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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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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흔적을 찾아서(28)-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

 

마태복음에 의하면 광야 시험 후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북쪽 호반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며 천국을 전파하시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4 복음서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사역하신 예수님의 공생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서로 매우 흡사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중, 세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통적인 관점으로 함께 보다" 라는 뜻으로 synoptic, 즉 "공관(共觀) 복음서"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들과 가르치심 들의 순서나 지역들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었고, 또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12제자들에 들어가지도 않았기에 “공관복음서 문제”라는 화두가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Q문서”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나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제가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적어 나감에 있어 그 순서가 좀 바뀌어 졌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사이에 위치한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신, 상당히 긴 수훈이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7장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되어 있지만 “산” 이라기 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갈릴리 물가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이 일을 기념하는 “팔복교회”가 이 언덕 위에 있습니다.

4세기경 비잔틴 제국에서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이 곳을 다녀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던 자리에 1936년, 프란체스코 수녀회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루치(Antonio Barluzzi)가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밝고 깨끗한 인상을 주는 교회 내부는 여덟 가지 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여덟 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 복의 내용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계자 안토니오 바를루치는 예수님이 주신 8복 말씀에 하나를 더하여 아홉 가지 복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가이드들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의 끝맺음인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는 말씀을 아홉 번째 복으로 생각한 안토니오는 팔각형 모양의 건물 중앙에 커다랗고 둥근 돔을 만들어 아홉 번째 복을 상징하였다고 말입니다. 진위는 차치하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왜 “구 복”이 아닌 “팔 복 교회”라고 하였을까요?

 

이를 위하여서는 아무래도 기독교와 성경이 어떻게 한국에 전래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복음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서기 635년부터 845년,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말합니다.

 

서기 1253년에는 몽고를 통해서 로마 선교사인 ‘루브루크’에 의해 고려(Core’e)시대에 카톨릭이 접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인 서기 1592년과 1598년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에는 일본군의 종군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참전했다는 정사의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라고 부르고 있지요.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순교를 당한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조선 평양에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설립되어 후에 장대현 교회로 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1872년에 만주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인 존 로스(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준비를 진행하며 존 로스 선교사는 압록강 상류 부근까지 가서 한 사람의 한인에게 한문 성경 몇 권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이 일로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존 로스는 1874년에 한국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의주 출신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어, 이응찬은 존 로스의 한국어 어학선생이 되는 한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세 명의 의주 청년과 함께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던 역사를 보면, 우리말 성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산상 수훈의 복은 세어보면 분명 9개인데, 중국에서 먼저 번역되면서 중국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는 8자에 복을 더해서 “팔 복”이라고 수훈에 표제를 붙이었고, 한글 성경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직역하여 이 교회를 “팔복교회”로 부르지 않았었을까? 하는 것이 저의 엉뚱한 공상입니다.

 

아니 어쩜 제가 알 수 없는 신학적인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9번째 복을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8가지 복의 과정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힘겹게 받아야 하는, 이해하기 힘든 “복”이기도 할 터이니까요.

영어 성경에서도 산상수훈의 표제는 “Beatitude”, 즉 우리말로 “지복(至福)” 혹은 “무상의 행복”이라고만 하였습니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던 곳에서 바라본 갈릴리

 

팔복교회 외부 모습

 

내부 모습

 

돔 아래 제단

 

여덟 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쓰여진 팔 복의 내용. 왜 9번째 복은 없을까요? 알 수 없는 신학적인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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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6
흔적을 찾아서(27)-갈릴리 호수(Sea of Galilee)와 베드로 물고기

 

‘긴네렛 바다'(민 34:11, 수 13:27)라 불리기도 하고, ‘게네사렛 호수'라고 기록되어 지기도 하고, 또는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라 불리는가 하면 그저 단순히 ‘바다’ 또는 ‘호수’라 불리는 천의 이름을 가진 갈릴리!

 

정확하게 말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팔레스타인 북부에 있는 담수호입니다.

남북 21㎞, 동서는 가장 폭이 넓은 곳이라야 13㎞로, 면적은 이곳, 온타리오에서는 작은 호수 축에 드는 Lake Simcoe(744㎢)의 1/5정도 밖에 안 되는, 물이 많을 때라야 166인데, 수면은 지중해면보다도 212m나 더 낮습니다.

 

수심은 50m를 넘지 못하는 작은 호수로, 사해로 흘러 나가는 요단강의 수량과 수면에서 증발하는 수분의 양이 유입되는 수량과 비슷하여서인지, 호수의 물에는 염분이 있어 그냥은 관개용수로도 사용할 수가 없으니 바다라는 말도 일리가 있는 갈릴리 호수인 셈이지요.

 

그래도 이 갈릴리 호수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제일 큰 호수로 귀중한 수자원의 보고인 것입니다.

