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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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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1
흔적을 찾아서(72)-버가모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버가모의 아크로폴리스, 즉 유적지를 떠나 산 밑에 있는 붉은 교회로 내려왔습니다.

이 곳이 계시록2:13~16로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질타하신 버가모 교회가 있었던 자리라고 하는데….

소아시아 7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가, 언제, 어디에, 세워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할 때(행19:26), 이곳에도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라 추측될 뿐입니다.

AD 130년까지 로마제국 행정 수도로 번영을 누렸던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제우스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데메테르 신전, 아스클레피온 신전 등 그리스 신전과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 그리고 로마 황제들의 신전도 많아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안디바처럼 순교를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던 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니골라당의 교훈이 스며들어 그에 현혹된 사람들도 많았던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입의 검으로 심판을 받고야 말리라는 경고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ian 155–230)이 AD 3세기에 버가모에서 발견한 어느 조각에서 안디바의 이름을 찾아내, 안디바가 실제로 버가모에서 순교했음을 입증해 주었다고 합니다.

계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은 하드리아누스(76~138) 황제 시대에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Serapis)를 위해 지은 것이어서 세라피스 신전이라고 부르다가,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합니다.

신전 밑에는 직경 9m의 도관 두 개를 묻어 세리누스(Selinus) 강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졌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마는 지금은 먼지 날리는 흙 바닥일 뿐이었습니다.

신전의 가장 중심부는 삼면이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당시 흔히 사용하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조각 기둥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버가모 교회로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이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버가모 교회”는 “초대 교회”서부터 이 때까지의 교회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계에서는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부르지만 아직도 안내판에는 이집트 신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신전, 아니 교회의 크기는 가로 26m 세로 60m 로, 지진을 대비해서 수없이 많은 얇은 벽돌을 쌓아 매우 두꺼운 벽을 만들면서 지어졌으나, 오늘날에는 건물의 대부분이 붕괴되었고, 19 m에 이르는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그 당시에 크게 지어진 대형 신전이요 교회였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돔 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 한 쪽은 이슬람 사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슬람들이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지어진 건물인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인생 무상이겠지요. 아니 신생무상일까요? 세라피스 신전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이슬람의 사원으로, 창고로….

폐허의 부서진 공간들마다 새들이 집을 지어 살며 날아다니는 그 부서진 교회 터에서 그 옛날의 진실하고 뜨거웠던 믿음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그 옛날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통해 편지를 보낸 그 교회터가 아니라 나중에 지어져서 봉헌된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 때에도 벌써 알았을까요? 나중에 지어질 교회 터가 이방신의 신전이었음을....?

이 지방이 워낙 잡신들의 위세가 당당하였던 곳이니, 이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마치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은 것처럼 니골라당이 현혹하니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죄에 대하여 자유와 양심을 내세우는 반 율법주의와, 음식에 매우 방종했으며, 불결한 생활을 하고, 호색에 몰두하는 반 도덕주의, 그리고

헬라 철학과 사상을 기독교 생활에 옷 입힌, 종교적 혼합주의”라고 이야기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으로 인해 안디바처럼 오히려 종교적 순결을 지킬 수도 있었습니다. 참 묘한 것이 종교여서, 핍박을 받을수록 순수해지고 더 뜨거워지는 속성이 있는가 봅니다.

초대 교회의 그 열정을 자유로이 믿을 수 있는 오늘에는 보기가 힘드니까요. 오죽하면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세를 약화시키려면 교회에 경제적인 풍요를 주면 된다”고까지 말하였겠습니까!

기독교가 온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던 중세 시대를 “암흑시대(Dark Age)”라고 역사학자들이 말하도록, 정치적으로 보호받으며 부를 축적한 교회는 타락하여 급기야는 개혁의 불길을 일구었으니 말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오랫동안 신학(神學)으로 앞서 있던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신학(神學)이 너무 신학(新學)으로 앞서게 되어서인지, 아님 정부에서 보호하는 정책으로 인하여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즈음에는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고, 그 많은 웅장하고 호화롭게 지어진 교회당들이 예배자보다는 관광객들도 메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오묘한 게 종교인가 봅니다.

발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머물 때에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꾄 사람입니다. (민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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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흔적을 찾아서(71)-버가모(Pergamon, 페르가몬) 유적지

 

선사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으로,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중에, 수하 장군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이 지역이 천연 요새임을 깨닫고 도시 중앙에 있는 390m 높이의 산 꼭대기에 성을 쌓는 등 이곳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리시마쿠스는 BC 281년, 코로페다움 전투에서 그의 수하의 배신으로 인해 패하여 전사한 후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에 의해 페르가몬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페르가몬 왕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이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소아시아 7교회 중 에베소, 서머나를 제외한 나머지 5개 교회가 있던 지역을 포함한 터키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 중 상당 부분을 관할했던 왕국이었습니다.

이렇게 발흥한 페르가몬은 BC 133년, 거대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로마에 왕국을 평화적으로 넘겨주며 150년이란 시간동안, 짧았지만 큰 족적을 후대에 남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페르가몬(Pergamon)은 세계 최초로 ‘양피지’를 발명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양가죽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양피지’를 헬라어로 ‘페르가멘트’(Pergament), 라틴어로는 ‘페르가멘툼’(Pergamentum), 영어로는 퍼치멘트(parchment)라고 한다는데, 모두 페르가몬(Pergamon)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합니다.

로마시대 이후, 성경에는 “버가모”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로마가 이 곳을 “아시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소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발전하였으나, 후에 세력이 커진 에베소로 수도가 옮겨지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던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의 지식으로는 동쪽에 있는 지금의 터키 지역을 “아시아”라 하였으나 후에 진짜 “아시아”를 알게 되자 “소 아시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버가모가 독립된 페르가몬 왕국일 때부터 높은 문화를 이루면서, 은광, 가축, 양털 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 등을 생산하며 부의 근원을 이루며 아시아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병원, 세계 최초로 양피지를 개발, 세계 최초의 노동조합과 세계 최초의 3단계 시스템 교육(초, 중, 고)을 구축하여 그리스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아시아 최대의 도서관(20만권 도서 소장)과 세계 최대 경사지(80도)에 야외극장을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버스로 꼬불꼬불 돌며 올라간 산 정상에 널려져 있는 유적들은 어제 본 에베소의 유적에야 비할 바는 못되지만 아직 발굴이 다 안되어서 그렇지 이곳 또한 엄청 큰 도시였던 것은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산 정상 조금 아래에는 넓이 30m, 높이 12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이 있었던 제우스 신전터가 지금은 다 무너진 채로 커다란 소나무를 키우고 있었고, 디오니소스, 아테네 등의 신전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자리에는 무성하게 핀 야생 양귀비가 만발하여 마치 새빨간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 곳에 혼자 서 있는 좀 올리브나무에는 부적이 주렁주렁, 마치 하얀 꽃이 만발한 것 같으니 역시 신들의 도시다웠습니다만 종이 쪽지마다 적혀진 사연들은 다 어떤 사연들이었을까요? 건강? 사랑? 돈? 명예? 기껏해야 인간 “오욕 칠정”중에 한 두 가지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부적을 붙여 놓고 빌고 나서야 마음에 평안을 얻는 인간의 본심에는 별 변화가 없나 봅니다.

