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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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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8
모세의 시내산과 지도의 시내산(2)

 

우리들이 교회에서 배운 대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은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있는 삼각형의 시나이반도 남동쪽에 있는 “에벨 무사”라는 산입니다.

 

그 산자락에는 성 캐서린 수도원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한참 박해가 심할 때, 알렉산드리아 귀족의 딸로, 아름다운 용모와 학식이 뛰어난 여인, 캐서린이 순교를 당하였는데, 그 후 천사들이 그녀의 시신을 이 산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이 되자 교계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시내산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도,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 십계명이란 약속의 증표를 받은 시내산이었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을 위시하여 성경의 기록을 중심으로 시내산을 찾기 시작하던 중, 마침 시나이반도 남단에 있는 제일 높은 산 에벨 무사”의 산정으로 순교자인 캐서린의 시신이 옮겨졌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라 이 산을 “시내산”이라고 하기로 결정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가 사실로 인정될 수가 있는 장점도 있었을 테니까요. (이 것은 학계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당시 전래되어 온 이야기에 근거한 저의 추론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마침 기독교에 귀의하여 신심이 깊어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지원하여 이 산 기슭에 하나님이 거니신 시내산 수도원’(Monastery of the God-Trodden Mount of Sinai)이라는 이름의 수도원을 지었으니 순교자 캐서린의 이야기와 더불어 이 산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라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그 당시 교계에서 받아드려 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후 800년경, 한 수도사가 이 수도원 안에서 한 유골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을 캐서린의 것으로 추정하여 “성 캐서린 수도원”이라는 별명을 부치게 되었는데 지금은 원래 이름보다 “성 캐서린 수도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3년에 UNESCO 세계유적지로 등록되어 그 역사적인 가치를 명실공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844년에는 독일의 성서학자 콘스탄틴 티셴도르프(Konstantin Tischendorf, 1815- 1874)가 이 수도원에서 엄청난 발견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시내사본”이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 구약 합본 성경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를 이 수도원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티셴도르프는 최초로 발견한 43쪽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 그리고 추가로 입수한 347쪽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 캐서린 수도원은 1975년에 추가 발견 분 12쪽을 갖고 있으며, 대영도서관은 러시아 보관 본 대부분을 사들여 지금까지 보관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는 1600여년 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감독 아래 고대 헬라어로 송아지피지 위에 쓰인 것으로, 성 캐서린 수도원에 보관돼 오던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일부가 빠져 있으나 4세기경에 정립된 신약성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중요한 자료로, 현존하는 성경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사본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코덱스(Codex)란 필사한 후, 두루마리 형태가 아닌 일반적인 책과 유사한 형태로 제본된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하는 페이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현대의 책처럼 제본된 방법을 이르는 말입니다.

 

2008년 7월 24일부터 대영도서관은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를 근 1년에 걸쳐 온라인으로 공개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보통 시내사본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라고 하는데, 약 100년 후인 1947년에 사해 서쪽에 있는 와디 쿰란 (사해의 북서쪽 해변에 있는 쿰란 근처) 주변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의 첫 두루마리 이후, 10여 년에 걸쳐 인근 11개 의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로, 쓰여진 시기가 기원전 2세기로 올라가기 때문에 엄청난 종교적,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현존하는 구약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사본입니다. 물론 성경의 구약부분만 있을 뿐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문서는 예루살렘의 지혜의 신전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시내산의 위치는 아라비아에 있다고 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감독 아래 신약성경을 포함한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를 만들면서도 왜 시내산을 시나이반도 안에 있는 산이라고 하며 그 기슭에 하나님이 거니신 시내산 수도원’(Monastery of the God-Trodden Mount of Sinai)을 지어 놓았을까요? 그 당시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는 동로마의 영토였기에 지금처럼 출입금지 구역이 아니었을 텐데….

 

아직도 많은 토론이 오가고 있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지역을 공개하지 않기에 자유로이 조사를 할 수 없는, 학계에서는 결론을 못 내린 채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시나이반도에 있는 시내산을 오르면서 감격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시나이반도에,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안에 수많은 지명들이 모세와 관련이 되어 있으니까요,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중의 한권

 

암만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사해사본의 일부분

 

시내산 기슭의 센 캐서린 수도원. ‘하나님이 거니신 시내산 수도원’(Monastery of the God-Trodden Mount of Sinai)이 원래의 이름입니다.

 

센 캐서린 수도원에 이어 후대에 지어진 부속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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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1
모세의 시내산과 지도의 시내산

 

우리는 요즈음 “창조론”과 “진화론”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문명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무엇”이 진화하여 인간을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우주를 만들었는지를 규명하지는 못한 채 막연히 Big Bang 이론을 최초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분들도 “신”의 존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도 니체가 그의 철학소설에서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한 “신은 죽었다! -니체”를 더 신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창조론자들은 또 이렇게 댓글을 달지요. “니체는 죽었다!-신“

 

 지구 안에 존재하던 어떤 민족에게나 다 그들이 믿던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신들의 이야기가 글자가 생기기 전, 그림으로 표현하던 때가 지금부터 약 5,500년경 전이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가며 문명이 발달하여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들이 믿는 신들의 이야기가 글로 남겨지고, 또 그 믿던 신들을 위하여 곳곳에 신전을 만들어 세우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3,000년경,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5,000년 전부터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견되었지요.

 

그 수많은 유적에서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들을 유추하며 인간들의 역사를 써오다가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오류를 고치기도 하며 오늘에 이르렀지요.

 

여기에 더하여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인도문명과 황하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중국 문명을 합하여 우리들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역시 단기로 치면 2020년을 기준으로 건국 년도가 4,353년이 되니 얼추 이와 비슷하게 개국되었다는 것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시간을 다시 오래 전, 기원전 1800년경으로 거슬러 가면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상인들에 팔려 이집트, 당시의 애굽으로 팔려가는 이야기가 있던 때가 됩니다.

