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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총무 직을 맡으면 한족들을 상대하기 너무 싫으니 그냥 지금 하던 일을 하겠다고 말이다. 참 그곳 분위기는 가족처럼 화기애애했다.

나는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원하는 음식을 해주었고, 그때마다 좋은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내가 만든 김치는 주변 남한 기업들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다른 남한 기업 직원들이 우리 회사로 와서 무조건 점심 저녁을 먹고 갔다.

그들은 자기 회사 주방 아줌마들은 왜 그렇게 김치를 못하냐고 불평을 했다. 그리고 음력 설에는 온 직원들이 모여서 김치만두도 만들었고 야식으 로 굴 떡국도 만들어 주었으며 다른 회사 직원들도 오게 하여 함께 음력 설을 지냈다.

설에는 식당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외식 할 데도, 놀러 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좋았던 회사는 중국에서의 사업 실패로 다음해 5월에 남한으로 철수하면서 나는 커다란 아쉬움을 안고 새 직장으로 옮겨가야 했다.

회사가 철수한다는 소식에 바로 다른 회사에서 나를 얼른 스카우트를 했다. 무려 3곳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세상에 내가 어디로 갈지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내 월급은 일반 공인들 하루 12시간씩 일해서 받는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돈이었다. 새로 스카우트한 회사에서는 당장 월급을 더 올려줄 테니 자기 회사에 무조건 와야 한다며 반강제로 날 데려갔다.

그들이 나를 데려가는 중요한 이유가 또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주말에도 사업을 하는 중요한 미팅에 나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다. 사무실에 조선족 통역이 있었지만 대부분 남한 사람들은 조선족 통역을 신뢰하지 않았다.

어떤 통역원들은 통역을 거짓으로 하고 때로는 거래를 중간에서 가로채기도 하고 뒷돈도 챙기며 비리를 저지르는 사례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면 정말 통역의 역할이 중요한데 아마 나는 같은 민족이라는 마음가짐이 그들에게 진정성 있게 느껴졌고 나를 신뢰하게 된 이유인 것 같았다.

회사 사무용품이나 물품 구매를 할 때도 10위안이라도 깎아서 절대 현지인들한테 바가지 쓰지 않도록 최대한 흥정을 했다. 사무실 책상을 사러 가면 다른 통역보다 절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고 그래서 주말에 회사 통역이 없을 때 일부러 나를 데리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거나 중요한 사업 미팅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남한사람들의 돈을 등치고 가격을 몇 배로 부풀려 바가지를 씌우는 현상을 사방에서 볼 수 있었고, 그런 모습에 정말 속상했다. 대부분 통역들은 뒷돈을 받으며 그렇게 거래를 해왔기 때문에 현지 물정을 잘 아는 회사 사장님은 그래서 나를 신뢰하였다.

전문용어들을 통역하는데 내가 전문적이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전문용어를 중국어로 다 꿰뚫고 있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현장 통역도 자주 나가야 했다.

전문 통역원을 제쳐 놓고 나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니자 사무실 조선족들과 현장의 한족들은 은근히 나를 경계하며 싫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까지 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도 때로는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도 살다 보면 가끔 있다.

 

6. 중산층의 상징 아파트를 사다

나의 중국에서의 10년 생활을 말하자면 내가 만난 인생의 귀중한 인연에 대해 빼놓을 수가 없다. 그때는 내가 가발공장을 다닐 때였는데 첫 시작 2달을 월급도 못 받고 일하다 보니 정말 돈 한 푼이 아쉬웠다.

마침 추석이 다가왔다. 중국 추석은 중추절이라고 하는데 정말 음력 설과 더불어 1년 중에 가장 큰 2대 명절 중의 하나였다. 그때마다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데 도시로 왔던 수많은 농민공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모든 회사들은 1주일씩 문을 닫는다.

나는 1주일을 쉬면서 무슨 알바라도 하고 싶었다. 남편은 나와 아들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나는 알바를 할 거니까 당신 둘이서 고향에 다녀오라고 했다. 왜냐면 버스비만 성인 1명이 150위안 정도 들기 때문이다.

