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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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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미 독립전쟁 전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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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에 의한 캐나다 역사(1497-1755)

1497년 이태리계 영국 탐험가 잔 캐벗이 대서양 연변의 캐나다를 발견한 후 영국은 캐나다 연변 대서양 어업을 활성화시켰다. 그 당시 약 30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 지역의 원주민 숫자는 약100만으로 추산되었다.

1534년 프랑스 탐험가 적 카치에는 북대서양 지역의 뉴펀드랜드 프린스에드워드섬 지역을 항해하였다. 다음해 두 번째 항해에서 게스페이를 통해 세인트 로렌스강을 따라 캐나다 내륙지방까지 들어와 이로코이 원주민 부락을 발견하고 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언어 KANATA는 부락이란 뜻인데 이 단어를 들은 카치에는 그가 탐험하는 지역을 CANADA로 명명하고 기록을 남겼다. 1541년 캐나다 식민지화  목적으로 한 세 번째 항해를 통해 원주민들의 모피를 유럽으로 향하는 수입 유통로를 만들었고 유럽인들의 모피 수요가 증가하며 모피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747년 할리엔 세계지도에는 세인트 로렌스강 북쪽지역을 캐나다로 표기했다.

1608년 모피산업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세뮤엘 샴플레인은 현 퀘벡시에 모피무역을 위한 요새를 만들어 프랑스 이주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1642년 폴 메사니오는 현 몬트리올시 지역을 두 번째 모피 무역도시로 만들었다.

1749년 영국의 에드워드 콘월리스는 핼리펙스에 정착하여 노바스코샤를 포함한 캐나다 대서양 연변지역을 차지하여 영국 식민지로 만들었다.

1750년 이후 온타리오 서쪽을 포함한 캐나다 내륙을 식민지화한 프랑스계 퀘벡 정착인들은 영국 식민지인 미13주의 서쪽에 이르는 오하이오 계곡까지 내려와 영토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1755년에 영국은 노바스코샤 핼리펙스 등지에 정착한 프랑스계 아카디언 정착인들에게 영국의 지배를 요구하며 이를 거부하는 아카디안 정착인들을 프랑스로 축출하였다.

 

영불전쟁의 워싱턴(1753-1754)

 1753년 프랑스계 퀘벡정착인들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버지니아 주수상 라버트 딘위디는 조오지 워싱턴 민병 소령과 수하 몇 명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에게 물러가라는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프랑스 사령관 센 피엘로는 워싱턴 사절단을 융숭히 대접하고 그의 답변 친서를 워싱턴에게 주었다. 77일간의 장정을 마치고 전달한 편지의 내용은 영불간의 북미 영토전쟁으로 이어져야 하는 내용이었다.

영국의 지시를 받은 딘위디는 워싱턴을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민병 300명의 의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오하이오 강변에 영국군 요새를 세우게 하였다. 그에 맞서 프랑스군 1000여 명은 11 km까지 접근하여 프랑스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50명도 안되는 프랑스군의 접근을 정탐한 워싱턴은 영국을 돕는 인디언들과 합세하여 무방비로 접근하는 조셉 주몬빌 프랑스 지휘관을 포함한 13명의 프랑스군을 저격하고 21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합세한 인디언들은 프랑스군 얼굴가죽까지 벗겼다. 워싱턴이 체포한 주몬빌을 심문하던 중 원주민과 통역오보로 해프 킹 인디언 추장이 손도끼로 주몬빌을 살해하였다. 주몬빌은 영국군에 외교사절단 임무로 영국 군부에 접근하던 중  참사를 당했다.

1754년 이 소식을 들은 주몬빌의 형제 쿨론 빌리어 프랑스 대위는 프랑스를 돕는 인디언을 포함한 700명의 군사를 일으켜 400명도 안되는 워싱턴군을 포위하여 워싱턴을 항복시켰다.

 워싱턴은 프랑스 언어로 쓰여진 항복서에 서명하여 용서를 빌었고, 주몬빌 사절단을 암살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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