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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2)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우리 모두는 충격에 빠졌고 친척들은 연로하신 시부모님들이 너무 안쓰러워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 다들 발벗고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려고 했다. 다행히도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남편의 6촌 동생이 겨우 기관 일꾼들에게 호소를 하여 아기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시아버지가 돈을 빌려서 담당자에게 뒷돈을 준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나는 하늘이 내려준 소중한 아들을 곧 품에 안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해 음력설이 막 지나서 나는 남편과 함께 벽돌공장에 일하러 갔다. 중국은 여자들이 임신을 하면 거의 여왕마마님 수준이다. 남자가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밥도 빨래도, 농사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벽돌공장에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적극 만류했다. 돈이 필요하겠지만 절대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농사철은 아직 2달 정도 더 기다려야 하고 아기를 키우려면 돈도 들 텐데 그냥 집에서 놀고 있을 수는 없다. 또한 나는 더 이상 빚쟁이들한테 빚 독촉을 받으면서 가난뱅이 딱지를 안고 사는 것이 너무 싫어 내 손으로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벽돌공장은 진흙으로 빚은 벽돌을 뜨거운 로 안에 구워내는 일인데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밖에서 일해야 했고 끼니는 매일 밀가루 빵과 절인 무, 또는 배춧국으로 때웠다. 돈을 아끼려 우리는 가장 싼 음식만 사먹으며 일했다. 그곳에서는 내가 일을 너무 잘해 모두 깜짝 놀랐다.

나에게는 벽돌공장 일이 아무리 힘들다지만 그래도 농사일보다는 열 배 나았다. 매일 일이 끝나면 하루에 얼마를 벌었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고 체질적으로 나는 농사일이 너무 싫었다. 일년 내내 힘들게 일해도 손에 남는 것이 한 푼도 없으며 국가에 땅값과 비료 값 등등 돈을 갚아야 하고 고구마나 땅콩은 가격이 너무 싸서 아무리 많이 팔아도 돈이 되지도 않았다.

벽돌공장은 각 농촌에서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어린 청소년 들도 많이 왔는데 나만큼 일을 잘하는 여자는 없었다. 북한에서 하도 안 해본 일이 없이 험한 일에 단련되어 나에게는 식은죽 먹기였지만 말이다.

숙소는 창고처럼 지어진 건물에서 널빤지를 깔고 잤는데 사람 들은 임신한 내가 잘못될까 봐 일을 살살 하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거의 3개월을 일해서 난생처음으로 100위안 짜리 지폐를 손에 만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느덧 출산 달이 다가왔다. 밭갈이를 끝내고 남편은 다른 집 남편들과 함께 건설 현장에 일용직으로 일하러 갔다. 나는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태아의 자세가 거꾸로 되어있다고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중국어를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지도 몰랐다.

해산 날짜가 2주가 남아있는 7월초,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배가 주기적으로 아파 와 옆집에 사는 이웃집에 건너가서 말했더니 아기를 낳을 징조라며 펄쩍 뛰었다. 당장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예정일이 12일이나 남았기 때문에 남편은 일주일 후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는 전화기도 없어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고 급하게 동네 트럭을 타고 마을 병원을 향해 달렸다. 30분 후에 병원에 도착했지만 그날은 마침 일요일 오후라 의사, 간호사 아무도 없었다.