이런 버가모에서의 선교활동에는, 교회 생활에는 당연히 많은 곤란이 있었겠지요. 바위를 뚫어 만든 동굴을 나서니 시야가 확 트이며 세상에서 제일 가파르게 객석이 지어진 야외 원형극장이 나타났습니다. 객석의 깊이도 에베소에서 보다는 많이 좁은 것 같아 그 가파르기가 더 심하게 여겨져서인지 일행들도 모두 조심을 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앉았고, 저는 카메라를 들고 그 몇 칸 아래 앞에 서서 화인더를 드려다 볼 때 사람들이 웃으며 하는 말들이 “조금 더 뒤로. !” 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화인더를 보며 뒷걸음 치다가 한발을 삐끗하면…? 저~만큼 아래의 무대까지 초고속 특급으로도 한참 걸릴 것만 같이 아득하게 보였습니다. 물론 뼈를 추스르노라 더 많은 시간을 고생하기는 하겠지만….

그 당시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관람을 하면서 대형사고가 나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 가파르게 지어진 객석이었습니다. 그 무대 뒤로 더 멀리에 까마득히 보이는 도시의 빨간 지붕들이 장난감 집처럼 보이는, 경관 하나는 빼어난 곳이었습니다.

고대 도서관 중에서 제일 규모가 컸던 곳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으로 50만권의 장서를 자랑했고, 그 다음이 버가모 도서관으로 20만권의 장서를, 그 다음으로 에베소에 있는 셀시우스 도서관으로서 약 1만 2000권 정도 장서를 보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버가모 도서관 사이에 ‘정보 전쟁’이 벌어졌답니다. 그 당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가 ‘파라오’ 가 되어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기였고, 알렉산더 대왕의 충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더의 뜻을 따라서 알렉산드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학문과 지식의 도시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BC 250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가 알렉산드리아의 가장 전성기로서, 도서관에도 가장 많은 장서를 보관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똑같이 알렉산더 대왕의 수하 장수였던 리시마쿠스로 인해 아시아에 세워진 왕국인 ‘버가모’에서도 유메네스 2세와 그 뒤를 이은 앗탈로스 2세도 정치보다 학문 연구에 치중해서 ‘버가모 도서관’을 크게 만든 후 이집트에서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파피루스’(Papyrus)를 수입해서 점점 몸집을 키워오는 버가모 도서관에 위기감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버가모에 파피루스 수출을 전면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버가모의 유메네스 2세는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만 자라는 파피루스를 대체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재료를 개발하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하는데, 얼마 후에 신하들이 양이나, 송아지 가죽을 가공해서 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피지’를 개발하였습니다.

게다가 유메네스 2세는 획기적인 발명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파피루스로 만드는 책은 ‘두루마리 형태’였는데, 유메네스 2세는 양피지 옆에 구멍을 뚫어 꿰어서, 지금처럼 최초로 옆으로 넘기는 책을 개발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책의 내용을 찾는데 드는 시간과 보관하는 비용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며 오히려 파피루스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는 계기가 버가모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버가모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도서관 전쟁’은 결국 알렉산드리아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주전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게 되자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매우 상심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버가모 도서관의 장서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고 합니다.

역시 문화재도, 나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없을 때에는 힘 있는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함은 만고의 진리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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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7
흔적을 찾아서(70)-서머나(Smyma) 폴리캅 기념교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는데, 2000년 동안 동양과 서양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 있었던 소아시아의 도시들인들 어찌 멀쩡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사용이 가능한 야외극장과 또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오는 많은 고적들이 고적답게 복원되어가고 있는 에베소를 떠나 도시의 이름마저 이즈미르(Izmir)로 바뀐 옛 서머나로 가는 동안 가이드는 “서머나에는 옛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중에 아직까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폴리캅 기념 교회가 있기에 그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며 창 밖으로 바닷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라고 합니다.

한 낮이 지나 많이 기운 햇빛을 받으며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입니다.

낚시꾼들이 많으면 경기가 안 좋은 것이고, 낚시꾼이 별로 없으면 경기가 좋다는 이 지역 경제 지표라고 합니다.

지금은 많지 않은 정도랍니다. 누구나 다 알기 쉬운, 참 좋은 경제 지표를 가진 서머나! 배가 고프면 낚시대를 드리우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고양이도 아닌 사람이 생선으로만 살 수가 있을까요? 이그, 그 놈의 의심은….

서머나 교회는 사도들이 모두 죽고 난 후부터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있었던 초대 교회였다고 합니다. 이 핍박과 순교의 시대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모두 죽으면서 “사도 시대”가 끝나자, 그리스도인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외롭고 힘겨운 신앙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머나 교회는 신약성경에서는 요한 계시록 외에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도 없기에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곳에도 예루살렘에서의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에 의해 생긴 “자생 교회”의 교인들에게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할 때 전도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행 19:10).

계 2:8에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시작된 편지에서 예수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라고 칭찬하시며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고 권면하시었습니다.

아마도 악의 영들이 외롭게 신앙을 지키며 힘겹게 버텨나가던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강력한 핍박을 가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뿌리째 뽑아 없애려고 했던 것을 예견하시었던 것 같습니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 유적을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기독교 유적은 파괴되어 거의 사라졌으며, 수차례의 지진으로 거의 모든 고대 유적지가 대파된 데에다가 현대에 와서는 터키에서도 3번째로 큰 도시 소리를 듣도록 개발이 되다 보니 서머나 교회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1690년, 희랍정교회가 지은 “폴리갑 기념교회”가 아직도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여 심한 교통 체증을 뚫고 교회에 도착한 시간은 교회가 문을 닫을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늦은 오후였습니다.

교회사에는 서머나 교회와 관련된 유명한 두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소개하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Polikarp, A.D. 69-156년)입니다.