 

헬몬산(혹은 헤르몬산 Mount Hermon)에서 발원하여 호수의 북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짧은 강도 요단강이요, 남쪽에서 흘러나와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긴 강도 요단강이기에 두 개의 요단강을 거느린 갈릴리 호수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었던 주 무대였기에 호반에는 전도 활동의 본거지로 삼은 가버나움(마 4:13, 막 1:21, 눅 7:1, 10:15)을 비롯하여 막달라(마 27:56), 고라신(마 11:21, 눅10:13), 디베랴(요 6:23) 등의 여러 성읍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 성읍들에 여러 기념교회들이 지어졌지만 정부의 정책 때문인지 전체적인 개발은 아직 이루어지지가 않았기에 호수 주변의 자연경관은 예수님 시대나 오늘이나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고기잡이가 주업이라 호수에 익숙했던 제자들마저 배를 타고 건너다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게 하도록 큰 풍랑도 이는 갈릴리 바다. 예수님의 꾸짖음에 잔잔히 순종하던 풍랑의 바다, 갈릴리.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며 제자들에게 평온함을 갖게 한 갈릴리.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무리에게 가르친 "씨 뿌리는 비유"와 그 밖에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고기 입에서 돈 한 세겔을 얻은 것도, 오병 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도 모두 이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며 제자를 부르신 것도, 또 부활하신 후 이른 아침,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며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곳도, 생선을 구워 놓으시며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부탁을 하신 것도 바로 이 호반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서 깊은 갈릴리 호반에 있는 골란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창문을 통하여 시원하게 다가오는 갈릴리 호수. 몇 사람들이 쾌속선을 타면서 뿌리는 물보라가 하얗게 수 놓여졌다가는 다시 파래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일어나는 상념들!

 

“지금 나의 심정은 어떤 심정일까?”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풍랑을 맞은 배 위에서 두려움에 떨던 심정? 모든 꿈이 깨어진 채 고향으로 돌아와 고기잡이에 종사하였건만 밤새 노력하였어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아침을 맞으며 허탈에 빠져 지친 모습? "주님이시다"는 소리를 듣자 겉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의 심정? (겉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내린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또한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생선을 구워 놓으시며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그 호반에 요즈음엔 “베드로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많은 순례자들에게 점심을 팔며 호황을 누리는 식당이 있습니다. 한 삼사백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큰 식당이었습니다.

 

근데 메뉴는 “베드로 물고기”라고 부르는,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도미 비슷하게 생긴 “갈릴리 역돔” 한가지뿐이랍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20여종의 물고기가 서식하는데 그 가운데 식용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3종류라고 합니다.)

 

하기야 베드로가 생업으로 고기를 잡던 그 갈릴리에 왔는데 “베드로 물고기”라 이름 붙여진 생선을 한번 안 먹고 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많은 관광객, 아니 순례객들에게 다 충당할 수가 없어 지금은 양식으로 키운 물고기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스테인레스 접시 위에 튀겨진 생선 한 마리가 쪼개진 레몬으로 장식된 채 나왔습니다. 생선을 입에도 안 대던 개띠인 나도 어쩔 수 없이 먹어 보았지요. 다른 것이 없기도 하였지만 과연 베드로 물고기 맛이 어떤지 보기 위해서….

 

정성이 들어간 생선튀김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기야 그 많은 사람들을, 그것도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내어 오려니 어련하겠습니까! 손가락을 쪽!쪽! 소리 나게 빨며 맛있게 먹는 고양이 띠들은 참 좋겠더군요…ㅎㅎㅎ. 하나 내겐 결국 누군가가 발상해낸 기가 막힌 상혼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생선에게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옛날, 해변에서 바위 위에 모닥불을 지펴 놓고 생선을 구워 주시던 주님의 손길이 그리워 먼저 일어나 해변으로 나와 보니, 잔잔한 물결에 물새들이 발을 적시며 모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점심 후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디베랴로 가는 동안 배 위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 6명의 목사님이 계셔서 배찬과 분병을 하는 동안, 우리의 성찬을 도우려는 듯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수면, 투명한 햇빛, 파란 하늘을 머금은 파란 갈릴리 호수 위에서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가 온 몸에서 용솟음치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며 온 천지에 가득 찬 하나님의 표상을 둘러보았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가려진 뿌연 시야를 통해서… 잔잔한 수면 위에 수없이 부셔져 반짝이는 태양의 편린들이 눈물을 통해서 더 없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오후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 시절의 고깃배” 모양이라며 유혹하는 관광선.

 

호텔 창문으로 보이는 갈릴리 호수.

 

“베드로 물고기”라고 부르는 여행객들의 점심상. 상술이라고 하여도 조금 너무 허술하였습니다.

