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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0)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다시 그 장사꾼과 함께 방앗간으로 돌아가니 마을 사람들은 우르르 나에게 몰려들었다.

“뭐라고 했어? 너네 돈 잘 번대? 언제 잘살게 되는지 그걸 물어본 거 아니야?” 나는 안색이 굳어진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다. 해줄 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명이 그에게 갑자기 돌발질문을 했다. “여기 우리들 중에 앞으로 누가 제일 잘 살지, 누가 제일 앞으로 일이 잘될지 한 명 짚어보세요.”

사실 그들은 이미 그를 조롱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꽤 심각하게 우리 모두를 훑어보더니 나를 콕 짚었다.

“이 아기 엄마가 이 중에서 제일 부자가 되겠네요.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젤 잘될 것이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킥킥 웃음소리와 함께 대놓고 말도 안 되는 별 돌팔이를 다 본다며 등을 돌리고 흩어져 갔다. 사실 내가 선택되는 순간 나는 많이 당황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정말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정말 돌팔이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곧 씨가 되고 열매가 되었다. 나의 야심찬 꿈과 목표는 주변 사람들의 천대와 멸시를 동력으로 삼아 불과 2~3년 후에 이루게 되었다. 나는 마을에서 가장 성공한, 부자로 등극했다(그 당시로서는 말이다). 훗날 나한테 말조차 걸기도 싫어하던 동네 촌장과 좀 내노라 하는 사람들까지 자기들 집에 저녁 초대를 하는 이상한 현상이 멀지 않아 벌어졌던 것이었다.

나는 그의 병아리를 산 지 이틀 후에 돈을 탈탈 다 털어 토종 아카시아나무를 5그루를 사서 대문 오른쪽에 담장을 따라 심었다. 내가 그의 말대로 아카시아나무를 심자 동네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다.

 흥. 아카시아를 심는다고 팔자가 달라지겠니? 뭐 이런 태도였다. 그런 그들의 비웃음까지도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토종 아카시아를 심은 몇 년 후에 이것이 어떤 대기적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그때로부터 3년도 안 되어 나는 진짜로 그 마을에서 제일 잘살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너도 나도 토종 아카시아를 대문 옆에 심는 열풍이 불었으며 그 이야기는 이제 그 동네 전설이 되었다.

그날 내가 산 병아리는 신품종이라 앓거나 삵에게 먹히고 겨우 2마리만 살아남았는데 그것마저 일찌감치 팔아버렸다. 왠지 토종 닭들과는 달리 양육하기가 꽤 어려웠다. 그가 나한테 남기고 간 중요한 힌트는 바로 “대문 오른쪽 옆에 토종 아카시아를 심어라! 그러면 모든 게 흥할 것이다” 였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나는 더 이상 기댈 곳도, 믿을 것도 없었으나 이 말만큼은 믿었다. 아니 그 말이라도 믿어야 했고 믿고 싶었고 또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그 동네는 흙 층이 얇고 큰 바윗돌과 돌 층으로 이루어진 동네라 나무와 풀들이 잘 뿌리내리기 힘들었고 특히 여름엔 가뭄에 말라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정말 정성스럽게 가꾸었다. 제발 이제는 잘살아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무를 지켜보며 정성을 다했다.

심지어는 나무들과 혼자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아카시아들아. 내 아기들아! 이 고생을 제발 끝장나게 해주렴. 이젠 그만 여기를 떠나서 도시에 나가 돈을 많이 벌게 나를 도와주렴.”