교회 안을 둘러보며 듣는 폴리캅의 생애는 믿음과 신뢰의 삶, 그리고 “죽도록 충성한 삶”, 바로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사도 요한을 찾아가 가르침을 직접 받음으로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폴리캅은 서기 115년경부터 156년경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어 복음, 특별히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고, 그 가르침을 그의 삶으로 증명했던 인물로, 폴리캅은 교회사에 있어서 두 시대, 곧 “사도 시대”와 “후 사도 시대”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폴리캅은 “영원히 유일한 진리는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이며, 교회가 전승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하나의 진리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선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이교도의 무리에서부터 하나님의 교회에로 회유해서 개종시켰다며, “아시아의 교회 전통은 폴리캅이 사도들에게 받아옴과 마찬가지”라고 이레니우스는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이레니우스(Irenaeus 115~202) [이단 논박]의 저자. 교회가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시기에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들끓었는지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지요. 문제는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가?” 일텐데 그 당시에는 이단을 규정하는 어떤 문서나 교리 신조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사도적 전승에 반하는 가르침"이라고 정의하였다고 합니다.

주후 160년경, 교회가 핍박을 받았을 때에 86세 노령의 폴리캅은 지방 총독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폴리캅의 덕망을 보고 “예수만 부인하면 살려주겠다!” 하였으나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하고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성난 군중들은 그를 사자 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사자들이 폴리캅에게 달려들지 않자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독은 어쩔 수 없이 폴리캅을 화형 시키라고 말을 하였고….(어째 멀리 유대 땅에서의 빌라도와 비슷한 행동 같지 않은가요….?) 바로 이 상황을 그린 그림이 천정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린 화가의 손을 묶어 놓은 채….

조금 더 자세히 보았으면…. 하였지만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빨리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퍼뜩 본 벽에 걸려 있는 튜린의 성의 복제품(?) 또한 특이 하였으나 자세히 볼 시간이 없으니 어이 할꼬…? 또 언제 다시 온단 말인가…!

교회 마당을 나오면서 생기는 의문, 왜 교회에 성물들을 걸어 놓아야만 할까….?

아마도 눈으로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그래야만 믿을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의 사고방식 때문이리라…. 그리고 교회는 그걸 이용하여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하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그러셨는데......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고 권면하신 말씀 위에 폴리캅의 생애를 되뇌이며 바닷가를 끼고 북상하여 옛 버가모 유적지로 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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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흔적을 찾아서(69)-에베소 교회가 받은 편지

 

대 도시, 에베소에 있던 교회에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신 말씀은 바로 에베소를 떠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2000년 전에 쓰여 이제야 배달된 편지를 읽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3년 가까이(행 20:31) 머물면서 눈물어린 목회를 했던 에베소 교회는 다른 초대 교회들보다 조금 더 순수했던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7 교회로 보내는 편지 중 첫 번째인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모든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거짓 사도를 드러낸 것과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잘 알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을 칭찬하고 있으면서도 “너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했습니다. 무엇이 처음 사랑이었을까요?

이즈음에서 초대 교회의 생성과정을 다시 한번 상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시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33년의 삶 중에서 3년을 공생애에 바치시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를 설명하시며, 그 나라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하여야 할 것들을 가르치신 후, 예언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후 다시 승천하시고, 한 분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다시 오신 일”이었습니다.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설명하시려니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비유로 설득하는 일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늘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기에,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을, 우리에게 주신 “주 기도문” 속에 함축시켜 놓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위해서, 사도들을 통해 병을 고치는 은사를 더해 주시고, 또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두려움 없이 순교할 수 있는 확신의 믿음을 주시었겠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았고, 또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각지로 돌아간 후, 여러 곳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퍼지게 되자 이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로 “자생 교회”의 씨앗들이 생겨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생 교회”를 인도하며 키워줄 사람은 고작 12명의 제자들뿐인데, 그네들로는 인간적으로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결정으로 7 사람의 집사들을 뽑아 일들을 분담시키고 사도들은 기도에 전념할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이 일이 문제의 씨앗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때였고, “자생 교회”들에겐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을 뿐, 로마 정부로부터 규제는 없었습니다.

이럴 즈음 나타난 사람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이었습니다. 그의 회심과 그 후의 사역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계시겠기에 재론은 안 하겠으나 “자생 교회”들이, 그리고 그가 선교함으로 시작된 교회들이 “초대 교회”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여러 지역에서 생겨나갈 때인 AD 60년경부터 로마의 박해가 시작되어 오자,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를 당하게 되고, “초대 교회”들은 더 멀리 소아시아로 피난을 가며 지하에 숨어들게 되었지요.

요한 계시록 2:6 에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그리고 2 :15에서는 버가모 교회에게 질타하시며, 성경에 2번 나오는 “니골라 당”의 시작은, 사도행전 6장에서 12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며 일곱 집사를 선출”할 때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로부터 였습니다.

그들 중 스데반 같이 순교한 사람도 있었고, 빌립처럼 복음 사역에 큰 업적을 남긴 이도 있었지만, 당시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초대 교회”에 니골라가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며 그 교리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기게 되자 그들을 "니골라당"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성경구절을 자세히 비교하여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에서는 단순히 니골라 당의 행위들을 지칭하는데 그쳤으나,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 당이 발람이 발락을 가르침 같이 교리를 바꾸고 있다”고 질책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남은 제자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돌보고 있었기에 그의 권위와 능력으로 에베소에서는 "니골라당"이 발을 붙이지 못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돌보고 있었던 1세기 말엽까지 여러 사도들이 기록했다고 추측되는 다른 문서들과 더불어 거짓된 이단들의 문서들 또한 많이 나돌게 되어, 초대 교회에 나도는 외경과 위경이 280개를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야기들은 모두 이 같은 문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며 지하에 스며들어 원시종교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확산되어 가던 초대 교회들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지상으로 나옴과 함께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게 되자, “로마 교회”가 되어 주교들이 각 교회를 다스리게 되자 교회들 간에 분란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로마 주교인 율리오 1세는 동방과 서방 주교들이 함께 참석하는 공의회를 사르디카(현재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합니다. 342년 혹은 343년에 소집된 사르디카 공의회에는 대략 서방에서 90명의 주교가 동방에서는 80명의 주교가 참석합니다마는 공의회는 참석 주교들의 자격 문제로 합의점을 못 찾자 동방 주교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사도 베드로의 권위’에 의해 로마 감독을 인정하며, 로마 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 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 주교좌의 우월성을 합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로마 주교좌를 놓고 교회들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이어 오던 중 366년 9월 24일, 로마 주교좌의 리베리오가 선종하자, 로마 교회는 두 파벌로 분열되어 귀족층의 지지를 받는 다마수스와, 부제들과 평신도의 지지를 받는 우르시키누스 사이에 피나는 투쟁을 벌여 우르시키누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378년에 열린 시노드에서 다마수스를 다마수스1세 교황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366년~384년재임). (다른 일설에는 다마수스에 이어 직위를 물려받은 38대 시리키우스(384~399년) 교황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교부들에게 교황 칭호를 붙여주어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는 제 266대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로마 교회에서 “가톨릭교회(The katholike ekklesia)”라는 용어는 서기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스미르나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교회 대표들이 모여 363년경부터 정경적인 책들을 비 정경적인 책들과 구분하는 일을 시작하여 367년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성경 목록을 마련한 후, 397년 제3차 카르타고 시노드에서 처음으로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선정하였으며,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확증되어 모든 외경과 위경을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많이 곁길로 빠졌지만,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그 사랑을 마리아 에게까지 확대시키며 싸움터가 되었던 “에베소의 종교회의”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통해서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를 쓴 후에도 몇 백 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진 회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아직까지도 살아 역사하며 우리의 마음을 때리는 것을 보면, 이런 것을 미리 내다보시며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며 책망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란 회의의 결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러러 나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란 때와 주위의 환경에 따라 너무나도 잘 변하는 것인데…. 허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그 길을 잘 모르는 저는 누군가가 미리 닦아 놓은 그 길을 걸어야 할 테인데 그 길의 끝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언제 즈음 알게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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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흔적을 찾아서(68)-에베소(7) '사도 요한 기념 교회'

