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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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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교회의 특징(2)
lhyunsik

신약교회의 특징(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이전과 이후의 차이점 신약교회의 특징(2)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렸느니라.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4-16) 골로새서 2:14-16절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알면 안식교리라든지 이단교리의 종교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분별할 수 있는 말씀) 지난 주에 이어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에 대하여 계속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이전과 이후의 차이점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방금 읽은 말씀을 잘 이해하길 원합니다. <골 2:14-15>말씀을 보시면, 이 말씀은 율법에 대한 강제적 규례, 명령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내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16절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라는 것은 십자가로 율법의 강제적 규례, 명령을 율법의 권능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끝내셨으므로의 뜻이지요. 먹는 문제, 마시는 것,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해 아무도 너희를 판단치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율법의 명령들, 구약의 십계명과 율법에 쓰여진 의식 명령들, 먹는 문제, 날을 지키는 문제, 안식일 등의 문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계속해서 이런 말들을 합니다. 힌두교는 소고기를 못 먹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못 먹습니다. 힌두교권인 인도에서는 닭고기 밖에는 없습니다. 닭고기만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도에는 이슬람문화권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문화적 충돌이 많이 있지요. 유대인이나, 이슬람 교도들이나 중동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영향을 받아서 돼지고기를 못 먹습니다. 안식교도 돼지고기만 못 먹는 줄 알았는데, 모든 고기를 다 먹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의 채식가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먹는 것 가지고 된다 안된다는 율법 하에서는 그랬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은 짐승의 굽이 통굽이냐 갈라졌느냐 생선에 비늘이 있느냐 없느냐 이러한 차이로 정결한 짐승이냐 부정한 짐승이냐를 나누기도 하고, 되새김질의 문제로도 구분하여 정결한 짐승만 먹을 수 있고, 부정한 짐승은 먹을 수 없는데 그 대표적인 고기가 돼지고기입니다. 그 돼지고기를 못 먹도록 금하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예로 구약성경에 그러한 사실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지켜야 한다 하는 예가 있고, 반대로 구약에 나오는 사실은 우리와 관계가 없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 아예 구약 성경을 읽지 말자하고 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렇게 양극단의 예가 있지만, 즉 구약과 신약의 교리적인 차이는 있지만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영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적용되어져야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이라고 할 때, 디모데가 보았던 성경은 구약성경기록입니다.(딤후 3:16) 주님이 보셨던 이사야 두루마리(눅 4:16), 구스 내시가 보았던 성경(행 8:28), 베뢰아 사람들이 공부했던 성경(행 17:10-11) 모두 구약 필사본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이 둘사이의 차이(구약과 신약의 교리적 차이)를 잘 모르기 떄문에 극단적인 사람은 “교리가 맞지 않으면 안 읽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므로 구약 39권의 성경말씀을 알게 모르게 등한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것이 다 동일한 아무런 차이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 안 된다를 따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율법 중에서도 먹는 문제와 거룩한 날, 월삭이나 안식일 등 날을 지키는 문제, 이 두 가지 문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끝났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 카톨릭 사람들은 아직도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구약적 요소를 가져다가 적용하는 일이 있는데, 이러한 먹는 문제에 관해서도 그러한 일이 종종 있습니다. 자 이제, 성경 몇 구절을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0절 말씀입니다. “그가 매우 시장하여 먹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그가 무의식 상태에 빠져”(행 10:10) 이곳에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환상가운데 어떤 짐승들을 보게 됩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지금 꽤나 시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6시쯤 지붕에 올라갔죠. 무의식 상태에서 말이죠.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니 마치 네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같은데 땅으로 내려오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이 있더라. 또 한 음성이 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이는 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매. 그 음성이 다시 두번째 말하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1-15) 이 말씀 속에는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0장 이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인데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지요. 베드로가 아직도 모르는 것이 한가지 발견되는데, 여전히 먹는 음식을 “구분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율법에 부정한 음식으로 여겨지는 온갖 네발 가진 짐승, 들짐승, 기는 것, 공중의 날짐승(12절) 등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니 처음에는 베드로 자신을 시험하시는 줄 알고 바로 응답합니다. 오 주님! 