그 나무들이 지금은 얼마나 튼튼하고 잘 컸는지 8년이 지난 후에 가보니 정말 아름답게 자랐고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병아리 장사꾼이 해준 얘기를 떠올린다고 한다. 몇 년 후에 내가 시골에 갔을 때 동네 아줌마들은 그 나무를 가리키며 그때 병아리를 사지 않은 것을, 풍수를 보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드디어 아들이 5살 되던 해 정월이 다가왔다. 이미 마음속으로 혼자 단호한 결심을 품은 나는 아무한테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누구도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고 비웃음만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월 보름이 지나고 남편은 또다시 공장으로 일하러 떠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나는 남은 빚을 갚기 위해 옥수수와 통밀을 아주 싼 값에 몽땅 다 팔아버렸다. 몇 년을 간직해오던 낱알들이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절대 곡식을 팔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흉년이 들면 그 낱알이 바로 식량이고 집 짐승 먹이로 쓸 수 있는 비상용으로 몇 년째 곳간에 보관하고 있는데 여름에는 쌀벌레가 득실거려 사실 손실이 너무 많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곡식들을 팔아 빚을 깨끗이 갚아 버리자고 계속 말해왔지만 남편과 시아버지가 평소에 극구 반대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중대한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쌀을 다 팔고 나니 빚은 겨우 다 청산했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내가 남들이 절대 팔지도 않는 낱알을 다 팔아버리자 아무도 내 속심을 모르는 그들은 내가 딴 남자를 따라서 도망가려고 하는 것 아닌지 아니면 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닌지 뒤에서 수군거렸다.

빚을 남김없이 다 청산하자 나는 내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년 동안 우리를 칭칭 감고 억눌려 오던 그 빚이라는 사슬을 드디어 내 손으로 끊어 버렸다. 내년에 먹을 비상양식이 나한테 왜 필요한가? 나는 이곳에 안 있을 거니까.

이제부터는 새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을 그려나가면 된다. 나는 더 이상 남의 인생에 나를 끼워 맞춰 사는 사람으로 살 수 없다.

 

3.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고리타분한 남편과 시아버지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던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다 갖추고 나서 시아버지한테 폭탄선언을 하였다. 때는 바로 3월 중순이었다.

“나는 아이 아빠를 따라 도시로 일하러 갈 것이니 그리 아세요. 그리고 다시는 농사는 손도 대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임대를 주던지 하세요. 낼 아침 버스 타고 떠날 거예요. 그리고 난 허락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알려주려고 온 것이니 말릴 생각을 마세요.”

돈을 훔쳤다는 사건 이후로 서로 시선도 마주치기 싫어하던 냉랭한 사이였지만 나는 그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80세 고령의 시부모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외아들과 늦게 본 외손주를 곁에 두고 살고 싶은데 아들도 도시로 떠나고 이젠 나까지 손주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하니 참으로 그들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이런 시골에서 내 청춘을 가난에서 허덕이며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또 이런 척박한 환경을 내 아들한테까지 물려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온 동네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동네의 아들 딸들이 도시에 일하러 많이 나가지만 모두 임시직이거나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시골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중국 사람도 아닌 내가 아이까지 데리고 나가서 청년들도 찾기 힘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 넓고 넓은 대도시에 나가서 길을 잃으면 어떡하느냐, 어떻게 찾아갈 거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일을 하겠냐, 내가 정신이 미쳤거나 아니면 딴 남자를 따라서 도망가려 한다고 비웃음이 여기저기 흘러 넘쳤다.

그러나 나야말로 아직도 고리타분한 생각에 얽매여 구시대적으로 살고 있는 그들을 비웃으며 드디어 나만의 길을 향해 닻을 올렸다. 그 당시에는 버스정류소가 따로 없고 길옆에 정신 바싹 차리고 서있다가 지나가는 버스의 목적지를 확인하고 바로 손을 흔들어 세워서 타야 한다.

아이 옷과 내 옷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그렇게 칭다오라는 대도시를 향해 아이와 함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몇 시간을 달려 작년에 한 번 왔던 기억을 더듬어 나는 버스에서 내렸는데 정말 하느님이 도와 제대로 찾아왔다.

나는 버스가 지나칠까 봐 창 밖에서 눈길을 잠시도 떼지 않았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날씨도 쌀쌀했으며 어느덧 저녁 6시가 다 되어 오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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