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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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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원칙 ; 이재명 목사(갈보리 침례교회)
lhyunsik

사역의 원칙 본문 : 고후 12:14-19 by 이재명 목사(갈보리 침례교회) 사역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들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모든 민족들 중에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하나님에게 뽑힌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되어 그 귀한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새언약을 맺으심으로 신약시대가 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레위 자파 가운데서도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지성소로 들어가는 거대한 휘장이 찢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신뢰하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구호로 외치면서 구원받은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진리가 확실하게 드러난지 5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구약적인 관념 하에서 “사역”이라는 말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누가 섬겨야 합니까? 신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고 학위를 갖추고 안수를 받은 목사들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교회를 약하시키고 왜곡시킨 니골라파의 가르침입니다. 직분을 가진 집사들까지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헌신하고 열심히 있는 몇몇 형제들만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까?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형제, 자매들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인 이 신약 시대에 제사장들이며, 사역자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실제적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역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삶은 전적으로 주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사역의 실제적인 대상들은 사람들이었고 영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역의 원칙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원칙이 곧 교회를 세우고 형제들을 세우며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을 몇 구절 참조하기 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항상 성경은 이처럼 성경의 문맥 아래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사소로운 해석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실제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2,33) 이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야말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하려고 그들에게 실족거리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형제들, 즉 교회를 실족케 하지 않으려고 매사에 주의하며 그들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역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참되게 주를 위하는 법은 바로 형제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역을 하지만 정작 형제들을 판단하고 무시하며 그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책망합니다. 롬 14:8,1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히여 살고 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다 설것임이라.』 이처럼 사역의 두 대상은 구원받지 못한 잃어버린 죄인들과 구원받은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구원간증을 통해 이 두 가지 사역의 방면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구원받은 목적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이 담긴 사도행전 22장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를 택하사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저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네가 보고 들을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행 22:14,15) 이와 같이 첫째로 믿지 않는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주 에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윈함입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의 행적들이 기록된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의 첫째되는 사명이 복음전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모든 사역의 기초가 되며 으뜸이 됩니다. 이 사역을 배제한 모든 사역은 결코 실제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으며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좋은 전통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을 향할 때에 에베소 교회의의 장로들 앞에서 자신이 받은 사역이 복음을 전하는 일임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 20:24) 복음을 증언하는 이 사역은 결코 사도 바울에게만 위임된 사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당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임된 사역입니다. 이것은 목사나 선교사 복음전도자에게만 국한된 사역이 결코 아닙니다. 이 사역은 심지어 형제들에게만 위임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에 관하여 자매들은 아주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가 있어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감옥에 넘겨지는 일로 인해 그들이 얼리 흩어져 피신하면서도 그들이 남녀 모두 복음을 전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구원간증을 하고 있는 또 다른 곳인 사도행전 26장에는 한가지 목적이 더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너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곧 네가 본 이 일들과 또 앞으로 내가 네게 나타낼 일들에 대하여 너를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라』(행 26:16). 여기에는 증인이라는 말 외에 또 다른 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이 사역자라는 말과 관련하여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신이 복음의 사역자이며 또한 교회의 사역자임을 고백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으며나 바울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내가 교회의 사역자가 된 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함이니』(골 1:23,25). 특히나 사역의 대상은 주 예수님의 양떼들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내 양떼를 먹이라』고 하시면서 맡기신 사역과 동일합니다. 많은 사역자들의 마음은 많은 섬길 대상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자신이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라 너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참된 목자의 마음과 삯꾼의 마음이 나뉘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목자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채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일들보다 그들을 탈취해 양젖과 양고기를 먹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의 순전하고 아버지같은 마음을 읽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적은 것이라도 오히려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주길 원했으며,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려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왜곡시키려는 모든 악한 소문들을 잠재웠습니다. 참된 사역의 목적은 그들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얻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얻어서 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그들의 열심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이 오직 그들을 주님 안에서 온전히 세우고 또한 그들을 위해 자신을 허비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밝히 말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이는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모아두지 아니하고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하기 때문이니라. 너희를 더욱 넘치게 사랑할수록 내가 덜 사랑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위하여 가진 것을 기꺼이 쓰고 또 나 자신까지도 쓰리라.』(고후 12:14,15)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섬긴 대가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자신을 향한 오해와 비방 속에서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조차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돌리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표현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12장에서 자신이 어리석게 보이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자랑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더라도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잇습니다. 그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익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체험을 자랑해서라도 어리석은 고린도 상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바울의 간절한 태도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원칙을 분명히 새기게 합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평판을 신경쓰기 보다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오해를 무릎쓰는 태도는 참된 선한 목자인 주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참된 사역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친구라는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창녀와 세리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신 것,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모두 다 자신의 개인적인 평판이나 의로움, 명분보다도 양들의 참된 필요를 돌보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역의 원칙입니다. 