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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7)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래도 지원군이 생겨서 마음이 든든했고 기분이 좀 풀렸다. 그러나 곧 남겨둔 아이의 모습이 자꾸 눈에 떠오르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부모나 남편이 밉다지만 어린 아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받는 것 아닌가? 어른들 싸움에 죄없는 아이한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여름 해가 떠올라 아침 10시쯤에 우리는 돌아갔다. 돌아와 보니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뒤늦게 새벽에 밭일을 나간 남편과 동네 몇 사람이 모여서 시아버지를 나무라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시이모 부부는 시아버지를 꾸짖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며느리를 얻고 또 손주까지 얻었는데 그때를 벌써 잊었소? 나이가 들었으면 화를 참을 줄 알아야지 그러다가 아들을 또 홀아비 만들 작정이오?”

웬일인지 시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절대로 잘못했다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와 말을 잘하지 않았다. 그때의 상처는 모질게 가슴에 박혀버려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그 일이 화제가 되어 동네 가는 곳마다 삼삼오오 모여 앉기만 하면 그 얘기가 나왔다. 나는 가는 곳마다 뭘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 나에게만 유독 가혹한 내 팔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해에 여름에 또 다른 도적 누명을 쓴 사건이 일어났다. 동네에는 강변에 있는 좋은 땅을 채소밭으로 정하고 세대별로 땅을 나눠 주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온갖 채소를 심어 먹으며 남으면 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토마토, 배추, 무, 토란, 부추, 파, 오이, 마늘, 가지, 고추, 정말 여름 내내 제철 채소는 미처 다 못 먹을 정도로 흔했다.

장에 가서 팔아도 돼지고기 몇 근은 살 수 있을 만큼 수입이 꽤 쏠쏠하다. 그런데 채소밭을 가꾸려면 매일 물을 길어와 밭에 뿌려줘야 했다. 물 길어오는 것이 나에게는 큰 고역이라 채소를 안 먹을지언정 물 긷는 것이 싫었다.

때는 바로 한여름, 남편은 김매기 철이 끝나 또다시 건설판에 일을 나갔다. 집에서 나 혼자 채소가 많이 필요 없는 밭을 가꾸기 힘들어 다른 집에 빌려줬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흔한 오이나 파, 토마토 이런 것들은 이웃들이 먹으라고 주는 경우가 많아 굳이 사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한 번은 나 혼자만 모르는 소문이 동네에 무성했다. 내가 아무개 집 채소밭에서 오이를 몽땅 따서 자루에 넣고 등에 메고 가져가는 것을 누군가가 멀리서 봤다고 한다. 그것도 이른 아침 사람들이 많이 없는 시간에 말이다.

또 집집마다 채소밭이 있고 오이가 흔해 빠져서 훔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먼 발치에서 나를 봤다고까지 했다. 체격이나 모양새가 틀림없이 내 모습이라고 한다.

아무튼 오이를 잃은 집은 크고 작은 오이를 모조리 뜯어갔다고 이건 분명 오이를 심지 않은 내가 훔친 거라고 동네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이 동네에 처음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랬다는 소문만 파다 하고 아무도 나한테 찾아와서 왜 그랬냐고 따지는 사람도 없었다. 우연히 이웃집에서 그 말을 듣게 된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그 오이 한 자루를 혼자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그리고 또 그 뒷말이 더 가관이었다. “못사는 집 새댁이 오죽이나 돈이 없으면 오이를 훔쳤을까. 그냥 모른 척 한번 봐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주인들은 말이나 하고 따가지 왜 몰래, 그리고 싹쓸이를 해가느냐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당장 그 집에 달려갔더니 밭에 일을 갔는지 대문은 잠겨 있었고 나는 몇 번이나 찾아갔다가 겨우 어두운 저녁에야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때가 중국 생활 3년째였고 의사소통은 꽤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말을 꺼냈다. “왜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내가 오이를 훔쳤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냐? 정말 내가 훔친 걸 봤냐? 난 혼자 오이를 그렇게 많이 먹을 수도, 팔 수도 없는데 도대체 말이 되느냐?”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더 기가 막혔다. “우리가 알면서도 불쌍해서 가만있으려고 했는데 도적이 제발 저리는 격이구나? 누가 분명히 너를 봤다고 했는데 더 이상 무슨 확인이 필요한가? 우리가 너희 집에 찾아가서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오히려 이렇게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고 적반하장이야?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어디서 거지 같은 나라에서 와서 동네 물을 흐리고 살면서 너와 말도 하기 싫다.”

그 두 부부는 아이를 안고 있는 나를 콱콱 밀치면서 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대문을 쾅 걸어버렸다. 그렇게 본전도 못 찾은 채 아이를 안고 매몰차게 대문 밖으로 쫓겨난 나는 천만 근짜리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가슴이 꽉 막혔고 목구멍이 메어왔다.

내가 오이를 훔쳐갔지만 그저 불쌍해서 모른 척 그냥 한번 넘어가 준다니? 시아버지까지 나를 멸시하고 무시하며 도적 누명을 함부로 씌우더니 이젠 온 동네가 나를 거지처럼 살아서 아무거나 훔치고 사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 버렸다.

나에게만 왜 자꾸 억울한 누명이 생기는 것인가? 역시 답은 하나였다. 모든 원인은 가난이 죄였다. 또 그리고 나를 위해 나서서 두둔해 줄 수 있는 부모형제가 없으니 내가 정말 동네북처럼 만만했던 것이다.

그렇게 품에 꼭 안겨 있는 아들과 함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캄캄한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나는 순간 생각했다. 나는 더는 이렇게 도적으로 몰리며 살 수는 없다. 바꿔야 한다. 동네 사람들의 생각은 나를 위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나를 바꿔야 한다. 결국은 돈 없는 가난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 아닌가?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자. 돈이 없다고 남편도 원망을 말자. 나를 바꿀 것이다. 나는 돈을 많이 벌 것이다. 그리고 또 정말 보란 듯이 누구보다 더 잘 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한평생이 시골에서 이렇게 거지처럼 도적 누명이나 쓰면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또 이런 가난한 환경을 내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내가 가지고 있다. 울지 말고 더 강해져야 한다. 나는 곧 눈물을 멈췄다. 그리고 결연히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오늘 내가 받은 이 수모를 꼭 너희들에게 갚아주리라. 내가 복수하는 길은 오직 너희들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되는 길이다. 무조건 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감히 너희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큰 부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가장 큰 복수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는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고 나는 가슴에 사무치게 칼을 갈았다. 그렇게 해야만 했고 그것이 나의 목표이고 내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내가 비록 먹을 것도 없는 못사는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신세이지만 이런 시골에서 너희들 따위에게 수모를 받으면서 살아갈 내가 절대 아니야. 난 너희들 보다 훨씬 더 높은 이상과 목표와 뜻이 있어. 보여주리라!

그날 이후로 나는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거의 웃지도 않았다. 내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고 마음속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나한테만 유독 가혹하고 불공평한 이 세상에 대해 절대 굴복하지 말고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날부터는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차곡차곡 세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울던 말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눈물은 나를 더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나의 슬픈 과거는 남들에게는 그저 이야깃거리 밖에 안 된다. 이렇게 중국의 작은 시골에서 내가 겪은 온갖 수모와 멸시는 큰 원동력이 되었고 불굴의 정신으로 포기를 모르는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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