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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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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1
저도의 추억

 

 

 

 인터넷 뉴스를 보니 문재인 대통령께서 진해 앞 저도 대통령 휴양지를 방문하시고, 불원간 저도를 국민에게 반납하시겠다고 하셨다. 좋은 일이다.


필자가 거의 반세기 전, (진해)항만방어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휴양을 오시면, 저도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상주하면서 오가는 어선들을 통제하던 일이 생각난다.


주위(마산 등) 어민들에게 대통령이 저도에 오셨다는 사실을 공지할 수 없으니(보안상), 어선들은 항로 가운데 위치한 저도를 오가는 길에, 평시대로 가까이 지나갈 수 있어 이 접근을 예방하는 일이었다.


그 외 비닐봉지가 떠 내려와도, 혹시 폭발물이 아닌가 수거 확인을 하기도 하고, 바다 쪽만 보고 있으니, 뒤쪽 골프장이나 대통령 숙소는 돌아볼 틈이 없어 대통령 가족 등 일행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저, 아드님 지만이가 골프카 타다 굴렸다던지 하는 소문 정도만 들었다.


 사실 그곳이 대통령 별장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해군가족 휴양지였다. 당시(60-70년대), 여름에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던 터라, 많은 분들이 저도 해변으로 놀러 가곤 했다.


 또, 그전에는 진해 근해가 오염이 안된 원시에 가까운 모습 그대로여서, 조금만 물속에 들어가도 물고기, 조개, 바위틈에는 해삼, 조금 깊이에는 멍게도 많았다.


작살(fishing gun) 사냥터로 아주 좋아 60년대 말 진해항 옆, 장천 어촌에서 어선을 하루 임대, 저도 근처에서 수영과 수중사냥으로 채집한 소라, 물고기 등을 구워먹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사채놀이 하던 건달 친구들이 진해로 놀러 와 어선 타고 저도 주위 이름없는 조그만 섬들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있다.


되돌아보니, 깨끗한 해변가에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모래사장 위에 널려놓고 말리거나, 한가로이 어망을 수리하는 모습 등 태곳적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어린 시절 ‘저도의 추억’을 되새겼다니 이해할 만하다. 


별장을 만들면서 관계자들의 수고도 많았던 곳이다. 소나무 등 거목마다 링겔 주사를 놓아주기도 하고, 모기 퇴치에 군의관들이 수고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리고 10여년 후, 다시 물속에 들어가는 부대에 배치되어 보니, 바위틈에 그렇게 많던 도미, 해삼, 바닥에 조개도 보이지 않고, 뻘을 파니 조개는 있으나 기름 냄새가 났다.


전에는 군복 바지 두 가랑이를 엮고, 그것을 삼태기 삼아 물속에 들어가면 한 시간 동안에 소라, 해삼, 조개를 바지 한가득 주워올 수가 있었는데, 세월 따라 세상도 변했다.


 박 대통령 가족은 자주 오셨는데, 영부인이 돌아가시고 안 오신 걸로 기억난다. 그리고 한참 후 영애, 박대통령이 오시다,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오셨다. 그리고 저도는 다시 어민의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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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6
조선은 왜 실패했나(14)-유교(성리학. 주자학)가 원인이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수령이 백성을 위한 것인가, 백성이 수령을 위하여 태어난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옷감을 내어 그 수령을 섬기고, 백성의 고혈과 뇌수를 짜내어 그 수령을 살찌우니, 백성이 수령을 위하여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수령이 백성을 위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영.정조 시절에는 이미 성리학(주자학)이 조선의 사상체계로 자리를 잡았고, 유교의 주자학적 해석 이외에는 이단으로 배척되던 시대였다.


임진, 병자호란으로 국가와 민생이 피폐해져 있는데, 오히려 조선 사대부들은 공허한 유교 명분논쟁에 몰두해 있어, 효종이 상을 당하자 복상을 얼마간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논쟁에(예송논쟁)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명이 북방 오랑캐 청에 망하자(1644) 조선은 중국보다 더욱 성리학을 발전시켜 소중화를 추구했다. 18세기 국가나 백성이 모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기, 양반은 수탈로 생을 이어나가고, 이런 현실을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호 ‘양반때문에…’에서 당시 시대상은 이미 언급했으나, 도대체 이런 상황이 왜, 조선에서 일어났을까? 무엇이 근원적 이유일까? 조선의 국교와도 같았던 유교(성리학. 주자학)에 그 원인이 있다.


 1. 조선초기, 성리학은 조선에 유용했다.


12세기 송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발전한 나라였다. 당시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발전지수가 높았다. (그랬다면 왜 서구에 뒤졌나? 이는 "왜 서양이 지배하나"에서 설명한다(이언 모리스 ).


광대한 중국대륙을 통일한 송은 한 명의 왕이 통치하는 나라로 안정된 통치를 위한 이론이 필요했다.