 

유적지를 나와 버스로 이동한 곳은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요한 기념 교회 터였습니다. 이 역시 지금은 다 부서진 채로 몇개 안 남은 벽과 기둥들이 그 당시의 위용을 말해줄 뿐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른 12사도 가운데 최연소이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기록된 사도 요한의 삶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초대 교회의 발전과 박해과정을 몸소 체험하며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을 쓴 후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요 21:22)”라 하시던 주님의 말씀대로, 오랜 삶 후 자연사한 최후의 제자였지만 그의 일생은 실로 “파란만장한 삶” 이었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부유한 선주, 세베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요한은 아마도 이웃 동네 벳세다에 살던 어부 시몬(후에 베드로가 됨)의 동생 안드레와 함께 당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42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0절에서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라고만 하였지 다른 한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을 마치 삼자의 이름처럼 기록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 마태복음 4장에서 설명하는 “제자를 만나는 과정”이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마도 요한의 기록이 조금 더 정확할 것 같은 정황입니다.

이어서 안드레가 제 형, 시몬에게 가서 전도하여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니 예수님께서 시몬을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며 이 셋을 처음 제자로 삼으신 후 이어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니, 예수님은 모두 5명의 제자와 함께 사흘 후에 가나의 잔치에 참석하시었던 것입니다. (26회, 가나의 혼인잔치 참조)

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는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함께 갈릴리에서 성공한 선주이자 요한과 야고보의 부친인 세베대의 배에서 함께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으나, 요한과 안드레는 먼저 배를 떠나 세례 요한의 추종자로 지내던 중 예수님을 만나 따르게 되었고, 시몬은 동생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난 후 배를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인 요한은 타고난 과격한 성격 때문에 예수는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아울러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붙여주었지만(막 3,17), 요한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기적의 장소에도, 다볼산(변화산)에서의 변모를 목격하기도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같이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마다 수제자 베드로와 함께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앞에서 올려다 보고 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9: 26~27)

그 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다가 AD 66년, 티투스에 의해 유대인 봉기가 처참하게 진압당하던 전쟁의 혼란 속에 마리아를 모시고, 그 당시 디모데가 교회를 돌보던 에베소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이 때 아버지인 세대베와 어머니도 함께 이주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마리아만 모시고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AD 64년(어떤 기록은 62년), 사도 바울이 순교 당한 후, 에베소 교회를 인도하던 디모데마저 AD 80년, “5월 아데미 축제” 때 열광하는 군중을 향해 “여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며 말씀을 선포하다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디모데에 이어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절정에 이른 AD 94년경 에베소(Ephesus)에서 사역하던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있는 “도미티아누스 신전” 앞을 지나다가 황제의 동상 앞에서 경배하기를 거부하므로 로마 군사들에게 연행되어 재판 결과 사형을 언도받은 후 독배를 마셨으나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아,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지만 “온 몸이 녹아내리고 뼈가 휘어졌으나 죽지 않는다”고 보고를 하자 황제는 부하들에게 "이는 분명 신이 내린 사람이라며 사람의 손으로 죽이지 말고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하여 AD 95년경부터 사도 요한은 밧모섬 채석장에서 노동을 하던 중, AD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에베소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초의 내용은 그리스 정교회의 전승으로 전해오며 밧모섬의 요한 기념 수도원 벽에 벽화로도 남이 있습니다.

마치 다니엘의 3 친구가 당한 이야기(단 3:17)와도 유사한 일이 신약 시대에도 일어 났습니다마는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별로 예화로 이용이 안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요즈음 사람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이런 “초자연적인 일”을 믿기에는 너무나도 지혜(?)스러워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을 남긴 후 AD 100년경에 95세라는 나이에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시신은 에베소 근교의 아야술룩(Ayasuluk 현재의 셀축) 언덕 위에 묻혀 있다가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후, 에베소에서도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되었습니다.

그 후, 그 작은 기념교회가 있던 자리에 6세기 들어 “아야 소피아 교회”를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527~562)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요한 기념교회를 십자가 형태의 건물로 건축했는데,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고, 본당 제단에는 특별히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건물은 14세기 초에 지진으로 회생불능의 손실을 입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투르크군이 이곳을 점거함으로써 재건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슬림들에게도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전승이 전해졌고, 일부 무슬림들도 이곳을 참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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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6
흔적을 찾아서(67)-에베소(6) '마리아 기념교회와 에베소 종교회의'

 

지금은 산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 옛날에는 항구에까지 이어졌던 대로를 바라보며 조금 외떨어진 마리아의 교회로 갔습니다.

