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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3)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닭 한 마리나 족발을 사먹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도 나는 차마 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기만 낳아주면 별것 다 해줄 것처럼 하던 식구들은 빚이 하도 많으니 함부로 돈을 쓰려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해주던 미역국이 너무 먹고 싶고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으며 아기를 안고 기뻐할 식구들 모습도 상상했다. 거의 한 달이 되어갈 때까지 빵과 면을 질리도록 먹은 나는 닭백숙이 너무도 먹고 싶었다.

돼지 족발은 꽤 비싸서 안 되겠다며 시아버지도 도리머리를 저었고 남편은 조금 벌어온 돈을 다 아버지한테 주고 나니 가진 돈도 없었다. 아무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환경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래저래 화병도 나고 스트레스도 받았다.

마침 선봉 아줌마가 가까이 와서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얼른 닭백숙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바로 당장 자기가 기르던 닭을 잡아서 삶아서 밤중에 가지고 왔다.

나는 그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버렸다. 남편은 내가 뼈만 남긴 것을 보더니 버럭 했다. 자기도 먹고 싶었는데 자기 몫을 남겨두지 않았다고 말이다.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냥 참았다.

내 팔자야! 이렇게 단순하고 생각이 없는 남자와 한평생 살아야 한다니 내 인생이 참 암담하고 서글펐다. 남편과 시부모들은 먹을 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도망쳐 나왔으면서 여기가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배부른 흥정을 한다는 태도였다. 비록 말은 다 못 알아들어도 그들의 비웃음과 은근한 멸시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갓 태어난 아기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과 기쁨이었고 내가 가진 세상의 전부였다. 그토록 허전하던 가슴에 갓난아기를 품에 안으니 갈가리 찢어졌던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어와 마음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는 듯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아들만은 꼭 행복하게 잘 키우리라.

농촌에서 생활하려면 집짐승은 필수로 키워야 하는데 나는 집짐승 냄새에 비위가 약해 먹이를 주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도 돼지, 당나귀, 병아리, 토끼, 염소, 거위, 오리 등을 다 키웠다. 적당히 크게 되면 팔아야 하기에 짐승들을 잘 먹여서 키워야 했고 새끼 낳기도 잘해야 하며 겨울 내내 짐승 먹이도 만만치 않았다.

농작물 중에서도 가장 돈이 되는 것은 담배 농사였지만 필요한 농기구들이 없어서 우리는 담배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우리집은 제일 가난했고 등 뒤에서 느끼는 동네 사람들의 은근한 무시와 멸시를 항상 느껴야 했다. 가난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기가 죽었으며 늘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3. 새 보금자리

 

남편은 원래 목수였다. 그는 시어머니를 닮아 천성이 어질고 착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 늘 수동적이라 목수 말고는 잘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라서 매일 시아버지한테 혼나고 야단을 들어야 했다.

시아버지는 해방 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울 때 팔로군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항미원조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그는 전쟁참가자 연금을 매달 받았는데 우리 온 식구가 거기에 매달려 살만큼 정말 큰 보탬이 되었다.

시아버지는 얼굴이 호랑이 같은 기운을 풍겼는데 성격도 호랑이 같아서 화를 잘 참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에는 시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서로 등지고 사는 사이로 지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남편한테 잔소리를 하는데 남편이 하는 모든 것을 맘에 들지않아 했고 땡전 한푼 없이 늙은 아버지한테 얹혀사는 아들을 항상 못마땅해 하였다. 시부모들은 고지식하고 정직한 전형적인 시골 노인들이었는데 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농사에 항상 서툴렀고 농사보다는 도시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매일같이 남편을 세뇌시켰으며 그때문에 내가 자기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도시에 가버릴까 봐 불만을 품었다.