"왕은 왕으로, 신하, 백성은 각자의 위치가 있으니, 그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 해야 한다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이론을 유교가 제공했다. 즉, 자연도, 사회도 그 속에 본질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는 것이고, 인간사회 역시 당연한 질서가 있으니, 자신의 위치에서 그에 합당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는, 도전 받지 않는, 안전한 계층적 질서를 강조하는 이론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에서 송은 유교(성리학)를 발전시켰다.


조선 역시 통일 왕국을 유지하는 데, 유교는 더없이 필요한 이론이됐다. 조선은 이로서, 민본주의, 왕도, 덕치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추구했고, 이를 위해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이로서, 조선 사대부 양반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공자 맹자만 외우면, 백성이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이론이 합리화 됐다. 비록 나라를 망치는 이론이었으나 양반에게는 얼마나 좋은가?


조선 초,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 유교학자를 양성하고, 사또가 임명되는 모든 현에는 유교학교, 향교를 설치한다(일읍일교). 이로서 중앙은 유학자 중심으로 덕치를, 지방은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로 조선 전기,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관학인 향교 외에 지방 양반들이 사학으로 서원(서당)을 활발히 설립했고(문중서원), 이에서 양성된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17세기에 이르러, 임진, 병자호란을 겪고, 명이 망하는 것을 본(1644) 조선은, 유교의 옳은 도리로서 사회동요를 막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을 대신, 동양의 유교나라, 소중화를 추구한다.


이게 지나쳤는가(?), 조선의 사상체계가 된 성리학은 유교의 주자학적 해석 이외에는 이단으로 금하는 우(경직화)를 범한다. (인간의 욕심을 인정하는 양명학; 부자 되는 것이 나쁠 것 없다.)


18세기,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여러 학설이 나오고 이는 학파 당쟁의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유교본연의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민본정신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운명도 다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14-17세기와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방에는 수공업, 광업이 발전하고, 농업의 경우 산지개간으로 농지확장, 모내기, 퇴비사용, 이모작 등으로 사회적 변천 속에 경직된 유교정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돈은 백성의 타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속에 상업을 억제하고(억상), 농사만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소박한 중농사상은 이미 국리민복, 부국강병을 신념으로 거침없는 약육강식의 19세기에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2. 왜, 조선은 주자학인가?


 맹자는, 인간은 본래 도덕적 본질이 있다고 보아(성선설), 이를 토대로 목가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그러나 맹자가 원했던 이런 이상사회는 맹자 이후 2300년 동안 실현된 예가 없었다.


그러한 맹자의 성리학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앉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사대부에는 소위 국리민복, 부국강병의 길을 추구할 이유(필요)가 없었다. 국민이 부유해져야 국가도 부유해져 강병도 추구할 수 있다는 상식이 그들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국방은 언제나 형제의 나라 명이, 군신의 나라 청이 그때그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아무리 기근이 들고, 삶이 어려워도, ''백성은 양반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유교에서 나온 신분사상이 있어, 다산 정약용이 보았듯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수령을 살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왕도, 사대부도 국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이 상식인 시절, 1905년 9월 미국 사절단으로 당시 26대 미 대통령의 딸, 에리스가 고종을 알현한다. 21살,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 본 고종은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바란다''고 편지한다. 가난을 미덕으로(청빈), 목가적 이상주의 국가를 염원했던(유교), 조선은 이렇게 실패했다. (끝)

 

※ 알림: 갤러리아 쏜힐점 문화교실에서 매월 첫째 주 수요일 낮 12시 30분에 천하성씨 ‘조선은 왜 실패했나', 문종명씨 ‘과학 이야기’ 강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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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조선은 왜 실패하였나(13)

  

(지난 호에 이어)


나. 그래도 합격만 하면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은 16세에 생원, 진사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한다. 성균관은 생원, 진사를 각 100명씩 선발한다. 그 전에 우선 1차 시험 초시, 2차 복시를 거쳐야 한다.


이항복은 성균관에서 5년 공부 후 최종시험, 알성시에 합격한다(24세. 선조 13년). 33명의 합격자에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임금이 합격증서 홍패를 하사하고 그들 부모를 위한 잔치, 은영연을 연다.


악공이 연주하는 가운데 기생이 술을 권하고 재주꾼들이 흥을 돋운다. 이어 급제자들은 사흘 동안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로 멋을 내고 시가행진을 하는데, 여기에서도 천동이 길을 안내하고, 악수가 풍악을, 광대가 이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주를 부리며 흥을 돋구고, 그 뒤에 급제자가 말에 앉아 서서히 뒤따른다.


지방 출신은 광대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고향 어른을 모신 가운데 홍패고사를 지내고 시가행진을 한다. 과거 급제는 고향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 넉넉지 못한 집안에는 부담이 되어, 잔치에 재산을 탕진해 어려운 처지가 되어 평생 빚쟁이로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황홀한 축제 뒤에 덫이다.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모두 관직에 임명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조선에는 정부가 임명하는 직이 중앙에 750여, 지방에 1000여 자리(문관)가 있어 관직 얻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던 중 직이 주어지면 이 또한 축하할 일이 되어 면신제라 하여 신고식이 있었다.


