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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브르그(Strasbourg) - 유럽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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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는 ‘유럽의 수도’라고 불리는 도시가 있다. 유럽 의회(Parlement européen)와 유럽평의회(Conseil de l'Europe)가 있는 스트라스브르그(Strasbourg)를 말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 알자스 지방에 있는 도시로 요즈음엔 프랑스의 8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프랑스에서 보아도, 독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에서 보아도 양국 모두가 변방으로 치부하도록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있어, 중앙 정부의 입김이 덜 작용하였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유럽의 정세가 안정이 되기까지 수없이 소속국이 바뀌다가 14세기 이래 프랑스령이 되었지만, 그 주민 대부분은 독일계로 언어 또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시의 이름도 ‘거리’를 뜻하는 Strasse 와 ‘성’을 뜻하는 ‘bourg’의 합성어로 ‘여러 도로가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성’ 이란 뜻이다. 


그래서인가? 스트라스브르그에서 내세우는 유명인사들 중에는 오히려 독일 사람으로 소개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은 이곳이 자랑하는 명문 대학으로 이 대학에서 많은 유명인이 나왔는데, 법학으로는 괴테가 유명하다. 그는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해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병으로 잠시 쉰 후에 다시 여기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공부를 마쳐 법학사가 되었다. 


또한 과학부분에서는 1897년 당시 독일령이었던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칼 페어디난트 브라운(Karl Ferdinand Braun) 교수가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브라운관’을 발명하여 텔레비전 세상을 열게 되기도 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이 배출한 최고 위인은 슈바이처박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1899년 이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해 목사로 활동하다가 1905년 서른 살의 나이로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해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아프리카에 의료봉사를 떠난 인물이다. 


그는 1차 대전 중에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고, 1916년에 어머니가 프랑스 군인이 타고 다니던 말에 치여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에서의 의료봉사활동을 멈추지 않고 1965년까지 헌신하다 자신이 사랑하던 바하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또 있다. 비록 대학은 안 다녔지만 서구 사회에서 자랑하는 유럽최초로 금속활자로 성경책을 인쇄하여 종교개혁의 불꽃이 활활 타게 한 구텐베르그 역시 이 곳에서 활동하며 금속활자 발명가로 칭송 받고 있는 것이다. 


독일 마인츠 출생의 구텐베르그는 1434-44년경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인쇄술을 연구하던 중 1437년 전후부터 도서 제작의 수단으로 활판 인쇄를 착상하며 납 활자 주조에 착수하였고, 또 목제 인쇄기를 제작하였다. 

 

 

 


그러다가 1445년경 주조 활자에 의한 활판 인쇄에 성공하였다. 이전의 인쇄술과 달리 오늘날과 같은 주석과 납의 합금으로 활자를 주조하기 쉽게 하고 황동의 활자 거푸집과 자모를 연구하여 다량의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판을 만들고, 인쇄지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개량하여, 양면 인쇄를 할 수 있는 인쇄기를 제작하였고, 금속 활자에 적합한 유성 인쇄 잉크를 사용하였다. (이보다 20년 전에 한국에서 먼저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종교개혁자 중의 중요한 한명인 칼빈도 이곳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칼빈주의를 완성해 나갔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인 그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가가 된 것은 1533년 11월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 총장에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문 때문이었는데, 루터의 개혁사상을 지지하는 그 연설문 초고를 칼빈이 작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콥과 칼빈은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심한 박해에 직면하였단다. 


그래서 콥은 바젤로, 칼빈은 파리 서남부의 앙그렘으로 피신했는데 칼빈은 그곳에서 유명한 <기독교 강요> 저술에 착수한 후 1535년 스위스 바젤로 가서 친구 콥을 만나 <기독교 강요>를 탈고하여, 1536년 3월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라틴어본 초판을 출간한 후, 다시 제네바를 거쳐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하였다. 


그런데 경유지인 제네바에 도착하자 당시 제네바 개혁운동의 선봉이었던 윌리엄 화렐이 찾아와 제네바에 머물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는데, 이게 바로 그를 제네바 개혁가라고 부르게 된 동기였단다. 


그는 제네바를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어해서, 세속적인 모든 체제를 개혁하는 소위 <신정>에 착수하였다. 그 당시 아주 개방적이었던 제네바에서 듣도 보도 못한 <교회헌장>이라는, 특히 여성들에게는 가혹하도록 엄격한 생활 규율을 만들어 시민들의 군기를 잡기 시작하자 여성들로부터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할 수 밖에….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여성들의 치마길이를 재기도 했고, 호수가 많은 제네바에서 겨울이면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스케이팅도 단속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체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며 다리를 내뻗는 여성들의 스케이팅 모습이 남자들을 유혹에 빠지게 한다는 거다.


이에 여성들이 즉각 반격에 나서, 칼빈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그들이 키우는 모든 개의 이름을 ‘칼빈’으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기에 ‘칼빈’이라는 개 이름이 엄청 많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538년에 스트라스브르그로 와서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프랑스령이면서도 프랑스 피난민들이 모이던 이 곳에서 그들을 위한 목회사역은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이때부터 칼빈은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를 칼빈은 ‘작은 프랑스 교회’라고 부르며 교회 이름을 ‘방패교회’(Boulier Church)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 ‘쁘띠 프랑스’(작은 프랑스)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구역으로 다음 호에 소개될 예정이다. 


스트라스브르그는 프랑스 북동쪽의 중요한 경제의 축 중의 하나가 되어 매우 다양한 종류의 2차 산업과 특히 금융, 연구, 기업 컨설팅 등에 집중된 3차 산업이 이 지역의 중심산업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의학, 약학 연구와 자동차 산업 등의 경쟁력 있는 산업이 육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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