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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4)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새집에 이사 오니 그동안 눌려왔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나는 거의 한 달 넘게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하루 15시간 이상을 자고 또 자도 피곤한 잠자는 병에 걸렸다. 아침 먹고 나면 아이와 함께 잠들었고 점심 먹고 또 자고 밤에는 밤대로 깊은 잠을 잤다.

밭에서 돌아온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나는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끝없이 자고 또 자도 몸에 기운이 빠진 건지 혼이 빠진 건지 아무튼 다 귀찮고 그냥 자고만 싶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해도 바로 정신을 잃고 곯아떨어졌고 일단 잠들면 누가 깨우기 전에는 절대 일어나지 못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신체 현상이었다. 밭일 갔다가 돌아온 남편은 내가 늘 잠만 잔다고 심한 욕설까지 했다.

그러다 끝내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날은 갑자기 정전이 되어 등잔불을 켜고 저녁을 먹었다. 내가 끝없이 잠만 자고 농사일을 나 몰라라 한다고 밥상 앞에서 잔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고 또 자도 계속 자고 싶으니 제발 좀 잘 수 있게 놔두면 안 되겠냐고 반박을 하다가 결국은 험한 말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인신공격으로부터 해서 거지같은 나라에서 왔으면서 감지덕지할 줄 모른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별의별 욕설이 다 나왔다.

오고 가는 심한 말속에 서로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밀치고 당기고 몸싸움까지 일어났는데 캄캄한 속에서 갑자기 날아온 그의 주먹은 바로 내 눈을 가격했다. 그리고는 홧김에 등잔도 던져서 깨버리고 내 머리 여기저기 주먹질을 해댔다. 캄캄한 속에서 서로 싸우는 소리에 아이가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자 그는 멈추었다.

 다음날 거울을 보니 내 얼굴과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바로 또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내가 얻어맞아서 눈에 시퍼런 멍이 생겼다고 남편을 여자한테 손을 대는 모지리로 비난하였다. 평소에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못하는 남편은 못나게도 나한테만은 큰소리치는 남자가 되고 싶고 손찌검도 할 수 있는 남자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매일 듣는 잔소리와 가정을 먹여 살릴 능력이 부족한 그에게 쌓인 스트레스가 그를 이성을 잃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달 내내 잠만 잤더니 그 이상한 현상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사람이 하루 거의 20시간을 자고 또 자도 끝없이 졸리고 또 잘 수가 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그동안에 쌓인 정신적 및 육체적 피로가 풀리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집 생활의 구석구석 가난의 그림자는 따라다녔다. 독립해서 생활하면서 또 하나의 문제는 땔 것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땔감을 마련하는 것이 정말 큰 문제였는데 여유가 있는 집들은 연탄을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름에 들판에 나가서 풀을 베어 말려서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그리고 겨울에 당나귀나 염소, 소 먹이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땔 것으로 사용한다. 문제는 둘러봐도 돌만 가득한 산과 들판에는 심지어 나무조차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 풀이 흔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들판에 남아있는 강냉이 대들을 베어와서 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우리는 강냉이도 많이 심지 않아서 그마저도 부족했다.

대부분 가정들은 옥수수대들을 베고 실어 날라오는 것이 귀찮아 밭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봄에는 밭에 세워둔 채로 불에 태워 버린다. 그들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땔 걱정이 없었다. 나는 밭에 무수하게 버려져 있는 강냉이 대들을 집에 가져오고 싶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초겨울 밤에 나는 아이를 재우고 들판에 나갔다. 버려진 채로 있는 옥수수밭에 도착한 나는 힘에 부칠 만큼 밧줄로 묶어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것 같은 옥수수대들은 생각보다 많이 젖어 있어서 엄청 무거웠다.

얇은 밧줄이 어깨뼈를 파고드는 아픔에 잠깐 쉬고 싶어 커다란 바위에 기대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밝은 밤 하늘 풍경이 장관이었다. 은하수가 가로질러간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을 뿌렸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그 순간 내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들을 잠깐 내려놓고 별들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달님, 별님,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이 고생을 해야 하나요? 왜 유독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합니까? 이젠 제발 좀 그만 힘들게 해주세요. 여태 겪은 고생들이 아직도 부족한가요? 언제면 나에게도 밝은 빛이 비춰 드나요?”

나는 내가 겪어온 가혹한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제발 이젠 좋은 일만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눈을 번쩍 떠보니 반짝이는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아닌가? 아니 내가 왜 여기서 잠들었지? 아! 맞다! 나는 그제서야 등에 메고 있는 강냉이 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쌀쌀한 밤에 내가 그렇게 깜빡 잠이 들 수 있었다는 게 신기 했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다그쳐 집에 돌아왔다.

마실을 나간 남편은 밤 12시가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했다. 오직 하늘의 달과 별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 황량한 초겨울 밤에 바라본 무수한 별들과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는 나에게 외로워하지 말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이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그때의 그 장면은 지금도 뇌리에 사진이 찍혀 남아있다.

 

4. 공포와 두려움은 과연 언제 끝나나?

나와 같은 마을에 살던 선봉언니는 서로 많이 의지했고 유일한 친구였고 형제와 같았다. 그녀는 체격이 조그마하고 강단 있게 생겼다. 내 남편과 달리 그의 남편은 돈을 많이 저축해서 그는 오자마자 돈을 잘 쓰고 다녔다. 그는 북한에서 부모형제, 아들까지 다 잃고 혼자 몸이라 돈을 보내줄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런 그가 정말 부러웠다. 내가 만약 저 돈이 있었으면 바로 부모님들을 도와드릴 텐데 말이다. 내가 쌀밥을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 그 언니 집에서 자주 쌀밥을 얻어먹다시피 했다. 그는 음식솜씨가 훌륭했고 특히 우리는 된장이나 김치도 같이 만들어 먹었다.

또 어쩌다 가끔은 함께 찰떡이나 송편도 빚어 먹었다. 그 언니는 음식을 많이 하길 좋아했고 여러 사람들이 나눠먹기를 좋아했다. 나는 원하는 것을 아무 때나 사서 해먹을 수 있는 그가 정말 부러웠다. 그는 나보다 3개월 늦게 아들을 낳았는데 우리는 물론 아이들도 서로가 유일한 친구였고 하루에 한번이라도 못보면 서로 섭섭할 정도였다.

가난한 나에게 그는 거의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시장에 가면 큰손 언니로 불렸고 그 지역에 소문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중국말을 너무 잘 못해 중국인이 아닌 것이 바로 탄로났고 급기야 북한 여자라는 소문이 쫙 퍼지면서 모두들 신기해서 그녀와 말을 걸고 싶어 했다. 더듬거리며 말하는 그의 중국어를 모두 재미있다고 구경거리로 여기기도 하였다.

나는 물론이고 동네사람들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함부로 나대면 신분이 너무 노출되어 공안에 잡혀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무시를 당할까 봐 함부로 장에 다니지 않았으며 필요한 것만 사고 절대 아무하고나 함부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도 많은 일을 당해서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다니면서 중국어 통역을 해줄 만큼 나는 언어습득이 빨랐다. 그녀는 술과 담배를 좋아했으며 농사일은 막힘이 없었고 일 반 남정네들도 못하는 일을 식은 죽 먹기로 해냈다.

담배는 일반 남정네들도 잘 못 피우는 독초를 기침 한 번 안 하고 쭉쭉 피워댔으며, 그러다 보니 그녀의 주변에는 이상한 남자들이 많이 꼬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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