코시를 향한 진군명령을 내렸다.

 

테일러는 포크의 명령을 어기고 70km 남쪽으로 계속 남진하여 사티로시를 점령하고 멕시코시 북부 32km 떨어진 부에나비스타에서 산타에나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초에는 패배했으나 테일러는 전투를 역전시켜 산타에나를 격퇴시키게 되어 큰 공을 세웠다.

 

한편 베라쿠루즈를 통해 진격한 스캇은 11월 멕시코시에서 22km 거리의 콘트레라스전투와 11km 거리의 추룹시코전투에서 산타에나를 패배시키고 멕시코시 문턱에서 멕시코정부의 협상을 기다렸다. 산타에나는 테일러와 전투에 패배하여 약해진 상태였다.

 

구아두루프 히달고 조약(1848)

포크는 니콜라스 트리스트 외교관을 파견하여 멕시코 근교의 구아두루프 히달고에서 1847년 11월부터 3개월간 협상한 끝에 1848년 2월 2일 구아두루프 히달고 조약에 서명했다.

 

서명내용은 멕시코가 1. 샌디에고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전역, 2. 뉴멕시쿄 전역, 3. 리오그란데 지역을 포함한 텍사스 지역을 1500만 달러를 받고 미합중국에 매도하는 것이었다.

 

사실 패전으로 1500만 달러로 깎여 받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포크는 멕시코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언어와 풍습이 달라 미국에 합병을 반대하는 일부 의원들의 의견을 따랐다.

 

3월 10일 포크는 미 상원의 구아두루프 히달고 조약 승인을 받았고, 1848년 7월 4일 72주년 미 독립기념일에 대서양에서 태평양연안까지 1백만 평방마일 이상의 미 영토를 확장하는 조약은 실효에 들어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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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5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9)-제임스 넉스 포크(2)

 

작은 꿈이 큰 꿈으로(1844)

1844년 포크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디딤돌로 부통령직을 원했다. 그는 밴 뷰런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전당대회에 공천을 신청했다.

재출마하는 밴 뷰런은 노예제도를 원하는 남부지역의 인기를 얻지 못했고 정부로부터 토지매매 지불액을 금, 은화로 받아야 한다는 정책을 고수하여 서부개척자들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특히 남서부 영토확장은 노예제도를 고수하는 남서부주와 노예폐지를 주장하는 북동주간의 쟁점이 되어 경선후보자 정책에 큰 변수가 되었다. 또한 경선후보자들은 민주당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잭슨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1844년 5월 13일 포크의 능력을 관찰한 잭슨은 포크를 만나 서남부 영토팽창을 할 수 있는 후보자가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포크가 대통령후보 경선자가 되기를 귀띔했다. 의외로 놀란 포크는 밴 뷰런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잭슨의 조언을 침묵과 비밀로 지켰다.

경선 직전 잭슨의 영향으로 민주당은 경선후보자가 3분의 2의 지지를 받아야 지명을 받을 수 있게 정관을 변경시켰다.

5월 27일 제1차 경선대회에서 밴 뷰런은 다수 표를 얻었으나 2/3의 지지를 얻지 못해 다음 경선에 들어갔지만 제2차 경선에서 6차까지 2/3 지지를 받은 후보자가 나오지 않았다.

일부 당원들이 포크의 이름을 대통령 후보경선에 올려 제7차 경선을 치르면서 포크의 지지도가 보이기 시작했고, 제8차까지 가면서 포크의 지지도가 올라가면서 밴 뷰런의 지지도는 내려갔다.

5월 30일 제9차 경선에서 포크는 233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었고 조오지 M 달러스가 포크의 러닝 메이트가 되었다. 포크는 잭슨의 영향력으로 미역사상 첫 번째로 부통령이나 국무장관을 거치지 않고 다크 호스로 대선후보가 될 수 있었다.

6월 4일 내쉬빌에서 이 지명소식을 받은 잭슨은 기쁨이 충만했고 벌티모어에서

머무르던 포크는 6월 6일 자신의 대통령 지명 소식을 접했다.

일부 민주당원들은 포크가 밴 뷰런을 배반하는 음모를 꾸미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했지만 포크는 언제나 밴 뷰런의 러닝 메이트로 의리를 지켰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자신보다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강한 포크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낙선된 경쟁자들을 위해 단임으로 대통령직을 끝나내겠다고 공표했다.