아이가 2살 되는 해에 나는 남편한테 분가하자고 돌발선언을 했다. 600미터 떨어진 동네 아래쪽에 내려가면 남편이 장가가려고 10여 년 전에 지어 놓은 새 벽돌집이 있었는데 미완성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벽과 지붕만 씌운 상태로 창문을 달고 대문도 달고 화장실도 만들어야 할 돈이 없어서 사실 그곳에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농촌 생활은 부업으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집을 짓거나 인테리어를 할 수 있는 큰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마침 건설판에 2주 정도 일용직을 떠난 남편이 200위안을 벌어 왔다. 나는 그 돈으로 지체없이 분가할 준비를 했다.

나 혼자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서 살 테니 당신은 여기서 부모와 같이 살던지 아니면 날 따라 새 집에서 살던지 선택하라고 말이다. 나는 비록 추위에 떨고 죽을 먹으며 살지언정 꼭 분가해서 내 살림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내 일이 잘 풀릴 것 같았으며 또 가난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첫 200위안을 가지고 중국식 온돌을 만들고 부뚜막도 만들었으며 가마솥을 사서 걸고 일단 끼니를 끓여 먹을 수 있고 잠 잘수 있게 방 한 칸만을 먼저 꾸렸다. 그리고 유리창문도 달았다.

따뜻한 햇빛이 창문을 비추며 집안을 밝혔고 비록 엉성하긴 하지만 아늑한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 시커먼 그을음이 천정에서 뚝뚝 떨어지는 시집보다는 새집이라서 넓고 환하고 밝은 남향집이 너무 좋았다.

매일 시부모가 해준 음식이 아니라 내가 직접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고 항상 얼굴이 화가 나있는 시아버지 얼굴을 보지 않아서 또 좋았다. 화장실이 가장 문제였는데 밖에 수숫대를 엮어서 칸막이를 만들어 간이 변소를 설치했다.

가을철이 끝나고 바쁘지 않을 때 나는 앞에 개울가에 나가서 돌을 주워 모았다.

다른 집들은 큰 돌을 사서 담장을 멋있게 지었는데 우리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돈이라 강변에서 동글동글한 돌들을 모아 집에 날라 왔다. 그렇게 10차 정도 모은 돌로 우리는 담장을 둘러쌓고 겨우 대문을 세웠다. 이제야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된 나는 그때부터 정말 억척스럽게 일했다.

토끼도 키우고 병아리도 많이 키웠고 오리, 게사니들도 많이 키워서 가을에 팔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리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손에 전혀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

한번은 음력 설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우리는 명절에 먹을 돼지고기 한 근도 살 돈이 없어 대충 음력 설을 지내기로 하였다. 명절 분위기로 흥성거리는 다른 집들과 달리 썰렁하고 한산한 우리집에 시아버지가 돼지고기 2근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기를 털썩 내려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 그는 빈곤하게 사는 아들 내외가 못마땅했고 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년에 오히려 아들을 도와줘야 하는 현실이 너무 한심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비참했다. 이렇게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집으로 어디를 가도 환영 받지 못했고 대접받지 못했다. 누구도 우리와 가까이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으며 있는 사람들 끼리끼리 관계가 형성되어 우리는 늘 외톨이 신세였다. 내가 아들을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 가려고 하면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보고는 대문을 슬쩍 잠가버린다.

그들 집에 가면 아이한테 간식이라도 줘야 하는 부담 때문에 혹은 내가 뭘 얻으러 올까 봐 피하는 눈치가 느껴졌다. 그래서 남의 집에 놀러 가는 것도 두려웠고 음력 설에 세배하러 다니면 내 아이한테 주는 세뱃돈은 남의 집 아이들의 절반이었다.

그 반면에 선봉 아줌마네 집은 매일 동네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돈을 펑펑 잘 쓰는데다가 워낙 성격이 좋아서 남녀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그 집에 모여 놀았는데 놀러 가면 사과나 만두 등 먹을 것들을 한 가득 해놓고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저 가난이 원수였다. 가난을 피해 북한에서 중국에 오니 여기는 또 다른 가난이 나를 힘들게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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