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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9)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는 가려면 아들을 두고 나 혼자 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들을 두고 갈 바엔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일단 나는 10살이 된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가 먼 길을 떠나 한국이라는 나라에 갈 건데 아빠랑 집에 있을래? 아니면, 엄마 따라서 먼 길 떠나 한국으로 갈래?”

10살 된 아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내 옆에 왔다.

“난 엄마 따라 갈래?” 그렇게 나는 아들과 함께 한국 행을 결심했다. 남편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그에게 아들이 방학이 되면 꼭 데리고 올 것이라고 약속하였고 모든 재산은 다 두고 갈 테니 아들만 데리고 가겠다고, 만약 동의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데리고 도망갈 거라고 통보 아닌 통보를 했다.

불쌍한 남편은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남자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고 죄책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고 너무 아팠지만 아들에게 더 큰 미래를 안겨주기 위한 것이라고 나를 합리화 시키면서 애써 외면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내가 그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다. 나중에 형제도 없이 홀로 남겨진 그를 결혼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고집불통인 그의 사고방식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꼭 필요한 여비만 챙기고 길을 떠났다. 은행에 있던 모든 통장과 현금들을 모두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야 떠나는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겨우 남편을 설득시키고 우리는 2007년 11월에 한국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의 길에 올랐다. 장거리 버스에 오른 우리는 출발해서 거의 닷새 만에 중국의 남쪽 국경도시 윈난성 쿤밍에 도착했다.

우리와 떠난 일행은 다른 탈북자 가족 3명과 우리 2명인데 어른 3명과 2명의 아이이었다. 5명 이상일 때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인원이 적으면 비용이 똑같이 들고 이윤이 남지 않아서 그런다고 한다. 쿤밍 버스터미널에는 도처에 경찰들이 널려 있었고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남한으로 가는 탈북자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경찰 제복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철렁해 무척 긴장을 했는데 낯선 안내자를 만나서 얼른 봉고차를 타고 10시간 거의 달려 소수민족의 작은 시골에 도착했다. 그곳 아파트에 3일 정도 살게 된 우리는 허락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었고 나 혼자만 그 안내자와 함께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다가 밥을 해먹었다.

우리는 전화기도 압수당했고 외부의 그 누구와도 연락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출발하는지 날짜와 시간도 알 수 없었으며 언제라도 출발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3일째 되는 날 새벽 2시에 안내자가 들이닥쳐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했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는 차에 올랐는데 진흙탕 물이 넘쳐흐르는 강을 보트를 타고 건너가니 그곳이 미얀마라고 한다. 불과 100m 정도 되는 강폭은 좁지만 물살이 아주 빨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중국 국경을 무사히 건넜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사실은 이곳 중국-미얀마-라오스 국경에서 많이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 되었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우리는 정말 행운이었다. 그는 다른 안내원에게 돈과 함께 우리를 인계해 주었고 우리는 또 거의 2시간을 걸었다. 그렇게 걸으니 어느덧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미얀마의 바나나 농장을 지나고 산속을 지나는 도중에 오렌지색 도포를 입은 승려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이 지은 독특한 집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메콩강 기슭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반대편 라오스를 볼 수 있었는데 안내원이 하는 말이 많은 탈북자들이 라오스에서 잡혀 북송 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라오스가 아니라, 미얀마를 통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의사 소통할 정도는 알았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우리는 비상식량을 많이 준비했는데 초콜렛이나 건빵들, 견과류들은 이때 요긴하게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주저앉아서 먹을 수 없기에 배고프면 걸으면서 먹어야 했다. 10살 된 아들은 곧잘 따라 걸었다. 그래도 중국 국경을 무사히 넘어와서 한결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여기저기 미얀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남방의 경치와 따뜻한 날씨는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 아까울 정도였다.

