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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허정희(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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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정희(문협회원)

 

 

먼 길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자리 밴쿠버로 돌아오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3년이 30년처럼 느껴질 만큼 도시는 변해 있었고, 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 도시 속으로 걸어가 보았다.

하루아침에 코로나가 세상을 뒤흔들었고, 밴쿠버에 살고 있던 나도 흔들렸다. 홀로 계신 시아버님이 걱정되어 온타리오주 워털루라는 도시로 남편과 함께 떠났다.

워털루에 봄이 오면 수선화에서 히아신스, 목단화로 정원이 바뀌었고, 민들레가 노란 꽃을 피울 때면 자리다툼이 시작되었다. 잔디 사이로 솟아난 민들레는 뽑을수록 땅속 깊이 뿌리를 감추었고, 해마다 수를 늘려 돌아오는 정원의 꽃이나 풀도 자리가 있었다. 풀들이 제자리를 고집하고, 옮겨 심은 꽃들이 시들어 갈 때면 내 욕망도 함께 사라져갔다. 꽃 속에서 오는 계절을 느끼고 숲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배웠다. 긴 겨울이 되면 흰 눈이 가을을 덮어 정원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여름날의 관심은 나에게 집중되어 겨울나기가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이 주는 단절된 외로움에 더운 위로를 찾아 사우나로 향했다. 뿌연 연기가 가득한 습식 사우나의 문을 열고 자리를 찾아 누웠다. 벽에 붙은 관에서 뿜어내는 수증기가 텅 빈 방을 채웠고, 얼어있던 몸 위로 내려앉았다. 후끈한 열기가 뿌연 연기 사이로 내려와 흘러내린 땀과 습기가 하나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긴장되었던 근육을 풀어 놓으니, 몸이 흐느적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긴 호흡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갈 길 잃은 수증기가 워털루와 함께 사라져갔다.

 

밴쿠버는 비 오는 날이 많고 안개가 자주 내린다. 바닷가 근처에서 피는 해무, 가시거리를 크게 줄이는 연무, 그리고 안개라고 부르지 않을 정도로 옅은 박무가 있다. 해무와 연무 그리고 박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 도시를 안개의 도시라 부른다. 안개의 도시 밴쿠버에서 마주한 새벽은 화려한 건물도, 차량의 복잡함도, 모두 안갯속에 가리어 나와 안개뿐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호흡이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침묵하는 한겹의 안개에 덧대어있다. 새벽안개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서서히 사라지는 안개는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고, 그 선이 하얀 띠처럼 얇아진다. 그것은 희망과 절망을 구분하는 선처럼 존재하다 빛에 의해 사라져가고, 삶도 죽음도 경계 없는 하나가 된다. 사는 동안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었던 나의 선들을 안개에 놓아 보낸다.

 

안개는 비어있는 것도 아니고 채워진 것도 아닌, 보이듯 안보이듯이 살라고 한다. 멈추지 않는 흐름 속에서.

새벽안개가 짙으면 맑은 하루를 약속하듯,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햇살에 눈이 녹듯 사라지는 안개가 품고 있던 산과 도시를 내게 주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사라진 안개가 남기고 간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나를 감싸주었다. 나의 것을 주고 비우니 비워진 나를 안개가 채워준다. 안개 속에서는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렸고, 긴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내일이 되어 모호하게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밝게 빛나야만 했고 선명하게 보여야만 믿을 수 있는 나의 믿음도, 영원할 것 같은 시간도, 안개가 되어 지나가 버렸다. 안갯속에서 길을 찾아 방황하던 젊음도 기다림 속에 핀 안개꽃이 되어 사라져 갔다. 환한 세상에서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안개가 지나가고, 삶의 명암이 드러나면서 그 깊이를 알게 되었다.

 

안개 속에서 푸른 하늘을 꿈꾸며 헤매던 젊은 날의 안개가 멀어지고, 햇살처럼 스며든 시간이 데려온 60대. 나의 자리에 서보니, 곁에 있는 가까운 것들이 보이고, 그들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살면서 삶이 버겁고 숨이 찰 때 나를 보듬어준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쉴 수 있어 편안하다. 밴쿠버로 돌아와 바라보는 나의 자리에는 시간이 남기고 간 삶의 주름이 놓여있다. 아이들은 자라서 갈 길을 찾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나를 안아주는 비와 안개가 있고,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산이 있어 좋다. 내 마음이 있는 곳, 어디에 가 있어도 돌아가고픈 그곳.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이 나의 자리임을 느낀다.

흰 눈이 가을을 덮어 화려했던 정원도 쉬어가고, 긴 겨울의 사우나는 나의 쉼터가 되고, 안개는 고단했던 방황을 품어준다. 안갯속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이 햇살 아래 드러나 하루를 열고, 나의 하루도 바쁜 도시의 움직임으로 들어간다. 도시는 늘 제자리였는데 나만 그곳에 없었다는 서운함이 내 눈을 가려 내가 보려 하지 않았다. 눈앞의 서운함을 덜어내고 바라보니 보이듯 안 보이는, 멈추지 않는 하루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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