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7 전체: 81,316 )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2)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오매불망하던 그날이 왔다. 내가 살던 곳에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곳을 국경을 몇 개나 넘고 돌고 돌아가게 된 것이다. 비행기 출발을 앞둔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기쁨에 넘쳐 있었다.

드디어 2008년 봄,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우리는 7시간 후에 화려한 불빛들과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는 거의 새벽이었다.

 

4. 서울의 옥탑방

 

중국에서 살 때 남한은 꿈의 나라였다. TV를 통해 본 남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로 꼽혔으며 아시안들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나라였다.

산 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 땅에서 무시와 멸시, 조롱과 천대 속에 움츠리고 잡혀갈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그 시간들은 다 옛말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나는 내 나라 내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남한에 들어와서 우리는 정부 탈북자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3달 동안 훈련을 받는다. 그곳에서는 교통과 노동법에 대한 상식, 직업훈련과 기타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컴퓨터 기초교육 등등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훈련을 해준다. 내가 그곳에서 한 것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은 영어 수업을 빠짐없이 참가해 영어를 배운 것이었다.

영어는 필수가 아니고 본인 선택이었는데 매일 아침 8시~9시 사이에 진행하는 영어 수업을 절대 빠지지 않고 들었다. 발음이나 문법이 북한에서 배운 것과 많이 달랐다. 모두 20대 학생들이 대학진학을 위해 수업을 들었는데 그 속에 아이 달린 아줌마는 나 혼자 뿐이었다.

아들은 언어 때문에 담당 선생님과 거의 일대일 교육을 받아야 했다. 3개월 정도 교육을 받고 나니 그 애도 금방 적응을 하게 되었다. 하나원을 수료하면서 나는 최우수 성적을 받았다.

 하나원에서 나오자마자 첫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던 정말 가슴벅찬 그 날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드디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그 많은 수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끝내 오고야 만 내 자신에게 감사하고 우리 모자를 품어준 남한 정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정부의 노력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정책은 정말 과분했고, 내가 이런 혜택을 받아도 되는 건지 송구스럽기만 하였다. 정부에서 임대아파트를 받게 되는데 나는 운이 나쁘게 서울, 인천 지역에 당첨되지 못했다. 경북 경산으로 가게 되어 나는 임대아파트를 포기했다.

임대아파트를 포기하는 건 사실 나에게 큰 모험이었다. 포기하는 순간부터 나는 월세건 전세건 내가 알아서 살 곳을 찾아야 하고 300만원이라는 정착금을 받는 돈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서울에 가서 살아야 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떠나올 때 미리 검색해둔 서울의 중국어학교에 아이를 보낼 계획을 세우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과감히 아파트를 포기하고 아들과 함께 서울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에 임시로 한 달 정도 살았다.

나는 300만원으로 아들과 살 수 있는 월셋집을 찾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금액으로 찾을 수 있는 월세가 서울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은 부동산 광고에 눈이 번쩍 띄었다. 보증금 250만, 월세 25만, 서울 ㅇㅇ중심에 있는 옥탑방, 이건 완전 대박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부동산중개소에 한달음에 달려갔고 난생처음 해보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나는 더 묻고 따질 것도 없었다. 아들 학교와 걸어서 20분 거리도 안 되는 가장 적합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덜컥 계약하고 1주일 후에 이사를 한 우리는 그날부터 옥탑방에서 살게 되었는데 살면 살수록 불편함이 여기저기 드러나기 시작했다.

옥탑방은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만들었고 사실 구청의 허가도 받지 않은 불법건물이었다. 8개월에 걸치는 난민수용소, 국정원, 하나원을 거친 오랫동안 갇혀살다가 드디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 기쁨도 잠시였고 덜컥 사인부터 해놓고 여길 이사 온 것부터 막심한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는 여름에는 너무 뜨거워 도저히 에어컨을 잠시도 끌 수 없어 전기세만 한 달에 30만원 정도 나왔다. 겨울에는 기름보일러가 돌아가는데 기름 먹는 하마처럼 한 달 50만원의 기름으로도 부족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통에 담아서 낑낑거리며 집에까지 들고 와서 옥탑방까지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며 보일러 기름구멍에 쏟아 넣는 것은 나에게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기름이 밖으로 새어나가 냄새가 진동하고 또 화재의 위험도 있기 때문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울엔 거의 보일러를 16도 정도로 돌리고 겨울 재킷과 두터운 옷들을 입고 살아야 했으며, 샤워는 너무 추워서 매일 할 수가 없어 1주일에 두세 번만 했다.

