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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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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로마의 개선문(2) -세베루스 개선문

 

 

두 번째로 세워진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에서 캄피돌리아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옛 모습 그대로 서있는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이다. 개선문의 앞면과 뒷면을 가득 메운 정교한 조각들은 많이 마모되었지만, 개선문 윗부분에 여러 줄로 길게 음각으로 쓰인 라틴어 문장만큼은 확실히 보인다. 


이 긴 라틴어 문장이 “국가의 일체성을 되찾고 로마 시민의 제국을 확장했기 때문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헌정한 것” 이라며 이 개선문이 세워진 동기를 알려주는 문구란다.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는 포악한 황제로 귀에 익은데, 막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우리들의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이다. 로마제국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렙티스 마그나(현재의 리비아 트리폴리) 출신으로 회계 감사관, 호민관을 거쳐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시칠리아 등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 밑에서 공을 세워 191년 판노니아와 일리리아 지방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내란 속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페르티낙스를 율리아누스가 살해한 후 황제로 자칭하자 뒤이어 시리아 총독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알비누스도 서로 황제임을 자칭하는 일대 혼란이 일었다. 


황제 자리는 하나인데 셋이서 저마다 황제라고 하도록 이 당시의 정치판도는 힘으로 좌지우지 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세루비스는 7대 군단 4만2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알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는 조건으로 연합하며 12개 군단 7만 2000명 중 2개 군단을 로마로 내려보내 율리아누스를 살해한 후 로마에 입성해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뒤이어 시리아 총독이며 황제로 자칭한 니게르를 대파하고 추격대를 보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살해했다. 그리고 197년 2월 19일 배로 불어난 대군을 이끌고 리옹 근처의 평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함에 따라 알비누스가 자결하고 세베루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이고 보니 그 중심, 로마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동맹과 배반을 쉽게 할 수 있는 권모술수와 더 강력한 군사력을 겸비하여야만 가질 수 있는 자리가 황제 자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후에 “군인 황제시대”라는 말이 만들어 졌지!


황제가 되어 내정을 정비한 후, 199년 동방 원정을 개시해 티그리스 강변까지 쳐들어가 파르티아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 했다. 


이 원정의 개선으로 203년 포로 로마노의 마지막 건축물인 세베루스 개선문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본국에 머무르며 각종 공공 시설 개발사업을 벌이다가 205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결국 아들을 황제 감으로 보지를 않았다는 이야기일 텐데, 이를 안 아들 카라칼라가 플라우티아누스를 살해하며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10년부터 칼레도니아 전역 제패를 목표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다가 211년 2월 4일 에부라쿰에서 사망하며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세루베스 개선문이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헌정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두 아들도 잠깐 드려다 보기로 하자.


세베루스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사이의 반목이 심각한 것을 알고는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도록 유언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카라칼라는 게타와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했지만 1년 후, 어머니 율리아 돔나 앞에서 동생을 살해하고 동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그를 죽였다고 원로원에 공포했다.


그리고는 동생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처형하고, 동생에 관한 기록과 형상들을 모두 지우고 파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개선문 윗부분에 새겨진 문장 중 네 번째 줄에 쓰여 있던 동생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다른 말로 대체해버렸던 흔적이 개선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베루스가 죽은 후 로마에서는 카라칼라가 황제 주치의로 하여금 아버지를 독살하도록 했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직접 죽였을 거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카라칼라는 난폭한 성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나 보다. 


카라칼라(Caracalla)란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명이었단다. 본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번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최대의 목욕탕을 짓고,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발표하는 등, 재위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하다가 결국 217년 암살을 당했다. 그래서인가? 요즈음도 “성이 문란해지며 목욕문화가 발달하면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이조시대의 궁중 암투를 보는 것보다도 더 자주 일어난 권력쟁탈 내전이 있었던 로마인데… 로마는 이후 오래지 않아 동서 로마로 나누어 진 후에 서 로마가 먼저 망하기는 하였지만, 이러면서도 1,000년 이상 수많은 유적을 만들며 세계를 쥐락펴락 할 수 있었는데… 반만년 역사를 가졌다는 우리는 같은 반도 국가이면서 무엇을 하였었나?” 왜? 누가 답을 할 수 있을까?


개선문의 꼭대기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개선마차에 올라탄 황제와 그의 두 아들을 조각한 청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개선문에 부조 되었던 화려한 승리의 감동도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도록 세월에 부식되어 가며 말없이 1800년의 세월 무상을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영화는 풀 잎에 내렸던 이슬 같은 것이라고… 그래도 오랜 세월 후에 이 개선문을 본 따서 만든 카루젤 개선문이 파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승리를 뽐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변함이 없는가 보다. 

 

 


   

 

 

그는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제명대로 살다간 황제였다. 18년 동안 로마제국을 통치했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마치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읊었듯이…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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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로마의 개선문(1) -티투스 개선문

 

 

많은 정변 속에서도, 침략하면 승리하던 막강한 세력을 유지해온 로마 시대에는 36개의 개선문이 세워졌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로마에는 2000년 전부터 세워진 개선문이 3개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남아있어 후대에 세워지는 대부분의 개선문의 모범이 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콜로세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지만 남아 있는 3개의 개선문 중에 제일 처음 세워진 개선문은 콜로세움의 서쪽으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 들어갈 때 지나게 되는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벌을 기념하여 세운 티투스 개선문이다. 

 

 

 

 


콜로세움 쪽을 바라보는 쪽 개선문의 정상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신격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신격 티투스에게 바친다’라는 뜻의 글귀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SENATVS/POPULVSQUE ROMANVS/DIVO TITO VESPASIANI F(ilio)/VESPASIANO AVGUSTO”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두 형제,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건국한 로마이고 보면 낳을 때부터 귀족인 집안이 어디 있었겠는가 마는 BC500년 경부터 시작된 공화정이 이어 오다 보니 수많은 귀족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다 한들 또 다른 귀족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인간사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정치적 혼란기에 여차여차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 아들 티투스가 자리를 이어받고, 또 뒤를 이어 그 동생이 황제가 되고 나니 집안의 귀족화, 신격화가 필요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티투스와 그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신격화되었다는 것은 이 개선문이 티투스가 죽은 다음인 서기 81년 이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세웠다는 뜻이 된다.


