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31 전체: 81,330 )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5)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나의 남편과 시부모들 모두 그녀를 나보다 더 좋아했는데 이유는 농사일을 막힘 없이 척척 해내는 그녀가 부러워서였다. 그래서 나는 왜 농사를 그녀만큼 못하냐는 핀 잔을 들어야 했고 그때마다 나는 반박했다.

 “농사 잘하는 것 하나로 사람을 함부로 비교하지 마라. 농사를 잘 한다고 잘살 것 같으면 한평생 농사로 잔뼈가 굵은 여기 사람들은 왜 아직 어렵게 사느냐, 특히 농사의 달인인 시아버지는 지금쯤 부자가 됐어야 하는 것 아니냐.”

남편은 내 말에 감히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시골에서 5년을 살면서 그 언니와 나는 서로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고 그 힘든 세월들을 견뎌낼 수가 있었다.

아이를 낳은 다음 해에 우리에게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큰 위기가 찾아왔다. 현(도급)공안국에서 관할 내에 있는 북한 여성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북송한다는 위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같은 동네 사는 주민의 자녀 중 한 명이 바로 그 공안국에 다니는데 몇 주 전에 70명이나 되는 북한 여자들을 불의에 수색하여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먼 산동성까지 와서 북한 사람들을 잡아가다니 그럼 여기도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니란 말인가? 전체 현에서 70여명을 잡은 거면 거의 마을마다 1명 이상은 잡혀간 셈이다. 나는 우리 현에 북한여자들이 그렇게 많이 살고 있다는데 대해 진짜 놀랐다. 그리고 그 사람이 북한 여자들을 직접 북송 했는데 그 과정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여자들은 북송되면 무조건 죽음을 당할 거라고, 고통스럽게 고문 받다가 죽느니 차라리 자살해 죽는다고 호송 도중 열차 창문을 깨고 뛰어내린 사람도 있고, 유리 조각으로 팔목을 그은 사람도 있고, 쥐약을 삼킨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기 전에 북한군들이 매 사람들 손바닥을 철사로 뚫어 10명씩 연결해 도망 및 자살을 못하게 하고 두만강 철교를 건너갔다고 한다. 그가 돌아와서 하는 생생한 증언은 어느덧 사방에 쫙 펴졌고 동네 사람들은 북한의 악행에 경악했다. 그리고 우리의 안전에 대해 다들 우려했다.

그 공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이미 우리 둘이 북한 여자들임을 알고 있었고 특히 조심하라고 미리 알려준 것이다. 그는 공안에서 언제 우리 동네를 불의에 급습하려 하는지를 미리 알려주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다른 동네로 며칠 동안 피신해야 했다. 붙잡혀 간 여자들은 대부분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고 그 아이들은 졸지에 엄마를 잃었다.

그들 대부분은 불의의 기습으로 미처 피하지 못하여 잡혔고, 혹은 마을주민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 악의를 품고 신고를 했거나 아니면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면서 신분이 노출이 되어 갑자기 잡혔다고 했다.

나는 그래서 이 언니가 항상 불안했고 너무 나돌아다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까지 표적이 되어 우리 마을에 북한 여자 2명이 있다고 옆 동네에 이미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동네 촌장이 우리집에 찾아왔다 갔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보니 나보고 빨리 며칠간 다른 곳에 피신해 가있으라고 했다. 공안이 앞으로 며칠 동안 언제든지 들이닥치면 우리를 끌고 갈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고 갔다. 밤에 잠도 한숨 못 자고 잡혀 갈 두려움에 떨던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타 동네에 있는 시 이모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피신을 해야 했다. 중국국경에서 수천 Km나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안전할 줄 알았는데 언제 잡혀갈지 모르고, 또 동네 누군가가 신고하면 아무 때나 잡혀갈 수 있다고 하니 이건 정말 불안하고 무서웠다. 정말 만약 내가 잡혀간다면 내 아들은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여기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차라리 농민공들이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번화한 도시에 나가면 아무도 내 신분을 알 수 없으니 그곳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이와 생이별을 하고 공안에 잡혀서 북송이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나는 정말 많이 조심했다. 낯선 사람들과는 될수록 말을 안 했고 그 언니와 같이 다니지 않으려고 애썼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잘 모르지만 그 언니는 그 지방의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모르는 남자들에게 담배도 건네고 라이터도 빌렸으며 금세 친해지고 물건들을 왕창 사며 도무지 조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양면의 동전과 같이 가장 친한 사람이면서도 아주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최근에 70여 명의 북한 여자들이 북송 되었다는 소식을 꺼내며 정말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정말 우리가 잡혀가지 않은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언니가 큰 사고를 쳤다. 음력설을 5일 앞둔 어느 해 그 언니는 3살 된 아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가출을 했다. 그의 남편은 나이가 아주 많았고 살짝 지체 장애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고 도망갈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마을에 도착한 첫날부터 내내 남편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더 젊은 남자를 만나서 도망갈 거라는 얘기를 노래처럼 부르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녀는 남편을 바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도망간 남자는 그녀의 남편보다 더 한심한 남자였기 때문에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당장 음력 설이 코앞인데 아이와 남편을 집에 두고 다른 동네의 홀아비와 가출을 해버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온 동네가 어수선한 가운데 그녀가 동북 길림성 연변으로 갔다고 연락이 왔다. 하필 도망가도 그 위험한 국경지대를 자진해서 찾아가다니 도대체 제정신인가? 만약 그녀가 잡히게 되면 나도 여기를 지체 없이 떠야 한다. 나까지 노출이 되기 때문이다. 정말 불안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다행히도 그녀는 음력설 전날 밤에 돌아왔다.

그들은 가출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길림성 연변까지 도착하여 택시를 탔다. 그런데 마침 택시 기사가 조선족 아저씨였는데 그녀의 어눌한 중국어 말투를 보고 바로 북한 여자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 아저씨가 여기 지금 북한사람들 마구 잡아가는데 이렇게 위험한 곳을 왜 왔느냐고 하면서 당장 여길 떠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바로 겁에 질린 그녀는 다시 택시기사에게 부탁해 나를 데려왔던 14도구의 사촌 누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한시도 지체 없이 그들은 다시 택시를 타고 며칠을 달려 기차표를 끊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데려왔던 사촌 누이가 그녀와 동행해 주었다. 그렇게 그가 지불한 택시비와 차비만 2천 위안이었다고 한다. 며칠 만에 2천 위안을 날려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하였으나 정작 그의 남편은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해 다행스러워 하였다.

그 후로 그녀는 가출에 대한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아들을 남겨두고 가출을 할 수 있는 그녀가 너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그 시골에서 5년을 사는 동안 항상 우리는 언제나 잡혀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잠식해 있었고 길에서 공안 제복을 입은 사람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 급히 숨을 곳을 찾을 정도였다.

이제 그곳에서도 우리는 맘 편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가난하고 어려운 농사 일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잡혀갈 두려움까지 도대체 내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5. 사라진 250 위안과 ‘오이도둑’

분가를 한 후부터는 살림도 나뉘었는데 매일 나의 일과는 아침을 챙겨먹고 아이를 시부모 집에 맡겨 놓고 밭에 갔다가 저녁이면 집에 돌아오는 것이다. 시부모들이 어떻게 아이들 돌보는지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아이 입에서 피가 흐르고 앞니가 하나 빠졌다.

여기저기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이빨이 돌에 부딪쳐 빠져버렸다. 그 후로부터 불과 3~4개월 동안 위아래로 앞니 8개가 다 사라져 버렸다. 언제 빠져 버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