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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산에 봄이 오면
Imsoonsook

 

 미국 콜로라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어언 이십여 일이 되어간다. 다른 때 같으면 평상심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시일이지만 이번엔 꽤 오랫동안 여운이 지속되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은, 모래바람을 동반한 극심한 강풍이 캠핑장을 휩쓸던 그레이트 샌드 둔(Great Sand Dunes)에서의 새벽녘을, 비가 내리는 날은 고산증을 달래며 우중(雨中)에 걸었던 오데사 레이크(Odessa Lack) 언저리를 돌고 있다. 요즘처럼 달 밝은 밤엔 모닥불 앞에 앉아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을~~.’ 하며 흥얼거렸던 황량한 사막의 어느 야영지로 돌아간다. 


 시시때때 아직도 마음이 그곳에 가 닿는 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진 여행이라 그러하겠지만, 로키산맥이라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행해졌던 크고 작은 움직임을 하나라도 더 붙잡고 싶은 갈망 때문이 아닌가 한다. 

 

 

 


 로키에 가면, 내면 어딘가에 숨어있던 열정과 용기 분출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광활한 자연을 만나기 위한 길이니 무리함은 당연하지만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뛰어 넘는 초인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롱스 픽(Longs Peak) 산행은 내면에 잠재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여정이었다.


 롱스 픽(해발 4300m)은 미국 콜로라도 Rocky Mountain National Park에 자리한 고산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산을 등반하기 위해 베이스캠프인 롱스 픽 캠핑장에서 야영을 했다. 


 새벽 한시 반, 남편의 인기척에 힘입어 어렵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몸이 선뜻 말을 듣지 않았다. 야밤 산행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큰 과제를 앞두고 잠을 설친 탓이었다. 옆 텐트의 일행들도 일어나 출정을 서두르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미리 준비해 둔 김밥과 간식들 그리고 물 3리터씩을 배낭에 넣고, 고산증 극복을 위해 각자의 방법대로 대비를 했다. 출발에 앞서 일행은 손에 손을 맞잡고 작지만 큰 울림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분에 넘치는 정상정복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산행이 되기를….’ 하고. 우리의 염원에 응답이라도 하려는 듯 밤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음력 칠월 초순, 달빛 없는 산길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뿐 적막강산이었다. 언제라도 사나운 야생동물들이 깜깜한 숲을 헤치며 튀어나올 것 같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헤드라이트로 겨우 앞을 밝힌 일행은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겨운 발자국을 옮겨야 했다. 


 베이스캠프가 해발 3000m 쯤에 위치했기에 고산 증세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던 데다가 몇 발작 옮길 때마다 고도를 높여가고 있었기에 페이스 조절과 수분 보충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거기다가 싸늘한 밤공기에 대처하느라 껴입은 의복은 잠깐의 산행으로 땀범벅이 되어 한 겹씩 벗어내며 체온 조절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어느 정도 산행에 적응이 되자 이번엔 쏟아지는 졸음으로 곤욕을 치렀는데 며칠째 이어진 수면부족은 긴장이 완화된 틈 사이로 무섭게 파고들었다. 졸음 산행은 사고와 직결되기에 바위틈에 앉아 잠깐 졸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마치 산상 기도를 위해 열성을 바치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한 발 두 발 내딛다 보니 멀리 먼동이 터 오고, 로키의 고봉 군락들이 희끗한 눈발을 이고 우리의 발아래 펼쳐져 있음이 눈에 들어 왔다. 


 대단한 용기와 열정으로 얻게된 엄청난 풍경 앞에서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숙연한 마음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곤 계속 이어지는 돌산을 휘청거리며 하염없이 걷다보니 일행 중 선두주자가 되어있었다.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오늘의 목적지 키 홀드(Key Hold)가 정오의 햇살을 받아 현란한 빛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우리보다 앞선 등산가들이 그 주변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위대해 보였다. 대충 눈대중으론 삼십분 정도면 그곳까지 무난할 것 같은데 문제는 가파른 돌산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뒤돌아보니 다행히 K선생이 같은 선상에 있었고 남편은 사진 촬영과 체력저하로 까마득히 보였다.


 이런 때 어딘가에 숨어있던 초인적인 힘이 나를 선도한다. 천근 무게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고 주저앉으려던 의지가 활화산처럼 솟았다. 로키 산맥에서 받은 정기가 바위산에서 대방출되고 있을 즈음 K선생의 일성이 들려왔다. ‘이쯤에서 돌아서자고.’ 하지만 신들린 발길은 K선생의 회향에도 아랑곳 않고 이 바위 저 바위를 껑충거리며 오름 새에 이르렀다. 


 경사가 심한데다 길을 찾아가며 올라야하는, 우려했던 구간에 들어서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두 발 또는 네 발로 안간힘을 써도 내가 예측했던 시간은 거기서 멈춘 듯 했고 남편의 빈자리가 서서히 느껴져 왔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갈 길은 험난한데 감당 못할 외로움이 엄습해 와 사기를 저하시켰다. 바로 이때 하산하던 K선생으로 부터 남편의 전갈이 전해져 왔다.


 ‘그만 내려오라’고. 돌아보니 그이의 걱정스런 손짓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마음은 이미 갈등 속에 있었던 터라 내려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아쉬움이 두어 걸음 더 올려 세웠다.


 각자 체력이 허용하는 만큼, 뿔뿔이 흩어져 길 없는 길을 개척해 가며 원 없이 걷다가 돌아섰다. 정상을 꼭 오르고야 말겠다는 만용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걸었다는 허세도 내려놓은 채.


 하산길엔 갑작스런 광풍을 만났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돌아서서 안전지대로 들어선 게 얼마나 다행인지……. 공원측이 심야 산행을 유도한 것은 이런 돌발현상을 간파한 결과였다. 몇 번 가슴을 크게 쓸어 내렸다. 


 그리곤 ‘로키 산에 봄이 오면 나는 다시 오리라.’며 흡족한 마음으로 그이와 함께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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