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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37)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내가 촉으로 느끼기엔 한쪽은 나를 놔주자고 하고 한쪽은 나를 끌고 공안에 가자고 하는 듯했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이들 네 사람이 정말 나를 끌고 공안에 데려가면 잡혀갈 텐데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내가 이제와서 두려울게 무엇인가? 정말 나는 용서해달라고 두 손이 발이 되어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공안에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정말 그들은 내가 처음 느낀대로 많이 냉정한 젊은이들이었다. 만약 지금 같이 휴대전화기를 널리 사용하는 시절이었다면 나는 바로 잡혀 갔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더 이상 귀찮은 듯 당장 여기서 사라지라고 손짓했다.

 결국 옷과 신발은 고사하고 손이 발이 되어 빌다가 하마터면 잡혀갈 뻔했다. 그 옷은 농사지을 때 입을 수 있는 허줄한 작업복과 작업 신발에 불과했지만 주기 아까워서 가 아니라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 때문인 것같았다. “꼬리빵즈”라는 말이 그들의 대화 속에서 자주 나왔기때문이다.

 “꼬리빵즈”라는 말은 조선인들을 차별할 때 쓰는 아주 모욕적인 단어이다. 정말로 화가 치밀었을 때 내뱉는 조선인에 대한 최악의 단어이다. 한 남자가 나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아니 날 진짜 공안에 데려가려는 건가? 그는 내게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해 주겠노라고 설명했다. 길을 잘못 들면 산속에 짐승도 많고 뱀도 많으니 위험할 거라면서 말이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대충 그런 뜻으로 이해를 한 나는 그를 따라 나섰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가 아니었으면 난 절대 그곳을 못 벗어났을 것이다. 산속의 개울도 건너고 울창한 수림을 가로질러 산봉우리를 넘고 또 넘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수많은 길을 내가 제대로 갈 수 있었을까? 거의 1시간 정도를 그렇게 걸어 앞이 환히 트이는 곳까지 와서 그는 이 쪽으로 가면 13도구가 나올 것이라며 자기는 되돌아갔다.

 하마터면 잡혀 갈 뻔했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혼자 후회를 하며 걸어가던 나는 수림이 끝나고 넓은 들판에 있는 허줄한 집한 채를 만나게 되어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아침에 인삼밭을 떠나서부터 아직까지 음식을 하나도 먹지 못했다. 이제 곧 이 길이 끝나면 수림이 아니고 마을길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내 옷차림으로는 도저히 마을을 돌아다닐 수가 없다. 한참을 망설이고 있던 찰나에 나이 많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른 손짓을 하며 가까이 오라고 한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 싫었지만 얼른 여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먹을 것을 구했다.

 그는 허줄한 출입문을 열어주며 라면 박스를 가리켰다. 우리는 라면을 꼬부랑 국수라고 불렀는데 평양에서 엄마 친구가 가져와 한번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맛있던 꼬부랑 국수, 살 수도 없고 구경도 할 수 없었던 꼬부랑 국수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나는 서너 봉지를 얼른 집어 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남자는 갑자기 문을 닫아 잠그더니 내 게로 다가와 옷을 마구 벗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당황했고 뒷걸음질치며 그를 피해 구석으로 몰렸다. 그러나 나는 힘으로는 그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바로 구석에 삽이나 곡괭이 그리고 호미 같은 농쟁기를 세워 둔 것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일부러 구석으로 밀리는 척 다가갔다. 그리고 얼른 삽을 잡아 들고 휘둘렀더니 그 영감은 너무 놀라 뒤로 물러섰다. 삽자루를 놓지 않고 대문까지 달려 나온 나는 삽을 집어 던지고 냅다 달렸다.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은 도와주려고 하는 대신 어떤 사람들은 강간이나 인신매매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루종일 꼬박 굶으면서 걷고 또 걸으니 산이 거의 끝나가고 마을이 가까이에 있는지 닭, 개, 염소 울음소리가 멀지 않는 곳에서 들려왔다. 정말 평화롭고 사람 사는 동네 같다. 어쩌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당과 지옥처럼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오늘도 남의 먹을 것을 훔치며 살고 있는 꽃제비들과 한 줌의 식량을 구하러 열차에 몸을 던지고 정처 없이 떠나가고 있을 북한의 현실을 떠올리며 가는데 눈앞에 두 갈래의 갈림길이 앞에 나타났다.