 

갈릴리 호반에 있는 가시 많은 나무(Ceiba Chodatii). floss silk tree라고도 합니다.

 

디베랴로 가는 일행들. 우리는 일행이 많아서 좀 큰 철선을 타고 움직였습니다.

 

옅은 물안개가 낀 호반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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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흔적을 찾아서(26)-가나의 혼인잔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였던 결혼식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가나의 혼인잔치”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화려하고 성대하였던 혼인잔치들이 수도 없이 많았었지만, 신랑과 신부가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그 위치마저 성경학자들과 고고학자들 사이에 분분하여 갈릴리 안의 작은 마을 몇 군데가 그 후보 지역들이라고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나사렛에서 약 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네 가나에 이 결혼식을 기념하는 두 개의 혼인잔치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1881세워진 교회를 1999에 보수한 프란체스코 소속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1566년에 지어진 그리스 정교회 소속 교회로, 두 교회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교회는 프란체스코 소속 교회로 혼인잔치가 열렸다고 전해지는 곳의 터를 매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우리들이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 교회는 밖에서 담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지하에는 이전 유적지가 일부 발굴되어 전시되어 있고, 포도주 항아리를 떠올리게 하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이곳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의 전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신 후 다시 베다니 지역으로 오실 때였을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 1:36-40)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사람,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였을 것입니다. 그 둘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자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이 둘의 대답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하니 완전 동문서답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함축된 대답은 “제자로 따를 터이니 계신 곳을 알려 주십시요”라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사해 북부, 요단강의 하류에 있는 베다니에서 이렇게 요한과 안드레가 제자가 된 후 갈릴리로 가던 도중에 벳세다에서 베드로와 빌립과 나다나엘이 제자로 합류되어 5명의 제자가 생겨났습니다.

 

베다니에서 약 160km 떨어진 갈릴리의 가나에서 결혼식이 있는 날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떠난 지 사흘 되던 날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마도 혼주와의 관계가 깊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새로 생긴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겠지요.

 

그런데 결혼식 피로연 중에 그만 포도주가 다 떨어지게 되어 혼주와 하인들이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며 예수는 완곡하게 거절을 하시었지요.

 

하지만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시니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이적을 보여주시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놀란 제자들의 믿음이 더 커지며 예수님을 따라오기를 잘하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겠지요.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요 2:11)고 하신 것을 보면 이적을 나타내시며 사역의 시작을 위해서였던지, 아니면 그 지역에서의 소문으로 잘못 인식이 되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서였던지 모르겠습니다.

 

이 포도주 이적을 두고 지금도 학자들 간에는 이견들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직접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숨겨진 은유와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먼저 나온 포도주는 유대교를 의미하며, 예수가 만든 새 포도주는 기독교를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가 먼저 나온 포도주보다 더 낫다고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은 것처럼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더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로 보는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공경을 강조하는 천주교에서 의미를 찾으며, 주위의 도움을 반영해서 예수에게 알리고, 당초 예수가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음에도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지시하여 결국 기적을 행하게끔 유도하는 나름 적극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나라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성모의 위상, 역할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나타나는 여러 사례들은 학자들이 이적을 설명하려고, 기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하다 보니 나온 오류의 결과들이 아닐까요?

 

요한복음 2장 11절에는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학 과목 논술시험 주제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에 담긴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라>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네요.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그 창조주를 뵙고 얼굴을 붉혔도다.”

이 짧은 서술이 과연 몇 점이나 받았었을까요? 아마도 학사 비밀인가 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높이 6.77m 너비 9.94m가 되는 엄청난 크기의 “가나의 결혼”이라는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 ~ 1588년 4월 19일)의 대작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려진 신랑의 모습은 마치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으나 신랑처럼 기쁜 표정은 아니게 그려져 있고, 오히려 예수님이 주빈처럼 화폭 가운데 그려져 있으며 뒷배경이 베네치아인 것을 보면, 조그마한 촌락에서, 포도주마저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자그마한 결혼식을 이렇게 크고, 화려하게 그린 베로네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가나의 결혼” 왼쪽 아래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 당사자들이라고 합니다.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1588년 4월 19일)의 대작

 

“혼인잔치 기념교회” 1999에 보수한 프란체스코 소속 교회

 

기념품 가게의 벽 장식

 

기념품 가계에 걸려 있는 태극기

 

갈릴리 지역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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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25)-나사렛 예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굳이 ‘나사렛 예수’라고 지명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요?

