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2000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www.budongsancanada.com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6 전체: 56,662 )
피렌체(Firenze) (1) 르네상스의 꽃술 ,메디치
bs2000

 

 

 

이탈리아! 유럽 남부의 지중해 북단에 장화 같은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다. 현재의 국토 면적이 301,336㎢ 이니, 남북한을 합한 223,125㎢ 보다는 1.5배가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세계의 역사와 종교와 문화와 예술을 말할 때마다 빼어 놓을 수 없는 나라다. 


기원전부터 지중해 동부,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에서 시작된 “인류의 기록된 역사”, 즉 정치적인 힘과 문화가 서서히 지중해 서부로 이동하게 되는 데에는 약 200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기원 전이 기원 후로 바뀌던 즈음에는 로마라는 나라가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그 당시 그네들이 알고 있던 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나라가 되어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니까.


정치적인 힘이 약하여지자 종교의 힘이 기승을 부려,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며 1500년의 세월을 버텨오던 중, 종교가 분열하고, 정치적인 힘들이 분산되면서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옛 것을 찾아보자”는 복고주의가 “신 보다는 인간중심”을 주장하는 사조와 어우러지며 “문예부흥운동”으로 꽃을 피울 때까지도 거의 모든 일들이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교황청의 결정으로 일어 났으니 이탈리아반도의 풍수기운이 무척 강했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는 동안 철학과 문학과 건축, 그리고 음악과 그림, 조각을 포함한 예술로 더욱 유명한 곳이 되었다. 이 배후에는 이 지방을 오랜 세월 동안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시장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발전한 은행제도가 유럽 전역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피렌체의 후발 은행업자인 메디치 가문의 살베스트로가 죽으면서1388년 메디치가의 은행업은 친척인 비에리 디 캄비오 데 메디치에게 넘어 가면서 영업 영역을 로마와 베니스로 확장하였다. 


비에리 밑에서 일하던 먼 조카뻘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1360∼1429)가 서서히 로마와 피렌체에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조반니는 금융업에 자질을 보여 몇 년 후에는 파트너가 되고, 다시 로마 지점을 총괄하는 지점장이 되었다. 지점장이 된 그는 스물 다섯에 피카르다 부에리(1368-1433)와 결혼하는데,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 1,500 플로린은 그가 개인적인 투자로 돈을 버는 종자돈이 되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세력 다툼이 벌어져 아비뇽, 피사 등 세 곳에서 3명의 교황이 생기던 혼란의 시기에 피사의 교황으로 지낸 요한 23세가 로마의 교황으로 즉위하게 되자 그를 지원하였던 조반니는 1412년 1월 16일 교황청과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헌금들을 로마 돈으로 환산해서 메디치 은행에 보관해 두었다가 교황청이 필요로 할 때 즉각 대령하겠으며, 또한 세계 어느 나라로 돈을 보내건 다른 은행보다 훨씬 싼 환율로 환전해주겠다”며 체결한 교황청 전속 은행 계약은 메디치 가문의 개조와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예술가의 꿈을 가졌던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디 메디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은행가가 되어 프랜차이즈 제도를 처음 도입해 유럽 16개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며 세를 확장하여 나갔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돈이 필요할 때마다 은행을 찾게 되고, 세계의 교회에서 거두어들인 헌금이 각 지역의 지점을 통하여 로마로 오는 동안 이자와 환율의 차이에서 오는 부를 축적하며 교황청의 금고 역할을 했다. 


이때 종교적 권력이 가져오는 부의 힘을 실감한 코시모 디 메디치 는 당시 교황이 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서 교황이라는 직을 갖는 것이 생각 밖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코시모 디 메디치는1434년부터 1464년에 이르기까지 30년간 피렌체 공화국의 군주가 되어 실질적으로 다스리며, 상상을 초월한 막대한 사재를 털어 피렌체 시정을 도우며 학예를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역시 사유 재산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투척했으며, 예술가의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가였다. 가업을 이어받은 피에로의 아들이자,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탁월한 지식인들을 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에 끌어 모았다. 


이곳에서 자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1513년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사촌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더 훗날의 일이지만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카트린 데 메디치 역시 이 곳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그의 뛰어난 외교 수완과 재력은 피렌체를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에 올려 놓게 되자 시민들은 그를 '위대한 자'로 칭송하였으며, 이때가 피렌체와 메디치가 번영의 정점에 달한 때였다. 


그는 예술가들을 향하여 "이들을 하늘의 별과 같은 영혼을 가진 비범한 천재들로 대접해야지, 짐을 싣고 다니는 짐승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라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차여차 하여 로렌초의 아들인 조반니가 1513년부터 1521년까지 레오 10세로서 교황직을 수행하는 동안 레오 10세는 은행가의 아들답게 면죄부를 팔아 성 베드로성당을 짓노라 부족하여진 교회의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그는 결국 종교 개혁을 초래한 교황 레오 10세라는 오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 후에도 클라멘트 7세 이후, 레오 11세까지 3명의 교황을 배출하며 1743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은 전통적인 봉건 귀족이 아니라 상업과 금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 가문이었다. (은행업을 하였다는 점과 그의 초상화를 볼 때 유대멸망 후 유럽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일까?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된 르네상스 운동에 깊이 공감하며 수많은 건축가,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들을 후원하며 르네상스의 꽃을 “꽃의 도시”란 이름에 걸맞게 피렌체에서 피울 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인가보다.


약 350년 동안 유럽을 쥐락펴락하며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내었던 메디치 가문 역시 대를 내려가면서 아들들이 방탕과 향락에 빠지며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메디치가의 최후 상속자 안나 마리아는 메디치가의 모든 재산을 토스카나 정부에 영원히 기증했다. 


가치를 가늠하지 못할 유산을 기증하며 안나 메디치가 남긴 당부는 "그 중 한 점이라도 피렌체에서 옮기지 말 것, 모든 민중의 유익을 위해 쓰일 것"이었다. 이 유언에 따라 모든 작품들이 메디치 가문이 일을 보던 사무실을 개조하여 만든 우피치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오늘에도 귀한 문예부흥시절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상업 자본으로 출발한 정치권력이 350년 넘게 유지된 사례도 메디치가 유일하다 보니 과연 돈은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메디치 가문이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출처: 피렌체인 이야기)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