 

이때부터 약 400년간을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던 야곱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루도록 큰 무리가 되어 모세라는 선지자와 함께 애굽을 떠나던 과정의 기록이 출애굽기에 장대하게 기록되었지만 막상 이집트에서는 수많은 성지 순례자들로부터 막대한 관광수입을 얻으면서도 아직까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이 발전하면서 고분의 상형문자들을 해독하다 보니 그 상형문자 속에 이런 역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오늘에는 전설에서 역사가 되었지요.

 

대체로 이들의 신화는 건국과 통치를 위한 방편을 신화의 기반으로 두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중에서도 이 4대 문명의 변방인 크레타 섬에서 기원전 2,000년경부터 발달한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 인도로부터 온 도리아족의 침략으로 미케네문명으로 발전하며 수많은 신들을 만든 후, 이 신들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였지요. 이런 신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그리스 신화라고 부르며 오늘날까지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기원 전 205년경부터 그리스가 신흥 로마의 침략을 받다가 기원전 146년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에게 완전히 점령을 당하였지만 이들의 문명은 오히려 로마를 점령하여 이들의 여러 신들이 이름을 바꾸면서 로마의 신들이 되었지요.

 

세월이 조금 더 지나자 세월을 기원 전과 후로 바꾸어 주는 위대한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으니 이가 신약성경의 기원이 된 “예수님”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이 낳은 어린아이를 살리기 위해 부모에 의해 물에 버려졌지만 여차여차하여 애굽 왕실에서 왕자로 자라던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정체성을 알게 된 후, 미디안 광야로 도주하여야 했고, 그 곳에서 40년간 이방인들과 살던 중 호렙산에서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며 방황하던 40년의 광야생활이 출애굽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쓴 책이 구약의 첫 책인 창세기이고, 백성들과 함께 하며 필요한 규율을 만들기 위하여 쓴 글들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 다섯 권의 책을 “모세 오경” 혹은 토라(????)라고도 불리는 유대인들 경전의 근본이 되는 “구약 성경” 책들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내용은 모세가 태어나기 약 1,500년 전, 아니 어쩜 더 오래 전의 일들을 기록하였기에 진화론자들에게나 지식인들에겐 믿기 어려운 서술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 신화와 닮은 점도 있으니까요. 이 점들은 앞으로 다니면서 해당되는 지역에서 조금씩 더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내산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를 하며 “흔적을 찾아서”를 시작하려 합니다.

 

시내산이 시나이 반도의 “에벨 무사”라는 전통적인 견해는 4세기 말경에 정립이 된 것 같습니다. 기원 후 381~384년 사이에 에제리아(Egeria)라는 수녀가 예루살렘과 시내산 등, 동쪽의 성지를 순례하며 본 대로 자매들에게 적어보낸 수기의 사본이 19세기 후반 이태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중간 부분만 있고 전후(前後) 부분은 없었으나 순례를 할 무렵에 시내 산으로 가는 여정지들이 잘 기록되어 있으며 숙박 시설들과 수도사들의 체계적인 안내가 있는 것으로 출애굽 여정지를 순례한 기행문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들 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구전과 역사가 혼재되어 온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지도 일부

 

▲시내산에서 아침 해돋이를 본 후 내려오는 인파들

 

▲시내산 정상의 한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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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네덜란드 풍차 마을 - 잔세스칸스(Zaanse Schans)

 

BC 5세기경부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다가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낮은(Neder) 땅(Land)이라는 뜻의 네덜란드(Nederland).

 

Holland라고도 하고, Dutch 라고도 하고 Netherlands 라고도 부르는 네덜란드는 주위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와 더불어 베네룩스 3국이라고 부르는 경제 공동체로 국토와 인구규모가 작은데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상.공업지역의 하나로 손꼽힌다.

 

스페인의 지배아래 있다가 독립하며 이룬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은 17세기에 “황금기”를 맞아 그 빈약한 자원에 어울리지 않게 세계적인 식민제국으로 발전하여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연합전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며 중계무역을 통해 국제경제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예술가, 저술가, 과학자 들이 모여드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 아이크, 토마스 아 켐피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베네딕트 디 스피노자와 르네 데카르트는 이 곳에서 지적 자유를 즐겼고, 빈센트 반 고흐, 렘브란트와 요한네스 페르메이르 등이 그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신들의 열정을 캔버스에 쏟아놓으며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네덜란드가 자바섬에 설립한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시아 식민지들을 확보하며 경제적으로 풍요한 국민들의 생활 방식이 널리 확산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툴립의 나라,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아 풍차로 물을 퍼내야 하는 나라면서도 중개무역을 발판으로 농업 강국이 되어 2017년 기준으로 국민소득 52,370US달러로 세계 11위를 기록하고 있는 작지만 작지 않은 세계 6위의 교역국이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Dutch pay” 라는 말이 있다. '더치 트리트(Dutch treat)'에서 유래한 말이다. 1602년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무역 등을 위해 동인도회사를 세우며 잘 나가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트리트(treat), 즉 '한턱내기' 또는 '대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 되었지만 17세기 후반, 영국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3차례에 걸쳐 패하며 네덜란드의 제해권(制海權)은 점차 영국으로 넘어갔고, 이에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Dutchman)을 얕보기 시작하면서 영어에서 '더치(Dutch)'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인들은 '대접하다'라는 의미의 '트리트(treat)' 대신 '지불하다'라는 뜻의 '페이(pay)'로 바꾸어 사용하며, '더치 페이'라는 말은 함께 식사를 한 뒤 자기가 먹은 음식에 대한 비용을 각자 부담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외에도 미국의 펜실베니아 주로 이주한 독일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생겨났다는 유래도 있기는 하지만….

 

튤립을 보았으니 이제 풍차를 봐야 할 텐데 풍차로 유명한 네덜란드에서도 이제는 풍차를 보려면 암스테르담에서 좀 떨어진 풍차마을 잔세스칸스(Zaanse Schans)로 가야만 한다. 마치 한국의 민속촌처럼….