참고로 포크와 비교한다면 애국심보다 자기애성으로 정신질환 수준을 넘는

나르시스트 결정체 트럼프는 온갖 거짓말로 범죄를 저지르며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내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1844대선(1844)

포크는 위그당의 헨리 클레이 대통령후보와 치열한 공방전에 들어갔다. 다행히 잭슨의 영향으로 무소속 타일러는 그의 내각이 민주당 재입당을 약속 받는 조건으로 대선후보를 포기하여 포크는 타일러와 표를 가르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클레이는 뉴욕주를 비롯하여 반노예정책 후보자와 표를 가르게 되었다.

포크는 다음과 같은 선거공약으로 유세에 들어갔다.

첫째 관세를 삭감하고

둘째 영국의 캐나다와 오리곤 지역 영토분쟁을 해결하고

셋째 연방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미 재무성 재 설립

넷째 텍사스주 영입과 멕시코 공화국으로부터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지역 매입

1844년 11월 12일 선거결과에서 포크는 48.1%의 지지율과 105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은 클레이를 누르고 49.5%의 지지율과 170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1845)

1844년 11월 15일 대통령 당선 소식을 받은 포크는 1845년 1월까지 잭슨의 지지와 지시를 받으며 타일러의 내각을 완전히 경질하고 탕평책으로 각 주의 유능한 정치인들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단지 미래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은 배제했다.

1845년 3월 4일 비 내리는 취임식에서 포크는 그의 선거공약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다짐했다. 포크는 49세의 나이로 그 당시 가장 젊은 대통령 취임 기록을 갖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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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8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8)-제임스 넉스 포크(1)

 

 

영어이름: James Knox Polk

출생: 1795년 11월 2일, 노스 캐롤리나주 파인빌

사망: 1849년 6월 15일 테네시주 내쉬빌

부인: 새라 칠드레스(1803-1891)

특성: ‘서부개척은 미 정착인의 숙명이다’(Manifest Destiny)의 선구자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1대, 1845-1849

역대대통령 평가순위: 12/44

소속정당: 민주당(Democrats)

업적: 1백만 평방 마일이 넘는 영토확장

인용구: 미 헌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성장과 교육, 결혼(1795-1924)

제임스 넉스 포크는 1795년 11월 2일 노스 캐롤리나주 파인빌에서 부친 새뮤엘 포크와 모친 제인 넉스 포크 사이의 10명 자녀 중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흑인노예를 거느리는 농장을 가진 부친은 1600년대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후예였다.

 

1806년 포크가족은 포크가들이 모여 사는 테네시주 머리 카운티로 이주하였다.

부친 새뮤엘은 머리 카운티의 판사직을 맞게 되었고, 제임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앤드류 잭슨을 포함한 유명 정객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1813년 제임스는 시온교회학교를 거처 머프리스버로 브래들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스 캐롤리나 대학에 입학했다. 근면하고 착실한 제임스는 재학 중 논쟁 회 회장을 맞고 연설을 읽혔으며 1816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내쉬빌로 돌아와 변호사 수업을 받고 1820년 자격증을 획득한 후 머리 카운티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했다.

 

12세의 새라 칠드리스를 처음 알게 되었다가 7년 후에 다시 만나 미모로 변한 새라에게 홀딱 반한 제임스는 1823년 구혼을 했고, 1824년 1월 1일 결혼식을 올렸다. 부농인 조을 칠드리스와 엘리자베스 위트시트의 6자녀 중 셋째 딸로 1803년 9월 4일 머프리스버로에서 태어났다.

 

새라는 1817년 윈스턴 샐림의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 여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었다. 잭슨은 새라가 훌륭한 신부 감이라고 결혼을 부추겼다.

둘은 결혼 후 애를 갖지 못했다. 포크가 어렸을 때 담석 제거 수술 중 생식기관을 잘못 건드린 이유라고 역사학자들이 추측한다. 대신 조카를 양자로 키웠다.

 

중견정치인(1824-1843)

1824년 포크는 정치초년생으로 테네시주 대표 미 하원에 출마하여 5명의 중견 정치인들을 제치고 하원에 입성했다. 모든 일을 열성으로 하는 제임스는 선거운동을 강행하여 옆에서 내조하는 새라가 제임스의 과로를 염려할 정도였다.

 

1824년 대선에서 국민의 투표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잭슨이 선거인단 투표로 낙선되는 과정을 목격한 포크는 1826년 3월 1일 하원에서 선거인단 투표제도를 국민의 다수 표로 결정하는 인기제도로 채택하자는 법안을 상정했다.

