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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0)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한 사람이 1개씩, 나한테는 2개가 차려졌는데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웠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아이스크림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면서 그 맛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나중에 사 먹으려고 도대체 이것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빙질링” 나는 혼자 빙질링을 외우면서 기억해 두었다. 내가 너무도 빨리 먹어 치우자 그들은 또다시 16개를 사 와서 나를 다 먹으라고 했다. 나는 정말 12개를 혼자서 다 먹어버렸다. 나머지 4개도 다 먹고 싶었지만 차마 체면 때문에 또 그리고 곧 아침을 먹는다고 해서 남겨두었다. 그들은 쌀밥을 한솥이나 했는데 나는 왠지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 많은 식구가 배불리 먹으려면 부족할거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 집 식구들은 밥을 많이 먹지를 않았다. 나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 밥그릇에 몇 번이고 밥을 담아서 먹었는데 먹고 또 먹는 내 모습을 그 집 딸들은 신기해서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한솥밥을 거의 혼자 먹다시피 한 나는 된장과 김치를 가져다 준 조선족 할머니에게 너무도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그 집 식구들은 나에게 갖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잡혀갈 위험이 없는 곳이라면 다 좋았고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말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부모형제들을 도울 수 있고 중국에도 데려올 수 있으니 말이 다. 그들은 만약 내가 원한다면 목걸이도 사주고 반지도 사주고 피아노도 사줄 것이라며 뭐든지 내가 원하면 신랑이 다 해줄 것이라고 했다.

 벌써 말만 들어도, 또 상상만 해도 가슴이 부풀고 내가 드디어 지옥에서 천국에 왔다는 기쁨에 넘쳤다. 고진감래라더니 온갖 고생을 다 겪은 나에게 드디어 이런 행복이 찾아왔다는 생각에 몹시 설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모님들과 더 멀리 떨어진 곳에 가게 되니 내 언제 다시 고향에 소식을 전하게 될지, 또 도와드리게 될지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다.

 

제 6 장 인생의 제 2 막

 

1. 깨어진 환상

 내가 그 집에 들어간 지 5시간 만에 그 집 아저씨와 나, 그리고 같은 친척집 아이 7살짜리 애와 함께 셋이 우리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버스를 탔는데 수시로 공안이 버스에 올라 신분증 검사를 하였고,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자는 흉내를 내라고 시켰다.

그리고 꼬마 애를 내 옆에 앉히고 자기는 바로 뒤에 앉았다. 공안이 신분증 검열을 하면 나는 자는 흉내를 내면 꼬마 애는 나를 엄마로 불렀고 “엄마는 잔다”고 얼른 대답했다.

꼬마애가 중국어를 하기 때문에 그들도 내가 아이 엄마로 생각했고 의심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잡히지 않고 무사히 국경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고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아무리 달려도 도대체 종착점이 어디인지 또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참 중국은 땅이 크고 넓기도 하였고 사람도 많았다. 기차역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기차에서 파는 음식들은 볼수록 침이 넘어가고 특히 노란 참외는 너무도 맛있었다.

아저씨는 많이 사주진 않았지만 과일이나 음식들은 감칠 맛이었고 나는 먹을 것이 차고 넘쳐나는 중국의 현실에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바로 이런 곳에서 살게 된다니? 돈을 빨리 많이 벌어서 멀지 않은 앞날에 부모님들과 동생을 중국에 데려와서 함께 살아야겠다는 꿈에 부풀어 기차여행 내내 정말 행복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구나! 그렇게 김일성, 김정일이 비방 중상하던 중국의 특색 있는 자본주의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살기 좋은 제도를 왜 김정일은 철저히 반대를 하는 것인가?

떠나서 거의 5일만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내 신랑이 될 남자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시골도 너무 깡 시골, 산골 벽촌인 것에 대단히 실망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바라보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낙후한 시골 마을이었다. 앞뒤를 둘러봐도 천지에 돌뿐인 정말 자랑할 것이 돌 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나는 벌써 암담하기 그지없는 불안한 나의 앞날을 그려보며 커다란 실망에 휩싸였다.