이 교회는 “테오토코스 성당”이라고도 부르는데, “테오토코스 (Θεοτ?κος)”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테오(Θε?ς)는 "신"과 토코스(τ?κος)는 "출산, 분만”을 의미하는 두 단어의 조합으로 "신을 운반하는 자", 즉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또는 “신의 운반자”라는 뜻이라고 하니 아마도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 쉽게 마리아 기념교회”로 소개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62회에서 누가복음의 수신자로 표현된 “데오빌로”를 데오스와 필로스의 합성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이 교회는 4세기경에 세워진 대형 교회였다고 하는데, 첫번째 성당 옆에 두번째 성당이 세워졌기 때문에 이중 교회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431년 제 3차 에베소 공의회가 열리었고, 이 회의에서 마리아가 신성시되어 아직까지도 천주교회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아니 어떤 때에는 예수님 보다도 더 숭상하는 신으로의 기초가 결정된 곳이건만, 지금은 무너지다 남은 벽 하나와 몇 개의 기둥이 서있을 뿐입니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을 방문한 후 성지로 선포하였기에 요즈음에도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에베소에 “마리아 기념교회”가 있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9: 26~27)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다가 AD 66년, 유대인 봉기가 진압당하던 유대-로마 전쟁의 혼란 속에 마리아를 모시고 그 당시 디모데가 교회를 돌보던 에베소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AD 80년, 디모데도 “5월 아데미 축제” 때 열광하는 군중을 향해 “여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며 말씀을 선포하다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디모데에 이어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AD 95년경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예수의 도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 되었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96년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계시록을 집필하는 등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에는 “요한 기념 교회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주에 소개 됩니다.)

또한 에베소에는 마리아가 살았던 집이라는 곳도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마는 우리 일행은 그 곳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을 간추리며 최선의 의견으로 집약하기 위하여 회의를 하게 됩니다.

회의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의견들로 토론이 되고, 그 토론이 격렬하여지게 되면 언쟁이 되고, 언쟁은 싸움으로 번지다가 급기야 서로 갈라서서 다른 세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양상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인 수장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몇 개의 중요한 종교회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가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마는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제1차는 325년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터키의 이스탄불) 근교의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종교 회의로써, 그 당시 교회 내의 분열과 분쟁을 끝내고자 소집했던 최초의 종교 회의였습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예수님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 곧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지닌 참 하나님”이라는 니케아 신조를 제정했습니다.

이 밖에도 부활절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하며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불씨를 남겨 놓았습니다.

제2차는 381년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서 기존의 니케아 신조에 성령(聖?)에 대한 내용을 첨가하는 등의 확대가 이루어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아리우스파나 네스토리안주의, 가현설, 사베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스주의 및 호모이우시오스 주의자를 배척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세가 점점 커지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들의 입장이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키릴루스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논쟁으로 커지면서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431년 6월 7일,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소집한, 제3차 에베소 종교 회의였습니다.

논쟁의 쟁점은 “예수가 신성을 지닌 채 태어났다는 주장에 따라 '신성을 지닌 탄생'인 테오토코스(Theotoskos)를 주장하며, 신성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로 인해 신성을 지닌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거룩한 어머니, 성모(聖母)라 부를 수 있다.”며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키릴루스와는 달리,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와, 예수는 인간의 영혼을 가지지 않고 신의 영혼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아포리나리우스주의에 따라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휘포스타시스(자립존재)가 병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의 탄생'이라 불러야 합당하다”는 주장의 대립이었습니다.

서로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의 주장으로 회의 기간동안 혼란이 지속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이 올 때까지 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주교들은 뜻하지 않은 문제로 회의 참석이 늦어졌고, 그 틈을 타서 먼저 에베소에 도착한 키릴루스가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과 함께 공의회를 주도하게 되자, 공의회는 키릴루스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네스토리우스 학파는 교리 논쟁에서 패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배척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하네스와 그 지지자들이 키릴루스 일파를 탄핵하고, 다시 로마에서 교황 첼레스티노 1세가 보내온 사절이 요하네스 일파를 파문하는 등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다양한 간섭으로 공의회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마는 결국 이 회의에서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 ‘Theotokos’ 이시다’는 것을 채택함으로 또 하나의 불씨를 남기고 끝난 회의가 되었습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433년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가 네스토리우스의 파문을 받아들이고 합동 신조를 발표하면서 키릴루스 일파와의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네스토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당했고, 451년 수도원에서 한을 풀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신학을 따르는 선교 활동은 중동을 포함한 동방 지역에서부터 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져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하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이, 새롭게 형성되는 신학과 정치 세력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되면서 기독교의 핵심이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되다 보니, 마치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동성끼리의 결혼도 인정하자”는 각 교단에서의 종교회의도 언제인가 먼 후일에 “동성연애를 합법화하고, 동성끼리의 결혼을 인정한 어디어디의 종교회의” 라고 명명되는 하나의 종교회의로 기록이 되어지겠지요?

신앙 속에 신학이 있는지, 신학 속에 신앙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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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흔적을 찾아서(66)-에베소(5) '아데미 여신'(The Artemis of Ephesus)

 

그 큰 원형 대극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그 큰 소란을 피우며 섬기던 아데미(Artemis)때문에 에베소를 떠나야만 하였던 사도 바울이 결국 AD 64년 로마에서 순교한 후,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던 디모데마저 AD 80년, 아데미 여신의 축제에서 그 “여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파하자 이에 광분한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오는 풍요의 여신, 아데미는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신성시하였던 신으로, 처음에는 킬벨레(Kylbele)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 여신은 로마와 메소포타미아 및 아라비아에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쳐

아랍인은 “알 라트(Al-lat, 알랏)”로, 이집트인은 “이시스(Isis)”로, 그리스인은 “아르테미스(Artemis)”, 로마인은 “디아나(Diana)”로 불렀으며 이오니아인들이 “아데미(Artemis)”라 불렀듯이, 여러 곳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결국은 다산(多産)을 의미하는 “풍요의 여신”이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의 가슴에는 유방이 24개가 달려 있고,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을 이고 있으며,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짐승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습니다.

매년 5월 아데미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따르는 축제의 행렬이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신전을 출발한 아데미 여신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에베소 시청에 이르러, 시청 앞에 있는 아데미 여신상을 만나게 되면

에베소 총독은 관저에서 나와서 아데미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데미 여신은 퀴레테스 거리를 지나 셀시우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 후,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대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고 합니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이 함성을 터뜨리고,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동안,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데미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고 합니다.

과연 무르익은 축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즈음에서 한가지 정정하고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입니다.” 라고 조금 전에 설명을 드린 것은 거의 모든 아데미 신상의 설명서에 나오는 말들로, 여신의 가슴에 있는 24개의 둥그런 모습을 유방이라고 표현한 대목입니다. 이는 유방이 아니라 황소의 고환이 맞는 설명일 것입니다.

