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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개선문(Arc de Triomphe)-승리의 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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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젤 궁 앞에 세운 개선문이 너무 작다고 더 크고 화려한 개선문을 지으라는 명령을 한 후에도 나폴레옹은 또 여러 전쟁에 나가며 국토를 넓히던 중,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모스코바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소련의 혹한을 못 이겨 후퇴하며 맞은 처절한 패배와, 1813년 제 6차 “대프랑스동맹”에 마저 패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1년이 채 안되어 다시 권력을 잡았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승리의 개선문은 공사가 중단된 채 흉물로 거리 한 가운데 서 있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후, 혁명 세력들 간의 불화와 정치 미숙으로 인한 사회의 불안은 다시 부르봉왕조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 1814∼1848)를 불러오게 하였고,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혼란 속에 지친 국민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시절의 추억이 살아나고 있었다. 

 

 

 

 


루이 필립 1세(Louis-Philippe I)는 군중들을 달래기 위하여 개선문 공사를 재개하여 1836년에야 겨우 완성되었다.  이렇게 다시 만들어진 개선문이 바로 우리가 흔히 “파리의 개선문”이라고 부르는 ‘아르끄 드 뜨리옹쁘’(Arc de Triomphe), 즉 승리의 개선문이다.


결국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이 치른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기 시작한 이 개선문을 살아 생전에 통과하지 못하고, 1821년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은 후에 그 곳에 묻혀 있다가 1840년에 가서야 그의 유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었으니 이런 걸 두고 인생 무상이라 하였던가?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1830년경부터 어수선한 정치상황 속에 국민들 사이에 나폴레옹의 신화가 다시 살아났기에 엄청 예우를 받은 장례 행진이 될 수가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기에 깊숙이 개입한 대 문호 빅토르 위고(1802.2.26-1885.5.22)가 188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혁명과 공화주의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그를 국부로 기려, 개선문에 빈소를 세우며 국장으로 치렀다. 그래서 죽어서 개선문을 통과한 사람은 아직까지 이 두 사람뿐이라고 한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드골 장군은 살아서 이 문을 통과 하였고, 그래서인지 개선문이 있는 광장을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La Place Charles de Gaulle Etoile)이라고 부른다.  에투알은 별이라는 뜻으로 하늘에서 보면 12개의 대로가 개선문으로부터 뻗어있는 모습이 마치 별빛처럼 보인다고…. 


그 대로 중 하나가 카루젤 개선문에서부터 시작되는 샹젤리제 거리이고, 승리의 개선문을 통과하여 곧게 이어지는 길이 샤를 드골 대로가 되며 신 개선문에 이른다. 


승리의 개선문 안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어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며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기리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종전을 선언하였기에 매년 11월 11일 무명 용사의 묘비 앞에서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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