 

바람이 많은 나라 네덜란드에서도, 풍력을 이용한 풍차보다는 효율이 더 좋은 현대식 풍력 발전기를 이용하다 보니 전통적인 풍차는 거의 다 사라지고,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된 풍차마을을 방문해야 할 정도로 세월이 바뀐 모양이다.

 

자그마한 나무 다리를 건너 풍차 마을에 들어서면 원목으로 지은 집과 아름다운 풍차들이 마치 야외 박물관 같은 느낌을 자아내며 길 따라 서있다.

 

실제로 잔세스칸스(Zaanse Schans) 마을은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산업혁명 시대를 이 지역에 재현해 놓고, 장인들이 매일 풍차 방앗간과 다양한 작업장에서 일하며 관광객들을 맞이하기에, 길을 따라 가노라면 나막신 작업장이나 납땜 공장, 치즈 공장이나 제분소 등을 방문할 수 있고, 길 건너에는 푸른 풀밭에 방목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잔세스칸스라는 이름은 스페인의 침입에 대항해 싸웠던 80년 전쟁(1568-1648)중에 지어진 흙으로 만든 요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스칸스(Schans)가 요새라는 뜻이니까 잔(Zaan)의 요새라는 말이 되겠다.

 

16세기에 잔(Zaan)지역에는 이와 같은 형태의 요새가 13개나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 곳 잔세스칸스는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의 공격을 받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풍차를 주 동력으로 삼던 18-19세기에는 이 곳에 약 600개의 풍차가 있었지만 1961년에 잔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주변에 있던 풍차 11개와 전통가옥 35채를 모아 우리 나라의 민속촌처럼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전통마을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또 다른 대표 명소인 ‘안네 프랑크의 집’은 작은 집에 비해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여름 내내 매진되기에 미리미리 예매를 하여야 한다고 한다. 혹시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리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우리 일행은 자연스레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옛날에 보았던 “안네의 일기” 영화의 기억들을 차창으로 보이는 주변 경계 위에 오버랩 시키며 낮은 땅, 네덜란드를 빠져 나왔다. 풍차의 바람을 받으며….

 

(인사말씀)

80주간 동안 함께 서유럽을 대가리 하시며 성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잔인하리만큼 힘들었던 봄이었지만 모두들 건강히 이겨 나가시며 좋은 날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다음 글, “흔적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동안에도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성원을 보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천천히 드림

▲나막신 만드는 기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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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7
네덜란드 튤립파동 (Tulip mania)

 

튤립 파동(Tulip mania)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샤를 드 레클루즈(Charles de l’Écluse)가 1593년,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에 초빙되어 올 때 가져온 튤립 구근을 레이던 대학에서 재배하며 연구하고 있을 때는 바로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정치적 안정을 찾은 후 해외진출의 황금시대가 시작될 때였다.

 

1610년경에 최초로 튤립이 꽃 시장에 등장하자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식물 애호가들이었다.

 

때마침 해외진출 황금시대로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한 동인도회사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은 갑작스러운 부호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고, 이 벼락부자들은 사치를 하면서도 또 다른 투자처를 찾기 시작하던 차에 단색의 평범한 튤립의 가격은 저렴해지며 수요와 공급이 맞추어 졌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색상으로 변한 튤립이 생기면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 시작하자 희귀한 튤립은 점점 비싸지며, 희귀한 튤립의 보유 여부가 부의 척도로 간주되어 부유층들이 앞다퉈 희귀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튤립은 단기간에 품종을 늘리기 어려운 종류이기에 품귀 현상을 일으키고 가격을 인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튤립은 씨앗에서 육성하는 방법과 모근에서 복제를 통해, 자근을 육성하는 방법이 있다. 씨앗에서 성장하는 교잡에서 신종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꽃을 피우기까지 3 ~ 7 년이 소요되는 반면, 모근으로 육성하면 그 해에 바로 꽃이 피기 시작하지만, 모근에서 생성한 자근은 2 ~ 3 개 정도가 모근으로 성장할 뿐, 발아하지 않는 종근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급격한 수요 증가를 생산이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색상이 변하여 피는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높은 값으로 팔렸다. 그러니 많은 원예가들이 서로 독자적인 품종개량 및 재배에 뛰어 들며 다양한 종류의 튤립들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리프킨 제독(Admiral Liefken), 폰 데르 아이크 제독(Admiral Von der Eyk),

피세로이(부왕, Viceroy), 제네라리시모(장군, Generalissimo)등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 고급 품종이었다.

 

특히 애호가들이 환호했던 품종은 브레이킹을 일으킨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센페이 아우구스투스〉(영원한 황제, Semper Augustus)였다. 튤립으로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장인과 농민 등에게도 퍼졌고, 그들도 서서히 시장에 참가하였다.

 

이때까지 튤립 거래는 구근이 현물로 거래되고 있었다. 또한 현물 거래를 위해 튤립 매매가 이뤄지는 겨울 동안에 그쳤다. 그러나 전매 이익을 얻는 자가 속출하며 과열된 튤립 인기는 계절을 불문하고 거래할 수 있는 구조를 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나 연중 거래와 그에 따른 선물 거래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거래된 튤립 알뿌리의 거래 총액을 보면, 1633~1637년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에서 거래된 금액이 각각 2,000만 길더였다. 다른 10곳의 거래소 규모가 암스테르담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해도 4년 동안 네덜란드의 알뿌리 거래 총액은 최소한 4,000만 길더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매매에 관련된 사람만 수만 명이었고 계약서가 주식처럼 거래되었음을 고려하면 거래 총액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이 거래량이 얼마나 많은가 하면 당시 암스테르담 은행의 예치금이 350만 길더,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체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최초 투자금이 650만 길더였다.