서기 71년, 유대나라를 완전히 초토화한 후 티투스가 많은 전리품과 노예들을 데리고 로마로 개선할 때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개선행렬에 함께 하였으나 아직 개선문은 없었다. 티투스는 후일 요세프스가 되는 요셉 벤 마티아스를 개선식에 대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타계하고 39세의 티투스가 즉위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의 친아들이 후계자가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자리를 세습할 수 있는 권한 등 많은 권한을 법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어떤 법령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자신의 치외법권적 권능을 인정받고 벼락출세한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포로 로마노를 확장하며 네로의 '황금궁전' 터 위에 콜로세움 공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군사문제에도 군기 확립과 안정을 도모하던, 10년의 치세 동안 로마 시민들은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종식시켜 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로 인정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 즉시 신으로 추앙되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 태우고 성벽을 헐어 버렸듯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 정복전쟁을 할 때까지는 성격이 포악하고 행실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로마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며, 로마의 도로망과 수로 등 인프라를 정비하는데 신경을 쏟으며 아버지가 시작한 원형경기장의 완공에 전념하노라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문 공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재위하던 2년 동안 로마에는 여러 가지 큰 재앙이 많았다. 서기 79년 8월 24일, 황제가 된지 불과 두 달 만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아직도 발굴 초기단계이지만 일부 입장이 허용되고 있다.)이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는가 하면, 서기 80년 초에는 로마의 중심부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서기 81년 여름에는 로마에 유례없는 전염병이 나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콜로세움 개막행사 100일 축제가 끝날 때쯤 그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고 하는데, 혹시 자신의 죽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기리기 위하여 개선문을 세운 것이란다. 반면 유대인들은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죄로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서로 보는 관점이 상반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에게 끌려서 로마로 온 수많은 유대인들의 후예들이 1400년 후에 피렌체에서 꽃을 피운 문예부흥 운동에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이 운동이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를 근대로 바꾸는 촉매작용을 하였으니 티투스의 개선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즈음도 유럽에서, 북미주에서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금융을 지배하고 있는 대다수가 유대 디아스포라의 후예들이니 말이다. 아직도 유대 나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옛날처럼 사두개파니 바리새파니 하며 서로 물고 뜯고 싸움질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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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이탈리아 로마(1) -콜로세움 3S의 효시?

 

 

 

로마!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쪽 벽이 부서진 채로 위용을 자랑하는 콜로세움(Colosseum)이다. 서기 7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949년 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로마 관광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자! 우선 콜로세움을 둘러보면서 이제는 미이라가 된 로마의 심장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원래 이름은 로마제국의 3번째 왕국을 이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성을 따라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유대나라의 멸망이 건설의 단초를 주게 되었다.

 

 

 

 


AD 64년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신전에 바쳐진 헌금을 압류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로마 주둔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로마군을 공격하여 기세를 잡은 후,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항복한 로마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말았다. 


반란의 여파는 다른 지방으로 점점 더 거세게 퍼져 나가며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자 유대를 관할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가 직접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그의 군대 역시 유대의 북부를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던 중 반란군의 기습으로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제국 내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해, 영국 원정을 통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정예부대를 맡겨 빠른 진압을 지시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군단은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반란군의 강렬한 저항을 받았지만, 한 달 반 만에 방어선을 뚫고 동굴에 숨어 있던 반란군 지휘자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의 항복을 받을 때 요셉으로부터 그와 그 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티투스의 막료로 종군하게 하였다. 

 

 

 

 


한편 로마군이 예루살렘 포위망을 좁혀 들어갈 때 로마에서는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가 되자 전쟁은 잠시 중단되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티투스가 신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로마에 가던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다. 


뒤이어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누르고 황제가 되자 오리엔트 군단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니까 요셉 벤 마티아스의 예언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비텔리우스가 제거된 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건너갔고, 아버지로부터 예루살렘 공략을 일임 받은 티투스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요셉 벤 마티아스는 티투스 곁에서 예루살렘 공략전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의 항복을 중재했지만, 결사항전을 외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 성은 넉 달 동안 계속된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고, 유대인들의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성 안 구석구석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고, 목숨 붙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가거나 티투스의 개선행렬에 끌려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


요셉 벤 마티아스는 후에 베스파시아누스로부터 자신의 씨족명을 하사 받아 이름을 라틴식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로 바꾸었는데, 항복 후 전쟁에 함께 다니며 본 바를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대 역사서 “유대 전쟁사”를 집필한 요세푸스, 바로 그 사람이다.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원로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선정을 베푸는 동시에 네로의 호화방탕한 실정 이후 자주 교체되는 황제들의 죽음과 등극으로부터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돌과 화산재를 이용한 시멘트 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하여 높이가 42.38m, 둘레 532m에 이르는 엄청 큰 원형경기장을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스)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즉 그 당시 정객들이 사용하던 “빵과 서커스”에서 한걸음 나아간 발상이었을 것이다. 


요즈음도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국민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3S방법", 즉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 당시에는 스크린이 없어 Live Show를 하였으니 아마도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 드는 관객이 5만여 명이나 되었다니까!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하며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단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늘 죽음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게 함으로써 영웅심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니까.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여 어떻게 로마가 승리하였는지를 보여주며 정부 홍보를 하기도 하고,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하도록 지어졌다. 현대인들에게는 경악할 내용이겠지만, 볼거리로 제공되는 이른바 '수간 쇼' 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크레타 여왕 파시파에(미노타우르스를 낳은 여성) 역을 맡은 여죄수가 황소에게 수간을 당하고, 다이달로스 역을 맡은 죄수가 날개를 잃고 경기장 바닥에 추락해 온몸이 뭉개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출처 로마제국, 쾌락의 역사 p300-302.) 