고참이 신참에게 향응을 베풀고 친목을 다진다는 뜻이다. 이 역시 광대와 기녀들이 따랐고 밤새 술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풍류를 맘껏 즐기는데, 짓궂은 선배들이 인분을 당나라 향료라 하여 얼굴에 발라주는 등 장난이 지나쳐 병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제한된 신분, 양반들만의 잔치였다. 우선 서당에 갈 수 있는 집안에서나 가능했다. 일반 농가에서는 서당에 입학할 5-6세의 나이이면 들에 나가 부모 일손을 도와야 했다. 또한 공자, 맹자, 천자문 등의 책값이 군포 두어, 또는 서너 필 값이었다. 당시 1년에 한번 내는 군포가 2필인데 평민에게 공부는 가당치 않았다.

 

난장판이란 말이 과거시험에서 유래됐다는데, 조선 중기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서당이 600여 곳, 조선 후기에는 900여 곳에 이르기도 했고, 전국의 응시자가 모이니, 3년에 한번 아마도 때로 난장판으로 보이기도 했던 듯하다.


조선의 교육열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던 듯, 그러나 공부만 한 생원들이 과하게 늘어 부작용도 심해 대원군은 일부(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한다.


다. 양반의 비리


1. "아전 때문에 나라 망친다"라는 상소문이 있었다(숙종. 송시열). 그러나 " 양반 때문에---"라는 글은 없는 듯하다. 역사 기록은 양반이 썼을 테니까. 아전은 양반의 하수인이다. "이놈"하고 주의를 주면 꿈쩍도 못하는 신분이다.


이들은 관가에 빌붙어 수령의 업무, 대인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이다. 수령의 임기는 1-3년이라 자리가 자주 바뀌고, 중앙에서 내려온 터에 업무파악도 재대로 안 되고, 더욱 재임기간 중 대부분을 한양에 거주하고 있어, 실무는 사실상 아전이 담당하는데, 이들의 비리가 심해 백성을 어렵게 했다.


영국 여행가 비숍이 어느 관서지방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글을 보자. "관찰사(도지사)는 모든 가구에 100냥을 거두어 전신주를 세운다. 그러면 수령(군수)은 그것을 200냥으로 늘리고, 다시 아전이 250냥으로 늘려, 백성의 부담금은 250냥이 된다” 100냥의 세금이 250냥으로 늘어난 것이다.


아전(중인)의 역사는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고려의 지방호족 출신들은 토지와 관직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방 토박이인지라 현지사정에 밝고, 글을 아는지라 부임한 사또의 업무를 돕는 하급관리(아전)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사회에서 양반과 양인(일반 백성)의 중간 신분으로,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었는데, 정부는 이들을 과거도 볼 수 없는 신분으로 얽어 매어 제도적으로 차별했다. 
달리 할 일도 없어 지방 실무행정가가 됐는데, 이들은 실질적으로 지방의 제2인자 였다. 백성의 생활에 매사 접촉하는 위치에 있고, 군대도 면제되고, 직이 세습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자리라 철종 때는 아전 직이 쌀 1000석 값에 해당됐다.


 2. 사대부도 먹어야 한다


어떤 관리도 관직에 항상 있을 수 없다. 당파싸움에 사직할 수도 있고, 조기 교체될 수도 있다. 결국 걱정 없이 살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점은 지금의 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다. 


공자, 맹자 30년을 공부했지만 그들은 땀 흘려 일할 줄은 모르니, 관직에 있는 동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가지면 더 갖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것이 생계형을 지나 치부형에 이르면 이를 감당 못하는 농민은 반란을 일으킨다. 19세기 조선은 민란의 시대였다.


 철종 말년, 주로 3남 지방에서 관아를 파괴하고, 수령을 축출하고, 악덕 아전은 죽이는 등의 민란이 37개 지역에서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이에, 3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그 내용이 결국은 착취를 금하는 내용이어서 기득권의 이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얼마간 정부의 의도대로 민란이 가라앉았으나, 이번에는 양반들이 "못 살겠다"하는 터에 조치는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폐지된다. 


지배층 양반은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에 철종 13년(1862년)에 민란이 다시 일어났고, 고종 때에는 전국으로 확산(47개 지역) 되면서 수령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같은 시기, 부국강병이라면 무엇이던지 할 태세인 일본을 옆에 두고, 조선은 참으로 거꾸로 가고 있었다.


 3. 조선의 세금 징수는 총액제


정부가 일정금액을 군현 단위로 미리 정해, 세금수취의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세수업무를 수령과 아전에 위임 함으로서 자의적으로, 제한 없이 수탈할 수 있는 함정을 만들었다.


악덕 수령 밑에 먹고 살 길이 없어 도망가거나, 민란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던 조선후기였다.