 

튤립 파동의 정점은 1637년 2월이었다. 튤립 거래가가 갑자기 폭락한 것이다. 왜 인지 갑자기 구매자가 전혀 없어졌다. 어음은 부도가 났으며, 지불을 할 수 없는 채무를 가진 사람이 3000명 정도였다고 했다. 네덜란드 각 도시는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여기저기에서 지불을 하지 못한 채무자와 지불을 하지 않은 채무자들의 말다툼과 도주가 이어졌다.

 

결국 각 채권자가 동시에 채무자가 되어 갔다. 소송을 한들 채무자에겐 이행 능력이 없었기에 사태 해결에 효과적인 수단도 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사태에 직면하자 의회와 시당국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무자와 채권자의 강렬한 로비 전쟁 끝에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 거래는 보류한다"라는 결정이 내려진 후 모든 계약서에 의한 계약은 일괄 무효가 되었다,

 

결국 연결고리의 처음과 끝에서 소수의 파산자와 벼락 부자를 남긴 채 튤립 마니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네덜란드 튤립 파동”으로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이었다. "튤립 파동" 이란 용어는 이제 거대한 경제적인 거품 즉 “자산 가격이 내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때”를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결국 “튤립 버블”은 네덜란드 경제와 그 역사에 거의 영향을 남기지 않은 채 역사의 한 토막으로 회자되는 교훈으로서 잠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포말이었던 것이다.

헨드릭 게리츠 포트가 1640년경에 그린 튤립 열풍에 대한 우화. 꽃의 신인 플로라는 두 얼굴의 여성과 환전상, 술꾼과 함께 차를 타고 바람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뒤를 타락한 하를럼의 직조공들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가는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애호가들이 환호했던 품종으로 브레이킹을 일으킨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센페이 아우구스투스〉(영원한 황제, Semper Augustus). 17세기 가장 비싼 꽃으로 팔렸다.

 


1637년 네덜란드 도록에 실린 것이다. 튤립의 구근은 그 가격이 크기에 따라 3000에서 4200 플로린에 달했다. 당시 능숙한 장인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면 300 플로린을 벌 수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였던 그림

 

아직도 새로운 품종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네덜란드의 튤립 밭(빌려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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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30
네덜란드 코이켄호프(Keukenhof) 정원

 

COVID-19이란 붉은 완장을 차고 세계를 정복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묶어 놓으며 행동의 자유를 속박하는 2020년의 4월은 참으로 잔인한 4월로 역사에 남을 것 같다.

 

그러나 섭리는 순리대로 언 땅을 녹이며 겨우내 얼었던 구근들로 하여금 싹을 틔워 꽃피는 5월이면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의 커미셔널스 파크(Commissioner's Park)안의 Dow's Lake 주위 잔디밭과 리드 운하(Rideau Canal)를 따라 캐나다 튤립 축제(Canadian Tulip Festival)를 열 수가 있을 텐데….

 

100여종 이상 가지각색의 튤립을 볼 수 있기에 매년 5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리는 축제가 올 봄에도 열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축제의 시작은 1945년 네덜란드 여왕 율리아나와 함께 Dutch Royal Family를 2차 대전 중 Ottawa에 머물게 해준 것에 감사의 뜻으로 종전 후에 10만개의 꽃을 오타와에 보내준 후 매년 1만개의 튤립 구근을 보내주며 축제를 도와주었기에 이 축제의 역사도 벌써 70년이 넘은 것이다.

 

이렇게 많은 튤립 구근을 보내 줄 수 있는 작은 나라 네덜란드 수도 암스텔담 근교 리씨(Lisse)에 있는 코이켄호프(Keukenhof) 정원에서도 매년 Tulip Festival이 엄청 크게 열린다.

 

축제는 3월말에서 5월말까지 개장을 하는데 이 기간에는 한국에서도 직항이 생길 정도로 온 세계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

 

 코이켄호프(Keukenhof) 지역은 15세기에는 숲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사냥터였으나 1401~1436년 네덜란드의 야코바 백작부인이 사냥도 하고 부엌에서 쓸 허브를 수집하기 위해 이곳에서 살았는데, 부엌을 의미하는 단어 'Keuken'과 정원을 의미하는 단어 'hof'가 합쳐져서 'Keukenhof'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의 토양이 비옥한 것을 발견한 원예건축가인 Zochter가 1840년경부터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함께 3대가 힘을 합쳐 8만6천평에 달하는 네덜란드 제일의 화원으로 조성하였다. 화원이 조성되자 리쎄 일대의 구근 재배자들이 야외 꽃시장을 개발하면서 이 일대가 더욱 커지며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매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곳 기준으로 수선화, 히야신스, 튤립은 4월초에서 말까지 꽃이 피기에 조금 늦게 오면 군데군데 튤립 꽃이 져서 잘라낸 곳이 많아, 낙화 후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접하게 된다.

 

시즌이 끝나면 내년의 개장을 위하여 정원의 설계사들과 디자이너들은100여 가지의 새 디자인을 구상하여, 9월말 첫서리가 내리기 전에 정원사들에 의해서 심어진다. 매년 같은 듯 다른 모습이기에 다시 찾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물이 흐르고 낮은 구릉도 있는 자연스런 환경에 정말 가지가지의 튤립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넓고 넓은 공원은 무릉도원 같아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정원 주위로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튤립 밭들의 정경 또한 장관이다. 색색으로 물든 대지 사이에 이미 팔려나간 꽃들의 자리는 짙은 황토색!

 

튤립을 국화로 하는 네덜란드는 역시 튤립의 강국,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품종이 저 흙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왕관 모양으로 위를 향해 이른 봄에 피는 꽃이, 낮에는 꽃잎을 열고 밤에는 꽃잎을 닫아 추위로부터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는가 하면 그 잎은 매끄러운 가장자리를 가진 칼 모양으로 왕관을 보호하는 호위무사 같은 구근식물 튤립의 본산은 네덜란드가 아닌 중앙 아시아라고 한다. 혹자는 지금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터키라고도 하고…. 하긴 오스만 터키가 그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으니까.