다시 말하면 로마판 3S 종합 공연장이었던 것이다. 비록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은 하였으나 그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한 원형경기장이 되었지만….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재의 제공 터가 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 – 1455)가 대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2,522개의 돌을 콜로세움에서 가져오도록 허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옛 건물을 헐고 화려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할 때에도 돌을 가져오라 허락하여 결국 많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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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피렌체(Firenze) 5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Duomo)”는 이탈리아에서는 교구장인 주교가 상주하는 “주교좌 성당”으로 보통 “대성당”이라고 한다” 라고 25회에서 설명을 하였다. 라틴어 도무스(domus)가 어원으로 영어로는 돔(dome)이며, 반구형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태리에서는 “주교좌 성당”이기에 여러 곳에 두오모가 있다. 그러나 피렌체와 밀라노, 그리고 피사에 있는 성당이 특히 크고 유명하기에 이 세 곳의 성당의 대명사가 된 것 같다. 마치 파리의 노트르담 처럼….


피렌체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즉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세계 곳곳에 많은 성당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이 되었는데, 복잡한 신학적인 배경이야 우리 같은 범인이 범접할 분야가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431년 6월 22일부터 에베소의 테오토코스 성당에서 열렸던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신성에 대하여 결정을 내렸다.


이후 수많은 교회들이 더 크게, 더 아름답게 지어지며 마리아에게 봉헌되어 온 것이 유럽의 역사이며, 또 성당의 역사이기도 한 것만 알아 두기로 하자. (좀더 자세한 내용은 저의 블로그 성지 순례 중 에베소를 참조하세요. http://blog.daum.net/chunchunhi-c/8090194)

 

 

 

 


피렌체의 두오모는 1296년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고딕양식으로 디자인하여 초석을 놓은 후 1446년에 완성되었으니 150년의 세월이 걸린 건축 기간이다. 유럽을 돌다 보면 100년 혹은 200년 이상 걸려 지어진 성당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워낙 크게, 화려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지어졌으니까.


더군다나 이 시기엔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시민 의식이 깨어나던 문예부흥 운동이 태동하던 때가 아닌가? 그러니 세월에 따라 여러 명의 건축가가 뒤를 이어 가면서 담당하다 보니 성당의 설계도 유행 따라 고쳐 지고, 크기도 커져 가며 1418년 대성당을 완성시켰지만 천장은 완성을 시키지 못한 채로 뚫려 있었다. 지붕 지름이 너무 넓어 원형지붕을 올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419년, 성당 건축 재정을 지원하던 피렌체의 또 하나의 부유한 모직물 산업길드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는 대성당 돔의 설계안을 공모하는 대회를 열기에 이르렀고, 바로 이 즈음에 세례당 문 조각의 공모에서 떨어진 브루넬레스키가 십수년간 유럽을 돌아다니며 로마에 가서 판테온도 보고, 멀리, 오늘의 이스탄불인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성 소피야성당”을 보며 견문을 넓히고 피렌체로 돌아온 것이다. 


이 공모에서도 세례당의 문 공모 때처럼 여러 참여자들 가운데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마지막 결선에 올랐으나 이 대회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 의뢰를 맡게 되었고, 기베르티가 조수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당 문을 만들면서 동시에 조수로 임명된 기베르티는 18년 전 세례당 문 공모에서 자신에게 패한 브루넬레스키의 돔 공사 계획을 무시하며 “말도 안 된다”고 말을 퍼트렸다. 일단 세례당 문 공모에서 인정을 받았던 기베르티로부터 크게 공격받은 브루넬레스키는 아픈 척하면서 로마로 떠나며 기베르티에게 모든 계획을 넘겨주었다. 
교회에서 큰일을 하다 보면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예나 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 또한 감당할 만한 시련이겠지만…. 

 

 

 

 

 


그러나 곧 기베르티는 전체 계획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시인하고 다시 세례당 문 작업으로 돌아가고,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독점적인 책임하에 인계 받은 후 그때까지 없었던 “2중 벽”의 기상천외한 공법으로 1436년에 돔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피렌체 두오모는 크기와 규모도 놀랍지만, 그 아름다움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새로운 공법의 산물이었다. 약 100년 후인 1547년 1월 1일, 7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로가 로마 교황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두오모 설계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자 “피렌체 두오모 보다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더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니 미적인 완성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말한 대로 그의 책임하에 완성된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이 돔의 규모를 뛰어넘게 되었지만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석상은 지금도 대성당 광장에 있는 카노니치 궁전 바깥에 앉아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피렌체 전경의 중심이 될 돔을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올려다 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만일 35년 전에 세례당 문 공모에 당선이 되었더라면 저 두오모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완성이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열린 천장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세계에서 제일”을 선호하는 DNA를 가지고 있는 가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하면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떠올리게 된다. 1990년까지는 그러 하였다.


하지만 1990년 9월 10일 이후 세계 최대의 성당은 유럽도 미국도 아시아도 아닌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영어이름: 아이보리코스트)의 수도, 야무수크로에 있는 “성모 평화 대성당”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대리석을 조립식으로 축조하여 3년 만에 완성시키었기에 사람들로부터 “영혼 없는 건축”이란 말을 들을 지언정 집권자의 과대망상을 충족시켜 준 산물로, 높이 170m, 총33만8천여 명이 동시에 미사에 참여가 가능한 세계 최대 성전이 된 것이다.


그 다음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고, 밀라노 두오모는 5위, 피렌체 두오모는 13위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건축의 비결이 다 풀리지 않은 채 수많은 지진을 견뎌내며 서 있는 터키 이스탄불의 그 큰 성 소피아성당의 경우는 가장 큰 성당 Top15에 들지 못한 채 겨우 20위 정도 되는 것 같다. 영혼이 없는 면적으로만 따지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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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3
피렌체(Firenze) 4 - 산 조반니 세례당

 

 

 

‘산 조반니’는 이탈리아어로 ‘성 요한’을 뜻하며, ‘성 요한’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은 현재 피렌체에 현존하는 종교 건물로는 제일 오래 된 건물로, 사도 요한에게 봉헌하기 위해 5세기경에 지어진 로마 시대 교회터에 다시 지은 세례당이다, 


서쪽을 제외하고 총 3개의 문이 있는데,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남문은 세례자 성 요한의 생애를 주제로 피사노(Nicola Pisano)가 1330년에 조각한 것으로 가장 오래되었다.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페스트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피렌체의 부유한 길드중의 하나인 의류산업길드, ‘아르테 디 칼리말라(Arte di Calimala)’의 후원으로 1401년, 동쪽 청동 문 제작 공개 경쟁이 있었다.