실제로 신상의 사진을 자세히 보아도 유두가 없는 둥그런 모양입니다.

다산의 상징이기에 유방이라고 설명한 듯 하나, 실은 소의 고환이 다산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머리에는 또 커다란 바벨론 성을 표현하는 모자까지 쓰고 있었기에 이 축제가 끝날 즈음, 신전으로 돌아온, 그 해에 뽑힌 여신이 그 무게에 눌려, 과로사하는 일이 많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었습니다. (어디에서 기록을 보고 한 소리인지 아니면 전승되어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몸에는 왜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 것일까요?

니므롯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족보를 설명할 때입니다.

그런데, 유독 함의 후손들에 관한 언급이 6~20절에 이르도록 길어진 이유는 아마도 함의 후손은 구속 역사의 흐름을 방해한 측면에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기록하고픈 이야깃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이겠지요.

8절에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용사라” 기록되었으나 개역 개정 이전의 성경에는 “첫 영걸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영걸”의 히브리어는 “기보르”로서, 이 단어는 통상 “폭력으로 통치하는 자, 폭군”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의 성경”은 창 10:8~9 절을 “개역 개정 성경”과는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게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놓았습니다.

“구스는 또 니므롯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는 세상에서 최초의 정복자였다. 그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힘센 사냥꾼이었으므로 니므롯처럼 여호와를 무시하는 힘센 사냥꾼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기게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10절에서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라고 되어 있어서인지 AD 1세기경의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바로 이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도록 선동하고, 주도한 인물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등장하는 네피림(Nephilim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 사이에서 탄생한 영걸: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처럼, 니므롯은 당대에 힘이 아주 강한,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어, 그네들이 차지한 땅이 비옥하면서도 들짐승들이 많아 거주민들의 안전과 평화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을 때(출 23:29-30, 신 7:22), 니므롯은 이러한 고충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로서 짐승들을 사냥하고 제압하여 유명세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후 그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거대한 무리가 생겨났고, 그는 거대한 세력(권력)을 가진 소위 ‘영웅’이 되어, 점점 불어나는 거대한 집단의 힘, 그 세력으로 자신을 신격화 하며, 바벨탑을 쌓아 올려, 마침내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대적하고, 백성들의 영혼을 도둑질하여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하는 적그리스도적 인물의 표상으로 변질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서 풍요를 누리기 위하여 황소의 고환이 필요하니, 니므롯처럼 특별한 사냥꾼이 필요하였고, 돼지보다도 더 많은 젖이 달린 아데미가 필요한 타락한 도시, 에베소가 되었나 봅니다.

에베소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였던 아테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3번이나 완전히 새로 세워졌는데, 첫 번째는 거대한 홍수로, 두 번째는 방화로 소실된 후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의 후원으로 세번째 지어진 신전이 있었는데,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나 큰,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12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신전이었습니다.

이런 신전이 기원후 263년에 Goth인들에 의해 파괴된 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그 많은 기둥들이 각처에서 교회를 비롯하여 건물들을 지으며 필요한 석재들을 이 곳에서 가져다 사용하여, 지금은 잡초뿐인 옛 터에 지름 2m의 돌기둥 하나만이 쓸쓸하게 남아 가끔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여 주고 있습니다.

많은 기둥들이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건축에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막상 성 소피아 성당에 가서 보는 동안, 벌려진 입을 닫지 못한 바람에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찾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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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2
흔적을 찾아서(65)-에베소(4) 원형 대극장

 

“인내”라는 뜻을 가진 에베소는 고대 그리스에 의해 건설되어, 로마가 한창 세계로 그 세를 확장하던 시대에는 현재 이태리의 “로마(Rome)”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그리고 현재 터키와 시리아 국경지대에 인접해 있었던 “수리아(Syria)의 안디옥(Antioch)”과 함께 로마제국 4대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곳입니다.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이며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의 성지인 에베소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도시였었습니다. 이런 큰 도시였으니 당연히 커다란 원형극장이 있을 수밖에요.

피온산 기슭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어진 웅장한 원형극장은 2만 5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극장이었습니다. 현재 에베소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원형 대극장 건물은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로마 시대에 각 부분이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관객석은 지름 154m, 높이 38m 반원형 구조로 총 66층의 줄이 3개의 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3층으로 된 무대 건물은 18m 높이였었답니다. 시민들이 모이는 집회, 연극과 문화예술 공연이 상연되었고, 로마 시대에는 검투사들의 경기도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음향 전달을 위해 객석 아래에 청동관과 토관을 묻어 진동을 극대화하였으며, 지형과 자연환경을 이용한 음향 기술을 구현하였다고 합니다.

극장으로 우리가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는 중에 어느 그룹 가이드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노래를 하며 그 음향시설이 잘 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방금 들어온 내 귀에도 잘 들리도록 음향시설이 놀랍게도 좋았습니다.

그 노래가 끝나고, 우리라고 가만 있었겠습니까? 대부분이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며 한 가닥씩 하시는 분들이신데….

무대 위에 둘러서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 하였습니다. 터키 땅에서, 그것도 유서가 깊고 사연이 많은 에베소 야외극장에서….

얼마나 잘 들리는가를 직접 느끼기 위하여 카메라를 멘 채 층계를 뛰어 올라갔습니다. 1층의 반 정도도 못 올라갔을 때 벌써 후렴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요.

돌아서서 듣는 그 하모니!  전신에 흐르는 전율은 도저히 함께 부를 수가 없도록 눈물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 나는 울보니까요. 울기 바빠서 사진도 제대로 몇 장 찍지 못한 채 그 감동을 느끼며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서양 관람자들도 함께 허밍으로 따라 불러준 “주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그리고 아낌없이 보내주는 큰 박수에 야외극장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떠나갈 것 같았습니다(아직 안 떠나 갔으니까 다음기회에 꼭 한번들 가 보시라). 그만큼 소리 전달이 잘 되도록 지어진 야외 극장이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원형극장 설계의 원리는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지만, 설명을 못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아마도 이런 원형극장의 음향 효과와 같은 원리를 이용해서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산에서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을 하셨고 그 군중들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산상 수훈 장면에서 예수님을 산 정상에 세우고 듣는 사람들을 그 아래로 설정해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이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예술가들이었지 과학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도시에 사도 바울(Paul)이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선교를 하며 교회를 세우고, 유대인들의 방해를 피하여 두란노 서원에서 계속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19장 19절)

자연히 그 반대급부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으니, 이들은 금.은.세공업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한 건축물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소개됩니다.) 

