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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1)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럴 때마다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는 내가 쌀밥을 안 해준다고 투정을 부려서 안 먹는 줄 알고 표정이 시퍼래서 아주 언짢아했다. 과연 이렇게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대부분의 이 고장 사람들도 쌀 사먹을 돈도 없이 살아가는데 나는 언제 어떻게 돈을 벌어서 부모형제들을 도와줄 것인지 그것이 제일 안타깝기만 했다.

그 동네는 고구마와 땅콩이 주요 농작물이었는데 그 외에도 담배, 밀, 수수, 또는 염소, 소 등 집짐승을 길러서 팔아서 돈을 만들어 썼다. 시골에서 돈을 벌려면 오직 짐승을 키워서 팔아야만 했는데 팔아도 비료와 농약, 그리고 돼지고기나 부식물 사먹을 돈이 부족하였다.

심지어는 음력 설에도 다른 집들은 음식 준비에 바빴지만 우리 집에는 밀린 빚을 받으러 사람들이 왔다 갔다. 나는 잘 못 알아듣긴 했지만 분위기가 돈을 갚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듯했다.

나는 돈이 없고 빚을 갚지도 못하는 형편에 급격히 우울해졌다. 그곳은 5일에 한 번씩 장을 보는데 나는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시아버지한테 5위안~10위안을 받아서 장보러 갔다. 하지만 정작 장보러 가면 그 돈은 쓸 데가 별로 없었다.

 농사를 짓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곳 지형은 평지가 아니고 산 지대여서 오르막 내리막이 심한 산동네였고 그나마 온통 돌 천지라 제대로 된 길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수도가 설치되어 있지만 우리 시집은 제일 높은 지대에 있어 수돗물 이 높은 곳까지 오지 않아서 우물에 가서 길어와야 했다.

우물까지 내려갔다가 물을 길어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와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이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긴 막대기 양쪽에 쇠 물통을 걸고 물을 한 가득 채운 다음 어깨에 메고 언덕을 올라온다.

 돌부리에 부딪쳐 넘어질 뻔한 아슬아슬함을 수없이 겪으면서 300m 가량 떨어진 우물가에서 하루에 2번은 길어야 충분한데 남자들이 밭일을 나가면 물 길어오는 일은 내 몫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나무막대기가 뼈만 남은 내 어깨를 파고드는 아픔을 참으며 물을 길어야 하는 일은 내 인생의 가장 고되고 혹독한 노동이었다. 고향에서도 오랫동안 머리에 물을 이고 길어 먹었는데 여기 와서는 어깨에 더 많은 양의 물을 메고 다녀야 하다니, 북한에서 웬만한 극한 노동은 다 해본 나였지만 정말 이것만은 고문을 당하듯이 고통스러웠다.

한번은 밤늦게 농사를 짓고 어두워서 집에 돌아왔는데 물독에 물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먼저 집에 돌아왔으니 할 수 없이 우물에 물 길러간 나는 그만 물통을 우물에 빠뜨렸다. 그곳은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것이 아니라 긴 막대기 고리에 튼튼한 쇠로 된 무거운 물통을 걸고 그 채로 우물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우물 속에 물통이 닿으면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물통을 철썩 한쪽으로 기울여준다. 그 다음 물이 안에 가득 차면 몸을 엎드려 우물 밖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북한에서보다 더 원시적인 물긷기 방식이었다. 빈 물통 하나의 무게는 거의 5Kg 정도이다. 거기에 물을 가득 채우면 25kg씩 양쪽에 2개를 매달고 기다란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고 양쪽에 철렁거리며 집으로 물을 쏟지 않게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그날은 내가 경험이 부족하여 물통을 살짝 기울여야 하는 타이밍에서 그만 고리에서 빠져 버렸다. 비가 온 뒤라 우물에 평소보다 수면이 높았고 날이 이미 어두워져 건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의 집 물통을 빌려서 다시 물을 길어온 나는 남편과 시아버지한테서 온갖 구박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물통 하나를 다시 사려면 20 위안을 주고 사야 하는데 못사는 형편에 그 돈이면 아주 큰돈이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역시 참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워낙 산골이고 뙈기 밭인데다가 하도 돌이 많아서 밭을 깊이 갈 수가 없고 당나귀가 앞에서 보습을 끌고 밭을 간다.