작품 주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 즉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믿음을 확인한 하느님이 이삭을 살려주는 이야기를 주제로 출품하여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출품작 중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당시20대 초반인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의 두 작품이었다.


피렌체의 유력 인사로 구성된 심사 위원회는 최종 후보로 남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에게 〈희생 제물이 된 이삭〉 패널을 시범 제출하라고 주문했고, 지금도 이 두 작품은 바르젤로 박물관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작품을 놓고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청동문 작업은 기베르티에게 맡겨졌다. 구약을 주제로 기베르티가 막상 청동문 제작에 들어가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측이 작품 주제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다.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문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입구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신약적 주제를 작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베르티는 총 28개의 신약 주제가 담긴 패널로 1403년부터 1424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청동문을 제작하였다.

 

 

 

 


동쪽 청동문에 이어 기베르티가 ‘공모의 주제’ 대로 구약의 내용을 주제로 삼아 28년에 걸쳐 두 번째로 만든 북쪽 청동문이 1452년에 완성되자 그것은 단순히 ‘문’ 이라고만 할 수 없는 천하의 걸작이었다. 후원자였던 의류산업길드, ‘아르테 디 칼리말라’는 기베르티에게 먼저 제작한 동쪽 청동문과 바꿔 달게 하였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애초에 동쪽문을 제작할 때부터 두오모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동쪽 문이 세례당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그 청동문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신약적 주제’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베르티로 하여금 새로운 패널을 만들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베르티가 두 번째로 ‘공모의 주제’ 대로 구약의 내용을 주제로 제작한 문을 두오모 성당 맞은편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의 반 유대교적 전통이나 신약의 주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우위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피렌체의 의류산업길드, ‘아르테 디 칼리말라’는 기베르티 작품의 탁월함을 들어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아마도 두오모를 짓고 있던 중에 필요한 재원과 타협이 되어지지 않았는가 싶다.


피렌체의 후배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 청동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고 높이 칭송했고, 지금도 미켈란젤로의 작명을 따르고 있는 이 유명한 문은 매일 관광객들로, 그리고 넋을 놓고 감상하는 관광객들의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브루넬레스키와 불꽃 튀는 경쟁에서 선택 받은 기베르티(1381-1455)는 결국 일생의 대부분을 청동 문짝만 만들다가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같은 건물,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문으로 만들어졌다가 북쪽 문이 된 문과 북쪽 문으로 만들어 졌다가 동쪽 문이 된 일명 ‘천국의 문’, 두 짝을 만드는 데 49년의 생애를 바쳤으니 말이다.


‘천국의 문’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는 다른 장소에 숨겨져 있었고, 1966년에는 홍수 피해를 입었으나 복원된 후, 1990년대에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현재 ‘천국의 문’의 진품은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세례당에 놓인 것은 복제품이지만 진품의 세밀함과 예술성은 거의 완벽하게 되살렸단다.


세례당 내부에 들어가면, ‘최후의 심판’과 ‘창세기’를 주제로 한 모자이크 장식이 화려한 쿠폴라(cupola)를 볼 수 있다. 


기베르티에게 기회를 빼앗긴 브루낼레스키는 그후 어찌 되었을까? 그는 지금도 두오모라고 짧게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옆에 앉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돔을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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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7
모세의 뿔 ? 꿈 보다 해몽

 

 

 

피렌체 이야기를 하다가 미켈란젤로가 나오고, 미켈란젤로 이야기를 하다가 다윗상이 나오고, 다윗상을 이야기하다가 성경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미켈란젤로의 또 하나의 걸작인 모세상을 여기에서 이야기를 하고 넘어 가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 같다. 실제로 모세상은 피렌체가 아니라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빈 영묘를 지키고 있지만 말이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처형당할 때까지 묶여 있었던 쇠사슬을 성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명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이라고 부르는 로마에 있는 성당 가운데 하나이지만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뿔이 난 모세상”이 있는 장소로 더 유명하다.


원래 모세가 지키고 있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영묘는 현재보다 더욱 거대하게 지어질 계획이었으나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오 2세의 사망으로 이뤄지지가 않았다. 


율리오 2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사생아를 두는 등 성직자다운 면모는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여차여차하여 1503년, 율리오 2세로 교황이 된 후 교회의 위엄에 관심을 쏟으며 예술을 가장 크게 후원한 교황으로서 당대의 강력한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건축하려는 생각을 품은 율리오 2세는 첫 모형을 브라만테에게 주문했고, 1506년 4월 18일 머릿돌을 놓았다.


그가 1506년 스위스 용병으로 근위대를 창설하며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혀 교황을 최 측근에서 지키게 한 것이 오늘날까지 바티칸을 지키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에 그림들을 그리게 했고, 또한 자신의 영묘를 위해 '모세'상을 만들게 하며, 라파엘에게는 바티칸 궁에 있는 프레스코들을 그리게 하는 등 로마에 훌륭한 건물들을 많이 세웠다.


1506년 시작된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교제는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비슷하여 자주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음에도 꾸준히 지속되어서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정신적인 동역자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의 율리오 영묘 가운데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것은 계획보다 작아진 '모세' 뿐이었고 그나마 교황은 이곳이 아닌 성 베드로 대성당에 삼촌인 식스투스 4세와 나란히 묻혔기 때문에 막상 모세는 빈 영묘를 지키고 있는 셈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빈 영묘를 지키고 있는 모세의 머리에는 뿔이 두개 나 있다.


프랑스, 디종 서쪽 교외에 있는 샤르트뢰즈 드 샹몰 수도원(1383년 건립)에 ‘모세의 우물’(1395~1406)이 있는데, 그 우물에 네덜란드의 조각가 슬뤼테르(Claus Sluter 1385~1406)가 커다란 기둥을 세우고 상부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6인의 예언자를 조각한 조각군이 있다. 