 

튤립의 원산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그 때까지 유럽에는 없던 꽃, 튤립을 선물로 받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져 왔단다.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구근 식물을 연구하고 있었던 샤를 드 레클루즈(Charles de l’Écluse)가 1593년,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에 초빙되었을 때 튤립 구근을 레이던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튤립 연구 및 재배를 진행했다.

 

레클루제가 돌연변이, 질병, 이종교배 등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 중에 나중에 '브레이크'라고 불리는 돌연변이가 있었다. 브레이킹을 일으킨 구근은 아름다운 점박이 꽃을 달고 있었다. 이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구근이 모자이크로 발병했기 때문이었다는 원인이 해명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지만, 이 돌연변이가 네덜란드에 튤립파동을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여러 가지 모양과 색으로 변이된 튤립들이 사방에서 손짓하는 넓디넓은 공원이다.

▲끝이 안 보이는 튤립 밭

캐나다 오타와의 튤립축제에서

▲오타와 튤립축제에서도 여러 가지로 변이된 튤립들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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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8
덴마크 코펜하겐(2)

 

(지난 호에 이어)

어느 날 스웨덴의 왕이 게피온에게 하룻밤 사이에 갈아 엎을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단다. 아마도 덴마크가 스웨덴을 지배하기 오래 전의 이야기인 것 같다. 덴마크의 건국 신화라고 하니까!


이에 게피온은 네 명의 아들을 황소로 변하게 하여 밤새 밭을 갈아 엎어 약속한 땅을 얻은 후 이 땅을 바다에 던져 섬이 됐는데, 이것이 오늘 날 코펜하겐이 있는 셀란섬이 됐고, 땅이 파인 곳은 스웨덴에서 가장 큰 베네른 호수가 됐다고 전해진단다. 건국 신화 치고는 매우 소박한 이야기인 것 같다.


분수대 옆에는 덴마크 유일의 영국 성공회교회가 아직도 있어 영국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 같다.


해변에 있는 왕립 선착장 건너편 항구에는 코펜하겐의 명물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1956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덴마크의 건축가 우촌(Utzon, Jorn, 1918~2008)이 2005년 인공 섬 위에 건립하였다.


외양은 평범하여도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따라 객석을 1492~1703석 규모로 바꿀 수가 있으며, 어느 자리에서나 똑같은 음량과 음색으로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음향설계가 완벽하며, 외관을 유리로 장식해 공연장 곳곳에 자연채광이 들도록 했다. 또한 냉매대신 바닷물을 순환시켜 찬 바람을 내게 하는 에어컨으로 냉방을 한다. 


항구에서부터 도보로 20∼30분이면 웬만한 관광지는 다 돌아볼 수 있다. 

도심에는 도로 중앙에 매달린 가로등 아래로 차도만큼 넓은 자전거길들이 나 있고, 역 앞 광장에는 자전거 파킹장이 엄청나다. 여왕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근면의 나라 덴마크, 언덕이 없다. 하긴 달가스가 국민들과 함께 개간한 매립지들이니까…


코펜하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바로 시청앞 광장이다. 1892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된 청사의 정면 중앙 벽에는 금빛 찬란한 '압사론' 대주교의 조각상이 선명하고, 코펜하겐에서 가장 높은 첨탑의 시계가 보인다.


왼편 중앙 도로에는 명의 바이킹 병사가 나팔을 부는 청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옌스 올젠'이 설계한 천체시계가 있다. 제작기간만 27년이 걸렸다는 이 시계는 덴마크인들의 정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청사 오른쪽으로는 '안데르센' 동상이 있고 시청 앞 넓은 광장은 각종행사, 집회의 장소로 시민 생활의 중심이 되어 항상 붐빈다.


1843년, 덴마크의 건축가 게오르크 카스텐슨(George Carstensen)이 세웠다는 세계 최초 테마공원, 티볼리(Tivoli)공원이 중앙역과 시청 사이에 있어, 해마다 덴마크 전체인구에 맞먹는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인기최고의 명소로 정원, 분수, 백조의 연못, 보트놀이, 제트코스터, 롤러코스터, 번지 드롭, 회전목마, 팬터마임극장, 야외무대, 매직 카펫, 콘서트홀 등 다양한 볼거리와 휴식 공간을 갖추고 있다.


1914년에 만들어 아직 운행 중인 목제 롤러코스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시설로 유명하다.


원형으로 지어진 왕궁 광장중앙에는 덴마크를 중심으로 노르웨이, 스웨덴, 세 나라를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묶은 칼마르 동맹의 주인공인 마르그레테 여왕의 기마상이 있다.


오늘날의 덴마크 여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국정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매일 정오 12시에는 위병들이 교대 행사를 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호기심과 눈을 즐겁게 하여 주지만 영국 윈저 성에 비하면 많이 초라한 듯하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코펜하겐에는 많은 공원과 푸르스름하게 산화된 구리지붕이 있어 흔히 ‘green city’라 불리며 아름답고 깨끗한 거리로 유명하다.


공원 의자에서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 옆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들과 어린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지나고 맑은 물에서는 백조들이 노니는 아름답고, 깨끗하고, 자유로운 도시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덴마크의 선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피온(Gefion) 분수대’
 

▲시청 앞 광장

 

▲시청 옆에서 나팔을 부는 두명의 바이킹 병사

 

▲위병 교대식

 

▲아침 출근시간의 자전거 행렬. 자전거 전용 도로가 차도만큼이나 넓다. 덴마크는 백여 년 전부터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지금은 완벽한 자전거도로망을 구축하여 일반 시민은 물론 국왕, 국회의원들의 등청과 등원도 자전거를 이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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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2
덴마크 코펜하겐(1)

 

 

 

수도 코펜하겐은 덴마크의 중심에 있을 법도 한데 반도의 끄트머리에서 옛날에 지배하였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스웨덴의 말뭬(Malmö)까지 다리가 놓여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다. 천천히 옛날로 돌아가는 신호일까?

