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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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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진리
lhyunsik

절대적인 진리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노니, 모든 말은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될 것이라. 내가 두 번째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앞서도 말했고, 또 미리 말해 두지만, 이제 떠나 있는 동안 전에 죄지은 사람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쓰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너희가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찾고 있으니, 그분은 너희에 대하여 약하지 아니하시고, 너희 안에서 강하시도다. 그분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느니라. 우리 역시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버림받은 자들이 아닌 것을 너희가 아는 것이라. 이제 나는 너희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노니, 이는 우리가 인정받은 자로 나타나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버림받은 자같이 될지라도 너희로 정직한 것을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느니라"(고후 13:1-8).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중 첫 번째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로 그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언젠가 조그만 소책자에 실린 구원 간증에 대한 내용 중 어떤 한 사람이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담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성경을 읽다가 그 사람은 "내가 어른들 앞에서도 맞담배질을 못하는데,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담배를 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문득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누가 그에게 율법적으로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담배를 끊은 실제적인 간증을 실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의 글에서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대했구나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성경과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이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사랑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오 예수 사랑을 말하고 떠들지만 실제로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인식 없이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만을 말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하나님인가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속해있는 단체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침례교도이든, 장로교도이든, 감리교도이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의 행하심과 성품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칼빈주의를 믿는다고 해서 주권적인 하나님만 되시는 것도 아니며, 여러분이 알미니안주의를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취소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여러분이 순복음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이 물질적인 풍요와 육체의 치료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두드러지는 예를 언급한 것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불변하시며, 영원무궁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정확한 자세가 없다면 그것은 실제적인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어렵고 복잡한 이유는 그 자신이 실제적인 하나님을 오직 절대적인 분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종교적인 관념 안에서 경험된 한 부분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게 그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대답을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대답은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단한다면 우리는 절반만 말한 셈입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내게 경험되지 않았으나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 가운데 자신을 표현하고 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섬겨야 합니다. 진리는 진리이기에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자체에 권위가 있으며. 그 자체가 옳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지지하든 말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에 조금도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깨닫고 있기에 그 진리가 중요하다는 말은 한 면에서는 맞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틀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얼마나 많은 종파에서 그 교리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며,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옳으며, 그것에 반대되는 그 어떤 교파나 그 어떤 위대한 신학자, 신앙의 영웅이라 하더라도 틀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절대성입니다. 그것은 누가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변치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진리를 소개하기 위해 그것은 마틴 루터가 주장했다느니, 웨슬리가 외쳤던 바라느니 하는 말을 보다 웅변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그 위대한 사람들이 주장했기 때문에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리의 궁극적인 능력은 그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을 기록하신 하나님에 의해 지지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교리를 지지하시는가가 바로 그 교리가 성경적인 교리냐 하는 핵심적인 쟁점사항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지지하는 가는 아무런 영향을 우리에게 끼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사람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여기에 있어서 판결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에 대해 절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그가 그 문제를 사람들의 견해에 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옳다함을 받은 문제를 왜 다시 인간들 앞에 들고 가야 한단 말인가?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을 하나님이 이미 정하셨는데, 그것을 변경시킬 자가 또 누구입니까? 그것이 신학자이든, 훌륭한 믿음의 선배이든 그것은 틀린 자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서 어떤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뿐 아니라 내 바로 옆에 있는 형제들의 의견도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진리는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봐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는 진리의 절대성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사역자란 사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로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그 주된 임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진리를 남대문 시장에서 헐값에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취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규정하시고 명령하신 진리들을 있는 그대로 전파해야 합니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그대로 제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불평이 나온다고 진리를 실천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게 제시했다면 그것은 옳게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을 임의대로 낮추는 