 

 

 

 


그 중에 모세의 상도 조각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뿔이 달려있다. 왜 뿔이 돋아났을까? 정통적인 성서학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기원 전 300년경, 헬라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도록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었던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유대의 각 지파에서 6명씩 차출되어 제작한 것이 최초의 번역본인 70인 역으로, 현재까지도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식 전례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며 기독교가 공인이 되자 성경은 다시 라틴어로 번역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히브리어에서 헬라아로 번역된 70인 역이 기초가 되어 여러 사람들이 번역을 하다 보니 많은 오역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382년 교황 다마소 1세가, 기존의 옛 라틴어 성경을 개정하고자, 히에로니무스 (예로니모)에게 성경 번역을 지시하였는데 그는 오류가 많은 70인 역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를 불가타 성경(Vulgata Clementina)이라고 하며, 이 과정에서 뿔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 같다고 한다. 


히브리어 QARAN (광선이 나오다. To send out rays)를 QEREN(뿔이 나오다. To grow A Horn)로 오역을 하였단다. 왜냐하면, ′빛′이나 ′뿔′의 자음이 같기 때문이란다. 히브리어도 한자처럼 점 하나를 어디에 찍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빛난” 광채가 “뿔난” 것이 되었단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번역상의 오류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치가 않다. 고대 사회에서 ‘뿔’은 대개 ‘영적인 힘’을 상징하였단다. 신명기 33:16-17 . 이런 것들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들 중에서 따로 구별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QEREN)이 들소의 뿔(QEREN)같도다, 라고 한 것 처럼….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빛난 광채”를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났다”는 뜻으로 옮겼던 것이란다. 위엄을 더하기 위해서….


또 있다. 모세가 기껏 시내 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훈계를 듣고 무거운 십계명 돌판을 받아왔는데, 내려오니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섬기며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 앉아 있는 자세며, 노려보는 눈매며 힘이 들어간 근육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왜 우리도 흔히 화가 날 때 “뿔이 났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건 좀 한국에서 생긴 역설 같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런 심오한 뜻보다는 오역이라는 쪽에 더 수긍이 간다. 그 당시 교황들의 작태와 다윗의 고추를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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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피렌체(3) - 할례 받지 않은 다윗상

 

 

2006년에야 겨우 시뇨리아 광장에서 오랫동안 고대하던 데이빗 상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 미술책에 소개된 다윗상의 중심에는 나무 이파리가 붙어있어 그 당시의 호기심으로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하였었는데 실물은 당당히 벗은 채, 찬란한 이태리의 햇볕을 받으며 몇 백 년을 서있었건만 아직도 선탠은 하나도 안된 채로 백옥 같은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나뭇잎파리에 가려 있던 고것이 아뿔싸! 할례를 안 받았네! 2017년에 다시 찾았을 때에도 다윗은 조금도 더 늙지를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벌거벗고 서서 지중해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알았지만, 다윗이 누구인가? 정통 유대인 혈육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정통 유대인이면 하나님과 한 약속, 즉 할례를 안 받았을 리가 없을 터인데….

 

 

 

 


중학교 때 미술책에서 보았듯이 나뭇잎으로 가려 있었다면 아무 의심이 없었겠지만 미켈란젤로와 동시대에 활약한 도나텔로도 1440년에 다윗상을 청동으로 조각하며 두 사람 다 인체에서 중세의 두꺼운 옷을 벗겨냈다.


그래서 속을 들여다보니 두 조각들 모두 다윗이 할례를 안 받은 벌거벗은 모습이 아닌가! 왜일까?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결국 신부들이 그 점까지는 설명을 안 해주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만을 설명하여 준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그네들이 보아 온 모델들, 유럽 사람들의 신체대로 조각을 하였겠지, 아주 아름답게 균형 잡힌 멋진 모습으로….


결국 문예부흥의 산물인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며 돌고 돌다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품었던 의문과 연계해서 답이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볼 때마다 왜 저런 모양으로 그렸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 교회에서 배운 상식으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둘러앉아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들었는데… 얼마 전에 유행했던 ‘다빈치 코드’에서 말하는 그 숨은 이유는 아예 제켜놓고 말이다. (그건 허구에 의한 또 하나의 허구로 상업적인 소설에 지나지 않는데도 교회가 너무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 오히려 작가의 주머니만 더 채워주게 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나 모두가 그 당시에는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고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풍습을 공부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림이나 조각에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지만 그 천재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 작품의 소재를 성경에서 얻어 올 때에는 누구 다른 사람, 즉 그 당시 성경을 접할 수 있었던 신부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그것을 설명할 만큼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특권층의 사람들이 부패할 대로 부패 한, 기독교로 말하면 종교가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함성이 들리기 시작하던 최악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네들이 부와 권력을 쥐고 그림을 그리라고, 조각을 하라고 명령 할 수가 있던 때였기에 예술가들에게 의뢰를 하였고, 또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신에게 정성스레 바치느라 심혈을 기울였지만 그 영감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결국은 썩어 있었으니 설명이 제대로 다윗의 그곳에까지 미칠 수가 있었겠는가?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델을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고 그리고, 만들고 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이태리 사람들이 모델이 되었고, 그 모델이 할례를 안 했으니 지금도 벌거벗고 서 있는 다윗상이 할례를 못 받았을 수 밖에….

 

 

 

 


수녀원 식당의 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다빈치 역시 예수님 당시의 풍습을 고증할 만한 위치에 있을 수가 없었으니 그 당시의 식탁 모양대로 테이블을 놓고 모델을 배열하면서 그리게 된 것 같다.


예수님 당시 그네들의 식사 모습은 이렇게 밥상에 길게 늘어앉아 먹는 우아한 식사가 아니었단다. 땅 바닥에 빙 둘러앉아 서로 기대기도 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진 곳에서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기록되어진 것을 보면 요한복음 13장 23절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았는지라”라고 되어 있으니까.

