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22 전체: 17,603 )
한국 현대사’(브루스 커밍스)를 읽다가(2)
chonhs

 워싱턴 정가의 경악-한국전에 핵무기 검토

 


 

 서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압록강까지 진격한 한-미군은, 12월 성탄절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맥아더는 이런 생각에 하와이에서 겨울 방한복을 잔뜩 싣고 오는 수송선을 되돌려 보낸다.
그러나 미 정보기관들의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 빗나가고, 중-북 연합군이 북쪽을 완전히 재탈환하자 워싱턴 정가는 경악한다. 워싱턴 고위층들은 미국의 모든 무기를 사용해서 이 패배를 역전시키려 했다.
당연히 핵 사용이 검토된다. 오늘도 북핵 문제가 주요 뉴스인데…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자. 

 

 본론


1950년 12월9일, 트루먼은 ''나는 재임 중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제 3차대전이 임박한 형국이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우리에게 닥친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며,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원자탄 사용을 고려 중임을 암시했다.
이에 놀란 영국수상 에틀리가 워싱턴으로 달려가, ''한국전에서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문서로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에틀리는 그런 무기는 더욱 필사적인 조치가 정당화 될 때만 사용해야지, ''미국이 북한 같은 나라를 상대로 싸우면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당치않은 일'' 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적절하게 잘 배치된 스파이 덕분에 세상을 움직이는 두 거물의 회담 내용을 읽은 스탈린은 전 지구적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스탈린은 이를 회피하고 싶어했고, 차라리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도록 내버려두자는 쪽이었다.


이와 달리 중은 전쟁을 치를 태세였지만, 3차 대전을 시작하겠다기보다 단지 한반도 중간까지만 밀고 내려가겠다는 생각이었다.
트루먼이 핵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한 11월30일, 미 전략공군사령부는 폭격기 부대를 ‘극동으로 출격시킬 준비’를 명령한다. 12월 24일, 맥아더는 26기의 핵폭탄이 필요하다는 목록을 제출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열흘이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계획이 있다. 중국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만주의 통로를 따라 핵폭탄을 투하하고, 50만에 달하는 대만의 장개석 군대를 압록강에 투입하고, 전방에는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방사선 코발트를 뿌리면, 적어도 60년 동안은 북에서 한국을 육상으로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시킨 51년 4월 초순, 핵 사용에 가장 접근해 있었다.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알려진 대로 단순히 그의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핵 사용명령을 내릴 경우, 현장에 믿을 만한 지휘관이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미 13개 비행사단을 한반도 인근에 배치시켰고, 중국도 신규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킨 후였다. 3월 말경 미 공군은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의 원자탄 탑재요원이 대기태세에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원자탄은 조립되지 않은 채 그곳으로 운반되어 조립되는데, 사용 직전 원자핵만 추가하면 되었다.


4월5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만약 중국의 신규병력이 전투에 투입되거나, 만주의 소련 폭격기가 출격할 경우, 만주기지를 즉각 원폭 투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트루먼의 서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상황에서 다행(불행?)히 핵무기를 운반할 제9폭격대는 괌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고, 오키나와 공군기지의 핵 탑재장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중과 소가 전쟁을 확대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었고, 맥아더 해임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원자탄 사용은 추진되지 않았다. 
이로서 아시아에서 두 번째 원자탄 투하는 이뤄지지 않았다.

 

 결론


반세기, 분단의 긴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북의 핵으로 남북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있다. 부디 남과 북이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 민족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기 바란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