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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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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국부들(27)-제임스 먼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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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교육

미 건국국부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알려진 제임스 먼로는 1758년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얼렌드카운티의 먼로 홀에서 스캇트랜드계의 농장주인 부친 스펜스 먼로와 모친 엘리자베스 존스의 두 번째 첫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된 제임스는 농장 일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1년에 11주만 켐벌타운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1772년 모친이 사망하고 2년 후 부친이 사망했다. 16세의 고아가 된 제임스는 학업을 중단하고 누이를 비롯한 동생들과 농장을 돌봐야 했다. 다행히 변호사인 조세프 존스 외삼촌이 5형제의 대부가 되어 양육을 맡게 되었다.

버지니아주 지역대표의원인 존스는 제임스를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로 거처를 옮겨 윌리엄 앤드 메어리 대학에 진학시켰고 토마스 제퍼슨, 패츠릭 헨리, 조오지 워싱턴을 소개했다.

 

미 독립전쟁 참전

1776년 초 먼로는 학업을 중단하고 미 연합군에서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12월 26일 700명의 보병을 이끌고 워싱턴 총사령관의 트렌튼 전투에 가담하여 기습공격으로 공을 세웠다. 전투에서 동맥파열을 일으켜 생명을 겨우 건진 먼로는 워싱턴으로부터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대위로 승진하였다.

1777년 말 전투에서 계속 밀린 워싱턴 주력부대가 영군의 전투영역에서 떨어진 펜실바니아 외각 벨리 포오지 진영에서 겨울을 지내며 맹훈련을 할 때 먼로는 미 독립군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고난을 함께했다.

만머스 전투 후 생활보장이 되지 않는 봉급으로 버틸 수 없어 먼로는 삼촌 대부에게 돌아와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영군의 남부공세로 위협을 받는 독립군에 재 입대하였다.

제퍼슨의 결정으로 먼로는 민병대 대령으로 임관되었으나 민병을 일으킬 자금이 없어 워싱턴 주력부대와 민병대간의 통신망을 구축하여 전령업무를 맡았다. 먼로는 워싱턴군과 프랑스연합군이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요크타운전투에 가담을 못하는 안타까움을 달래야 했다.

먼로는 미 독립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임단체인 소사이어티 오브 신시내티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변호사 및 정치입문

먼로는 1783년 법과에 복학한 후 제퍼슨 밑에서 법학을 이수하고 버지니아주 프레드릭버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고 농장을 정리한 후 변호사업과 정치에 몰두했다. 1786년 먼로는 엘리자베스 코트라잇(1768-1830)과 결혼을 하고 버지니아주 샬롯트빌에 정착을 하고 세 자녀를 낳았다.

1782년 이후 먼로는 버지니아주의 정치에 입문하여 버지니아주 대표로 활약했다. 1789년 조오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이끄는 미합중국 상원에 출마했다가 제임스 매디슨에게 참패 당하고 버지니아주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계속하던 중 1790년 보궐선거로 연방 상원에 당선되었다.

1790년 해밀턴은 연방당을 세우고 제퍼슨은 민주공화당을 세워 심한 대립을 일으켜 워싱턴 내각이 2개의 정당으로 분리되었다. 워싱턴은 무소속이었지만 주로 해밀턴의 정책을 따랐다.

먼로는 언제나 제퍼슨을 따라 민주공화당 당원이 되어 활약하며 해밀턴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1794년 워싱턴은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먼로를 프랑스에, 잔 제이를 영국에 파견하여 양국과 유대관계를 맺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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