저는 속되거나 부정한 음식을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저는 못 먹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번째(15절)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음식들을 이미 정결케 하셨다, 성결케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음식을 이제 다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 주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보았던 골로새서 2장의 14-16절 말씀을 보면, 율법의 규례들과 권능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월삭, 안식일 등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끝내셨다는 말씀을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음식에 간한 여러 가지 논쟁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베드로도 음식을 못 먹는 줄 알았는데, 신약을 모르므로 못 먹는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이것들을 먹어도 되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 (딤전 4:1)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딤전 4:2)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령할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3) 여기서 말씀하시는 유혹의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가 무엇인가 하면, 마귀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마약을 하거나, 눈에 보이는 죄악들이나, 못된 짓을 하게 하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2절 말씀을 보니까 결국 마귀의 교리는 말씀에서 보시는 것처럼 위선되고, 거짓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교리에 의하면 오늘날 로마 카톨릭가 너무나 흡사합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삼가다고 명한다고 하는 것이 말입니다. 마치 혼인을 금하는 것이 더욱 거룩한 것이다. 혹은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이 더 영적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사실 누구를 따르는가 하면 과거의 구약시대와는 달리, 이제는 1절 말씀에서 보시는 것처럼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4-5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없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이라.” (딤전 4:4-5)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이 음식을 성결케 해 주십시오”하며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그 음식이 거룩히 구별됨을 믿고, 아멘하며 먹는다면 어떤 음식이라 할지라도 괜챦다는 말씀이지요. 주님께서는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마 15:11) 이제 음식이 모든 문제는 완전히 지나갔음을 오늘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음식문제를 거론하는 자들은 무엇을 모르는 것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먹어야 되는 음식,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 즉 율법 아래의 문제들을 모두 끝내셨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기에 감사함을 받으면(딤전 4:1),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지요. 이제 음식의 문제는 분명해 졌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예를 들어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의 “안상홍 증인”이라는 자들이 모이는 곳인데, 그들은 유월절이랑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안식교”외에도 안식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날을 지키는 문제도 골로새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골 2:14-16) 아무도 너희를 판단치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땠습니까? 안식일을 범하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정말로)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안식을 범하면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범법한 자들을 돌로 쳐 죽입니까? 그렇지 못하지요. 법대로 하자면 반드시 쳐 죽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민수기 15장 32-36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나무 거두는 자를 발견한지라. 나무 거두는 자를 발견하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고 왔으나 그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 밝히 알지 못하므로 감금하였더니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도로 그를 칠 것이니라. 이에 온 회중이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서 그를 죽이니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민 15:32-36) 그가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닙니다. 나뭇가지를 거두어 들인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안식교에서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는 차원에서 나뭇가지 하나라도 거두어 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합니까? 안식일에? 그들 스스로가 속는 것입니다. 진째 율법대로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들도 못지키면서 사람들에게 인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말씀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날을 지키는 문제, 안식일 외에도 거룩한 날, 월삭 등 규례와 절기들, 이러한 것들을 지키는 일들에 관해서는 골로새서 2장의 말슴대로 이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끝내버린 일이기에(골 2:14) 아무도 우리를 판단치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전에 보신 골로새서 말씀에서는 두 문제 다 나왔습니다. 먹는 문제도 이제 지나갔고, 날을 지키는 문제도 지나갔다.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0장10절 말씀과 디모데전서 4장 3절 말씀에서도 보았습니다. “내가 알고 또 주 예수님을 통하여 확신하거니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서 부정한 것은 없으되 다만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하니라.” (롬 14:14) 음식에 대한 문제가 또 한번 언급됩니다. 