비숍의 글을 다시 보자. "어느 사람이 조그만 돈을 모았다고 알려지면, 관리들은 그것을 빌려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거절하면, 체포하여 당사자의 친척이 그 돈을 낼 때까지 곤장을 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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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조선은 왜 실패하였나(12)-거꾸로 간 조선 후기

 

 (지난 791호에 이어)
경제적으로는 농업의 경우 볍씨를 흩뿌리던 모종방법이 모내기, 퇴비사용, 산지개간, 이모작 등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수공업, 광업도 발전하고 있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18세기에는 경기 서울 일대의 명문가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 이들의 탐욕적인 국정운영이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로 만들었다.
 양반이 나라를 망쳤다


 조선 농민의 대부분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땅 주인에게 겨우 몇 배미의 땅 조각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었다. 자그마한 땅 조각을 갖고 있더라도 조만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기 일수였다.


흔히 말하는 대로 찢어지게 가난하여, 하루하루 연명하는, 말 그대로 고단한 나날이었다. 22대 임금 정조 당시 면천군수 박지원의 글을 보자.


5인 가족, 소 한 마리, 논밭 50마지기를 소유한 어느 소작인의 한해살이: 그의 평균 년 생산은 497두. 우선 세금으로 지대250두, 전세 72두를 납입하고, 내년 농사 종자로 49두를 떼고 나면, 나머지가 5인 가족 1년 생활용이다. 곡식이 돈이었던 시절, 여기서 의복, 소금 등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나면 겨우 입에 풀칠이 가능한데, 흉년이 들거나 빌린 곡식이 있거나 집에 우환이라도 생기면 영락없이 적자다. 빠듯한 생활에 세금이 밀리고 불행히도 가혹한 수령을 만나면 밀린 세금 때문에 주기적으로 곤장을 맞게 된다(하멜 표류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고려 권문세족에 몰려있는 농장을 몰수,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니 조선 왕조 설립시 설정된 좋은 제도는 어디 가고, 국가의 노골적 착취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조선초기(15-16세기), 개혁정책의 추진으로 제반 제도가 정비되고 정치적 안정, 문화융성을 이루었으나(태조-세종-성종), 중기(16세기, 명종) 양반의 과전이 세습되는 등 경제 체제가 해이해지기 시작하면서 국정이 문란해지고, 임진, 병자호란을 겪으며 나라가 꺼꾸로 가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들어선다.

 

정상국가를 받치는 중요한 축인 세금, 교육, 사회 기강이 조선 후기 어떠했는지 보자.


과거제도의 몰락


중국 명나라에서 활발했던 과거제도는 고려 때부터 실시됐다. 옛날의 학자는 벼슬을 구하고자 학문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학문을 이루면 남들이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음서). 


후에 조선의 모든 관리는 과거를 통해 등용되었다(음서도 얼마간 혼용되었고, 하급 관리에는 과거급제가 안 되도 성균관 학생이면 임용되기도 했다)


 가. 양반 되기


돈 있는 집안 자제는 어린 나이에(6-7세) 서당에 입학, 천자문, 사서삼경 등 기초한학을 배우고(초등과정), 15-16세에 향교에 입학한다(중등과정). 향교는 정부에서 수령을 파견하는 읍이면 모두 설립했다. 초기에는 중앙에서 교관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임란 후 지방 양반이 훈장(교관)이 되었다.


유교의 주요내용인 소학, 대학, 논어, 주역, 춘추 등을 마치면 생원, 진사시를 치르고,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문과에 응시하는데, 과거는 3년마다 33명을(문과) 뽑았다. (기타 무과 28명, 잡과인 의관, 역관 등).


응시자는 6만 명 수준으로 2000대 1 정도의 경쟁률 이었다. 합격자는 평균연령이 35세라 하니, 30년을 공부한 것이다. 당연히 낙방자가 양산 돼 그 시절에도 시험공부만 하다가 늙어버리는 ‘길 떠나는 나그네’인 고시낭인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은 학생시절부터 군역과 세금이 면제되니, 이런 특전으로 서당에는 학동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다 한다. 


과거제도는 어려서부터 근로나 백성의 의무를 모르는 백성을 길러냈다. 나이 들고 급제 못하면 결국 폐인이 되거나, 글을 아는 고로 지방의 일자리를 얻게 되는데(향리), 조선의 봉급체계가 상후하박이 심하여 말단 직에는 봉급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결국 생계형 도적이 된다. 그래서 조선 말기 교육기관은 도적학교가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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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1)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이를 기초로 왕도정치를 추구하고,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왕도로 사회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이상국가). 


이에는 인간은 탐욕스럽고, 정치는 부패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고로 도덕적으로 교육된 인간이 도덕정치(왕도)를 실천함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이룩할 수 있으며, 또한 지배층의 부패를 예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 개혁의 이념적 근거인 성리학을 좀더 학문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논쟁이 야기되고, 17세기, 이 논쟁이 다른 논리(학파)를 배타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상적인 학문이 현실에서 이상하게 굴곡하는 우를 범했다. 이 논쟁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당파를 만들고, 이상적인 학문인 성리학은 현실에서 당파싸움의 도구가 되었다.


결국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논쟁으로 전락한다. "왕과 왕비의 상에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하는 논쟁(예송 논쟁)이 피 튀기는 정쟁이 되고, 18세기 더욱 심하게 되면서 조선 말기로 이어진다. 딱한 일이다.