산부인과에는 젊은 여자 의대 실습생 혼자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초음파를 다시 해보더니 태아가 거꾸로 자리잡고 있어서 여기서 출산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점점 느낌이 당장 아기를 낳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실습생 의사는 구급차를 불러줄 테니 현 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권했다. 현 병원까지 가려면 2시간은 걸려야 했는데 나는 10분도 견딜 것 같지 않은 불안함을 느꼈다. 이웃집 부부와 나는 구급차에 올랐고 실습생 의사를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차 안에서 산모가 위험해질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급차에 올라타고 출발한 지 5분 만에 나는 양수도 터지고 아기 발이 벌써 빠져 나왔다. 갑자기 당황한 실습생 의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고 구급차는 비상 신호를 켜고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병원을 나선 실습생 의사는 할 수 없이 아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손으로 막으면서 땀을 흘리면서 애를 썼고 뱃속의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밖으로 나오려는 아기와 못 나오게 막으려는 사투로 인해 고통이 두 배, 세 배가 된 나는 차가 달리는 몇 십 분의 시간이 그토록 길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한 듯이 젖어 있었고 두려움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실습생 의사와 이웃집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방향을 바꾸어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더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20분만 참으면 된다고 격려를 하였지만 이미 30분 내내 길에서 진통을 겪고 있던 나는 기절상태에 이르렀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도 당직 여의사 한 명만 있었고 운전사와 경비원 등 네 명의 남정들이 나를 받들어서 해산실로 옮겨갔다.

사실 수술을 해서 태아를 꺼내야 하지만 수술 의사가 당장 없고 할 수 없이 전신마취를 하고 강제로 아기를 꺼냈다. 그렇게 발부터 거꾸로 태어난 아들은 다행히 무사했고 나는 아이도 무사하고 나도 목숨은 건졌다는 생각에 한숨 돌렸다.

병원에서는 아기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이 적힌 생일 메달을 기념으로 주었다. 그날 6명이 출산을 하였는데 5명이 딸이고 나 혼자 아들이라며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몸이 너무 허약하니 만약 다음 둘째 아기를 가진다면 생명에 아주 위험할 수가 있으니 낳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다시 구급차를 타고 마을 병원으로 돌아왔다. 산모가 진통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링거도 맞아야 하고 항생제를 맞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싸늘하고 초라한 시골병원 병실에서 갓난아기를 안아보니 먼저 간 아들 얼굴과 꼭 닮아 있었는데 나는 첫 아들이 환생하여 돌아온 것 같이 느껴졌다.

그동안에 느꼈던 고통도 다 사라지고 가슴속에 맺힌 상처들이 아물어가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모형제도 모르는 이국땅에서 홀로 낳은 아기를 부모님들께 보여드릴 수도 없는 내 처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다음날 겨우 연락을 받은 남편이 돌아왔는데 산모와 아이를 데리러 온다는 게 농사짓는 삼륜차를 끌고 왔다.

아마도 자가용 택시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어 삼륜차를 15위안을 주고 데리러 온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자가용 택시도 15위안이고 삼륜차도 같은 가격인데 왜 택시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참 한심하기 그지없다.

 적재함에 겨우 올라탄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바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디젤 연기를 펄펄 날리면서 쾌속으로 달리는 적재함 위에서 집으로 오는데 길에 박혀있는 돌멩이 하나 하나까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덜컹거려 정말 온 육신이 다 아파왔다.

그래서 그런지 바람이 조금만 불어오면 팔꿈치나 무릎관절이 시리다 못해 저리고 두통이 바로 생긴다. 아기를 안고 집에 가니 유리도 없는 창문으로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고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 침대에서 산후 한 달을 보내야 했다. 나는 남편에게 창문을 비닐로 막아줄 것을 부탁했으나 자기는 너무 덥고 숨이 막혀 막으면 안 된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먹을 것도 없는 북한에 비하면 중국은 정말 천국이 맞지만 많은 생활방식이 너무도 다른 남편 때문에 한숨만 나왔다.

한족들은 산모를 방문할 때에는 흑설탕과 과자들을 가져오거나 천을 가지고 오는 풍습이 있다. 천은 아기 솜옷이나 바지를 만들어 입으라고 선물하는 것이고 흑설탕 물을 마시면 몸의 나쁜 피가 빨리 빠져나간다고 해서다.

신랑은 쌀밥을 지을 줄 몰라 얇은 냄비에 쌀을 넣고 불을 때다가 까맣게 태우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만들었고, 시어머니 역시 밥을 지을 줄 몰라서 난처해했다. 그리고 원래 산모한테는 닭이나 돼지 족발을 삶아준다고 하는데 우리집은 돈이 원수라 닭도 족발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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