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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7)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리고 우리 둘은 1주일 내내 일만하다 보니 돈 쓸 시간도, 쓸 일도 없었다. 그렇게 돈은 금방 모아졌고 나는 아파트 하나 사 놓으면 나중에 아들에게 하나 줘도 되겠다 싶어 얼른 구매했다.

이 동네에 온 지 불과 3년 사이에 우리는 참 많은 기적을 이루었다. 꼬질꼬질한 난민 차림으로 처음 여기에 발을 디딜 때부터 이제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만점 시험지를 가져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손으로 이루어냈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당시 도시사람들도 아파트 1채 사는 것이 정말 로망이고 꿈이었고,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남편의 고향 시골에서는 아직 외지에 돈 벌러 나가 아파트 한 채 사 놓은 사람이 없었다. 시골에서는 우리가 칭다오에서 아파트 2채를 샀다는 소문이 쫙 퍼지면서 동네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특히 나는 북한에서 속옷도 변변히 없이 맨주먹으로 이 동네에 와서 온갖 고생과 가난, 그리고 그 많은 수모를 견디며 끝내 자신의 힘으로 인생역전을 이룬 전설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병아리 장사꾼이 제대로 맞췄다며 서로 나처럼 대문 옆에 토종 아카시아를 심는다고 난리였다. 또 어쩌다 시골에 돌아가면 서로 자기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했고 우리 집 대문 돌쩌귀에 불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심지어는 동네 촌장이 나를 만나러 찾아왔다. 무슨 회사에서 일하냐, 어떤 일을 하나, 자기 아들을 데려가서 취직시켜주면 안되나 등등 서로 자기 자식들을 도시로 데리고 나가 내가 일하는 한국회사에 취직시켜 달라고 부탁이 줄을 섰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돈 빌려달라며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도, 들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어렵던 시절,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모두가 외면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눈웃음 치며 다가왔고 나를 대하는 말투가 달라졌다. 그리고 서로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한다.

내가 정녕 설움과 가난에 온갖 수모를 받으며 살던 그 여인이 맞는가? 동네 사람들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내 남편 혼자는 절대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때부터 그들은 무인도에서도 무조건 살아남아 돌아올 사람이라고 나를 인정했다.

우리가 그곳에 자리를 잡으며 뿌리를 내리기까지 삼촌이라는 인물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외지인이라는 딱지를 안고 그 동네에 정착할 생각도 못했던 우리가 동네 영향력 있는 삼촌이라는 존재로 인해 지긋지긋하던 가난과 고생의 소굴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당시 중국의 개혁개방의 10대 대도시 중의 1위에 꼽히는 칭다오시에 정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 삼촌이라는 선물을 나에게 보내준 하느님에게 무한의 감사를 드린다.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삼촌과 만남은 필연이었고 그는 나의 삼촌 이상의 존재였으며 세상이 비웃고 모두가 외면하던 나를,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그 후에는 아직까지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지만 미래에 그런 인연을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 나도 더 크게 성공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삼촌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7. 재회, 그리고 나만의 길
 

중국에서 만난 귀한 인연 중에 또 다른 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한국책방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북한에서 온 부부를 소개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조심이 그리고 정말 경계를 하면서 잠깐 만났는데 참 그 또한 신통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책방 바로 옆 한식당에서 주방 일을 했고, 남편은 액세서리 회사에서 일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책방에서 만나면서 서서히 친해져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왔고, 그곳 근처의 남한 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젠 고생도 끝났고 돈도 잘 벌고 있는데 북한에 부모 형제들에게 어떻게 돈을 보낼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요. 언니네는 북한에 어떻게 돈을 보내요?”

“돈만 있으면 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뭔 걱정? 우린 지금 몇 년째 그렇게 보내고 있어”

“어머나, 정말 그런 루트가 있어요? 난 아는 사람도 없고 물어 볼 데도 없고 몇 년 동안 혼자 속만 태우고 말았는데 날 좀 도와주시오.”

타국에서 만난 그 부부와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그들은 외아들을 북한에 두고 왔는데 아들 걱정에 어느 하루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알게된 후부터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아들과 함께 그 언니 집에 놀러 갔다.

유일하게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들과 함께 북한 음식도 해먹고 속에 묻어둔 이야기들을 터놓을 수 있었으며 북한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그 언니 부부는 바로 우리 옆집에 세를 들어 살았고 우리는 서로 친형제처럼 가까웠다.

그 언니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당시 대도시 들에서는 시골에 서 온 농민공들의 아내들에게 타 지역에 살 수 있다는 증명서를 요구했다. 중국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여자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 돈벌이를 떠나 사실상 통제불가능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이 임시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집마다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의 가족 사항과 부인의 피임 상태라는 증명서 제출을 요구했다. 응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쫓아냈다.

그 언니도 그래서 계속 시달림을 받고 있었는데 증명서가 없는 그는 그런 서류를 제출할 수가 없었고 중국어 문제로 충분한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거의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경고까지 받은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동네 촌장인 삼촌과 잘 아는 관계로 부녀회장을 직접 만나 그를 나의 친언니로 소개해 증명서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도록 보증을 섰다. 그러는 와중에 북한에 있는 형제들과 드디어 연락이 닿게 되었고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부모님들과 남동생과의 직접 통화를 원했지만 몸이 불편해서 올 수가 없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나는 정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자나깨나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부모님들과 동생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니 정말 속상했다.

나는 내년엔 꼭 엄마나 남동생을 데리고 함께 오라고 언니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당장 그들을 중국에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픈 남동생을 중국에 데리고 오면 치료도 하고 부모님들도 데리고 와서 실컷 효도를 하면서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은가?

나는 당장 고향에 돈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해 5월에 전화통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부모님들과 동생은 함께 오지 않았다. 두 언니만 함께 왔는데 계속 부모님과 동생을 걱정하는 나에게 그제야 그들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 봐 말을 못 꺼냈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터라 큰 충격에 며칠을 몸져누워 앓았다. 정녕 내가 부모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단 말인가? 그리고 내 남동생도 야속하게 먼저 떠나갔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내 사랑하는 남동생을 데려와 치료도 해주고 함께 한국에 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못했는가? 내가 그동안 내 코가 석자라 돈 한푼 보태 줄 수 없었지만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동생과 부모님들은 더는 나를 기다릴 수가 없어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님들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토록 애타게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렇게 내가 잘 살면서 돈 한푼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일찍 돌아가신 것 같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부모님들과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북한은 나에게 더욱 멀게만 느껴지고 이제는 더 이상 중국에만 눌러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남한 기업에 취직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나의 착각은 그만 깨졌다. 바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노동자와 업주간의 갈등이 악화되었는데 결국 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때 통역을 맡은 조선족은 공인들과 한 편이 되어 회사측에 골탕을 먹였는데 그때부터 회사는 중요한 통역에 나를 불렀고 그러다 보니 한족들은 나를 아주 미워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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