이로서 정치-사회 개혁의 이념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조선 말기 그 긍정적 기능을 상실하고, 조선 실패의 원인을 자임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교사상 체계인 성리학은 농본주의적 중세사회의 학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농업의 발전뿐 아니라 상공업이 발전되면서 사회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고, 이에 맞는 다른 사상이 필요했다.


성리학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나, 조선의 사대부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온 서구가 조총, 대포를 앞세워 문을 두들일 때, 조선의 사대부는 "공자왈, 맹자왈" 하며 익힌 사상으로 이를 대하고자 하니.


모택동도 중국의 후진성이 유교에서 기인했다고 봐 공자사당을 모두 부시는 등(홍위병), 과거의 전통과 결별을 선언했다. 


 다) 조선의 성리학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된 학풍으로,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 했다 해서 일명 주자학 이라고도 칭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는 그 속에 본성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이나 인간사회나 모두 위계질서를 갖고 있어, 동물 세계에서도 모두 똑같은 동물이 아니라 각기 다르듯, 인간 속에서도 이와 같이 모든 게 다 같지 아니하고, 그리하여 그 속의 인간은 각자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함이 인간 각자의 도덕적 의무라 했다.


이러한 성리학의 사고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고, 이것이 조선 왕조 초기 개혁적 성격을 띄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적절하고 필요한 논리가 되어, 그 필요로 인해 조선의 주요 통치 이념이 된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저자 이언모리스는 “공부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 시대의 통치에 필요한 이론을 찾아낸다” 했는데, 조선이 그러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부터 16세기 중엽, 세조 이래, 공신 세력이 가문의 힘을 이용, 부를 확대해 가자, 이로 인해 땅을 잃은 양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더하여 지배층의 비리와 탐학으로 농민은 과중한 조세부담을 지게 되고, 지방 사족(사림파, 지방의 중소 지주)들은 이러한 불안한 사회를 보고 이를 적극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의 중앙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장,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이를 통한 사회적 안정을 구현하려 하였다.


또, 사림파는 향촌질서 구현에도 고민하였는데, 이것이 향약 보급운동이다(이는 별도로 소개한다).


16세기 들어 성리학은 학문적 연구와 논쟁을 거쳐, 이를 조선의 독자적 사상체계로 발전시켰다. 도덕과 그 실천을 중시하는 기풍에 사우(교우) 관계를 중시하는 흐름이 가미돼 학파가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이러한 사우-학파의 연결이 정치적 상황과 충돌할 때, 자기 학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당파로 변질되고, 18세기 들어, 이상적 국가의 추구로 시작된 성리학은 당파싸움의 도구로 전락하여, 조선 실패의 단초가 된다.


더욱이 성리학이 시대적 유용성을 다해가는 상황으로,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사회에서 나타나는 농업, 상공업의 발전으로, 14~16세기와는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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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0)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왜 실패했나’를 생각하면 1800년 이후, 격동의 100년을 조선에서는 10대의 소년이 통치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또는, 유교가 문제였다고도 한다.


유교는 간단히 언급할 수 없는 문제다. 조선은 유독 유교적 문화가 깊었는데, 이것이 망국의 원인이 된 연유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신분차별, 양반제도 역시 유교적 통치이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연과 인간사회에는 본질적 질서가 있는데, 하늘과 땅이 있듯, 가정에는 부모-자식 같이, 국가에는 넘을 수 없는 계층질서가 있다고 유교는 본다. 근본적으로 차별적이다.


그 질서 속에 각자는 자기의 신분을 지킴이, 인간도리라 생각했다. 이에서 신분제도가 싹튼다. 양반과 일반인(양민), 또는 중인, 노비는 각자의 신분질서 속에 작자의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백성에게는 엄히 다루어도 양반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죄가 되어도, 양반은 자기 노비를 시켜 벌을 대신 받도록 했다. 양반은 굶어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아니했다.


아마도 유교적 문화가 조선 망국의 제 1원인인 듯하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설명이다.


다음 질문은 조선이 왜 이토록 유교를 숭상했는가(?) 이다. "사상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은 "그 필요가 왜 거기서 발생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이 지리(지리정치)이다. 이상이 이언모리스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순서대로 들여다 보자.


1) 어린 왕이 문제였나(?)


지덕체를 모두 갖춘 임금, 정조가 왕위 25년, 1800년에 승하한다. 이어 순조가 11세에 왕에 오르고, 어린 왕을 보필하고자 했던 조치가 뜻과는 달리 조선 말기 외척의 세도정치 시작으로 흐른다. 정조는 죽기 전 어린 아들을 걱정해, 당시 유력한 인물, 김조순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김조순은 김상헌의 후예로, 김상헌은 병자호란 중 청과 주전론을 외치며 친명배청을 외처, 당시 정치중심에 떠올랐고, 이후 그의 후대가 계속 정치의 중심에서 붕당정치를 이끌고 있었다.


