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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산복도로(山腹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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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부산은 내가 1.4 후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피난 와서 한동안 살았던 동네가 아니라 관광가이드가 없으면 어디인지 조차 모르도록 변한 대도시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공격을 피해 가장 마지막까지 안전지대로 남아있던 곳이었기에 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은데다 얼마 안 되는 해안가 평지에는 이미 이곳 주민들이 살고 있었기에 피난민들이 갈 곳은 산기슭 밖에 없었다. 

 

 

 


 그나마 조금 늦게 합류한 피난민들은 더 높이 올라가야 했다. 이렇게 용두산과 영도의 봉래산 기슭을 메운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일터로 오르내리느라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골목길들. 전쟁 통에 어디 도시계획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었겠는가! 

 

 

 


 산자락을 따라 형성된 집단주거형태는 피난민들의 고달픈 생존의 자취였었을 텐데, 피난민들이 떠난 후에도 그네들의 자리를 다시 메운 새로운 이주민들로 계속 변형되며 유지되어 온 산자락을 ‘산복도로’그리고 영도에서는 ‘흰여울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였다. 

 

 

 


 더 넓히지는 못한 채 보수되어 사용되던 168계단은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로, 까마득한 급경사의 계단 수가 168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산항에 배가 들어오면 선착순으로 부두 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168계단을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야 했다. 2016년 5월부터 모노레일이 가동되고 있는데 이는 주민과 여행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계단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고 한다. 이 역시 역사의 상징적 유물이니까.

 

 

 


 산복도로의 정점인 망양로를 따라 시원한 가로수 길을 10분 정도 걷다 보면,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유치환 우체통’ 전망대를 만난다. 유치환은 동구에서 터를 잡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시인으로, 그의 예술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치했다.


 이곳에서 편지를 부치면 1년 뒤에 주소지로 배달 해준다. 마음 담은 편지 한 통 띄워보는 것도 잊지 못할 여행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라며 호객을 한다. 부산항 대교를 배경으로 빨간 우체통과 청마의 동상, 그의 대표시인 ‘행복’ 조형물이 나란히 서있어 영도부터 부산항 대교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포토죤이다.


 그 사이에 빡빡하게 지어진 집들 사이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들이 미로처럼 펼쳐져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골목골목을 돌아올라 보니 산은 그대로인데 집들은 다 콘크리트로 지어져서, 아랫집 지붕이 윗집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진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1.4 후퇴 후 많은 피난민들이 다닥다닥 붙여 지은 판잣집이었기에 불도 많이 났던, 그래서 ‘불산’이라고 까지 불렸었는데…. 

6.25 당시 밤에 부산항에 입항하던 유엔군들이 한국에도 이렇게 높은 고층 건물이 많은가? 하고 놀랐었다는 유머가 있었는데, 요즈음 부산은 정말로 거대한 고층건물들로 스카이라인이 바뀌었다.


 1932년 4월 20일 착공한 영도다리. 한국 최초의 도개 장치를 갖춘 다리가 되어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 속에 매일 개폐를 보러 오곤 하였었다.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수명이 다한 후, 바로 옆에 1980년에 개통 된 부산대교를 바라보며 이제는 전시 목적의 도개교가 되어 하루에 한 번씩 열렸다 닫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부산의 명물이다.


 영도산 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던 판잣집으로 많은 피난민들의 거처를 만들어 주었던 영도가 지금은 마치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하얀 마을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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