 

 

 

 


(많은 목사님들이 이 그림에 얽힌 예화, 즉 예수의 모델과 가롯 유다의 모델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하지만 이는 예술가의 순수성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하나님의 대언자라고 자처하며 힘을 쥐고 있던 교황청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믿음의 괴리 중에 일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네들의 천재성이 인정되어 오늘까지 최대의 걸작이라 칭송 받으며 아직도 벌거벗고 서있는 다윗상이나, 그 움직일 수 없는 중세 수도원의 식당 벽에서 색이 바래가고 있는 최후의 만찬이나….


모조품을 만들어 재미를 보는 상혼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림을 배경으로 하여 추리 소설을 만들어 떼돈을 벌기도 하고...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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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피렌체(Firenze) (2) 르네상스의 꽃

 

 

 

중세시대에 미술의 절대적 수요자는 교회였다. 모든 교회마다 그려진 수 많은 그림들은 모두가 성경의 이야기를 그린 것들이다. 성경을 직접 읽을 수가 없고, 성경의 이야기를 신부들의 강론을 통해, 그것도 이해하기 힘든 언어를 통해 듣는 것이 전부이다 보니 교인들에게 성경을 이해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13, 14세기에 이르러 수공업과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미술품에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새로운 수요층이 확대되자 조각과 회화의 수요는 점차 교회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의 집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넓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술가는 의뢰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자신의 창의력을 반영하여 역량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소재를 넓혀갈 수가 있었고,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다양한 표현방법을 개발하게 되는 시대를 열게 되었으니 이 시기를 우리는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많은 조각과 그림들은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만큼 교회의 힘과 부는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단지 표현하는 방식의 세부 묘사가 전보다는 많이 인간중심으로 옮겨졌을 뿐이지….

 

 

 

 


복고주의라는 기치하에 그리스의 신화를 빙자하며 여성들의 나신이 부끄러움 없이 나타나는 것도 이 시대인 것 같다. 바티칸의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많은 벽화들도 구설수를 받으면서도 옷들을 벗겨 놓았고, 보티첼리(Botticelli, S. : 1445~1510)의 그리스 신화를 상상하며 그린 ‘비너스의 탄생’ 외에도 모든 미술관에 전시된 이 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많은 그림들이 벌거벗겨져 있다. 결국 인간들의 본연의 모습들이 소재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인본주의라고 하였나?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가 당대에 두각을 나타내던 탁월한 지식인들을 미켈로초(Michelozzo)가 지은 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Palazzo Medici Riccardi) 궁전에 끌어 모은 면면들을 보면 이 시대를 대표하던 지성들이 거의 다 모인 것 같다.

 

 

 

 


보카치오, 페트라르카, 치마부에, 조토, 알베르티, 브루넬레스코, 마사초, 도나텔로, 기베르티, 프라 안젤리코, 미켈로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파울로 우첼로, 고촐리, 기를란다요, 베로키오, 미켈란젤로, 다빈치,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등등 셀 수 없는 시인, 작가와 화가, 조각가 등 예술가와 과학자가 그 작은 도시에서 활동하면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며 논문을 쓰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며 아름다움을 창조하였으니까!


문예부흥 시대에 가장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지금까지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린 것도 피렌체에서이고, 그와 함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제로가 다윗상을 조각한 것도 피렌체에서 였으며, 크리스토포리가 오늘날의 피아노를 만들어 낸 것 또한 피렌체에서 였다.

 

 

 

 


과학 또한 크게 발전한 시기였기에 지동설을 옹호하다가 천동설을 고수하던 교황청과 알력을 빚으면서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여 사형을 면하고 근신을 명 받은 후 여생을 메디치 가의 보호 속에서 보내며, 새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었다. 


그가 근신명을 받은 후 재판정을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린 말 “그래도 지구는 도는 것을….” 그래서 지구는 아직도 돌아가는 모양이다. 지축이 조금 더 기울어졌다고는 하지만….

 

 

 

 


현재 통용되고 있는 피아노 건반의 원형은 1709년 메디치 가의 악기 수리공이자 클라비쳄발로(clavicembalo)를 만들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만들었다. 현악기에 가까운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쳄발로(일명 하프시코드harpsichord)는 음의 강약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크리스토포리는 연구를 거듭하여 해머가 현을 두드려 연주자가 음의 강약을 바꿀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악기를 강약(Piano e Forte)을 표현할 수 있는 클라비쳄발로(Clavicembalo)라 명명했으나, 그 후 피아노 포르테(Piano Forte)라고 줄여서 사용되다가 피아노(Piano)로 정착되었다. 


크리스토포리는 메디치 가의 명성에 걸맞게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악기를 만들었다. 건반은 견고하고 호화로운 상아를 재료로 썼고, 나중에 추가된 반음을 내는 검은 건반 역시 값비싼 흑단을 사용했다. 이후 크리스토포리의 피아노는 독일과 영국에서 개량되어 1890년경에 현재와 같은 피아노가 되었다.

 

 

 

 


필생의 역작 “신곡”으로 중세의 암흑을 단숨에 걷어내며 명실상부한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il sommo poeta)이자 14세기 르네상스의 문화사적 지평을 연 인물, 단테가 피렌체에서 태어난 것은 문예부흥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1265년 경으로 역 추산이 되도록 그의 유년기 기록은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피렌체에서 존경 받던 귀족 출신으로, 당시의 관례에 따라 열두 살에 귀족 가문의 딸인 젬마 도나티와 조혼(早婚)을 했단다. 그러나 단테는 아홉 살 때인 1274년 5월의 어느 날, 포르티나리 가문에서 개최한 파티에서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그녀를 ‘진주의 빛깔을 가진 소녀’로 기억하며 연모의 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 후, 1283년에 우연히 아르노 강의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열여덟살의 꽃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베아트리체를 만나 몇 마디 어색한 말을 주고받았단다. 그 후 정쟁에 휘말려 피렌체를 떠나 유럽을 방황하며 겪었던 뼈저린 시련과, 한에 사무쳤던 유랑의 기간 동안 베아트리체에 대한 연모를 승화시키며 쓴 책이 바로 “신곡”이다. 


그러나 묻혀 잊을 뻔하였던 단테를 문예부흥의 중심으로 되살려 낸 사람이 바로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세 문인 중 마지막 인물인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였다.