정조는 이런 유력 가문에 의지, 어린 왕의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당정권은 부패하는 속성이 있는지, 이들은 파벌을 만들고, 집결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왕은 이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또, 왕은 이런 가문의 협조가 필요, 혼인관계(왕비)를 맺으니 이로서 세도정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실패는 시작되었다.


2) 유교(성리학 또는 주자학)가 문제였나(?)


가) 중국의 세계관


중국은 오래 전부터, 자기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있고, 왕(천자)은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중국이 세계중심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송 대에 이르러, 중국 외각에 위치한 타국은 오랑캐로, 또 그보다 멀리는 금수로 보는 화이론이 전개되었다.


이 생각이 명으로 이어진다. 조선은 중국에 가까이 위치했고, 당시 송의 문화는 세계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세계관이 조선에 유입된다. 명이 오랑캐 청에 망하자, 조선은 명이 갖고 있던 중화문화의 계승을 자청(소중화), 중국보다 더 유교에 집중한다.


이 때에 서구문물과 접촉이 발생한다. 당연히 서구는 금수다. 16세기 서양 선교사가 천문학을 소개하고, 하늘의 이변, 일식, 월식을 예측하는 등 지구는 둥글다는 신지식을 소개한다.


지구가 둥글다면 위치상 세계중심국이 있을 수가 없고, 그들이 갖고 온 지도에는, 중국은 좀 크긴 해도 중심에 위치해 있지도 않아, 중국의 기존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중화사상은 허구가 아닌가?


나) 성리학


성리학은 송 대에 유학사상을 발전시켜, 송, 명 대에 유교의 주류학문이 됐고, 조선은 이를 받아드리고 발전시켜, 조선의 주류 통치사상이 됐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가 처음 성리학을 수용,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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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3.1절 100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9)-하멜 표류기(2)

 

 

 

(지난 호에 이어)


귀족들은 기생이나 다른 동반자를 데리고 절에 자주 놀러 옵니다. 사원은 숲이 우거진 산속에 위치해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또 절 건물은 그 나라에서 가장 잘 지은 건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원에서 중들은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절 이라기보다 갈보집, 선술집 같이 보입니다.


 5) 여행과 접대


나그네들이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는 여관 같은 곳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 날이 저물게 되면, 양반집 이외에는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자기가 먹을 만큼 쌀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집 주인이 그 쌀로 밥을 지어 반찬과 함께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서울로 가는 큰 길에는 관리나 평민이나 함께 묵어갈 수 있는 주막집들이 있습니다.


 6) 교육


양반이나 잘 사는 사람들은 자식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며, 어릴 때부터 선생을 두어 글 공부를 시킵니다. 그 어린이들은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옛 성현들이 어떻게 하여 지위나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고 자랍니다. 이렇게 하여 과거에 합격하면 왕으로부터 합격증서를 받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증서입니다.
이 합격증 때문에 젊은 양반이 거지가 되어버리는 수도 많은데, 이유는 내야 할 기부금과 잔치비용이 많이 들어 재산을 날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많은 투자를 하고, 또 합격을 해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합격했다는 사실 만으로 보람을 느낍니다.
종(노비)들은 이와 달리 자기 자식을 거의 돌보지 않는데, 이는 자식이 일 할만한 나이가 되면 주인이 데려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7) 민족성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믿을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 먹으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
한편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 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말을 믿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약한 백성입니다. 나의 친구 벨테프레(하멜보다 26년 먼저 이 땅에 표류되어 결혼하고 정착한 최초의 서양인, 화란인)가 말하기를 타르타르인(?)이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는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는 병사가 더 많았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일본으로 가던 영국, 포르투갈, 화란 배가 해안에 표류하면 그 배를 나포하려 시도하지만, 나포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에 격퇴당해 돌아오기가 일쑤입니다. 그들은 피를 싫어해 누군가 전투에서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맙니다.
(400년 전이라 하지만 나라가 이래서야… 임진왜란 직후여서 정신 차릴 때도 됐는데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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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3.1절 100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8)-하멜 표류기(1)


 
1653년(조선 17대 효종), 대만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스페르베르호는 제주도 인근에서 좌초, 선원 64명중 36명이 살아남아 조선에서 13년을 머문다. 하멜은 1666년 조선을 탈출, 본국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그는 보험금을 청구하고, 그간의 급료를 청구하기 위해 조선 견문을 정리 했는데, 이것이 하멜 표류기이다. 17세기 유럽에서 발간된 최초의 조선 관련자료가 되어 이후 유럽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책이 됐다.


필자는 이 책에서 외국인에 비친 조선 백성의 진솔한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그런 내용은 별로 없다. 아마도 그가 여행가로 조선에 온 것도 아니고, 고생스러웠던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멜은 1600년대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지,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조선의 관리


사또는 임기가 1년 입니다. 그 밖의 관리들은 임기가 3년이지만, 과실을 저지르고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파면되는 관리가 많습니다. 국왕은 국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항상 정탐군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사형을 받거나 종신 유배를 당하는 관리들이 많습니다.


