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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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Hwanghyunsoo

 

 2021년이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LA에 살고 있는 김용현 선배가 보내준 <평화로 가는 길>을 읽는 것이었는데, 오늘 새벽에서야 마지막 장을 읽었다. 지난 10월 말에 책이 들어 있는 우편 봉투를 뜯고, 카톡으로 “잘 받았습니다. 책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독후감도 한번 써 보겠습니다”하며 인사까지 드렸는데, 어찌하다 보니 해를 넘겼다.

 나는 김용현 선배를 1991년에 <MBC방송연구소> 문자방송부에서 만났다.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약 2년 정도를 함께 근무했으니, 23여 년의 MBC 근무 기간에 비하면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 김 선배의 스마트하고 온화한 첫인상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문자방송부는 새로 생긴 부서로 여기저기서 온 ‘용병’으로 만들어졌다. <문자방송>을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지는데, 지금의 인터넷 방송의 ‘원조’ 쯤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당시, 뉴미디어인 <문자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20여 명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각 부서에서 내보내고 싶은 인원들이 문자방송부로 모이게 된다. 부서장이 평소에 함께 있기 껄끄러웠던 노조 전임자도 있었고, 같이 있기 불편한 직원들이 발령이 난다. 김용현 선배는 교양제작국에서 위원으로 근무했는데, 그에게는 ‘해직 언론인’이라는 딱지와 소속 부서장보다도 선임이라는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나도 소속 국장과 사이가 안 좋아서 새로운 미디어 방송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 자원을 했다. 하여튼 그런 인연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김선배가 ‘미국에 가족을 두고 온 기러기 아빠’, ‘해직 사우의 대표로 회사 측과 힘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등의 개인적인 사연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김용현 선배와 가깝게 된 것은 그의 자서전 <자식에게 남기는 이야기>의 편집을 도우면서다. 그는 함께 근무하는 후배 동료들에게 항상 웃음과 편안함으로 대했지만, 나는 선배의 모습에서 ‘겨울나무’ 같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김용현은 1941년 서울 종로구 충신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 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 서울에 살던 그의 식구들은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치하에서 석 달을 보내게 된다. 그의 가족은 9.28 수복 때, 북으로 끌려가게 된다. 추석을 미아리 고개에서 보내고 창동쯤 이르렀을 때, 미군 폭격기가 나타났다. 폭격기는 퇴각하는 인민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격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파편에 맞고 뇌진탕으로 쓰러진다. 어머니는 막내를 업고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군 병원을 찾아 다녔다. 그 와중에 4남매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된다. 형과 누나, 김용현, 동생은 행여나 놓칠 세라 서로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를 밀려다녔지만, 북새통 속에 어머니를 잃고 만다.

 

 

 국군을 만난 덕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모가 없는 빈집은 너무 무서웠다. 4남매는 어머니를 기다리기보다는 ‘외할머니 댁에 가서 기다리면 어머니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외가가 있는 충북 영동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한강 다리는 벌써 끊어 진지 오래되어, 나룻배를 겨우 얻어 타고 건넌다.

나룻배가 가라앉을 것처럼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한강을 건넜다. 뺨이 터질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영등포역까지 걸어간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때 나이 15살이던 형과 14살이던 누나는 동생들을 살피기에 자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들을 돌보았다.

외할머니는 4남매만 내려온 걸 보고 너무 놀란다. 몇 날 며칠을 기다리니, 어느 날 어머니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등에 동생을 업고 나타나셨다. 남으로 가는 기차가 영동역에 서지 않자, 기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머리를 크게 다치신 것이다. 아버지는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전쟁 중이라 강원도 철원 어느 야산에 시신을 임시로 묻고 오셨다고 말한다.

외갓집 개울 건너 용암초등학교와 황간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여 년을 시골에서 보낸다. 1957년, 중앙고등학교에 합격하지만, 입학금이 없어 포기하고 일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음 해, 보성고등학교에 들어간다. 1965년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6월에 문화방송에 아나운서로 입사한다.

3년 뒤, 라디오 PD로 옮겨 송해, 이승주와 함께 ‘싱글벙글 쇼’를 제작했고, ‘별이 빛나는 밤에’, ‘젊은이의 양지’, ‘현지 르포, 그 후 그곳’ 등을 만들었다. TV 교양제작국으로 옮겨 ‘여성시대’, ‘터 놓고 이야기합시다’, ‘인생은 60부터’ 등을 연출한다.

1980년 유난히 더웠던 여름, MBC의 차장급 이상의 기자와 PD들에게 사직서를 쓰라는 이진희 사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사표 제출자 중 선별된 74명의 사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소위 전두환의 ‘1980년 언론 대학살’이었다.

1년여를 방황하다가 ‘미국 유학’이라는 핑계로 이민을 간다. 이민 초기에 주유소, 청소 등 노동을 했고 김 선배의 부인은 햄버거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한다. 그 선배도 MBC 아나운서 출신이었는데, 둘 다 견디기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다행히 2년여 만에 영주권이 나왔지만, 샌드위치 가게를 덜컥 사서 더 큰 고생을 한다. 비즈니스를 해 본 일이 없는 부부의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삶은 피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9년이 지난 1989년, 서울 MBC에서 복직 통보를 받는다. 아내와 두 아이를 두고 혼자 서울로 돌아오지만, 기대했던 ‘명예 회복’은 쉽지 않았다. 기쁨은 서러움으로 변했고, 이산가족의 삶 또한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2년 5월에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LA로 돌아와 <미주 한인방송>의 보도 책임자로 일하다가 <YK 미디어>를 설립하고, <무궁화 한글학교>를 만들어 교장을 하며 9년 동안 아이들에게 모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LA 지회장>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2008년에 <한민족 평화연구소>를 만들어 분단된 조국의 평화를 비는 여러 행사를 주최하였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김용현 선배는 내가 토론토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안쓰러워하며 여러 조언을 해 주셨다. 자신이 힘들었던 시간을 되씹어 보며 했던 말이었을 게다. 이번에 보내준 <평화로 가는 길>은 김용현 선배의 다섯 번째 책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MBC에서 해직을 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본인은 아쉬운 MBC 퇴직이었지만, 그렇게 이민 온 덕에 ‘고국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고국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꿈틀대는 지성을 보면, 얼어붙은 대지 위에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서 있는 ‘겨울나무’의 믿음직함을 보는 듯하다.

그의 책 219 쪽에 있는 ‘겨울나무’라는 동요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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