 

1827년 하원 재선에 당선된 포크는 잭슨의 연방정책을 동조하여 연방정부의 인프라 건설사업반대, 중앙은행제도 폐지 그리고 낮은 관세를 지지하였다.

 

1833년 하원 5선에 당선된 포크는 1836년 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잭슨과 밴 뷰런의 경제실책으로 1837년 장기 경제공황을 맞은 미국민의 원성이 하늘처럼 높아졌다. 같은 민주당인 포크는 차기 하원의장선출에서 겨우 13표를 받아 참패했다. 7번의 하원 재선과 2번의 의장직을 지냈던 포크는 8번째 하원출마를 포기하고 테네시 주지사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당 표밭인 테네시주는 1835년 이후 처음으로 위그당의 뉴튼 캐논이 주지사가 되었다. 포크는 지역을 찾아 다니며 독립적인 주정부를 인정하는 민주당 정책을 재인식시키는 유세를 강행하여 1839년 5만4102표를 받아 2706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주지사에 당선된 포크는 부통령직을 다음 목표로 184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공천 경선에 참가했다가 기권하고 공천 없이 밴뷰런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했으나 겨우 1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탈락했다.

 

설상가상으로 해리슨의 유세에 힘입은 위그당은 1841년 제임스 존스를 테네시주지사 후보로 선정하여 존스는 포크와 300표 차이로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낙선된 포크는 컬럼비아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하다가 1843년 테네시주지사 선거에 재도전했으나 계속 참패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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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1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7)-잔 타일러(3)

 


다산 다복(1815-1860)

 

레티셔 크리스천 타일러(1790-1842)


레티셔는 1790년 버지니아주 뉴 켄트 카운티에서 잔과 동갑내기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라버트 크리스천 대령은 흑인 노예를 거느리는 농장을 경영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항상 수줍어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레티셔는 법대에서 잔을 만나 5년간 열애를 하며 죽으나 사나 레티셔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잔과 1823년 23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레티셔는 결혼 수개월 전에야 잔에게 첫 키스를 허용했다.
결혼생활 29년간 8명의 자녀를 낳고 양육하며 정치생활에 몰두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행복한 가정을 유지했다. 백악관에 입성하기 2년 전에 다산으로 몸이 쇠약해진 레티셔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입성 후 1년이 지난 1842년 10월 10일 51세의 레티셔는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 백악관에서 사망한 첫 번째 국모가 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태어난 농장에 안치되었다. 백악관 귀빈 영접은 둘째 딸 레티셔가 맡았다.

 

줄리아 가디너 타일러(1820-1889)


줄리아는 1820년 5월 4일 뉴욕주 가디너 개인소유 섬에서 태어났다. 부친 데이빗 가디너 뉴욕 상원의원은 흑인노예를 부리는 농장부호로 알려졌다. 줄리아는 이스트 햄프턴에서 성장하며 뉴욕의 취가로 상류사회여성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42년 1월 20일 21세의 줄리아는 백악관에서 타일러를 소개받았다. 9월10일 타일러는 부인 레티셔 사망 한달 전 30세 연하의 줄리아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줄리아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변심을 일삼는 그는 병석에 누워있는 전 부인과의 결혼 전 약속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헌신처럼 저버렸다. 


1843년 2월 22일 백악관 무도회에 초청받은 줄리아는 청혼을 하는 타일러를 단호히 거절했다. 9월 3일 집념이 강한 타일러는 줄리아 부친 가디너와 줄리아를 프린스턴 증기군함 포토맥강 유람 항해에 초청했다. 


축포를 올리고 향연을 즐기다 축포를 한번 더 올리자고 하여 귀빈들이 갑판으로 모이는 중 축포가 폭발하여 엄셔 국무장관, 길머 해군장관과 가디너를 포함한 많은 귀빈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부친을 잃어 비통에 빠진 줄리아는 타일러의 끈질긴 감언이설과 유혹에 홀연히 1844년 6월 26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1860년까지 14년간 7명의 자녀를 낳았다.


타일러는 백악관에서 재혼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15명의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미 대통령의 다산 다복 기록을 갖게 되었다.


전 처의 큰딸보다 5살이나 어린 줄리아는 새어머니 대접을 못 받았지만 1845년 3월 4일까지 9개월간 백악관에서 초호화판 사교생활을 영위했고 흑인 노예제도 정책보존에도 영향을 과시했다.