것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려는 자들은 결코 자신의 의와 행위들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이 이루신 일들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점에 있어 분명치 못한 채 자신의 행위를 주장할 때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의 행위임을 알려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 땅에서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는 영원한 지옥에서 불과 유황 가운데서 영원히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진리의 소중함은 단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영적인 진리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포함해서) 절대적인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사실 절대적인 진리로 인해 자신의 부족함과 할 수 없음이 드러날 때 그것을 마냥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예전에 많이 말한 적이 있는데, 주님을 따르는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 그것을 임의대로 넓혀서 많은 사람들이 다 그것을 믿고 즐거워할 수 있게 만들었다면 그는 진리의 일꾼이 아니라 멸망의 일꾼이 틀림없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만이 우리에게 영생과 유업을 약속하며, 그것을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고 난 뒤에는 그 길에서 얻을 것은 사망과 멸망밖에 없습니다. 롯이 소돔에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못됩니다. 의인인 롯이 있기 때문에 소돔이 좋은 성읍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은 소돔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중요하지 거기에 롯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심지어 천사가 소돔에 들어갔다고 해서 소돔의 죄악됨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진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또한 소돔에서 두 번째로(즉 상대적으로) 의인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롯 다음으로 의인입니다. 어쩌면 그곳에 있는 사람의 기준으로는 그가 롯보다 더 의인이라 불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서는 단지 한 명만이 의인이었고 그 상대적인 의인인 그 사람은 유황불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의인입니다. 진리에 있어서 다수결의 원칙은 넌센스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견해나 다수가 그것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진리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우리의 상태와 조화시키기 위해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낮출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요구이며, 누가 그것을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고칠 순 없습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친한 사람들이 진리의 엄격함을 인해 고통받을 때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진리를 쉽게 낮추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종이 해서는 안될 짓입니다. 진리는 사람들의 기준을 맞춰주는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타협시키는 것이며,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상당히 완화시켜서 말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훼손시킴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진리에 대한 자세는 절대적입니다.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느니라.} 바울에게 진리는 하나님 그분 자신과 동일합니다. 사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자세입니다. 진리는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 위로 달려야만 하듯이 우리도 그러합니다. 레일을 벗어난 기차가 사고를 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를 거스르는 것은 레일을 이탈한 기차와도 같은 위험한 지경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라, 하지말라는 말을 그렇게 유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가 하라, 하지말라고 하는 말을 가장 중요시 여겼습니다. 바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이 옳은 것이라 말해도 바울은 그것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멈추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담대하게 육신적인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자신 안에 내주하신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문제가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이목을 크게 상관치 않았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무례하거나 안하무인격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그만큼 진리가 절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진리는 구름기둥과 불기둥과도 같았습니다. 진리가 go면 바울도 갔으며, 진리가 stop하면 바울도 즉시 멈추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었고 또 진리의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바울처럼 절대적이지 못한 많은 이유는 사실 다른 사람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장 골치덩어리는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이중적인 기준입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못하며, 사람이나 일의 영향을 받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행, 불행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자세가 없으면, 사역이나 그밖에 모든 일에서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진리를 희생시키는 것을 쉽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사항은 절대적인 진리를 결코 희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희생시킬 수 있으나, 진리는 절대로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의 절대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절대적이므로 나 자신의 감정, 환경, 체험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진리의 길을 가기 때문에 내가 옳다함을 받는 것이지, 내가 가기 때문에 내 길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설령 자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모든 영적인 면에서 뛰어나다 할지라도 어떤 길이 옳고 틀린 것은 내가 행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행하지 않더라도 옳은 길이 있고, 내가 행하더라도 틀린 길이 있다. 그러므로 옳은 형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누군가가 옳은 형제가 되고 싶다면 오직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기독교계에 또는 교회사에서 이름을 낸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결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리의 길로 걸어갔기 때문에 우리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은 그 사람만을 보면서 그가 옳기에 그가 가는 길 역시 옳다고 거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 그들은 진리를 보는가, 사람을 보는가? 너무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않고 진리의 절대성을 놓친 채, 사람들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것을 본다. 