 2) 형벌


국왕이나 국가에 배신하고 기타 중죄를 범한 자는 매우 혹독한 벌을 받습니다. 범죄자의 전 가족이 몰살되고, 살던 집은 헐리며, 그 터에는 다시는 집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의 재산과 종들은 전부 몰수되던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이런 일이 우리가 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국왕은(효종) 자기 형수(소현 세자 비)가 바느질 솜씨가 좋은 것을 알고 옷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국왕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 속에 부적을 집어 넣었습니다.


왕은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왠지 평안을 찾을 수가 없어 옷을 뜯어 조사해보니, 그 속에서 부적이 나왔습니다. 왕은 형수를 동판을 깐 방에 가두고, 불을 때서 타 죽게 했습니다.


어느 고관이(황해 감사 김형욱) 이에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그는 곤장 120대를 맞고 참수 당했습니다(대개 곤장 100대면 죽는다).

 

하멜 자신도 잠시 조선군에 근무했는데, 당시 자기 부담으로 총알 50발과 거기에 쓸 화약을 소지해야 하는데, 화약을 충분히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5대 맞는 벌을 받았습니다.


남편을 죽인 여인은 길가에 어깨까지 파묻고, 그 옆에 나무톱을 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톱질합니다. 주인을 죽인 종은 고문을 해서 죽이고, 이에 반해 주인은 사소한 구실로도 자기 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여자가 간통을 한 경우, 남편이 아내를 죽여도 무죄가 됩니다. 유부녀와 간통을 했거나 달아난 사람은 그 여인과 함께 마을로 끌고 와, 옷을 발가벗기거나, 또는 속옷만 입힌 채, 얼굴에 회칠을 하고, 두 사람의 귀를 뚫어 엮고, 법의 집행자는 "간통한 년 놈이요" 하고 소리지르며 온 마을을 끌고 돌아다니다가, 곤장 50-60대를 때립니다.


 3) 세금


국왕에게 세금을 제때에 내지 못한 사람은 밀린 세금을 다 낼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정강이 뼈를 맞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의 일가친척이 밀린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은 결코 자기 수입을 못 받는 법이 없습니다.


보통 죄는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는데, 가볍게 말 한번 잘못해도 그런 벌을 받기 때문에 백성들은 매 맞는 것을 별로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4) 종교


이 나라에는 사찰이 굉장히 많은데, 모두 경치 좋은 산 속에 있습니다. 어떤 사찰에는 5, 6백 명이나 되는 중들이 살고 있고, 그 사찰이 다스리는 종이 3, 4천명 되는 곳도 있습니다.


누구든 중이 되고 싶으면 중이 되고,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들은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머슴보다 별로 나을 게 없습니다. 그러나 지위가 높은 중은 존경을 받는데 주로 그들의 학식 때문입니다. 그들 중 국왕의 승려(왕사. 국사)라 불리는 중도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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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3.1절 100주년 기념]조선은 왜 실패하였나(6)

 


이집트나 그 외 다른 가난한 나라의 빈곤에 대해 대부분 학자나 평론가는 그 주요 이유를 지리적 위치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막이고, 강우량이 부족하여 토양과 기후가 농업에 부적합하고, 이들의 문화적 속성이 경제발전과 번영을 저해하는 이슬람적 신념을 갖고 있는 탓이라 한다. 또는 지배층이 나라번영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해 그릇된 정책을 시행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학자들은 백성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배만 부르면 된다는 소수 권력층이 이집트를 다스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1981-2011년 재임)은 개인 재산이 700억 달러에 달한다.


과거 몇 번 혁명이 있었으나 바뀐 것이 없다. 여러 의견이 있으나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권력을 소수층이 독점하고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다른 나라의 빈곤을 설명하는 보편적 이론이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제도이다. 정치와 경제제도의 상호 작용으로 한 국가의 빈부가 결정된다. 관료가 부패하면 반드시 망한다.

 

 

(지난 호에 이어)


스탈린과 공산당 정치국이 마음을 바꾸면, 이전 계획이 뒤집어지고 무시된다. 현실이 그러니 고스프란은 의사 결정을 하기 꺼렸다. 


더욱이 잘못된 결과가 나오면 결정에 참여한 자는 총살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책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1937년 인구조사를 했다. 결과 1억 6200만이었다. 스탈린이 기대한 1억 8천만에 한참 모자랐다. 3년 전에 발표한 1억6800만에도 못 미쳤다. 그 동안 숙청과 기아 탓이었다. 스탈린은 인구조사담당자들을 시베리아로 보냈다.


2년 후 다시 조사를 했다. 이번에는 스탈린의 의도를 알아채고, "자세히 알고 보니 1억7000만 이었다"고 발표했다. 스탈린도 소비에트 경제에서 인민이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소련 노동자도 목표 생산량이 달성되면 상여금을 받았다. 꽤 많은 상여금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생산량은 당연히 지난해 생산량을 기준으로 작성된 탓에 상여금을 받기 위해서는 목표생산량이 매년 상향되어야 하고, 계속 더 많이 만들어 내야 하기에 고달프게 됐다.


