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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1)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어느 해 겨울 직장에서는 멀리 떨어진 산으로 가서 땔나무를 해오기로 결정하였다. 60살 이하의 직원들과 우리 보위대원들도 모두 포함되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화물차 적재함에 빼곡히 타고 보름 정도 머무를 준비를 하고 떠났다.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화물차 적재함에서 얼굴과 머리를 감싼 모습들이 마치 피난민들 같아 서로 마주보며 킥킥 웃기도 했다.   우리는 개인이 도끼와 밧줄, 톱을 준비해 와야 했다. 산꼭대기에서 나무를 찍으면 어깨에 메고 끌고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서야 우리는 동네 어느 숙소에 자리를 잡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눈 뜨자마자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 나무들을 찍기 시작했다. 큰 나무 작은 나무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찍어 넘겼다. 여자들은 힘에 맞는 작은 나무를 찍어 넘겼고 남자들은 더 큰 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나에게는 두툼한 군용동화(겨울솜신발)가 있었는데 사실 아까워서 집에 두고 얇은 작업신발을 신고 산에 왔다. 그런데 2시간도 되지 않아 신발이 눈 속에서 젖어 버리고 발이 꽁꽁 얼기 시작했으며 발가락이 감각을 잃어버렸다. 1월 중순의 대한 추위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는데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어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점심 먹으러 내려갈 때까지 참으려 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일하기 싫어 꾀병을 부린다며 집에서 준비를 제대로 해오지 않았다고 구박을 하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속에서 발이 동상을 입었는지 시리다 못해 저리고 저리다 못해 찌릿찌릿 아파오며 그 아픔이 온몸에 전해졌다. 발과 종아리까지 다 젖어 버렸고 뼛속까지 얼어드는 느낌에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훌쩍거리는 꼴을 보기 싫으니 그만 내려가라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나는 금방 찍어낸 작은 나무 하나를 밧줄로 감아 어깨에 메고 황급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따가운 눈총을 뒤에서 느끼며 정신없이 걸으니 좀 나은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사는 게 이렇게 고달픈가? 언제면 우리도 땔 걱정, 먹을 걱정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과연 그때가 오긴 올까? 산속에서 동상을 입으면서까지 땔나무를 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이렇게 힘들게 해도 몇 달도 못 버티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연이어 떠올리며 주인집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따뜻한 물에 발을 잠그고 한참 앉아 있었다. 원래 찬물로 발을 녹여야 하는데 뜨거운 물에 발을 넣으니 발 속에 얼음이 차 있는 듯했다. 발이 퉁퉁 붓고 신발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아 주인 할머니가 도와줘서 간신히 벗을 수가 있었고 피부색이 시퍼렇게 변해버렸다. 또 동상을 한번 입으면 고치기 힘들다는 주인 할머니의 말에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주인 할머니의 솜신발이 내 것보다 조금 큰 듯해서 빌려 신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매일같이 산에 올라 도끼로 생나무를 찍고 찍은 나무들은 가지를 쳐내고 가지들은 따로 묶어 산 아래로 끌고 내려와야 했다. 사람들은 내려오면서 나무와 함께 데굴데굴 굴리기도 하고 눈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였다. 참으로 고달픈 경험이었다. 그렇게 눈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인생경험을 한 덕분에 나는 도끼 하나로 나무를 찍어 넘기는 법을 배웠고 훗날 종종 이 경험을 써먹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고통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낭만과 웃음도 함께 있었다.

 우리가 숙소로 잡은 집은 방이 3칸이 있었는데 15명이 3칸에 나누어서 잠을 잤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등잔불 아래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우리는 그때마다 오락회를 했다. 하루 중에 그래도 제일 편안한 시간이었다. 음치와 박치에 노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유일한 오락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마다 생활총화도 빠지지 않았다. 매일 뭘 잘못했고 왜 잘못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이라는 결의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제일 난감한 것이 누군가를 짚어서 비판을 해야 한다. 매일 함께 지내는 동료들을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이 무척 껄끄럽지만 무조건해야 하기에 대충 누구는 늦잠을 잤다, 누구는 춥다고 불평을 했다, 등등 서로가 감정이 상하지 않을만큼 비판을 했다.

 회사에 돌아온 다음 날 우리는 종업원 총회를 열고 그동안 산에서의 작업 성과와 매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대해 집중분석 및 비판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당연히 내 이름이 제일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데 내가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사상적으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추위에 굴복하고 일 능률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비판 세례를 퍼부었다. 그렇게 제일 만만한 19살의 신입 직원인 나를 인민재판을 하듯이 집중비판 대상으로 내세웠다.

2. 다시 학교로

 보위대 보초를 선지도 3년이 되어 오는 해에 우리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실업을 당했다. 무력부 산하 기업소들의 모든 여자 보초병들을 갑자기 남자 현역 군인들로 교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산사업소는 여성 노력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알아서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나와 엄마는 너무 속상해하다가 나를 교양원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유치원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는데 아무나 가기 어려운 곳이다. 이곳은 1년만 공부하고 졸업하면 성적에 따라서 자격증을 주는데 운이 좋으면 인민학교 교사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이나 안면을 내세워 오는 곳이었다.

 그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 역사, 어린이 심리학, 수학, 무용, 미술, 음악, 등, 교원대학 3년 교육과정을 1년간 속성으로 배운다. 고등학교 공부에 비하면 식은죽 먹기이지만 많은 애들이 공부를 어려워했다. 특히 그들은 난생처음 만져보는 풍금과 심리학을 특히 힘들어했다. 그중에서 어려운 것이 심리학인데 주요 내용들을 보면 유치원생들에게 어떻게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과 사상을 심어주는데 필요한 심리적인 요인들을 교육과 결부시켜 잘 주입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내용들이다.

 숙소는 10명이 한 호실에서 사는데 각 호실마다 호실장이 있고 학급마다 소대장, 3개 소대가 모여 중대를 이루었다. 공부가 끝나면 대열을 맞춰 밥 먹으러 갈 때는 김일성, 김정일 노래를 소리높이 부르면서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식당으로 간다. 밥은 통밀을 삶아주는데 참 껄끄럽고 목구멍에 넘기기 힘들었지만 며칠이 지나면 그것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리고 다시마나 절인 양배춧국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무용시간에 한참 무용을 배우고 나면 벌써 다 소화가 되어 배가 고팠다. (다음 호에 계속)

 

구입 문의: https://www.bookk.co.kr/book/view/111237  

-알라딘, 교보문고, Yes 24 통해 온라인 주문

-정가 33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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