 

이유는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살던 “예수”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가 자랐던 지명을 이름에 덧붙여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을 뿐이라는 설이 지배적이기는 합니다마는 성경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라는 대목을 보면 마가복음 16장 6절에 나오는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는 한 절을 빼고는 모두가 ‘촌 사람 예수”라는 듯이 비하하는 뉘앙스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보더라도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하는 것을 보아도 사람들은 “촌 사람 예수”라고 하지만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바꾸어 부른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무래도 “베들레헴의 예수” 하면 유대인들의 자랑인 다윗왕의 혈통임을 인정하게 되는게 싫어서는 아니었을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요셉이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잉태하였음을 알리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기록되었는데….

 

당시 “처녀가 잉태를 하였다”함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두려운 일이었기에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며 위로 겸 피할 길을 말해주었습니다. (누가 복음” 1장 26-36)

 

천사가 떠나자 마리아가 일어나, 나사렛보다도 더 산골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피신하여 보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나이의 엘리사벳의 태 속에서는 벌써 6개월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위로 속에 3달을 더 그 곳에 머물다가 돌아왔으니 아마도 세례 요한의 탄생을 본 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천사가 친족이라고 한 엘리사벳, 즉 후일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이 후 성경에는 더 나오지 않으나 경외서인 초기 야고보 복음서(Infancy Gospel of James)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가 탄생하기 이전의 마리아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중심내용으로 삼고 있기에 성경이 오늘날처럼 확정되기 전에는 야고보 복음서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도 합니다.

 

경외서(經外書) 또는 위경(僞經)은 출처가 의심스러운 경서, 또는 정경으로 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내용의 문서이기에 AD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경 27권을 확정할 때 선택되지 못한 경서들입니다. 그래서 현재 개신교의 성경에는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천주교회와 정교회에서는 여러 외경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구약 39권은 AD90년 유대인 랍비들의 모임인 얌니아(Jamnia) 공의회에서 정경으로 확정된 것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 27권과 함께 정경으로 확인하여 총 66권으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가톨릭 백과사전에는 성 히폴리투스(St Hippolytus)의 주장에 따라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사촌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의 어머니인 소베(Sobe)와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Anna)가 자매간이기 때문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우리 식으로 이종사촌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번역할 때에 기본으로 삼고 있는 KJV(킹 제임스 버전)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사촌(Cousin)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 옆에서 태어난, 소위 대도시의 처녀 마리아가 왜, 어떻게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가서 살게 되었는지, 또 베들레헴이 고향인 다윗의 후손 요셉은 왜 150km나 떨어진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예루살렘 출신의 마리아와 정혼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도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헤롯 대왕이 유대 왕으로 우뚝 설수 있기까지 수많은 크고 작은 봉기와 진압의 난을 피하여 시골 마을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의 야트막한 언덕(해발380m) 위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 나사렛!

나다나엘이 거침없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나사렛은 성지도 아니고, 특별히 종교적 의미를 지닌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마태복음 2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며 관주에 이사야 11:1 이라 하였지만 막상 거기에도 나사렛이란 지명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사장 사가랴의 집안과 인척 관계인 마리아가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을 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수태하여 인자인 예수를 낳았으니, 왕과 제사장과 하나님의 DNA를 고루 가지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 아닐까요? 이건 외경도, 위경도 아닌 그저 한번 해보는 억지 공상이랍니다.

 

이런 작은 마을 나사렛에 AD 34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가 찾아와,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하는 동굴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결국 전승에 따르면 나사렛에서도 마리아가 동굴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과연 그랬을까요? 현재 지어진 교회 아래 옛 집터 자리를 볼 수 있게 하여 놓은 것을 보면 동굴보다는 집터가 맞는 표현 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 동굴 위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당 건물은 AD 638년 아랍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습니다.

AD 1109년, 십자군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면서 새로이 교회를 건축하였지만 1187년에 있었던 “Horns of Hittim” 전투 이후에 아랍에 의해서 다시 파괴되었고 이 교회에 있던 사제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229년에 잠깐 동안 십자군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가 1263년 Mamluks(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 군인으로 알려진 부대로 맘루크왕조로 발전하였다.)의 아사히 바이바르스(Azzahir Baibars)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620년이 되어서야 프란체스코가톨릭 수도회가 무너진 채 폐허로 남아 있었던 교회를 사들여 소유하게 되었으며, 1730년에 다시 복구하였다가 1877년에 확장하고 증축하였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5번째로 지은 교회로써, 이탈리아의 건축가 조바니 무치오(Giovanni Muzio)의 설계로 1955년부터 1969년까지 지어진 교회당이며, 특이한 것은 교회의 지붕이 백합꽃 모양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 돔을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정면

 


교회 문에 예수님의 일생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성당 내부

 


교회 지하에 있는 마리아의 동굴 앞의 제단. 먼저 온 순례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리아의 옛 집터 자리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옛 집터 자리

 


한복입은 예수와 마리아

 


세계 각국의 의상과 풍습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회랑에 걸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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