바로 앞의 5절, 6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귀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학신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며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때문이요, 먹지 아니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드리나니” (롬 14: 5-6) 이 말씀은 이유가 오직 주님 때문이라면 한 날을 귀히 여기던 같게 여기던, 먹는 것도 마찬가지로 주님 때문에 먹고 주님 때문에 먹지 않는다면 자신의 확신대로 하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형제를 고려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형제를 좀 고려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고전 8:13) 한 날을 귀히 여기는 형제를 같게 여기는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먹는 문제도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를, 먹지 않는 자가 먹는 자를 판단치 말고 형제를 고려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도 제사음식에 관하여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양심에 걸려서 목 먹는 자가 있다면 옆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좀 도와 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형제가 연약하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주라는 말씀이지요. 로마서 14장 15절 말씀을 보시면,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것은 이제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롬 14:15)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사랑으로 행하여 그 음식 먹는 문제 때문에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는 이제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주어 졌습니다. 자유롭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다 되지만, 신약시대에는 날을 지키는 것도, 먹는 것도 자유스럽지만, 다만 우리가 그러한 모든 일을 행할 때에 첫째로 고려해햐 할 것은 “주를 위하여 하라”는 것이지요. 주를 위하여 날을 소중히 여기든, 같게 여기든, 주를 위하여 먹든지, 말든지 이러한 것이 믿음으로 확정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또 다른 한가지를 말씀드리자면 형제들의 믿음을 좀 고려해줄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두 가지 요소를 사도 바울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골로새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21절 말씀을 봅니다. 율법이 과연 무엇입니까?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1) 1) 만지지 말 것, 2) 맛 보지 말 것, 3) 손대지 말 것 이것이 율법이지요.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구약시대에는 우리 몸으로 행하는 것이 참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만졌느냐, 말았느냐? 시체에 손댔느냐, 말았느냐? 그것을 맛 보았는가 않았는가?의 문제가 사람이 더러워지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이 지나갔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이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도 그렇고, 어떤 것은 개신교에서도 그렇고, 여전히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손대는 문제, 만지는 문제, 맛보는 문제 등 이러한 율법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것을 지키면 잘하는 사람이고, 못지키면 못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지나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날을 지키는 문제와, 먹는 문제가 구약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지만 -어떤 일은 사람들이 생명을 죽여야 할 정도로-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 날을 지켜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안식일, 절기, 월삭일, 거룩한 날, 음식먹는 문제 등 이러한 모든 문제가 구약시대에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왜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규례와 법령을 지워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골 2:14-16) 우리는 분명한 차이(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지금이 신약시대 지만 이것은 해야 한다.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씀에 영향을 받아서 마치 겉으로 드러난 무엇인가를 여전히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고, 못 지키면 안 되는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제 신약시대의 차이는 마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손의 문제, 발의 문제, 눈의 문제 등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오늘은 왜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유로우니까 우리 맘대로 살라고 해결해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위선적이고 거짓되게 행하는 것, 마귀들의 교리를 따르는 것,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구약시대의 행위만 행하면 자신이 잘한 것처럼, 다른 것은 안 해도 안식일만 지키면, 다른 것은 안 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뭔가를 하면, 다 된 것처럼 여기는 자들에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중시하시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되면, 예전에 구약적 방식으로 보면 교회 다니는 것이 제일 좋고, 교회에서 열심히 무엇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었다면, 신약시대에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제는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참 가치는 손으로, 발로 무엇을 행하고 몸으로 무엇을 행한 것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중시하시냐 하면)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감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 의식법을 풀어놓으신 목적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더 섬기고 따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의 특징은 절기나 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절, 사순절 등 교회에서는 (어떤 때는 중시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중시할 때는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합니까? 주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왜 교회는 저런 것을 지킬까?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그 사람 마음이 주님 때문에만 한다면 괜챦습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모든 원리를 알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매여서 한다는 것이지요. 신약교회의 특징은 특별한 날들이나 절기들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뭔가 해야 한다면 우리가 정해서 하면 됩니다. 우리가 추진해서 ‘오늘 이날을 중요하게 하자!”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공부해가면서 신약시대의 우리가 주님 섬기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