 거기에다 바퀴벌레들이 사방에 기어 다니고 나는 그것이 바퀴벌레인지도 몰랐는데 얼마나 살찌고 큰지 징그러워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여름에 비가 오면 창문 틈으로 빗물이 철철 새어 들어 밤새 이불이 젖어버렸고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창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올 정도로 허술하기 그지없고 일단은 겨울 난방용 기름값과 여름 에어컨용 전기세가 한 달 50만원을 웃돌고 있으니 도저히 여기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계약서라는 개념을 사실 몰랐던 나는 난생처음으로 문서에 사인을 해놓고도 내용도 읽어보지 않았고 내가 2년 계약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주인 할머니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이런 불편을 얘기하면 내가 계약을 했기 때문에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만 했다.

나는 그렇게 1년 넘게 살다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당장 이사가야 한다는 마음에 좀 괜찮은 집을 찾고 또 덜컥 사인하고 말았다. 거기에다 보증금까지 내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주인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 너무 춥고 더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이사 갈 거예요. 2달 후에 이사 나가니 보증금 돌려주실 거죠?”

“아니, 무슨 보증금? 2년 계약했으니 끝날 때까지 돌려줄 수 없어. 새 계약을 했든지 이사 나가든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나는 사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주인할머니가 어쩌면 이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 하는 원망이 생겼다. 내가 계약을 했던 부동산에 찾아가 다른 세입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보러 왔다 갔지만 아무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2달이 지나도 다음 세입자를 구할 수가 없었고 나는 당장 이사갈 날짜가 다가왔다. 그런데다가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다음 집에 보증금을 맞춰서 낼 수 있다.

나는 다시 할머니에게 사정을 해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여기 법을 잘 모르고 덥석 계약부터 한 내가 잘못이지만 이 건물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도저히 못되니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어요. 제가 이렇게 부탁 드릴게요. 2달치 월세를 빼고 나머지만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전 1주일 후에 이사를 가야 해요. 그 2달 동안이면 다른 세입자를 찾게 되겠죠.”

“아니, 이봐 아기 엄마! 자꾸 떼를 쓰는데 이건 떼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니야. 2년 계약기간은 본인 책임이야.”

“물론 저도 제 불찰인 걸 잘 알아요. 여긴 처음이라 너무 몰라서 그랬어요. 그저 저를 한번 도와주는 셈치고 180만원만 돌려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나 지금 너무 바쁘니까 이젠 그만해요. 계약을 해놓고 떼를 쓰면 안 되지 참나.”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냥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정말 너무 하시네요. 자꾸 계약서 얘기를 하시는데 무허가 건물을 가지고 법을 말씀하시니 앞뒤가 안 맞네요. 이 건물 불법으로 개조해서 월세 놓으시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계약서도 무효가 아닌가요?”

갑자기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가시가 돋쳤다. “아니, 이런 북한 새아기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계약은 법적인 책임이 따르는 거라고, 불법건물 얘기는 또 어디서 듣고 와서 이젠 별 걸로 다 협박하네?”

사실 행복하기만 하고 감사하기만 하던 남한 사회의 첫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치게 되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차갑고 쌀쌀한 주인 할머니도 원망스러웠고, 무허가 건물을 알면서도 나에게 계약서를 내민 부동산업자도 원망스러웠고, 이런 불법 건물이 버젓이 세를 주고 또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코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새삼 느꼈다. 다른 탈북자 가족들은 정부 임대아파트에서 불편함이 없이 살고 있는데 나는 이게 무슨 고생인가? 하지만 이제 와서 이렇게 남을 원망만 할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