 

 

 


노르웨이, 오슬로(Oslo)에서 훼리를 타고 파도가 심한 북해를 거쳐 코펜하겐으로 들어가는 좁은 물목으로 들어서면 조용하여진 배의 선창으로 Kronborg Castle이 보인다. 한 때는 지배도 하였던 이웃사촌,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의 무대가 된 '엘 시노어'성이다. “To go or not to go?” 고민할 필요도 없이 “Not to go.”다. 일정에 없는 성이니까. 

 

 

 

 


잔잔한 내해를 통해 코펜하겐으로 가는 동안, 산은 하나도 안보이고, 그저 넓은 목초지들이다. 유명하였던 풍차 대신에 들어선 풍력발전기가 사방에서 돌아가며 눈을 어지럽힌다.


안데르센의 동화로 유명한 "인어공주"가 있어 해마다 1억이 넘는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관광지가 되었으며, 칼스버그 맥주의 독특한 맛으로 세계인들의 입맛을 잡고, 레고(lego)조각으로 동심을 사로잡은 선진국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코펜은 상인이라는 뜻이요 하겐은 항구, 그러니 상인들이 드나들던 항구가 수도가 된 것이다. 

 

 

 

 


항구와 이어진 운하를 뉘하운(Nyhavn)이라고 부른다. 1673년에 인공운하가 개통되자 주변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코펜하겐 항구에 돛을 내린 선원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술집거리로 발달되었는데 요즈음엔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이 살던 집을 바라보는 것이 일정에 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되었다. 

 

 

 

 


많은 여행객들이 그가 살았었던 집 앞 운하 주위의 많은 노천카페에 앉아 시원한 칼스버그를 마시며 어릴 적 읽었던 그의 동화 속으로 들어가려고 타임머신을 뒤로 돌리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이었을 당시 이곳에 다녀간 후 청계천 운하를 구상하였다고도 한다.

 

 

 

 


인어공주상 가까이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덴마크의 선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피온(Gefion) 분수대’가 있다. 덴마크 예술가 안데스 분드가르드(Anders Bundgard)의 작품으로,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여신이 황소 4마리를 몰고 쟁기질을 하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분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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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5
덴마크와 한국의 두 영웅-그룬트비와 달가스 그리고 박정희와 류태영

 

흔히 스칸디나비아 3국 하면 노르웨이, 스웨덴과 함께 덴마크를 꼽는다. 현재는 영토가 이 3국가 중 가장 작지만 과거에는 덴마크가 칼마르 동맹의 종주국으로서 발틱해와 북해를 오가는 선박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며 바이킹의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로 지경을 넓혀, 북유럽, 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지금의 캐나다 동부에까지 세력을 넓혔으나 넓어진 영토에 비해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부족하였다. 


또한 이 무렵, 유럽의 정치지도가 바뀌는 격정의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전투를 경험하며 발전된 무기와 훈련된 군대를 갖게 된 여러 나라들과 계속되는 전쟁에서 패하며 영토와 지배력을 상실하던 중, 1864년 프러시아의 침공으로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던 슐레지안 지방을 빼앗기고,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침공으로 홀스타인 지방을 빼앗기면서 결국 덴미크는 항복을 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 후 덴마크에 남은 영토는 북해의 찬 바람이 몰아치며 모래를 날리는 황무지가 국토의 대부분이도록 축소되었다. 국민들은 뜯어먹을 풀이 없어 뼈만 앙상한 젖소와, 배고픈 돼지들을 몰고 바닷가로 나가서 파도에 밀려온 해초나 죽은 생선을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배고픈 가족을 부양하려고 프러시아나 오스트리아 병사에게서 몸을 팔아 연명하는 여인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덴마크는 유럽의 모든 국가들보다도 더 개방적인 성문화를 유지하며 국가가 관리하는 홍등가가 관광지가 될 정도이다. 물론 규모는 많이 작아졌지만…)

 

 

 


이 처참함을 보며 “다시 무기를 잡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자”며 의용군을 모집하려는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공병장교였던 엔리코 달가스(Enrico Mylius Dalgas, 1828년 6월 16일 - 1894년 4월 16일)로,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덴마크의 부흥 운동가다.


그러나 그 때 한 목사가 나서서, “지금 전쟁을 다시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전쟁은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더 깊은 나락에 빠뜨립니다. 밖에서 잃은 것을 우리 내부로부터 찾읍시다.”라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바로 니콜라이 프레데리크 세베린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년 9월 8일 ~ 1872년 9월 2일) 목사였다. 그는 루터교 목회자이면서, 시인, 역사가, 민속학자, 정치가, 저술가, 교육자, 철학자로 숭상 받는 덴마크의 민족운동가이다.


이 두 사람이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면서 황무지 개간에 앞장서자 그 열성에 감동한 국민들이 함께 모래땅에 나무심기를 거듭한 끝에 거친 국토는 푸른빛으로 바뀌었고, 이로써 덴마크 부흥의 기틀이 다져지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고, 높은 세금에도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낙농업 나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덴마크는 우리 나라와도 꽤나 깊은 인연이 있는 나라다. 전쟁의 피해를 뼈저리게 체험한 국민답게, 우리나라에서 북괴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병원선을 보내 의료 지원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선의 의료 기자재를 한국에 기증해 서울에 “국립의료원”이 설립되어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한 나라이다.


6.25전쟁 후 잿더미가 된 채 반토막이 된 한국의 참상은 덴마크사람들이 겪었던 참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본의 압정 하에 있었던 1936년 5월 14일,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류태영(柳泰永, 1936년 ~ )에게 가난은 ‘한’ 이었고,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 도토리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굶주림’은 그와 온 국민에게 비참함을 뛰어넘는 ‘비극’이었다. 


18살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해준 차비를 들고 서울로 올라와 신문을 돌리며 하우스 보이, 구두닦이에 방물장수, 아이스께키 장사 등을 하며 1957년 건국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공부를 계속하던 중 유달영 박사가 쓴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통하여 덴마크의 가난한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을 읽고 “나는 공부한다면 덴마크로 간다”는 결심하고 덴마크의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낸다는 기지를 발휘하여 덴마크 국왕인 프레데릭 9세에게 편지를 보냈다. 