평소엔 그 절반도 안 하는데 추석과 음력 설엔 부르는 게 값이고 그나마도 자리가 없어 버스를 탈 수가 없고 잘 세워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고향에 가는 버스를 타는 일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큰돈을 쓰면서 사이도 좋지 않은 시부모들 만나러 가는 것보다 명절 때 임시직을 찾아 돈이나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편과 아이를 1주일 연휴를 보내놓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아 여기저기 일손이 필요한 곳을 수소문했다.

마침 동네에 나와 동갑인 아줌마가 자기 삼촌을 소개해주었다. 그녀의 삼촌은 뜻밖에도 그 동네의 당서기였는데 한마디로 그 마을의 권력자였다. 그의 아들이 작은 자수공장을 운영하는데 수출용 모자에 글자나 로고를 새기는 자수사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 일손이 부족해 밤새워가며 일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곳으로부터 걸어서 2분 거리에 있어 이건 정말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그의 삼촌과 식구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우리도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의 아들 며느리도 나와 동갑이고 그들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들의 딸 역시 내 아들과 같은 학급이었다.

기계로 자수를 끝낸 후 실밥을 가위로 잘라내는 일인데 수공으로 일일이 해야 되는 거라 정말 산더미처럼 일감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수백 개 넘게 실밥을 잘라도 겨우 3위안을 받았다. 한 끼 밥값도 안 되었다.

그래도 당장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루한 일이었지만 열심히 했다. 그렇게 그들과 인연을 맺은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면서 금세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 삼촌은 갑자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 옥수수 밭에 옥수수를 오늘 다 따 들여와야 하는데 비를 맞으면 안 된다네. 여러 사람이 필요한데 혹시 같이 가지 않을 텐가?”

나는 동네 부자인 그들에게 옥수수 밭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지만 주저없이 나섰다. 옥수수 따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당연히 가야죠. 비를 맞으면 안 되니 빨리 갑시다”

그렇게 네댓 명이 동네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밭으로 달려가 급히 옥수수를 따서 자루에 넣고 차에 실었다. 나는 재빨리 옥수수를 따내고 자루를 채워서 어깨에 척척 메고 화물 적재함에 실었는데 남자들도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 삼촌과 아들은 입을 쫙 벌렸다.

“아니 김,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해? 여자가 그렇게 일을 잘하는 건 처음 보네.”

나는 그의 칭찬에 씨익 웃으며 내가 주인인양 그들을 재촉했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끝냅시다. 비가 막 쏟아질 것 같네요.”

그렇게 절반 넘게 했는데 무정한 소낙비가 드디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고 삼촌은 그만하고 돌아가자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만 더하면 되는데 마저 끝내면 안 되냐며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삼촌은 비를 맞으면 병이 난다며 나를 억지로 끌고 차에 태웠다. 만약 나였으면 비를 맞으면서라도 다 끝냈을 텐데 잘사는 사람들은 병 나는 것이 걱정인 것이다. 그렇게 일을 다 못 끝내서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그들은 연신 나를 칭찬했다.

내가 남의 일을 몸 사리지 않고 무거운 자루를 척척 메고 다닌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그 훗날에도 두고두고 그날 일을 곱씹었다. 그의 집에 돌아와 옥수수를 하차하고 나니 비가 멈추었다. 집안에 들어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삼촌이 갑자기 나에게 20위안을 건넸다.

“이건 뭔가요?”

“받아 둬. 오늘 일당이야.”

“뭐? 일당이요? 무슨 말씀을, 겨우 40분도 안 되는 일을 이웃끼리 도와줄 수 있는 거지 갑자기 웬 돈을, 난 돈 받으려고 도와준 거 아닌데, 절대 받을 수 없어요. 아니 안 받을 거예요.”

온 집 식구들이 나를 나무라며 돈을 받으라고 재촉했고, 그 돈 안 받으면 일감도 안 준다며 기어이 내 손에 쥐어줬다. 사실 20위안이면 내가 모자 실밥 뜯는 일을(하루 3위안) 1주일은 거의 해야 만질 수 있는 돈인데 겨우 40분 일하고 큰돈을 받다니 참 남의 돈을 그저 공짜로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들은 나와 정말 친해졌고 가족처럼 여기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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