1862년 남편 사망 후 북군에게 60명의 노예와 1600 에이커의 농장을 뺏기고 1881년부터 연간 5000 달러의 대통령 미망인 연금으로 여생을 조촐하게 살다가 1889년 7월 10일 리치먼드에 자리잡은 엑스체인지호텔에서 69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할리우드 장지에 안장된 타일러의 옆에 자리잡았다. 


 
대통령 퇴임 및 반역(1845-1861)


1845년 3월 4일 대통령직을 퇴임한 타일러는 버지니아주 찰스 카운티에 위치한 3000 에이커의 그로우브 농장을 구입했다. 이 농장은 해리슨 전 대통령이 건축한 90 미터의 긴 주택을 가진 농장으로, 사용하지 않고 비어 있었다. 타일러는 농장이름을 셔우드 포레스트로 바꾸고 면적을 1600 에이커로 축소시켰다. 그는 60여명의 흑인노예를 거느리며 고수익을 내는 농장을 경영하며 틈틈이 흑인노예해방운동을 반대했다.


여기에서 태어난 막내딸 펄은 1947년까지 생존했고 현재 이 농장은 손자 해리슨 타일러가 소유하여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미국 전역의 노예해방운동을 선언하여 미 남서부는 주 의용군을 소집하며 연방탈퇴 운동을 도모하게 되었다. 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타일러는 피스 컨퍼런스를 열고 링컨에게 노예주와 노예해방주를 대표하는 2원제의 상원으로 나누자고 했으나 링컨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4월 17일 분쟁지역에 미 연방군을 동원하여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실망한 타일러는 6월 버지니아주를 남부연합(The Confederate)에 가입시키고 링컨의 노예해방운동에 반대했다. 8월에 남부연합 상원의원이 되어 활동하고 11월에 남부연합 하원직을 맡아 1862년 2월 미 남부연합하원 개원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타일러는 전직 대통령으로 미 역사상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반역의 우를 저질렀다.

 

사망(1862)


타일러는 나이가 들면서 골골하며 감기에 자주 걸렸다. 어지러운 병증세가 심하여 버지니아 농장에 돌아온 타일러는 1862년 1월 18일 숨을 쉬지 못하며 27년 후 줄리아를 곁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링컨은 타일러의 미 연방국장을 부결했고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대통령은 남부연합기를 타일러의 관에 덮고 남부연합국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의 시신은 리치먼드 헐리우드장지에 안장되었다.


타일러는 미 대통령 중 사망 후 관위에 성조기를 두르지 못한 유일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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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6)-잔 타일러(2)

 

자칭 대통령 취임(1841)

미 헌법 2조 1항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나 불능시에 대통령직무를 부통령에게 유임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법은 1967년 2월 10일 수정헌법 25조가 실효될 때까지 실행되었다. 수정헌법에 의해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에 오르고 신임 대통령은 차기 대선까지 상원의 동의를 받고 부통령을 임명하게 되어있다.

1841년 4월 5일 새벽에 해리슨 대통령의 사망소식을 접수한 타일러는 4월 6일 새벽 4시에 워싱턴에 자리잡은 호텔에 숙박하며 대통령직에 선서를 하고 해리슨 내각을 소집하여 자신의 직함을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데니얼 웹스터 국무장관은 헌법에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임무를 유임 받을 수 있지만 대통령직함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직함 사용은 내각의 다수결로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타일러는 웹스터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는 내각은 사임하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내각은 그의 결정을 따랐다.

4월 9일 타일러는 취임선언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6월 1일 미 의회는 그가 10대 대통령직함으로 임무수행을 하는 사안에 동의했다. 자칭 대통령이 된 타일러는 미 대통령역사에서 유고로 직함을 갖고 임무수행을 한 9명의 부통령 중 첫 케이스를 만들었다. 9번째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는 수정헌법 25조에 의한 결정이었다.

 

변심, 독선, 탄핵소추(1841-1843)

연방은행을 복귀시킨다는 약속을 하고 위그당 후보에 올라 자칭 대통령자리에 오른 타일러는 헨리 클레이가 주도하는 미연방은행 복귀 제정안을 두번씩이나 거부했다.

1841년 9월 11일 클레이의 영향력으로 위그당 내각은 웹스터를 제외하고 전원 사임을 했고, 9월 13일 위그당은 당 배반과 독선을 일삼는 타일러를 당에서 제명 처분했다.

