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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을 찾아서(57)-사랑장을 쓰게 된 동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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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던 중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됩니다(사도행전 15장 38~39). 이유는 단지 1차 전도 여행 중에 일찍 돌아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이를 안된다고 우기는 바울 사이의 사소한 의견의 차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마가를 데리고 가자, 말자, 하는 것이, 이 두사람이 서로 갈라 설만큼 큰 싸움의 이유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바울에게는 하늘같은 은혜를 베푼 바나바인데 말입니다.

바울이 비록 회심을 하였다고는 하나, 그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였다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하여도 어느 누구 하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음 속에서는 그 뜨거운 사랑이, 말씀이 용솟음 치는데 듣고 믿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막으로 들어 갔겠지요.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막에서 심신을 수양하였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회심한 때로부터 3년 후에야 그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소개하며 요즈음 말로 하면 신원보증을 서 준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다소에서 은둔하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불러와 함께 사역을 시작한 것도 바나바였고, 바울의 체험으로 나오는 열변으로 그 곳까지 피난 왔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리스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도록 그 행실들을 말씀에 기초하여 변하게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4:36-37 에서는 간단히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풀 수 있었던 곳도, 또 오순절 성령강림이 이루어진 곳 역시 마가의 다락방이었는데 바로 그 마가의 외삼촌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그를 무척 신임하고 신뢰하였었을 것입니다.

결국 바나바의 신원 보증으로 바울이 된 사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권위 내지는 자격을 베드로와 그 외의 제자들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바울은 물 만난 용처럼 그의 학식과 달변의 재능과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아주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각 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바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의 가정은 그 당시 얻기 힘든 로마의 시민권을 부모대에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있었던 상류 가문에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이 되어, 비록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당대 최고 교육을 받으며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되도록,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젊은이였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생활과 사상의 근저에는 유대 민족의 피와 전통, 종교가 뿌리 깊은 기초로 되어 있었기에 책임감에 불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었다가 다시 광명을 보게 되면서 회심을 하게 된 사연들은 사도행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장배경에서 형성된 그의 성격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변할 수가 있었을까요?

회심 후 새 확신을 얻은 그는 회심 전의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었다”고 하였습니다마는 그는 또,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성격이 새 사람이 되어 날마다 안 죽어도 되도록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하여 봅니다.

좀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가 속한 사회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똑똑함이, 그 능력이 그를 그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이유가 되는 약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는 것을 설명하자면 "잘난 체 하기는…!", 또 모르는 척하면 "교만하기는…!" 하면서 소외를 시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로에 서게 될 경우가 참으로 많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학문이 많은 사람들은 그 학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려 하다가도 그 학문을 이해 못해 관철시킬 수가 없는 사람을 보게 될 때 "에이, 무식한 …" 이런 말이 뱉아지게 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고 있는 많은 제자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힘입어 지혜로워 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배운 것 없는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네들이 보기에 바울은 자기보다 더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하고, 추진력도 강하며 신분마저 다르니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기와 질투, 그러다가는 그 시기와 질투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모략으로 모함이 시작되는 게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겸손하게 굴어도 "그건 가증스런 위선이야!" 할 때 어떻게 설득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 학식이 있고 사회적으로 신망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절대적인 약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오해일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말씀에 기초하여 말씀을 대언한 것이라고 쳐 두기로 합시다. 허나 이 또한 그의 교만의 결과라고 말을 한들 그로서는 억울하지만 피할 수가 없는 오해일 것이니까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하는 동안 있을 수 있었던 일들을 가정하여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아마도 여러 면에서 대조가 되고 비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이 교만하여 바나바를 업신여기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바울로부터 업신여겨진다는 느낌을 받으며 서러웠던 바나바여서인지 하여간 자그마한 일, 마가를 데리고 가자, 말자, 이 한 이유 때문에 서로가 결별을 하도록 심히 크게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바나바는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권위를 위하여 "사도된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이렇게 많은 서신서의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던 바울이 언제부터인가는 "죄인 된 바울은"이라고 고쳐 쓰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만큼 이제는 이력이 붙었고 자신이 생겼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자신의 에고에서 벗어났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한참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에베소에 거처하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와 성경교육을 실시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일들로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저 옛날,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로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결별하게 된 자신을 되돌아보며 일어나는 후회. “그 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 결국은 사랑장에 표현된 것이 아닐까요?

이 또한 어찌 보면 바울에게 이방전도를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만, 그 하나님의 속내를 모르니 우리 인간들의 심성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가정해 본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1~4)

그 때 내가 좀더 바나바를 사랑하였더라면… 마가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조금 더 겸손하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

마가가 중간에 다시 돌아간다 하여도 그 짐을 내가 지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 때 그렇게 성을 내었을까? "에이, 못 배운 것들… "하며 혀를 차지 않았더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6)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쁨으로 그네들의 의견을 쫓았더라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7)

그 때 내가 조금 더 참고 다투지 않았더라면… 바나바와 마가를 조금만 더 믿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혹시 이런 회한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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