봄이 되면 밭갈이 할 때마다 당나귀를 채찍질하며, 나는 당나귀 잡이에 나섰고 김매기 역시 한 포기 한 포기 손으로 김을 매야 했으며 비가 오면 찰 진흙이 신발에 찰싹 달라붙어 발을 옮기기도 힘들다.

 그리고 밭이 한곳에 몰려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골고루 섞어서 땅을 배정받았는데 등성이 먼 밭에까지 올라가는데 한 40분 이상 걸린다.

뜨거운 뙤약볕에 하루 종일 밭에서 김을 매고 집을 내려오면 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린다. 집에 오면 물도 길어야 하고 짐승들 먹이도 줘야 하고 나 혼자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신랑이나 시아버지가 하는 일을 거들어야 했다.

우리 집만 유독 고생바가지였다. 대부분의 집들은 수돗물도 나왔고 사는 형편이 꽤 좋아서 경운기로 밭갈이하고 농작물을 날랐으며 땔 것이 없는 우리 집과는 달리 연탄으로 밥을 짓고 차도 끓여 마시고 괜찮게 살았다.

우리 집은 모든 운송 수단은 바퀴가 하나만 달린 한족들의 전통적인 손수레에 당나귀를 메우고 앞에서 길잡이를 해야 하고 뒤에선 수레를 잡고 거름이나 돌, 그리고 모든 농작물을 날라서 운반해간다.

때로는 가파른 길이 거의 90도 정도로 경사가 급했고 바퀴에 돌이 잘못 끼면 수레가 옆으로 와장창 기울어진다. 우리는 당나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겨울에 당나귀 먹일 풀을 뜯으러 다니는 것도 쉽지가 않다. 워낙 돌산이라 풀이 많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당나귀 먹이 풀을 베러 들판을 헤맨다.

내가 우리 동네에 온지 3개월 후, 우리 옆집에 북한 여자가 또 한 명 왔는데 바로 남편의 사촌 되는 사람한테 시집왔다. 그녀의 남편은 내 남편과는 달리 벌어 놓은 돈이 많았고 그 여자는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썼다.

나는 그것이 너무 부러웠고 돈 없이 가난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원래 농사꾼 출신이라 막히는 일 없이 농사일에 능수능란했고 남정네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척척 잘했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전갈과 매미 잡이에도 능해 동네 그 누구도 그녀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전갈이나 매미는 잡아서 팔면 단가가 매우 비쌌는데 돌이 흔한 우리 동네에는 전갈이 천지였고 나는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전갈에 물린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그녀는 이 동네에서 살기에 아주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온 동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의 부러움과 칭찬을 받았고 시아버지나 신랑은 내가 그 아줌마처럼 일을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놨다.

나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생소한 농사일을 배우면서 살아가야 했지만 농사는 절대 나의 체질이 아니었고 내 머릿속에는 무조건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열심히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나의 환상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2. 하늘이 내려준 축복

태어난 지 8개월밖에 안된 어린 아기를 잃은 후부터 나는 주변에 어린아이들을 될수록 멀리 피해 다녔다. 등 뒤에서 쌔근쌔근 잠자던 아기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이제라도 아기 업으러 가야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졌으며 가끔은 등에 업혀서 꼼지락거리던 아이의 느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손으로 등을 만져보기도 했다.

허전한 가슴속에는 차가운 강물에 떠내려간 아들 생각에 칼로 베는 듯 아파왔고 자책감이 되살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될수록 빨리 아기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래야 빨리 고통스러운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중국인 남편을 만난 지 3개월 만에 나는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 2달째 되는데 갑자기 정부에서는 낙태를 할 것을 강요했다. 신분증도 없고 결혼증명서도 없기 때문에 임신한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시부모님들은 손자가 생기게 된 것을 너무 기뻐하였는데 75세가 다되도록 손자를 안아보지 못해 그동안 많은 속을 태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소원이 이루어지나 했더니 강제로 낙태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또다시 아들을 죽이는 가혹한 살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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