1841년 연방정부의 적자는 1,100만 달러가 되었고, 각 주정부의 적자는 연방 도움없이 계속 늘어가고 있었다. 타일러는 관세를 높이지 않고 연방토지를 공매하여 연방수입을 올렸으나 은행의 은행역할을 하는 연방은행 없이 정부의 적자를 해결할 수 없었다.

타일러가 위그당이 제안하는 관세인상을 두 번씩이나 거부하자 위그당은 1842년 7월 하원에서 타일러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으나 상원에서 1843년 1월 127대 83으로 탄핵소추안은 기각되었다. 이로 인해 타일러는 미 대통령 역사에서 첫 번째로 탄해소추를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텍사스주 영입(1843-1845)

1836년 3월 2일 텍사스공화국은 멕시코공화국으로부터 독립되었고 텍사스 거주 미 개척인들을 중심으로 텍사스를 미국에 영입시키는 제안을 했으나 미 상원에 의해 기각 당했다.

애덤스, 벤 뷰런, 클레이를 중심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위그당 정치인들은 텍사스주가 영입되면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주가 증가된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잭슨과 포크를 중심으로 노예제도를 선호하는 민주당 정치인들은 텍사스를 영입할 경우 멕시코가 영국과 연합하여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추측하여 영입을 반대했다.

1837년 경제공황으로 텍사스 경제가 침체되어 샘 휴스턴 텍사스 대통령은 영국의 중재 하에 멕시코와 분쟁을 방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843년 이 기회를 엿본 타일러는 텍사스 영입을 계획했다. 그는 텍사스 영입의 공로를 이용하여 1844년 대선에 재선을 꿈꾸고 있었다.

1844년 4월 타일러는 물밑작업을 통해 휴스턴 정부와 텍사스 영입조약을 만들어 6월 미 상원에 제출했으나 상원은 위그당을 중심으로 기각했다. 이로 인해 텍사스 영입제안은 1844년 대선에 화두가 되었다.

무소속의 타일러는 민주당에 입당을 원했으나 거절당해 대통령후보에서 탈락되었고 텍사스 영입을 선거공약으로 세운 민주당의 제임스 포크가 12월 4일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선이 끝난 12월 타일러는 상-하원 다수결로 텍사스 영입을 통과시키고 1845년 3월 1일 텍사스 영입조약에 서명, 3월 3일 하원에 통보하고 4일 11대 포크 대통령 취임식 일에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타일러 공로에 의해 텍사스는 1845년 12월 29일 미 합중국의 29번째 주로 영입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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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1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5)-잔 타일러(1)

 

영어이름: John Tyler

출생: 1790년 3월 29일 버지니아주 찰스 카운티

사망: 1862년 1월 18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부인: 초혼 레티셔 크리스틴(1790-1842) 자녀 8명

 재혼 줄리아 가디너(1820-1889) 자녀 7명

특성: 흑인 노예제도 옹호, 남북전쟁시 남부연맹구성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0대, 1841-1845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37/44

소속정당: 민주공화당(1811), 민주당(1828), 위그당(1834), 무소속(1844)

업적: 텍사스주 영입(1845)

인용구: 직권남용은 인간의 심리작용이다.

 

성장과 교육 결혼(1790-1808)

잔 타일러는 1790년 3월 29일 버지니아주 찰스카운티에서 농장주인 부친 잔 타일러 시니어 버지니아 주지사와 모친 메어리 암스테드의 8남매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7살 때 모친을 잃은 잔은 집에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고 17세에 윌리엄 앤드 메어리 칼리지를 졸업하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익혔다. 1808년 법률학도인 잔은 18세 나이에 레티셔 크리스천과 결혼을 하고 19세에 변호사가 되었다. 양가는 모두 버지니아주에서 잘 알려진 농장주로 흑인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정계입문(1809-1835)

1809년 버지니아주 19세의 타일러는 리치먼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고

1811년 21세 나이에 찰스 카운티 의원에 당선되었다.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타일러는 리치먼드 방위를 위한 민병중대를 소집하였고 전투경험 없이 대위로 예편되었다.

 

1813년 부친의 사망으로 농장과 13명의 흑인노예를 유산으로 물려받아 타일러는 24명의 노예를 부리는 농장주가 되었다.

