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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0)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2. 내 아들을 돌려주세요!

우리가 도착한 곳은 태국 치앙라이라는 국경 도시였는데 나는 학교 때 배웠던 영어를 기억하며 태국인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나 혼자 유일하게 영어를 더듬거리며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처음으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해 본다.

여기 도시 이름은 뭐냐, 치앙마이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버스터미널은 어디에 있나, 택시는 있는가 등등 말이다. 치앙마이는 태국의 방콕 다음으로 큰 광역도시이고 해외 관광객들이 넘쳐났는데, 태국어를 몰라도 의사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태국인들 대부분이 영어나 중국어 둘 중의 하나는 잘 할 수 있었으며, 식당에 가면 대부분이 중국인들이라 그곳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쫓기거나 숨지 않아도 되어 점심을 푸짐하게 먹은 우리는 그날 작은 여관에 들어가 하룻밤을 잤다.

시골 여관은 안전시설이 안 되어 밤에 강도나 경찰이 들이닥칠 때도 있다고 한다. 침대 2개밖에 없는 여관방에서 나는 아들과 한 침대를 쓰고 다른 일행은 여자 형제 2명과 딸과 함께 한 침대에서 좁은 대로 자야 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우리는 일단 간단한 쇼핑을 했다. 여름옷들과 샌들을 사들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치앙마이 버스터미널은 너무 크고 넓어 자칫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해외 여행객들이 많아 그들은 대부분 치앙마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다행히도 티켓을 끊고 제대로 버스에 탈 수 있었다.

우리는 치앙마이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나중에 다 틀어졌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 달려 치앙마이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 길옆에서 팔고 있는 쌀국수부터 사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쌀국수였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건 매일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서 시장을 여기저기 구경하고 방콕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경찰서에 바로 갈 것이냐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방콕으로 바로 가면 1인당 버스비용이 600 밧트가 들었고, 경찰서로 찾아가 난민신청을 바로 하고 방콕에 이송되면 난민수용소에 바로 갈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비용을 쓰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대부분 탈북자들은 버스에서 경찰에게 여권검색에 걸려들어 수용소에 이송된다 고 하는데 우리는 검색도 당하지 않아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는 어리석은 짓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잘못된 판단과 정보 부족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예상보다 더 오래 발이 묶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일단 치앙마이시 경찰서를 찾아갔다. 나는 이때 학교 때 배웠던 온갖 영어 단어들을 떠올리며 소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다른 2명은 러시아어를 배워 영어는 하나도 몰랐고 그 지역에는 중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나 아니면 소통을 할 수가 없어 갑자기 5명의 운명이 내 어깨에 달려있는 듯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경찰서 앞에 짐을 내려놓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라고만 해놓고 저녁 해질녘까지 들여놓지 않았다.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들과 과일을 사고 주변을 구경했는데 횡단보도를 찾지 못해 하마터면 차에 부딪칠 뻔하였다.

태국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그래서 길을 건너다가 갑자기 경적도 없이 차 한 대가 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 기절할뻔했다. 그 후부터 무서워 길을 건너지는 못하고 한 쪽만 계속 뱅뱅 맴돌면서 경찰서의 수속을 기다렸다.

밤이 되어오자 당직 경찰은 종이로 등불을 만들어 하늘에 날려보내는 걸 보여줬는데 소원을 빌어서 하늘로 올려 보내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등불을 만들어 하늘에 띄우며 무사히 남한에 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다음날 수속을 하게 된 우리는 경찰서 측에서 불러준 남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통역뿐 아니라 성경책과 한식들을 많이 가져다 주셨다. 특히 불고기, 김치, 김, 밥 등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모로 그 목사님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변수가 생겼다. 우리는 불법체류자이므로 법적으로 재판을 받고 나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에 갈 수 있는 난민수용소에 보내지는데 7살~18살의 청소년들은 45일 동안 따 로 청소년 감호소에 보내진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님도 우리에게 설명을 제대로 해주시지 않아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45일 동안에 아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며 우리는 경찰서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법을 우리가 알았더라면 바로 방콕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우리는 그곳 경찰서에서 45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렇게 경찰서에 다시 돌아오게 된 나와 아들은 갑자기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뭐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먼 땅에 와서 아들이 어디로 간 건지, 어떻게 사는지, 언제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무척 화가 났고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정말 매일 아침 경찰들에게 물었다.

“아들이 언제 오나요? 제발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제발, 제발.”

“45일 지나야 온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그들은 분명히 영어로 45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45일이라는 날짜를 알아들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4박 5일도 아니고 45일을 어떻게 갈라져 산단 말인가?

중국말만 하던 아들이 갑자기 학교도 못 가고 이상한 감호소에 가서 외국 애들이랑 지내야 한다니. 애는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고 또 낯선 환경이 무서웠을까? 울고 있을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이 현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절대로 아들과 45일 동안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마치 아들을 영영 못 만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너무 두려웠다. 내가 고향의 부모, 형제들과 그렇게 헤어져 다시는 영영 못 만나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아이와 갈라져 지낸 지 1주일째 되는 날 큰 계획을 세웠다. 나는 떠날 때 접이식 칼을 준비해 왔는데 혹시라도 산이나 수림 속에서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침 식사를 배달하러 당직 경찰 한 명이 구류소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구류소 안에 있는 복도에 있었고 다른 죄인들은 감방처럼 생긴 방에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었는데 당직 경찰이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나가는 순간에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제발 데려다 주세요.”

사실 경찰들은 내가 매일같이 애원하는데 익숙해져 그냥 나를 무시하곤 했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나를 매정하게 밀쳐버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의 다리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를 나한테 잡히게 된 그는 걸을 수가 없게 되자 다시 들어왔다. 나는 그의 앞에서 준비했던 작은 손 칼을 꺼내 내 배에 갖다 댔다.

“아들을 지금 당장 안 데려오면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아들을 지금 당장 데려다 달라.”

그리고 칼을 내 배에 깊이 눌렀다. 갑자기 당황해진 당직경찰은 비상벨을 눌렀고 순식간에 10여 명의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대여섯 명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킴. 그 칼 내려놔. 안 돼 그러지 말고 잠깐 얘기해!”

나는 사실 자살소동을 벌여 그들에게 겁을 주어 아들을 데려오게 함이었는데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진짜로 옷을 찢을 뻔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연기를 하며 진짜로 울부짖었다.

“내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아들을 돌려주세요. 제발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내가 할 줄 아는 영어는 고작 몇 문장밖에 없어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사방에 둘러싸인 경찰에 결국 잡히게 되었고 칼을 뺏겼다. 그들은 나를 독방에 처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나는 혼자 하루 종일 독방에서 울고 또 울며 들여 보내준 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틀을 갇혀 있으며 밥을 한술도 먹지 않으니 경찰들이 이틀 만에 나를 독방에서 풀어주었다. 사실 그들 모두가 나를 안쓰러워했다. 나는 그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지도, 죄인처럼 천대하지도 않았다. 독방에서 풀려난 다음날 아침 10시쯤에 갑자기 아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 엄마 내가 왔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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