큰 사역이든 작은 사역이든 눈 앞에 형제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 그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하고 순수해야 하며, 모든 사역이 원칙이 그들을 주 안에서 세우기 위함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의 주된 목적은 단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강한 부담이 있었으며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곳에서나 복음을 최우선으로 전한 것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또한 이미 구원받은 연약하고 어린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교회를 관심하였습니다. 바울의 모든 편지들은 다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로마의 교회,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이 교회들,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교회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그는 사역을 하고 그들을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그가 개인적으로 보낸 디모데서, 디도서 빌레몬서 또한 교회를 위한 그의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디모데서는 에베소 교회를 돌보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면서 그에게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돌볼지를 돕기 위해 기록한 것이며, 디도서 또한 크레테에 세워진 교회를 위해 보낸 디도가 그 교회의 장로들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쓴 것입니다. 빌레몬서도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뒤 잠시 인디옥에서 쉬다가 다시 2차 선교여행을 갈 때에 그 목적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르되 우리가 전에 주의 말씀을 선포한 각 도시로 가서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가 알아보자, 하니』(행 15:36) 형제들을 방문하는 일 이것을 하나님은 사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방문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하니라.』(행 15:41) 또 그의 3차 선교여행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합니다. 『안디옥으로 내려가 거기서 얼마를 지낸 뒤에 떠나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온 지방을 차례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강건하게 하니라』(행 18:23) 이처럼 그의 사역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교회를 향하였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거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 4:11,12) 여기서 섬기는 일은 ministry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은 성도들을 위함이며 또한 교회를 위함입니다. 심지어 복음전도자조차도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형제들을 교회를 관심하십니까? 형제들을 사랑하고 관심하여 그들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사역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관심하지 말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통해 실제로 형제들이 유익을 얻고 주 안에서 세워지고 있는가를 관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주님의 일이라 여기면서 하시는 그 일이 참으로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면서도 내내 이러한 사역의 원칙들을 인식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목적을 잊은 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고 자랑을 일삼을 때에 은사의 목적은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고전 14;26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이처럼 모든 사역과 예배순서와 은사들은 모두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찬송을 부르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야 합니다. 교리와 계시와 모든 지식과 말하는 것이 모두 다 형제를 세우는 일이라야 합니다. 이것이 사역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을 세우기 위한 사역의 원칙을 따라 모든 일을 하였으며 반대로 형제를 실족시키는 일에 관하여는 결단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고후 8:13) 바울이 그 유명한 사랑장에서 사랑을 가장 뛰어난 은사와 덕목으로 꼽은 이유도 바로 가장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인 고후 12: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거니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하되 오직 너희를 세우기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13;10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능이 바로 무너뜨리지 말고 세우라고 주신 권능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동일한 말씀이 고린도후서 10장에도 반복된 것을 볼 때에 사역의 권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그 권위를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데 전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고후 10:8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는 너희를 무너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라고 주신 것인즉 이 권위에 대하여 내가 조금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권위를 가진 자들에게만 교회를 섬기는 사역이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주님 앞에서 사역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두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허락하신 목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솜씨를 뽐내거나 자신의 지식이나 재능, 열심을 자랑하기 위해 사역에 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뛰어난 교회의 일꾼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다른 형제들과 협력하여 다른 형제들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마음으로부터 믿고 참되게 시인하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왕가에 속한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묻겠습니다. 누가 교회의 일꾼이며, 사역자며 교회의 종입니까? 목사만입니까? 목사와 집사입니까? 형제들만 해당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시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소개할 때에 그가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자매였고 그녀의 이름은 뵈베였습니다. 그녀를 소개할 때 바울은 “교회이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바울이 사역한 동역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그들은 부부이지만 동일하게 이름이 언급되며 오히려 자매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됩니다. 바울은 이 외에도 여러 자매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녀들의 이름은 “우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와 “주 안에서 수고하는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이며 또한 “주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랑하는 버시”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서는 뵈베 자매를 통해 로마 교회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당시에도 실제로 예수님을 섬겼던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있었고, 십자가 밑에까지 따랐던 대부분도 여인들이었으며, 예수님을 위해 몰약을 준비했던 여인은 심지어 부활이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역을 지닐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은 철저히 권위를 여자에게 허락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만 한다면 자매들은 교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섬김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교회 안에서 목사나 집사의 직분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혼란케하는 자들의 아버지인 마귀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고 평강과 질서를 위해 권위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몇의 형제들에게 권위를 위임하시고 직분을 주신것과는 별개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서 분배하신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만 이러한 사역을 가지는데 중요한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역은 전적으로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거니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하되 오직 너희를 세우기 위하여 하느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 섬겨지는 모든 크고 작은 사역들이 모두 다 이러한 원칙 안에서 감당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사역자 훈련학교] 생명의 연결 에베소서 4장 11,12,16절 : 11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16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의 공급하는 것을 받아 서로 꼭 맞게 결합되고 들어차서 각 부분의 분량대로 효력 있게 일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주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사역자들을 주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은혜를 공급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공급은 각 마디가 서로 꼭 맞게 결합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21절 :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낯선 자도 아니요, 외국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이요,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며 20 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이돌이 되시나니 21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꼭 맞게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거룩한 전으로 자라가고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꼭 맞게 뼈대를 이루어 자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으뜸 모퉁이돌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건축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4,5절 : 4 참으로 사람에게는 거부당하였으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돌 곧 보배로운 산 돌이신 주께 나아와 5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우리는 산 돌들이며 영적인 집으로 건축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역자가 하는 일은 생명의 일입니다. 