1816년 버지니아주 상원출마에 당선되었고 주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치력 제한을 주장했다. 부친과 친분이 두터운 토마스 제퍼슨의 영향을 받은 타일러는 연방정부의 통치력을 증가시키는 연방은행제도를 폐지하고 노예제도 결정은 주정부 관할에 맡겨야 한다는 정치적 도구를 만들어 미 남부의 지지를 받았다.

 

1817년 타일러는 버지니아주 대표 미 하원에 당선되었다.

1821년 워싱턴정부의 연방체제화 정책에 불만을 가진 타일러는 정계를 떠나 리치먼드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계속했다.

1826년 지인들의 권유로 버지니아주 주지사에 당선되어 버지니아주 자치를 위해 노력했다.

 

1827년 버지니아주 대표 미 상원에 당선되었다.

1828년 대선에서 민주공화당은 잭슨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당과 애덤스 중심의 공화당으로 분리되었다. 타일러는 민주당에 가입하여 연방중앙은행 폐지를 주장하는 잭슨을 지원했다.

 

1834년 잭슨의 정책에 이견을 가진 타일러는 특히 주정부의 분리반대법에 반감을 느껴 민주당을 탈당하고 클레이와 해리슨 중심으로 창당한 위그당에 입당했다.

 

1836년 대선(1835-1836)

1835년 타일러는 정계를 떠나려 했으나 지인들의 권유로 버지니아주 위그당 부통령후보에 등록되었다. 위그당은 조직이 잡히지 않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위그당 후보들이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 등록하였다.

 

1836년 대선결과는 선거인단의 과반수 이상의 선거인단 표를 받은 밴 뷰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 후보 중 과반수 이상을 받은 후보가 나오지 않아 미 상원에서 다수결로 잔슨이 당선되었다. 타일러는 47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아 탈락했다.

 

1840년 대선(1839-1840)

1836년 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된 타일러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귀향했다.

1839년 펜실바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첫 번째 열린 위그당 전당대회에서 해리슨을 당대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부통령 후보는 노예제도를 주정부정책에 일임해야 한다는 타일러를 후보로 선출하여 남부의 몰표를 기대했다.

 

1840년 선거결과는 해리슨과 타일러가 234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60개의 표를 받은 밴 뷰런팀을 압승으로 패배시켰다.

 

부통령 재임(1841)

부통령직을 맡은 타일러는 3월 4일 9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한 후 윌리엄스빌 자택으로 돌아와 해리슨의 내각구성 소식을 듣고 있었다.

 

성격이 우유부단한 해리슨은 내각구성에 심한 압력을 받고 4월 4일 급성 감기 폐렴으로 재임한지 31일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해리슨 사망 3일전 웹스터 국무장관은 타일러에게 해리슨의 중병사실을 알려 주었고 4월 5일 새벽 그의 아들 골레처는 윌리엄스빌 타일러 자택을 방문하여 해리슨의 사망을 알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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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4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4)-윌리엄 헨리 해리슨(4)

 

▲백악관 관저 해리슨 임종

 

퇴역 후 정치생활(1814-1829)

1814년 해리슨은 미 북서부 총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오하이오주 노스벤 가족농장으로 귀향했다. 1816년부터 1819년까지 해리슨은 오하이오주를 대표하는 미 하원직을 맡게 되면서 정치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하원직 임기 중 1817년 먼로내각의 국방장관직 후보로 나섰으나 먼로는 잔 캘훈을 선택했다.

 

1819년부터 1821년까지 오하이오주 상원직을 지내며 18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출마에 낙선된 해리슨은 1824년 오하이오주 대표 미 상원으로 당선되었다.

 

해리슨은 1828년 그랜컬럼비아(Gran Colombia) 주재 미 대사직에 임명되어 미 상원직을 사임했다. 그는 컬럼비아 독재자 볼리바에게 민주주의를 종용하다 볼리바의 항의를 받고 1929년 잭슨 대통령 소환으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1836년 대선출마(1836)

40년간 미 정부를 위한 봉사와 전공을 세운 해리슨은 1829년 야인이 되어 소액의 은퇴자금과 저축으로 농장을 운영하며 많은 식구들을 부양해야 했다.