이 신전을 관광하러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금은 세공업자들은 이 우상, 즉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팔고, 관광객들은 부적같이 이 아데미 신상을 가지고 다니게 되어 제법 돈벌이를 잘하고 있었는데, 관광객이나 에베소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하니” 누가 우상을 사겠습니까? 

그러니 금은 세공업자 중 데메드리오라하는 사람이 자기 종업원들과 동업자들을 선동하여 복음전하는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데메드리오는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시 동안이나 하더니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행 19장 25~41)

 

본문에서 보인 것처럼 사도 바울이 그 무리들에게 잡혀가지 않고 그를 돕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간 후 바울이 따라 들어가 몸소 해명하려 하였으나 제자들이 만류하고, 또 에베소에서 친구된 관리들이 권면하여 원형극장에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사도행전 20장 1절에 쓰인 대로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떠날 수가 있었음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 더 큰 일을 위해 베푼 은혜인가 봅니다. 

비록 그것이 더 큰 핍박으로 다가와 결국 순교를 하기에 이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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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6
흔적을 찾아서(64)-에베소(3) '셀시우스 도서관과?유곽'

 

에베소 유적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꼽으라면 단연 지금은 파사드(Façade 건축물 정면)만 남아있는 셀시우스 도서관이 될 것입니다. 비록 부서진 채 앞면의 일부만 남아 있지만, 정교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의 조형미는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건물입니다. 저 역시 사진으로만 보아오며 언제인가 실물 보기를 동경하여 오던 건축물이었으니까요.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장서 20만권을 가진 버가모에 있는 도서관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으로 약 1만2000여권의 장서가 보관됐었다고 합니다.

당시 책이라는 것이 양피지 아니면 파피루스였기에 습기에 약한 책들을 잘 보관하기 위하여 이중벽을 만들었을 정도로 잘 지어진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도서관에서 많은 학자들이 공부하며 학업에 정진하였었겠지요.

그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인 사도 바울 또한 에베소에서 보낸 시간들이 모두 3년 남짓 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이곳에서 많은 도서를 열람하며 강론도 하였을 것이라는 가설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이곳이 사도 바울이 근거로 삼았던 두란노 서원의 자리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고···.

확실한 기록이 없으니 목청 큰 사람의 주장이 이길 법합니다마는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셀시우스 도서관은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던 총독 셀시우스(Celsus)의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AD 117년~135년에 걸쳐 지은 건물이니, 이 때에는 사도 바울은 물론 사도 요한 마저 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후일 터이니 말입니다.

이 도서관에 있던 장서들은 AD 262년, 고트(goth)족의 침략으로 다 소실되었고,

그 후 4세기에 이 지역을 강타한 큰 지진으로 내려앉아 매몰되었던 것을 1903~1904년 오스트리아 고고학자가 에베소 유적지를 발굴한 후 1970~1978년, 독일 고고학자 볼커 미카엘 스트록카(Volker Michael Strocka)의 “에베소 건축물 재건운동”에 의해 그나마 일부분 남아있던 유적들을 근거로 파사드(Façade 건축물 정면) 형체를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집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선교하는 일이 기록되던 중, 9절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영어로 School of Tyrannus인데, 영어나 라틴어 권에서 티란누스(tyrannous)는 '폭군'을 뜻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나오는 “티란노스(Tyrannus)”는 헬라 사람의 이름으로 “sovereign, 주권자”를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 당시 티란노스는 자기 집에 “서원(school)”이 있는 철학자이거나, 사상가로 추정되고 있는 인물로, 9절에 쓰여진 대로 바울은 자신을 배척하는 회당의 “복음의 훼방꾼들”을 벗어나 이 곳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며 날마다 강론을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언급한 제자들은 2차 전도여행을 매듭짓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던 바울이, 잠시 기항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하게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시작해서 에베소를 다시 찾은 바울을 통해 새롭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여러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셀시우스 도서관으로 돌아가, 정면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고, 출입구 사이 벽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4개의 여성상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부터 각각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Sophia)상, 미덕을 상징하는 아레테(Arete)상, 지성을 상징하는 에노이아(Ennoia)상, 그리고 지식을 상징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상들로 아름다운 여신들의 석상입니다.

이 여신상들은 다 복제품이랍니다. 진품의 일부는 최초 발굴자의 권리 주장으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박물관에 있고, 남은 부분은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 하필 여신상이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이 도서관 바로 건너편이 그 당시의 유명한 유곽이라는 것입니다. 길을 건너 조금 더 내려오니 길바닥에 박힌 자그마한 돌 판이 나옵니다. 케말이 그 돌에다 물을 부으니 선명하게 나타나는 발자국과 또 여자의 모습, 그리고 동전의 모습. 이게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랍니다.

내용은? “당신을 사랑해 주기 위하여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라나…. 유곽의 광고랍니다.

‘지라시’(‘광고 전단’이라는 일본 말의 잔재. 근데 이런 건 ‘지라시’라고 하는 게 뉘앙스가 좀 나을 것 같습니다. ㅎㅎ)를 뿌리는 게 아니라 대리석 돌 판에 새겨진 광고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넘도록 생생히 그 내용을 전해주는 광고이니 그 본전은 몇 백 곱을 뽑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때에도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남자였던 모양입니다. 남자들이 가는 곳에 따라붙는 여자들! 필요와 공급의 원칙은 그 때에도 벌써...? 하긴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당시 인구 숫자에 끼지도 못하는 여자의 존재였건만, 그런 여자들이 아내가 되고, 자식을 낳아 어머니가 되면, 남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파워를 가지게 되어 있으니, 그 파워 역시 그때에도 벌써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바람기가 일반적인 그 당시 남편들도 아내에게 “잠시 유곽에 갔다가 올게!” 라며 떳떳이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나, 도서관에 갔다 올게!”하고 거짓말을 해야만 하였나 봅니다.

남편이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겠다는데 아내가 무슨 토를 달아 제재할 겁니까?

마치 자녀들이 놀러 나가는 거 같은데도 도서관에 간다면 아무 소리 못하는 요즈음의 부모들처럼 ….ㅋㅋㅋ

아마도 집요한 아내들은 “그래요? 나도 같이 갑시다!” 하고 함께 따라 도서관으로 왔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곤 옆에 앉아 요리책을 보던지, 소녀경(素女經)을 읽던지…. 이런 아내들의 남정네는 도서관에서 책을 펼친들 그게 머리에 들어왔을까요? 마음은 바로 창 밖 건너편 콩밭에 가 있었을 텐데··.ㅋㅋㅋ.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광고판에 새겨진 발의 크기로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하였다는 겁니다. 발 크기가 그것보다 크면 들어올 수가 있고, 그것보다 작으면 집에 가서 젖 좀 더 먹고 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착상인가요!