 왼쪽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오른쪽으로 가면 커다란 산전막이 있었으며 산등성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산전막 안에 남자 세 명이 창문으로 머리만 내밀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산속으로 가고 싶었지만 산전막의 알 수 없는 남자들을 보고 흠칫 놀라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밝은 대낮에 마을로 내려가는 것은 더더욱 위험했다.

 말뚝처럼 꼼짝 안 하고 날카롭게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셋 중에 나이 지숙한 아저씨가 손짓을 했다. “야. 이리로 오나” 갑자기 처음으로 들어보는 또렷한 조선말이었다. 나는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무서워하지 말아. 나 나쁜 사람 아니다. 너 북조선에서 왔지?” 너무 놀라 무서움이 앞섰지만 이들이 만약 나쁜 사람들이면 지금 도망친다 해도 잡힐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일단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파출소가 있는 마을 쪽으로 향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조선 말을 건넨 사람은 나이 많은 아저씨였고 나머지 두 남자는 그 아저씨의 19살 되는 아들과 22살 난 조카였다. 그들은 산에서 많은 소들과 양을 방목하면서 넓은 옥수수밭과 콩, 수수 등을 심고 관리하였는데 아저씨는 나를 안심시키고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니 잠시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진짜 일손이 필요해서 내가 그곳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몇 살이야?” “26살이예요.” “뭐?? 26살이라구? 난 한 45살쯤 된 줄 알았지. 많이 늙어 보이네.”

 내 몰골이 얼마나 폭삭했으면 20살이나 더 늙어 보일까? 한족이지만 조선말을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아저씨는 그곳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다른 북한 아줌마가 오두막에서 혼자 산다며 날 데리고 갔다. 그 오두막으로 가려면 큰길을 꼭 건너야 갈 수 있는데 우리는 수없이 지나다니는 차들을 피해 건너갔다.

 그러나 오두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숫대로 지은 삼각형 모양의 오두막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누울 정도의 크기로 아저씨가 지어준 거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틀에 한 번 정도 쌀과 먹을 것을 갖다 준다고 했다. 북한 아줌마가 없어지자 아저씨는 갑자기 불안해 했다. 한 번도 여길 비운 적이 없었는데 혹시 잡혀갔나면서 말이다.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넓은 밭을 보여주면서 여기서 자기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사실 농사짓고 용돈을 받으면 그것도 괜찮겠지만 국경 연선에서는 언제 잡혀갈지 모르므로 아주 위험하였다. 그들이 사는 오두막 옆에는 한창 수리 중에 있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 하나가 더 있었다.

 아저씨는 그 오두막을 가리키며 이걸 수리해줄 테니 나보고 그곳에서 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내키지 않았고 정말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잡혀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국경 연선지대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저녁 무렵에 그의 아내가 소달구지에 먹거리들을 많이 싣고 올라왔다. 아들이 저녁을 했는데 한족들인데도 조선 된장국을 구수하게 끓였다. 심지어 풋고추와 오이를 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냥 조선 음식이었다. 장백현은 조선족자치주인데 한족보다 조선족 비율이 훨씬 많다. 그래서 조선족 학교, 그리고 뉴스나 텔레비전들은 조선말 방송이 더 많다. 그곳 한족들은 조선족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서 조선말을 조금씩 할 줄 알며 조선 된장, 고추장, 김치를 정말 좋아했다.

 내가 북한에서 먹어 본 지도 까마득한 된장국은 냄새만 맡아도 벌써 자석에 끌리듯 그 오두막에 눌러앉아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꽤 오랜만에 푸짐한 밥상에 5명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밥상에는 흰 쌀밥과 감자와 돼지고기를 넣은 된장국, 풋고추, 절인 오리알, 가지볶음 등 나에게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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