 

해리슨의 전공을 기억하는 지인들이 그에게 지방법원 서기직을 부여하고 해리슨 차기 대통령선거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소식이 필라델피아에 전해지며 수만 명의 지지자들이 방문해 그를 전쟁영웅으로 대우하며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1835년 위그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 받은 해리슨은 밴 뷰런 민주당 후보와 경쟁하며 1836년 대선에 출마했다. 1836년 12월 7일 73개의 선거인단의 지지표를 받은 해리슨은 잭슨의 인기몰이로 170개의 지지표를 받은 밴 뷰런에게 참패를 당했지만 36.6%의 지지율을 받은 해리슨은 50.8%의 지지율을 받은 밴 뷰런과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승산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40년 대선출마

1839년 최초로 열린 위그당 전당대회에서 핸리 클레이와 윈필드 스캇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은 해리슨은 밴 뷰런 민주당 대통령과 경쟁하는 대선에 출마했다.

 

해리슨은 1837년 경제공황이 회복되지 않아 투표자들의 인기를 잃은 밴 뷰런의 실책을 비난하며 미 중앙은행 복구로 경제회복을 약속하는 선거공약을 내세웠다.

 

해리슨은 1840년 12월 2일 지지율 52.9%로 234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아 지지율 46.8%로 60개의 선거인단표를 받은 밴 뷰런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선에 당선되었다.

 

미합중국 8대 대통령취임(1841년 3월 4일)

68세의 해리슨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첫 번째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에 입성한 대통령기록을 세웠다. 1841년 3월 4일 취임식에 내리는 봄비는 살 속을 스며드는 냉기를 뿌리고 있었다.

 

해리슨은 외투도 입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고 8,445개의 단어로 구성된 취임서를 두 시간 이상 걸려 읽어 내려갔다. 취임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경제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중앙은행 복구 계획이었다.

 

취임식은 행진과 저녁 연회로 이어졌다. 초청된 1,000명은 1인당 10달러를 냈다.

 

해리슨은 취임식이 끝나고 내각구성으로 고심해야 했다. 그를 밀어준 친지나 위그당원들은 지위 상하 구분 없이 요직을 요구하며 백악관에서 진을 치고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능한 심복을 두지 못한 해리슨은 내각구성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개성이 강하지 못한 해리슨은 심사숙고 할 시간도 없이 내각을 구성했다

 

취임 31일만의 죽음(1841년 4월 4일)

1841년 3월 24일 외투와 모자 없이 차가운 봄비를 맞으며 지역시장을 거닐던 해리슨은 이틀 후 발열을 하고 28일 심한 옆구리 통증을 느꼈다. 밀러 주치의는 감기처방과 폐렴처방으로 피를 뽑았다.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4월 3일 심한 설사로 혼비백산한 해리슨은 밀러 주치의를 잔 타일러 부통령으로 착각하고 대통령임무를 부탁한 후 4월 4일 0시 30분에 눈을 감았다.

 

폐렴이 사망원인으로 기록되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장질부사나 콜레라의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당시 워싱턴은 하수도 시설이 건설되지 않아 백악관 오물은 700 미터 정도 떨어진 오물 처리장에서 수거했고 오물로 덮인 늪지대는 항상 전염병 균이 창궐하였다.

 

 워싱턴 정부는 타일러에게 대통령 대행직무를 맡기고 30일간 애도를 하고 해리슨 시신은 오하이오주 노스벤드 해리슨 기념지에 안장되었다. 해리슨은 미 대통령 중 31일 최단기의 임기를 마치고 최초로 백악관에서 운명했다.

 

최고령(65세)의 나이로 영부인이 된 애너 심스는 이사 준비하느라 백악관 입성도 못하고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미 상원은 심스 해리슨 미망인에게 25,000 달러의 연금을 승인했다.

 

악연의 저주?

건강했던 해리슨이 1840년 대선에 당선되어 1841년 급사한 이후 매 20년마다 해리슨을 포함하여 당선된 미 대통령 7명이 임기 중 사망했다.

1860년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 1865년 암살

1880년 제임스 가필드 1881년 암살

1900년 윌리엄 1901년 암살

1920년 워렌 하딩 1923년 중풍으로 사망

1940년 프렝클린 루즈벨트 1945년 중풍으로 사망

1960년 잔 F 케네디 1963년 암살

1980년 로널드 레이건 1981년 암살미수, 1985년 임기 중 치매시작

2000년 조오지 W 부시 생존, 이라크 전쟁으로 미군 4,431명 전사

2020년 당선 조 바이든

마튼 캘리 미 역사학자는 2020년 위의 역사적 사실을 조상의 땅을 뺏기고 전사한 테컴서 원한에 의한 저주라고 기술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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