생명의 일을 하려면 먼저 생명의 인식과 연결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일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돌 혼자서, 지체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온전한 건물로 건축되어야 하며 각 마디가 서로 꼭 맞게 결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교회 안의 생명의 연결을 주의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의하지 않으면 기능과 일을 최고로 놓게 됩니다. 형제들을 바라볼 때 어떤 형제는 필요가 있고 어떤 형제는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기능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가장 주의한다면 어떠한 기능과 일의 능력에 상관없이 모든 형제들이 귀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독불장군처럼 모든 일을 혼자 차지해서 해치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형제들과 인식을 같이 하고 생각을 같이하여 함께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사역자입니다. 때로는 더 늦는 것 같더라도, 더딘 것 같더라도 인내하며 형제들을 세우고 함께 길을 가는 것이 사역자의 본분입니다. 형제들과의 생명의 연결은 다만 친하고 좋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와 비방을 뚫고 가야하는데, 마귀의 이간하는 역사를 통과해서 가야하는데 형제들 사이에서 참된 생명의 연결을 가지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참된 생명의 연결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를 신뢰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가저야 합니다. 허물없이 위선없이 가식없이 계산없이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형제애로 완전히 결합되어야 합니다. 형제들이 온전히 하나될 때, 필라델피아가 이루어질 때, 생명의 연결이 단단해 질 때 생명의 사역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역자 훈련학교]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1절 :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성경에는 믿음이란 단어를 계속해서 언급하지만 "믿음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된 곳은 오직 이 곳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기보다 믿음의 작용과 기능에 대해서 더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성도는 "믿음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그 시간에 한 번 더 믿음을 행사하겠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믿음은 연구와 지적인 습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 :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15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놋 뱀이 들려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것을 예표합니다. 놋 뱀을 바라보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예표합니다. 믿음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며 주시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5절 :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그분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믿음의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편 123편 1,2절 : 1 하늘들에 거하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로 향하나이다. 2 보소서,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 눈이 주 우리 하나님을 바라되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까지 기다리나이다. 믿음은 눈을 들어 주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기까지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시작되며 자라나며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질 때 힘차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는 곧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믿음을 가진 상태는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의 어떠함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나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하는 모든 나에 관한 상태를 고려치 않게 되고 오직 주님만 바라며 전진하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조건인 믿음을 행사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헌신이 필요한데 곧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겠다."라는 것입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현재까지 어떠했을지라도 지금 주님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현재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거에 어떠했던 나를 보지 아니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부단한 훈련으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가 틈만 생기면 자동적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자기중심의 눈을 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눈을 가지는 시작이 필요합니다. 나를 바라보지 않는 삶의 시작!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의 지속!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상태를 훈련하기 원합니다. =============================================================== { 사역자 학교의 의의 }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사실 성경 디모데전,후서는 사역자들을 향한 지침서라 말할 수 있는 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 말기에 자신의 모든 계시와 경험들을 집약해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젊은 사역자에게 충고하며 권면하는 말씀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처음부터 누가 "사역자"가 되느냐에 관한 논쟁으로 수많은 교파가 나뉘었습니다. 사실 "사역자"는 한면에서는 종과 같이 섬기는 자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기능 중 어떤 한가지 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여러가지 교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모든 국가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다스리며 다스리는 자의 권한을 얼마나 제한할 것인가에 따라 왕정국가, 대통령체제, 총리체제, 공산당 체제 등 다양한 국가체제가 생겨난 것과 어떤 면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목사)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하면 자연히 섬기는 종으로서의 본분이 약화되고, 섬기는 종으로서의 본분을 강화하면 교회의 질서가 확립이 되지 않는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겨납니다. 그런 면에서 섬기는 자로서의 면을 잊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이해하는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사역자는 형제들의 짐을 지고, 교회의 짐을 지다보면 어쩃든 강건해질 필요를 느낍니다. 사역자는 자칫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 안에서 강건해지기 쉽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로 인해 강건해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다양한 은사들로 인해 강건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은혜" 안에서 강건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역자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한 느낌 아래 있는 사역자는 필연적으로 모든 일에 불평이 있고 대가(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역자 자신이나 섬김을 받는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역자로 온전히 드릴만큼의 충분한 은혜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까? 사역자는 사실 넘치는 은혜로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역자는 "신실한"사람이라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재능있는" 사람에게 맡기라거나, "지혜로운" 사람에게 맡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은사가 많고 지혜가 많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만 그것이 사역자의 기본 자질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교 교육은 "신실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똑똑한" 사람을 뽑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역자 학교를 통해서 "지식"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심판날에 수완있고 능력있는 종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착하고 신실한" 종을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르고 악한" 종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함은 일단 "부지런함"을 포함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담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역자의 태도입니다. 저는 오늘 사역자 학교를 하시는 여러분이 작게나마 교회 안에서 뭔가를 섬길 때 "신실함"을 배우기를 원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기쁨으로 부지런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은혜 안에서의 강건함"과 "신실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더 큰 은혜로 이끄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