“데카메론”으로 명성을 얻었던 보카치오가 유랑자의 회한 속에 임종한지 무려 52년이 지난 1373년에 처음으로 단테 강연을 피렌체에서 시작함으로써 단테가 재조명되며 문학에서의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운동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시뇨리아 광장 뒤로 좁은 골목길을 몇 번 돌면 카사 디 단테 박물관(Museo Casa di Dante, Santa Margherita)이 나타난다. 1911년, 피렌체 시는 건축가 주세페 카스텔루치(Giuseppe Castellucci, 1863~1939)에게 의뢰하여 카사 디 단테를 신축하게 했다. 


이곳이 단테의 집으로 최종 결정된 것은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던 1865년의 일이지만, 과연 단테가 살았던 집인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단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들은 여전히 이 골목을 돌며 옛날에 배웠던 단테를 회상하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곤 한다.


그 당시 집을 짓던 사람들이 거리 포장을 하면서 길에 단테의 초상을 그려 넣었다고 가이드들은 이야기 하지만…. 어찌 되었던 길에 깔린 돌에 물을 부어 보면 벽에 올려 놓은 단테의 두상과 모양이 비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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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피렌체(Firenze) (1) 르네상스의 꽃술 ,메디치

 

 

 

이탈리아! 유럽 남부의 지중해 북단에 장화 같은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다. 현재의 국토 면적이 301,336㎢ 이니, 남북한을 합한 223,125㎢ 보다는 1.5배가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세계의 역사와 종교와 문화와 예술을 말할 때마다 빼어 놓을 수 없는 나라다. 


기원전부터 지중해 동부,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에서 시작된 “인류의 기록된 역사”, 즉 정치적인 힘과 문화가 서서히 지중해 서부로 이동하게 되는 데에는 약 200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기원 전이 기원 후로 바뀌던 즈음에는 로마라는 나라가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그 당시 그네들이 알고 있던 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나라가 되어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니까.


정치적인 힘이 약하여지자 종교의 힘이 기승을 부려,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며 1500년의 세월을 버텨오던 중, 종교가 분열하고, 정치적인 힘들이 분산되면서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옛 것을 찾아보자”는 복고주의가 “신 보다는 인간중심”을 주장하는 사조와 어우러지며 “문예부흥운동”으로 꽃을 피울 때까지도 거의 모든 일들이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교황청의 결정으로 일어 났으니 이탈리아반도의 풍수기운이 무척 강했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는 동안 철학과 문학과 건축, 그리고 음악과 그림, 조각을 포함한 예술로 더욱 유명한 곳이 되었다. 이 배후에는 이 지방을 오랜 세월 동안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시장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발전한 은행제도가 유럽 전역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피렌체의 후발 은행업자인 메디치 가문의 살베스트로가 죽으면서1388년 메디치가의 은행업은 친척인 비에리 디 캄비오 데 메디치에게 넘어 가면서 영업 영역을 로마와 베니스로 확장하였다. 


비에리 밑에서 일하던 먼 조카뻘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1360∼1429)가 서서히 로마와 피렌체에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조반니는 금융업에 자질을 보여 몇 년 후에는 파트너가 되고, 다시 로마 지점을 총괄하는 지점장이 되었다. 지점장이 된 그는 스물 다섯에 피카르다 부에리(1368-1433)와 결혼하는데,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 1,500 플로린은 그가 개인적인 투자로 돈을 버는 종자돈이 되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세력 다툼이 벌어져 아비뇽, 피사 등 세 곳에서 3명의 교황이 생기던 혼란의 시기에 피사의 교황으로 지낸 요한 23세가 로마의 교황으로 즉위하게 되자 그를 지원하였던 조반니는 1412년 1월 16일 교황청과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헌금들을 로마 돈으로 환산해서 메디치 은행에 보관해 두었다가 교황청이 필요로 할 때 즉각 대령하겠으며, 또한 세계 어느 나라로 돈을 보내건 다른 은행보다 훨씬 싼 환율로 환전해주겠다”며 체결한 교황청 전속 은행 계약은 메디치 가문의 개조와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예술가의 꿈을 가졌던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디 메디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은행가가 되어 프랜차이즈 제도를 처음 도입해 유럽 16개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며 세를 확장하여 나갔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돈이 필요할 때마다 은행을 찾게 되고, 세계의 교회에서 거두어들인 헌금이 각 지역의 지점을 통하여 로마로 오는 동안 이자와 환율의 차이에서 오는 부를 축적하며 교황청의 금고 역할을 했다. 


이때 종교적 권력이 가져오는 부의 힘을 실감한 코시모 디 메디치 는 당시 교황이 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서 교황이라는 직을 갖는 것이 생각 밖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코시모 디 메디치는1434년부터 1464년에 이르기까지 30년간 피렌체 공화국의 군주가 되어 실질적으로 다스리며, 상상을 초월한 막대한 사재를 털어 피렌체 시정을 도우며 학예를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역시 사유 재산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투척했으며, 예술가의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가였다. 가업을 이어받은 피에로의 아들이자,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탁월한 지식인들을 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에 끌어 모았다. 


이곳에서 자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1513년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사촌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더 훗날의 일이지만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카트린 데 메디치 역시 이 곳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그의 뛰어난 외교 수완과 재력은 피렌체를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에 올려 놓게 되자 시민들은 그를 '위대한 자'로 칭송하였으며, 이때가 피렌체와 메디치가 번영의 정점에 달한 때였다. 


그는 예술가들을 향하여 "이들을 하늘의 별과 같은 영혼을 가진 비범한 천재들로 대접해야지, 짐을 싣고 다니는 짐승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라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차여차 하여 로렌초의 아들인 조반니가 1513년부터 1521년까지 레오 10세로서 교황직을 수행하는 동안 레오 10세는 은행가의 아들답게 면죄부를 팔아 성 베드로성당을 짓노라 부족하여진 교회의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그는 결국 종교 개혁을 초래한 교황 레오 10세라는 오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 후에도 클라멘트 7세 이후, 레오 11세까지 3명의 교황을 배출하며 1743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은 전통적인 봉건 귀족이 아니라 상업과 금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 가문이었다. (은행업을 하였다는 점과 그의 초상화를 볼 때 유대멸망 후 유럽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일까?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된 르네상스 운동에 깊이 공감하며 수많은 건축가,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들을 후원하며 르네상스의 꽃을 “꽃의 도시”란 이름에 걸맞게 피렌체에서 피울 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인가보다.