왕궁의 주소도 몰랐지만, 우편 배달부는 알 것이라는 믿음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덴마크 왕궁 외무성에서 답장을 받았단다. 이 또한 덴마크 사람들의 인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라는 초청 편지를 받은 후, 덴마크로 유학길에 오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한다.


덴마크어를 3개월 만에 터득하여 복지국가와 국민운동에 관해 2년간 배웠지만, 그 당시 덴마크는 이미 복지국가로 완성된 상태여서 실제로 농촌 발전을 경험해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는 실제 부흥 운동이 진행 중인 이스라엘 유학을 결심하여 이번에도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이었던 잘만 샤자르에게 편지를 보낸 후 항공권, 생활비, 의료비, 학비 모든 지원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받아 이스라엘로 가게 된다. 강한 집념과 타고난 체력, 그리고 명석한 두뇌와 끊임없는 기도가 이룬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귀국 후 건국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달가스와 비슷한 구상속에 고심하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소개되어 한국의 새마을 운동의 주역으로 낙후된 농촌의 모습을 바꾸어 놓으며 “보릿고개”란 단어를 망각하게 만들 수 있게 한 큰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시에 KIST와 포항제철 등을 만들며 산업화를 병행하여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한국판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한국을 급속도로 발전시키는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너무나도 급속도로 발전한 성장통을 아직까지 앓고 있으며, 그간 이루어낸 번영을 까먹고 있는 요즈음의 한국이기도 하지만….


한 나라의 발전에는 많은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소수의 지도자와 이를 따르는 많은 국민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덴마크와 한국이 보여준 것이다.


여기 말 중에 “Too many Chief, no Indian” 이란 말이 있다. 


모두가 우두머리가 되려고 하는 바람에 지도자들은 많은데 이를 따르는 국민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우리말과 비슷한 말이겠지.


후일 이명박 대통령이 덴마크의 운하를 본 후 청계천 복개를 헐고 오늘의 서울 시민 휴양지로 다시 태어난 청계천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또한 한국과 덴마크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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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8
덴마크 -인어공주와 안데르센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의 랑겔리니 공원의 맨 끝자락, 한 켠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인어 공주’(덴마크어: Den lille Havfrue) 상 또한 유럽의 3대 썰렁 명소 중 하나이지만 많은 크루저들이 정박하는 항구이다 보니 항상 사람들로 봄비기도 하고, 때로는 인어 공주 조각상이 세계 순회 전시를 하기도 하기 때문에 잘못 가면 그나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인어 공주 이야기만 듣고 오게 되는 곳이다.


칼스버그의 창업자 제이콥슨의 후원으로 조각가 에드바르드 에릭센(Edvard Eriksen)이 안데르센의 '인어 공주'에서 영감을 얻어 1913년에 제작했다. 


머리는 덴마크의 유명 발레리나인 엘렌 프라이스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지만, 몸 부분은 프라이스가 누드 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하여 에릭센의 부인인 엘리네 에릭센이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보안이 허술한 바닷가에 있는 관계로 머리는 세 번 잘려 나갔으며 다리와 팔은 각각 한 번씩 잘려 나갔고 2003년에는 아예 폭탄으로 송두리째 박살내서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 후에도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등 바위 위에서 수난을 많이 격은 인어 공주가 되었다. 조각상의 크기는 125cm의 자그마한 동상으로, 사진을 보며 상상하던 것보다 작고, 단순한 모양에 많이들 실망한다. 


그러나 덴마크를 찾는 사람들은 꼭 한번씩 돌아보는 명소가 되어 1년에 1억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다녀 간다는데, 인어공주의 동상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격은 인어 공주의 작가 안데르센을 조금 드려다 보기로 하자. 

 

 

 

 


212개나 되는 명작 동화를 쓴 최고의 이야기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인어 공주” “미운 오리 새끼” “엄지 공주” “꿋꿋한 양철 병정”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눈의 여왕” “전나무” “나이팅게일” 등을 망라하는 그의 동화들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1846년에는 덴마크 국민으로선 최고의 영예인 단네브로 훈장을 받으면서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과 교제하는 명사가 되었지만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덴세에서 태어난 안데르센의 유년기는 매우 불우하였다.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고 어머니는 세탁부로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그는 밖에서 뛰어 놀기보다는 혼자 인형놀이를 즐기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단다. 그가 11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가족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져, 노래와 연기에 재능을 보인 소년 한스 크리스티안은 오덴세의 유력자 가문을 전전하며 재주를 선보여 연명하는 동안 이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

 

 

 

 


1819년, 14세의 나이로 청운의 꿈을 안고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간 안데르센은 여러 극단을 찾아다니며 입단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던 중 다행히 당시 정계의 실력자이며 예술 애호가인 요나스 콜린의 눈에 들게 되었다.


콜린은 일단 기본 학력이 있어야 훗날 뜻을 펼치는 데에도 유리하리라는 조언과 함께, 안데르센에게 왕실 후원금을 얻어주며 수도를 떠나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도록 독려했다.


동급생들보다 대여섯 살이나 더 많은 17세의 나이로 학교에 입학한 후 재학 중에 ‘죽어가는 아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의외로 호평을 받자 안데르센은 연기자보다는 작가의 길로 선회하며 6년간의 공부 끝에 1828년, 23세의 늦깎이 학생으로 졸업을 하였다. 