1940년대에 접어들자 지도자들은 이런 잘못된 인센티브제도를 알게 되었다. 당근뿐 아니라 채찍도 함께 써야 한다고 결정했다. 법을 만들어 열심히 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조리 범죄자로 취급했다.


새로 만든 법은 허락 없이 작업장을 20분 이상 비운 자나, 무단결근자는 25% 감봉, 또는 6개월 강제노동이다. 그 결과 1940년부터 1955년 사이에 성인 3분의1이, 그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그 중 25만이 총살, 1500만이 감옥, 250만이 시베리아로 갔다. (매년 농땡이로 감옥 가는 인구가 100만). 


그래도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결국 1987년 고르바초프가 이런 착취적 제도를 벗어 던지자 공산당은 흔들렸고, 소련은 와해됐다.


 북한 이야기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1950년 북한은 남한을 침공했다. 황평원이 동생과 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형은 가까스로 인민군 징용을 피할 수 이었고 이후 남한에서 약사로 일 했다. 의사인 동생은 북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50년 만에 이산가족 행사에서 둘은 만났다. 동생은 북 공군에서 일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괜찮은 직업이다. 동생은 잘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형의 눈에는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


형은 북쪽에서 나온 가족들이 돈을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바 있어 동생에게 돈을 주려 했다. 동생은 "가져가봐야, 그 돈 내놓으라 할 테니, 그냥 넣어두라"고 했다. 동생이 낡은 외투를 입고 있어 “그 외투를 벋고 이걸 입고 가라” 했으나,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여기 오려고 정부에서 빌린 것이다"


독자도 아는 바, 남북간 경제격차가 크다. 1945년 두 정부가 판이한 경제운용 방식을 택하면서 운명이 갈렸다. 오늘날(2019년 신년사) 이들이 경제개발에 매진 하겠다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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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3.1절 100주년 기념-조선은 왜 실패하였나(5)

 

(지난 호에 이어)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면화는 우즈베키스탄 수출의 45%를 차지하는 제일 중요한 작물이다. 소련 공산정권하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농가가 국영농장에 속했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국영 농장은 모두 와해되고 농지는 분배되었다. 그렇다고 농민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초대 대통령 카리모프가 당선되었다. 신 정부는 농민이 어떤 작물을 생산하고 얼마에 팔 수 있는지 가격을 정했다. 면화는 값비싼 수출품이었지만 농민은 세계시장에 판매한 가격의 일부만 가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정부 몫이다.


 농민에게 별 소득이 안 되니 애써 면화를 재배하는 농가가 없었다. 정부는 모든 농가 농지의 35%를 면화 재배에 활용할 것을 강제하였다. 소련 붕괴 당시만해도 면화 수확에 농기구 콤바인이 이용됐는데, 신 정부 하에서는 농민이 열심히 일 할 의욕이 없어져, 농기구를 정비하지도, 새 농기구를 구입하지도 않았다.


수확에 차질이 생겼다. 정부는 새 농기구 구입보다 값싼 해결책을 내놓았다. 면화 수확기 9월이 되면 전국의 학교마다 수확량을 배정한다. 수확기 2달 동안 가까운 농장에 배정된 학생들은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간다. 도심지에서 온 아이나 멀리 사는 아이는 농가 창고에서 잔다. 점심도 각자 준비한다. 


2006년 국제가격은 킬로당 1.4 달러였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3센트를 받는다. 봄이 되면 면화 밭 김을 매고, 옮겨심기 위해 다시 동원된다. 75% 정도를 학생이 수확한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당연히 이런 어린이 노역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대통령과 그 측근이다. 이걸 바꾸고 싶지 않은 거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1991년 당선 후 다른 정치세력을 탄압하고 보안군을 앞세워 자유언론을 모두 억압해 버리고, 투표를 통해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다시 2000년에 7년으로 바꾸고 90% 득표로 재선됐다.


카리모프 정권하에 우즈베키스탄은 가난에 찌들어있다. 평균 국민소득이 1000 달러 정도. 이런 현실은 오래 전에 잊혀진 과거의 유물 같지만 21세기에 들어서도 독재자 일가와 그의 가신 체제하에 신음하는 나라가 많다.

 

구 소련의 해체로 독립은 됐으나, 신 정부를 이어받은 사람은 구 체제의 사람들이어서 옛 버릇은 그대로 답습된다. 안타깝게도 이를 대신할 준비된 대안세력이 없어 반복되고 있다.


 소련 이야기


스탈린과 그의 뒤를 이은 지도자들의 정책이 얼마간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몰라도 지속 가능한 방식은 아니었다. 착취적 제도는 두 가지 이유로 벽에 부딪힌다. 경제적 인센티브 결여와 신진 엘리트 층의 반발이다.


고스프란(gosplan. 국가계획위원회)은 소비에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담당했는데, 현실을 보자. 장기적 안목으로 합리적 투자를 한다는 멋진 목표는 있었지만, 우선 계획이 걸핏하면 수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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