만일 이 길이 옳지 않은 길이면 그가 간다고 해도 길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길의 옳고 틀림은 그와 상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형제가 옳은 길을 갔다면 그가 훗날 실족한다 할지라도 그가 택한 길이 옳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범죄하고 넘어져 조롱을 당한다 할지라도 진리는 여전히 위대하며, 진리는 옳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짓고 넘어져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믿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어떤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오 엑스 게임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오에 달려가고 단지 몇 명만이 엑스에 달려갈 때 엑스가 답인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에 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틀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에 몇 명이 갔는냐가 아니라 오와 엑스 중 무엇이 정답인가에 잇듯이 그리스도인의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 자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생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무슨 능력으로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도 인생의 문제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이 한낱 연약한 인생이면서 누구를 돕는다는 밀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능력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절대적인 진리의 능력만이 인생의 문제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진리의 기준이 지켜질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자세는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아니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어떤 특별한 사역자에게만 필요한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응당 가져야 할 자세가 한 가지 있다면 결코 진리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그러한 절대적인 마음입니다. 이 시대는 라오디케아 시대이며, 그만큼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진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끄러운 사람의 목소리가 아무리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우레와 같은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해 절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 주위의 인간관계들, 개인적인 감정과 문제들이 모두 진리 앞에 멈춰야 됩니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이 더 유리한가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내게 불리할 지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나에게 잘대해 주면 옳고 나에게 섭섭하게 대하면 틀리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가지고 그 교회가 옳고 틀리고를 말하면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행한 것이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인의 감정, 우리가 상처를 받고 받지 않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길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옳다 하시면 옳은 것이고, 틀리다고 말씀하시면 틀린 것입니다. 어떤 길이 옳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다른 모든 사람이 가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뛰어난 형제가 가기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 길이 옳은 길이면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형제가 가지 않더라도 나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람에게 더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진리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의 감정과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판단할 때 진리로 판단하지 않고 나 자신을 내세워 판단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온통 왜곡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심판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입니다. 사람이 여러분에게 잘 대해주면 이렇게 하고, 잘 대해주지 않으면 저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그 일을 진리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를 보아야지, 나 개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만일 진리가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가 그와 동고동락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 매일 싸우고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라 할지라도 교제를 지속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적인 관계로 교제한다면 우리는 실상 진리를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기질과 느낌과 선호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의 기질과 느낌에 따라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안락과 편리를 위해 진리를 이용하고 희생시킨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자가 되어야지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파하는 자기 되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느낌이 진리를 다루는 사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위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훌륭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이 위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나의 인격적인 자세나 무례한 행동은 주의해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사람을 고려하는 것은 주로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진리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다른 형제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진리보다 더 고려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김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자매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이것이 바뀐다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리는 것이 되며, 우리 자신의 입장 때문에 진리를 왜곡시키는 길로 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절대성을 본다면 오직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일은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의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님이 높이신 만큼 높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낮추어서는 안되며, 그 기준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렇게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을 의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임의로 인간들에 맞게 낮춘 것이 바로 인간의 종교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진리를 높인다는 말과 종교적인 기준을 고수하며 율법적이 된다는 것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자유를 가져오지만 종교와 사람의 율법은 속박과 짐을 가져옵니다. 진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뵙지만, 종교적인 기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위선만 늘게 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많은 종교적인 무거운 짐들을 사람들 위에 얹어놓고는 자신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에게는 관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합니다. 반대로 우리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심으로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자세를 조금 잘못 배운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 하나를 붙잡으려다가 큰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세부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천연적인 율법적인 경향을 가지고 우리가 진리에 절대적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율법은 판단하게 만들지만 진리는 사람들을 세워주며, 율법은 교만하여 군림하게 하지만, 진리는 겸손히 그들을 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자세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키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을 고려하고 사람의 방법과 감정들을 고려하지 않게 되면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진리를 따르는 모든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김 익현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