 

 

 

 


1833~4년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요소가 깃든 장편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해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1835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펴낸 동화집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안데르센은 전 유럽을 다니며 당대 내노라 하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며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찰스 디킨스 같은 작가 뿐만 아니라 슈만, 멘델스존, 리스트 같은 낭만파 음악가들과 친구가 되어 지내는 동안 스웨덴의 전설적인 소프라노 예니 린트를 만나게 되었다.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25세의 소프라노 예니 린트의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매력에 빠졌고, 멘델스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한창 인기있던 작곡가 멘델스존은 그녀에게 낭만적인 노래를 선물하며 그녀와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고 그녀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작곡했으나 막상 1846년 영국 버밍엄 축제에서 2000여명의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초연에 성공한 무대에는 린트가 아닌 다른 소프라노가 노래를 불러야만 하였다. 린트가 받아들이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니 린트는 같은 북구 출신에,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던 안데르센과는 마치 오누이 같이 가까워져 서로의 예술에 자극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지만 여기까지 이었나 보다. 


그녀는 스캔들 하나 없이 청교도적인 도덕성을 겸비한 오페라 무대의 프리마돈나로 칭송 받으며 안데르센을 오빠처럼 따랐지만, 예니를 여자로 사랑했던 안데르센에게는 예니의 순수한 사랑이 상처로 남았기에, 예니 린트를 빗댄 동화를 통해 순수하고 자연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며 평생 독신으로 산 그의 말년이 매우 우울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니 린트는 어떤 책이나 사람보다 내게 깊고 따뜻한 영향을 주었다”라고 고백하며 “인어공주”와 “나이팅게일”은 예니 린트를 위해 쓴 작품이었다고 안데르센은 말하였다고 한다.


사랑을 떠나 보내면서 성숙하는 게 이 작품의 주제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원작이지만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동화로 널리 알려지도록 판본들이 많아진 이유를 평론가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이기 때문” 이라고들 말하는데…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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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독일 로렐라이 언덕

 

 

“시인은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본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범인, 즉 나 같은 보통사람들은 우주 속에 살면서도 우주를 보지 못하고 거저 살아온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덴마크의 ‘인어공주 상’, 벨기에의 ‘오줌싸게 소년 상’과 더불어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을 유럽의 3대 썰렁 명소라고들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세상 풍진 속에 이제는 손과 발이 떨리는 많은 노인네들이 여기저기서 그 언제인가 가슴 떨리도록 심취하였던 마음 속의 동경과 사랑을 되새기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흐린 눈동자로 바라보는 ‘로렐라이 언덕’이어서 항상 바쁜 곳이다. 


우리가 사춘기였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들은 대개가 일제시대 때 교육을 받으신 분들이었다. 우리 나라가 이조 시대일 때, 일본에 나타난 신흥세력인 메이지 정부가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일들을 십 수 년 만에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식민지가 없었으면서도 선진 대열에 끼일 수 있도록 발전한 독일을 롤모델로 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독일의 문화와 학문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런 교육을 받은 선생님들 밑에서 교육받은 우리들 또한 간접적으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을 학창시절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당시 일본은 독일과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던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래서인지 음악도 문학도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던 것 같다. 로렐라이 언덕 아래를 흐르는 라인강이 어떠한 강이라는 것과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시와 노래를, 아마도 독일에 가보지도 못한 채, 선생님의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이야기를 우리에게 아름다운 환상 속에 빠지도록 가르쳐 주셨으니까.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2-1856)는 괴테처럼 독일에서 숭상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의 삶과 신념, 그리고 시의 세계를 낭만주의적 시로 표현하면서 독일 후기 낭만주의 문학의 주요 대표자로 불리도록 그의 많은 시들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부모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후일 나치 치하에서는 하이네의 시들을 명시선집에 '작자 미상'의 시가로 표기하며 포함시킬 수밖에 없도록 그의 시들은 계속 사랑을 받아왔다. 


그 시 중의 하나, “Loreley” 란 시에, 그 당시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지휘자로 있으며, 독일 및 여러 나라의 민요와 종교 음악 등을 수집, 정리하며 작곡하던 프리드리히 질허(Philipp Friedrich Silcher, 1789년 ~ 1860년)가 곡을 붙인 것이 우리들이 애창하던 ‘로렐라이 언덕’인 것이다.

 

 

로렐라이(Loreley)

 

 

옛날부터 전해오는 그 이야기
내 마음에 끝없이 떠올라
왠지 자꾸만 서글퍼지네.

 

라인강은 고요히 흐르고
날씨는 차갑고 어두워지는데,
산봉우리는 저녁 빛이
눈부시게 빛나네.

 

너무나도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그곳에 황홀하게 앉아있네. 
그녀는 금빛 장신구를 반짝이며,
금빛 머리칼을 빗어 내리네.

 

금빛의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그녀는 노래를 부르네.
마술같이 사람을 홀리는
노래의 선율.
조그만 배에 탄 뱃사공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암초는 보지도 못하고,
언덕 위만 쳐다보네.

 

마침내 물결이 조그만 배와 함께
뱃사공을 삼켜 버리겠지.
그녀의 노래로써 그렇게 한 것은
바로 로렐라이 언덕.

(번역 카나비 배용, 출처: Loreley (로렐라이 언덕)-하이네 시)

 

 

로렐라이라는 처녀가 배신한 연인에게 절망하여 라인강가 바위언덕에서 몸을 던진 후부터 어두워질 무렵이면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조난시키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요정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얽혀 있는 언덕이다.

 

 

 


이 전설은 수많은 문학작품과 노래들의 주제가 되었는데, 하이네가 지은 시에는 25명 이상의 작곡가들이 그들의 영감으로 작곡한 곡이 붙여졌지만, 프리드리히 질허의 노래가 가장 널리 불려진다. 노래 가사는 많이 함축되어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아래 고요한 라인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저편 언덕 바위위에 어여쁜 그 색시
황금빛이 빛나는 옷 보기에도 황홀해
고운머리 빗으면서 부르는 그 노래
마음 끄는 이상한 힘 로렐라이 언덕

 

 

유럽의 3대 썰렁 명소 중 하나라는 말을 인정하기에는 한 평생 간직하여 온 환상이 아까워, 저녁노을이 아니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유유히 흐르는 라인강을 한참 내려다 보았다. 어디 즈음 떠 내려 갔을까?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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