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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크루즈 여행(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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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바다에서): Pullmantur호는 마지막 기착지인 노르웨이를 향했다. 파도는 전날 같이 사나웠다. 거대한 배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려, 마치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탄 기분도 들었다. 한없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놓여있는 돛단배 한 척. 어디로 가도 목적지가 없는 한가로이 떠도는 조각배, 인생사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뜻으로 풀이해 본다.

 

 

 


 막간을 이용하여 파도와 더불어 역사공부하는 것도 여행도중 감칠맛이 난다. 두 인물을 선정했다. 콜럼버스 전기다. 콜럼버스는 제조공장을 하는 꽤 부유한 집안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 콜럼버스에게 장차 공장을 맡기려고 했으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좋아하고 모험심을 키웠다. 그 무렵만 해도 지구는 네모나서,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질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극구 말렸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의심을 품고 그것을 증명해보고자, 포르투갈 조왕 2세에게 간청하여 배를 얻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가서 ‘이사벨라’ 여왕의 원조로 드디어 항해 길에 올랐다.


 2달간 바다와 싸우는 긴 항해가 계속되었다. 처음엔 기세당당하게 출항하던 선원들은 오랜 항해에 지쳐 자기들끼리 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굳은 신념으로 이들을 설득하여 드디어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 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제일 먼저 상륙한 콜럼버스는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엎드려 흙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큰소리로 울었다. “하느님과 이사벨라 여왕의 이름으로 나는 이 땅을 점령한다!” 콜럼버스는 엄숙하게 선언하고, 그 땅에 산살바도르 섬(‘구세주의 섬’이란 뜻)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중앙아메리카의 동쪽바다의 흩어져 있는 여러 섬들)의 한 섬인 이곳을 ‘인디아’로 잘못 알았다. 그리고 이런 잘못을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했다. 나중에 ‘베스푸치’에 의해 이곳이 아메리카의 일부로 밝혀졌는데, 콜럼버스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쯤 지나자, 이 섬에 사는 원주민이 몰려왔다. 그들은 거무스름한 피부에다 단단한 몸집, 짜임새 있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이 알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에게 ‘인디언’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인디아의 주민‘이란 뜻이었다. 


 인디언들은 콜로부스의 일행을 보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콜럼버스 일행을 신으로 알았던 것이다. 거무틱틱한 자기들 모습만 보다 흰색의 백인들이 그들 눈엔 신같이 보였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귀족의 집 연회장에 초대받아 갔을 때 일이다. 손님 중에 한사람이 콜럼버스의 공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옆에 있는 삶은 달걀 하나를 들고 말했다. 


 “여러분, 식탁에 이 달걀을 세울 수 있습니까?” 아무도 세우지를 못했다. 콜럼버스는 달걀의 끝을 깨트려 식탁에 세우며, “남이 한 것을 보면 무엇이든지 쉽고 간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콜럼버스 말에 손님들은 아무 말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런 소박한 꿈에서 결국에는 인류의 역사의 커다란 공헌을 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콜럼버스는 여러 차례 항해를 하여 공을 세웠는데, 원조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감옥살이까지 하다 1506년 5월 20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이킹은 8~11세기에 원거주지 스칸디나비아 및 덴마크에서 유럽 각지에 이동한 게르만의 일파, 노르만인의 별칭이다. 그 명칭은 스칸디나비아 연안의 비크(vik, 후미에 사는 사람들)에서 유래하였는데, 전화(轉化)되어 상인 활동을 위해 비크를 근거지로 하는 전사적(戰士的) 상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게르만 고래(古來)의 이교를 신봉하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항해술에 능하여 사가, 에다(옛 아이슬란드어로 쓰인 고대 북유럽의 신화와 영웅전설을 쓴 책) 등의 민족 문학을 낳게 하였다. 


 8세기 무렵부터 북해, 발트해 연안에서 약탈을 겸한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9~10세기에는 강력한 군단조직을 배경으로 잉글랜드, 노르망디, 시칠리아, 나폴리, 러시아, 아이슬란드 등으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 호전적인 반면 정복국에 대하여 정치, 군사, 경제적 지배를 추진하여 토착문화와 융합하며, 북유럽의 상업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바다 탐험에 혁혁한 공을 세운 탐험가도 많았으나 이 특출한 항해사들로 인해, 역사적 뒤안길에 소리없이 사라진 항해사들도 많았다. 바이킹 역시 어느 항해사에 뒤지지 않는 바다의 사나이였는데 안타깝게도 자국 영토 확장을 하다 해적왕의 불명예를 않은 비운의 항해사가 된 것이다.


 사납던 배도 가끔은 한숨을 돌리며 미끄러지듯 바다를 질주한다. 물결은 비교적 잔잔했고, 달빛은 고요했다. 이따금 고기잡이 어선과 마주칠 때면 외로움이 교차되며 서로의 손을 흔들며 지루함을 교환했다. 일렁이는 뱃머리서 멀리 수평선 저너머 미지의 세계에서 무언지 모를 비현실적 이야기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문학의 향기가 이런 것일까. 오경(五更) 달빛 희미한 뱃머리에 서서 ‘희망의 나라로’를 웅얼거리니, 어느덧 동녘해가 희미하게 비쳐오고 있다. 잔잔한 파도가 또 다시 심통을 부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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