약 350년 동안 유럽을 쥐락펴락하며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내었던 메디치 가문 역시 대를 내려가면서 아들들이 방탕과 향락에 빠지며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메디치가의 최후 상속자 안나 마리아는 메디치가의 모든 재산을 토스카나 정부에 영원히 기증했다. 


가치를 가늠하지 못할 유산을 기증하며 안나 메디치가 남긴 당부는 "그 중 한 점이라도 피렌체에서 옮기지 말 것, 모든 민중의 유익을 위해 쓰일 것"이었다. 이 유언에 따라 모든 작품들이 메디치 가문이 일을 보던 사무실을 개조하여 만든 우피치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오늘에도 귀한 문예부흥시절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상업 자본으로 출발한 정치권력이 350년 넘게 유지된 사례도 메디치가 유일하다 보니 과연 돈은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메디치 가문이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출처: 피렌체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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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이탈리아- 740년을 버틴 ‘피사의 사탑’

 

 

 

모나코를 떠나 프랑스 땅을 달려 이탈리아 국경을 넘기까지 분명 3개국을 지나 왔는데, 마치 토론토에서 위성도시 미시사가를 온 것 같다. 참 세상 좋아져서 잠시 사이에,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기울어진 종탑을 보며 이탈리아 입국 신고를 한 셈이다.


우리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으로 보며 배워 온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은 이탈리아 로마의 서북부, 토스카나주 피사시의 피사 대성당 부속 건물로 세워진 종탑이다.

 

 

 


종탑으로는 특이하게 본당에서부터 떨어진 독립된 건물로 지어진 이 탑이 유명한 이유는 금방 쓰러질 듯 한쪽으로 기울어져, 기술적 측면에서는 완전 실패한 건축물이지만 1372년 완공된 후 오늘날까지 무너지지 않아 ‘불안정 속의 완성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피사는 로마시절부터 도시국가로 발전하던 중 피렌체에 정복되어 문예부흥 시기에는 유럽에서 유명한 대학까지 있을 정도로 물리학과 천문학을 중심으로 갈릴레오가 활동하던 본거지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시 도시가 많이 파괴되어 지금은 부서지다 남은 성곽 안에 대성당, 세례당, 종탑(피사의 사탑)으로 이루어진 웅장하고 훌륭한 교회 건물들이 그 옛날의 영화를 이야기 해준다. 특히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사탑으로 엄청난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고 있다.


피사의 사탑이라고 불리는 이 종탑은 1173년 이탈리아 건축가 보라노 피사노의 설계도에 따라 착공했다. 하지만 3층까지 공사가 진행됐을 때 지반 한쪽이 붕괴돼 기울어지고 말았다. 

 

 

 

 


피사노는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무게 때문에 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사가 중단되고 약 100년이 흐른 1272년 공사가 재개됐을 당시, 탑 밑 지반을 다지는 공사부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남쪽으로 기울어짐이 발생했다. 


결국 문제점을 안은 채 "지오반니 디 시몬네"라는 건축가가 기울어짐을 막기 위해 반대편 기둥을 짧게, 기울어진 쪽 기둥을 길게 세워 균형을 맞추는 기상천외한 비체계적 건축 기술로 건설을 계속해1319년 마침내 꼭대기 7층까지 완공되었다. 이때 탑은 이미 1도나 기울었고 중심에서 0.8m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다가 1360년경 새로운 건축가들이 나서서 8층에 마지막 종루를 쌓을 때에도 탑은 계속 남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남쪽에 계단을 추가하는 임기응변으로 1372년 우여곡절 끝에 종탑으로서의 모습이 완성되었으나, 종탑보다는 세계 최초의 기울어진 수직 건축물이 되어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피사의 사탑이 완성된 것이다.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는 58.36m, 지름은 15m, 297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있는 종탑으로, 무게는 1만 4,453t이나 된다.

 

 

 

 


수치로 보면 제법 큰 탑 같지만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이 정도의 탑은 아예 건물 축에 들 수도 없는 작은 탑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며 온전히 서 있는 2000년이 넘는 건물들이 부지기수이니 말이다.


이런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사람들이 이 자그마한 종탑이 계속 기울어 지는 것을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는가? 수많은 권력자들이 수많은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를 하였었다.


그러나 탑을 지을 때 그 기울기를 보완하기 위해 각 층의 기둥 높이를 조절한 결과 이 탑을 똑바로 세워 놓으면 오히려 더 불안정하게 보이는 우스운 모양의 탑이 되고 마는 결과가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관광객 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전문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위원회의 복구 공사 목표는 ‘무너지지 않을 정도만 세운다’였다. 


이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목표였지만, 사탑의 명목을 지키고 관광객 호기심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기울어진 채로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준 하에 1990년 이탈리아 정부가 추가 보강공사를 했고, 11년여 만에 기울기가 약간 바로잡혀2008년 측정된 기울기의 각도는 중심축으로부터 약5.5도에서 기울어짐이 멈춘 상태이다.


앞으로 300년은 안전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앞으로도 논란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불완전한 작품에서 오히려 성공적인 관광 명소가 된 피사의 사탑은 기술자에게, 그리고 건축가들에게 과연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일까?


1604년, 갈릴레오(Galileo Galilei)가 "낙하물체는 등가속도운동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또한 포물선 낙하운동 법칙도 발견했는데, 옛날부터 갈릴레오가 이 실험을 피사 사탑에서 하였다고 전해왔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실제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단다. 나도 그렇게 배웠었는데, 그럼 어디에서 낙하 실험을 하였을까? 이 좋은 장소를 놔두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배운 교육은, 지식은 과연 어디까지가 정설이고 진리일까? 이탈리아에 들어 왔으니 수없이 많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유물들을 소개하며 기억 속에 교육을 통해 배워 온 많은 이야기들을 요즈음에 얻은 지식과 비교하며 풀어나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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