여기 오면 새로 지은 큰집이 기다리고 있고 예쁜 옷도 사주고 반지도 사주고 피아노도 사줄 거라는 말은 동화 속 책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었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고구마 밭, 바로 여기서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야 한다니, 거기다가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남자의 부모님 집은 부엌이 연기가 새까맣게 그을려서 까만 페인트를 벽에 칠한 것보다 더 두터운 검댕이가 붙어 있었으며 서까래 기둥 사이 사이로는 거미줄과 먼지 그리고 시커먼 그을음 덩어리들이 당장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듯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밖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곳간들이 여기저기 원형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고 돼지, 염소, 닭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날아다니며 심지어는 부엌까지 들어와서 먹이를 쪼아 먹었다.

부엌 바닥에는 닭들이 똥을 여기저기 싸지르고 먼지를 일으키며 푸드득 날아다녀도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당나귀도 있었고 소들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곳 시골 한족들의 생활환경에 나는 급격히 실망했고 여기서 살아가야 할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조그마한 동네라 소문이 금방 퍼져서 나를 구경하러 온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말은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을뿐더러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신랑이 될 사람도 왔는데 착하게 생기긴 했지만 31살 치고는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중국은 아들이 성인이 되면 집을 지어놓고 신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내가 시집 온 집은 하도 가난해서 집을 지어놓긴 했지만 집만 지어놓고 창문도 달지 않은 상태였다.

시집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 그렇게 살았다. 시부모는 원래 자식이 4명 있었는데 3명은 어렸을 때 병을 앓다가 죽고 남편만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신랑은 일찍이 호적을 도시로 옮겨서 농사지을 땅을 분배 받지 못했고 도시에 있는 국영기업에서 일하다가 파산되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그래서 직업도 없고 땅도 없고 일용직으로 가끔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모아놓은 돈도 없을뿐더러 나를 데려온 비용 2천 위안이라는 빚까지 있었다.

내가 팔려 온 것은 아니지만 날 데려다 준 아저씨와 나의 여행경비에다 또 감사의 의미에서 돈을 더 준 것이다. 이불이나 침대 등 이것저것 살림 준비를 하는데 드는 돈을 또 빌려야 했다. 시집에는 창고 같은 컴컴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바닥은 여름에는 비가 오면 물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뻘같이 진흙이 질척거렸고 습기가 차서 온몸이 쑤시곤 했다.

그리고 창문은 감옥처럼 나무막대기로 얼기설기 가로막고 유리도 없고 비닐도 없이 비바람과 눈바람이 고스란히 집안에 들어왔다. 바로 그 방에서 첫해 겨울을 났는데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에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 방 안에서 너무 춥게 지냈다. 그리고 그곳은 빵이 주식이었고 쌀값은 밀가루보다 2배나 비쌌기 때문에 시집은 돈이 없어서 쌀을 살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같이 중국 빵을 먹는 것에 질렸지만 밥을 먹고 싶다고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찬들은 기름을 많이 넣어 너무 느끼해 비위가 약해 먹을 수가 없었다. 또한 밀가루로 만든 온갖 종류의 한족 음식을 먹어야 할 뿐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기도 해야 했다.

그나마 칼국수 비슷하게 생긴 면이 조금 입에 맞았다. 당장 굶을 걱정은 없지만 나는 그때부터 몇 달 동안은 심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밥상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을 때마다 갑자기 아이 생각과 함께 떠나올 때 아파서 누워 계셨던 아버지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엄마와 동생이 얼마나 고생하면서 힘들게 지낼까 하는 걱정 때문에, 또 이 음식을 함께 나눠서 먹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목이 꽉 메어오고 밥을 넘길 수가 없어 먹지를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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