내 발은 분명 그것보다 크기에 들어갈 자격(?)이야 넘치지만 이제는 허물어진 유곽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으니 문고리를 잡을 수도 없고…. 오호, 통재로다.

광고판의 아낙은 아직도 예쁜 아낙인 채로 나에게 손짓을 하는데, 옆에 선 부인은 나의 손목을 잡아끄니....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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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9
흔적을 찾아서(63)-에베소(2) '유적지'

 

에베소 유적지는 사도 바울이 2, 3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하며 전도활동을 편 곳이라 해서 한국 관람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의 무덤 터를 보며 “앞으로 볼 모든 곳이 다 이렇게 무너진 곳일텐데… 다 이러려나?”하는 아쉬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다음 에베소 유적지로 갔습니다.

가이드 케말이 사온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니 대로를 메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 여기부터는 뭐 볼거리가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아마도 크루저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 같은 대열을 따라 가며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쎌시우스 도서관과 대형 야외극장이 있다고 했으니까….”하는 기대로 따라 들어간 고대 에베소 유적지! 발 닿는 곳마다 경이로움에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 많고, 웅장하고, 정교한 유적들. 어찌 말로,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요.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라 하였으니 지면상 많이는 못하더라도 재미있을 법한 곳들을 사진설명으로 대신하렵니다. 이 곳에도 예외 없이 로마시대의 목욕탕과 공중변소, 로마의 황제들과 그 외의 우상들을 숭배하던 신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살기 위하여 먹고, 배설하고, 그리고 삶의 어려움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신을 믿으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과 좀 더 잘 사는 것을, 좀 더 부유한 것을 뽐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속성은 그때나 이제나 다름이 없는 모양입니다.

(앞으로 5회에 걸쳐 에베소의 다른 유적들과 함께 교회 관련 이야기를 이어 가도록 하려 합니다.)

 

 

바리우스의 목욕탕 (Bath of Varius)
 

1세기쯤 만들어졌다는 이 목욕탕에는 냉탕, 온탕, 사우나, 탈의실 등의 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기할 점은 우리나라의 온돌 원리와 비슷한 난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토기처럼 생긴 것들은 당시 수도 배관을 발굴해 모아둔 것으로 그 당시에 사용된 온수와 냉수 수도관들입니다.

 

 

THE BOULEUTERION (Odeion오데온)

안내판은 "THE BOULEUTERION" 이라고 되어 있지만 가이드는 이런 반원형 형태의 극장을 “오데온”이라고 한답니다. "오디오"의 어원이 바로 이 “오데온”이라고 하네요.

당시에는 지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귀족들이 회의, 음악회 등 각종 공연을 했던 극장으로 1,400명가량 수용 가능한 작은 원형 극장입니다. 이 곳에는 이 외에 엄청 큰 원형 극장이 하나 더 있답니다. (65회에 소개)

 

 

 

승리의 여신 "니케(Nike)

커다란 돌에 새겨진 여인이 승리의 여신 "니케(Nike)" 입니다. 니케 여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승리의 월계관이고요. 요즈음 한창 인기 있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바로 이 여신에서 따온 이름이고 로고 역시 이 돌의 형상에서 받은 영감이라고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에베소의 고급 주택

걸어 내려가다 보니 한 켠에는 거대한 임시건물을 설치한 구역이 있었습니다. 외부와는 폐쇄돼 있어 그 안을 보려면 또 다른 입장권을 사야 하기에 케말이 사온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 보니 새로 발굴, 복원되어가고 있는 당시 부촌의 고급 빌라들 내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벽에, 바닥에 수놓은 모자이크 그림들, 냉수와 온수를 함께 나오게 한 상수도 시설물들의 잔해… 그 당시에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던지 요즈음 사는 것에 하나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은 것처럼 호화로웠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옛날에도 분명 이런 호화로운 집을 소유하며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손님처럼, 종처럼 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비록 종의 몸으로 살더라도 내집처럼 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 집이란 호화로움이나 육체의 안락보다는 내가 마음 편하게 거하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지요!

 

 

THE CURETES STREET (퀴레테스 거리)

헤라클레스 문에서 셀시우스 도서관까지 연결된 길. 좌우 보행로 바닥은 모두가 모자이크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 행정과 종교 업무를 담당했던 사제를 "퀴레트" 라고 했습니다.

이 거리의 양쪽에 사제들과 유명인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 "퀴레테스 거리 (Curetes Street)" 라고 불렀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기둥만이 남아있습니다. 인근 항구를 통해 외국에서 들어온 실크, 향신료 등 고급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과 요한의 시대 까지만 해도 에베소는 아주 번창한 항구 도시였습니다마는 카이스트로스 강(River Kaystros) 하구에 토사가 퇴적되며 항구가 점점 현 에베소에서부터 멀어졌다고 합니다.

 

 

 

THE LATRINE (공중 화장실)

50여명이 동시에 일을 볼 수 있는 공중변소였다는 곳에 들어가니 긴 대리석 판에 구멍을 잘도 뚫어 놓았습니다. 여럿이 밑을 까고 둘러 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하였을까요?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주식 값이 너무 떨어져서 걱정이라고…?

기름 값이 너무 올라 살기 힘들어 졌다고…? 아님 Sunshine Girl을 보면서 어제 사온 계집종의 자태를 뽑내었을까요?

바지를 입은 채로 바로 그 자리에 앉은 우리 일행들의 모습도 참 재미 있었습니다.

시워~언 한 표정을 짓는 사람에서부터 힘쓰는 표정을 짓는 사람까지… 그래도 이태리제 대리석 변기인데…ㅋㅋㅋ

현재의 양변기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밑으로 오물이 떨어지면 하드리아누스 신전 뒤편에 위치한 거대한 목욕탕, 스콜라스티카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로 씻겨 내려가는 수세식 화장실의 형태이니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프라이타니온(Prytaneon)

시 의회당이 있었던 곳으로 고관들의 회의와 종교 의식, 공식 리셉션 장소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의 심장을 상징하는 Hestia의 신성한 성화가 꺼지지 않고 타 올랐다고 합니다.

 

 

 

멤미우스 기념비(Memmius Monument)

1세기 멤비우스가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 “술라”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 “술라”가 에베소를 탈환하는 장면과 “술라”를 칭송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Hadrian’s Temple)

 

 

상업 아고라(Commercial Agora)

에베소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가 있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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