그렇게 메콩강 나루터에 도착하니 작은 보트와 또 다른 안내원이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트에 오르기 전에 보트맨은 우리가 짐이 너무 많다며 짐을 꺼내어 버리게 하였다. 짐이 너무 많으면 용량 초과로 작은 보트가 뒤집어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이 옷과 먹을 것만 남겨두고 내 옷과 신발 등은 모조리 버려야 했다.

그리고 보트는 사람 5명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보트맨은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안전사항을 알려 주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위험하니 조심해야 된다고 했다. 보트는 오래 전에 사용하던 구식 보트에 엔진을 매달아 속도를 내게 하는 것인데 안전벨트도 없어 갑자기 방향을 돌리면 휙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메콩강에는 악어들이 많았고 보이지 않는 암초들이 많아 잘못 부딪치면 사방으로 날아가 악어 밥이 될 수 있다고 보트맨이 경고하였다. 우리는 보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배치되어 앉았으며 양손을 보트에 붙은 손잡이를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았다.

나는 처음 압록강을 건널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때도 탈북한다며 강을 건너다가 첫 아이를 잃지 않았던가? 또다시 탈출을 한다고 압록강보다 더 위험한 메콩강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악몽의 재현인지 너무도 두려웠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아들에게 당부했다. 만약에 암초에 부딪쳐 보트가 뒤집어지더라도 손잡이를 절대 놓지 말 것이며 빨리 보트 위에 올라와야 한다고, 손잡이를 놓지만 않으면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 아무 영문도 없이 나를 따라나선 아들은 이런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말을 잘 들었고 고개를 끄떡이며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벌써 아침 10시가 되면서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데 길고도 긴 메콩강을 달리는데 2시간 넘게 걸렸지만 나는 그 시간이 10시간보다 더 길고 또 길어 보였다. 중간중간에는 물밑에서 살짝살짝 드러나는 암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앞에서 마주 오는 커다란 중국 여객선에는 북한 공화국 깃발이 달려있어 정말 긴장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북한 깃발을 10년 만에 눈앞에서 보게 되자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고 별의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여태 잘 숨어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내가 잡혀가면 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나쁜 생각들이 마구 떠올랐다.

암초와 악어도 무서웠고 우리를 향해 마주 오고 있는 여객선은 저승사자처럼 앞에서 우리를 위협했다. 큰 여객선들은 갑자기 보트를 멈추게 하고 단속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객선이 마주 오자 우리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반대편에서 노를 저으면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한창 물놀이 흉내를 내면서 여유만만하게 노를 젓던 우리는 여객선이 멀리 지나가 버리자 다시 전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보트가 쏜살같이 달리면 무조건 세워서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잡아간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물보라를 일으키며 쾌속으로 달리는 보트를 즐겨야 할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 순간을 즐길 수 없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양쪽에 끝없이 펼쳐진 숲과 수려한 암벽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고 처음 타보는 보트는 스릴만점이었지만 암초와 악어라는 두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는 태국 땅에 도착했다. 보트맨은 우리를 내려주면서 행운을 빈다고 했다. 많은 탈북자들이 보트가 뒤집혀 물속에 잠겨 죽은 사람들도 많고 특히 악어가 팔을 낚아채 물어뜯어 팔을 잃은 여자도 있었다는데 우리는 다행히 아무도 안 다치고 무사히 도착하여 행운아들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가 이 말을 출발하기 전에 했으면 아마도 우리는 보트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때 지리수업 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강들의 이름을 지도에서만 보던, 이름만 기억나는 메콩강을 내가 직접 건너다니, 중국, 미얀마와 라오스 등을 거쳐야 하는 이 위험한 여정은 태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 드디어 끝났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북송될 위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태국은 탈북자들을 북송하지 않지만 일단 불법체류자로 분류하여 난민수용소에 넣고 그들이 원하는 나라에서 받아주면 그 나라로 보내준다. 태국 땅에서는 브로커나 안내자가 없었는데 북송될 위험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자유의 몸이 된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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