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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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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랑
lhyunsik

"형제 사랑"(요일 2:7-11) 2004/12/18 http://my.dreamwiz.com/comekjv/ 본문: 요일 2:7-11 제목: 형제 사랑 2004.03.14 오전설교 저는 지난주 오전에 이어 오늘 오후에도 동일한 주제와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한 설교입니다. 한 젊은 목사가 새로 교회에 부임을 했습니다. 성도들은 젊은 목사에게 많은 기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첫 주 설교는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였습니다. 모두들 너무 좋은 설교였고, 은혜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목사는 그 다음주 설교도 똑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성도들은 젊은 목사가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설교 준비를 못했나보다며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똑같은 설교를 다시 했던 것입니다. 차츰 성도들은 불만을 나타냈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다 못한 집사가 젊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왜 매주 ‘서로 사랑하라’는 같은 설교만 반복하십니까? 저희들은 다른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젊은 목사는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까지는 그 설교를 계속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 다른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언젠가 말했던 예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 소망, 믿음, 사랑, 교리, 성장, 교제, 세움, 나눔, 말씀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중요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다른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두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입니다. 특히 오늘을 사는 우리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식에 관한 부분도 중요하지만, 사랑에 대한 부분도 더 강조되어야 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요한일서는 몇 번이나 더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수많은 말씀을 통해, 저의 나태함과 무지함을 주님 앞에 자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부터 깊이 묵상했던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만 여러분이 주목하면 됩니다. 더 이상 어렵고 난해하지도 않습니다. 7절 계명이란 단어는 2: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요한일서에서). 과연 요한일서에서 말씀하시는 계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분 안에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절). 그런데 ‘나는 그분을 아노라’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4절)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의미로써 계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사도 요한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 즉 주님의 말씀을 계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계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이 5 [...내가 네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의미로 계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또 하나는 간단히 말해서 형제 사랑이 곧 계명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도 동의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형제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7절 본문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의미로써의 계명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오히려 옛 계명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 그럼에도 사도 요한은 8절에서 새 계명을 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번째 의미의 계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목하십시오. 이 새 계명은 참된 것입니다. 누구에게 참된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분과 너희에게” 참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참된 것이 바로 이 계명입니다. 참되다는 말씀은 “TRUE”입니다. 진리입니다. 형제 사랑은 “진리”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요 14:6) 진리란, 참된 것이며, 마귀가 극도로 저주하며, 발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꼴을 지켜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의심과 비방과 시기와 질투와 오해를 유발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너무나도 자주 당하는 것입니다). 8절 그리스도인 안에는 어두움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참 빛이신 주님께서 빛나고 있습니다. 요일 1:5 [우리가 그에 관하여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말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라.]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란 사실은 신약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요 1:4-9, 3:19-21, 요 8:12 [그때에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ꡒ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결코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ꡓ고 하시더라.]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나고 계십니다. 주님이 빛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요일 1:7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이 서로 교제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간에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제란 이렇게 간단합니다. 모든 성도가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제가 잘 된다 안된다 말할 것이 없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교제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빛 가운데 행함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10절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성도의 교제를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강력하게 주관하는 사람들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간에 교제하고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바라고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인이 서로 간에 교제를 나누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만드는 것입니다.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얼마든지, 자신이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나누고, 정상적인 성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그렇게 보이기 위해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진리가 그 사람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여기서 말씀하는 ‘어두움’이란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9절을 주목하십시오. “그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요일 1:6절의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하면서....와 같은 사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두움 가운데 있느니라.” 성경은 정확히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어두움인지 아셔야 합니다. 어두움이란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두움이란 심판이나, 죄나, 마귀적인 일들이나, 육신적인 일들과 연관된 단어이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단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말로만 하나님과의 교제, 말로만 빛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이란 다름 아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10절은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9절과는 정 반대의 말씀입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실족할 계기가 없으나” 하나님과 교제가 있고,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이 실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실족합니까? 각 지역교회에 왜 그렇게 많은 영적 전쟁으로 사랑하던, 그리고 신실했던 지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진짜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형제 사랑을 하지 않았던 것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에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11절 하). 그래서 “누구 때문에”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면,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족할 계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두움의 일을 했기 때문에 실족하는 것이며, “누구 때문”이라는 핑계만 대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실족할 것을 염려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 실족할 것을 걱정해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제 사랑에 관해 할 말이 많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나 성도들이, 그 어려움 가운데서, 로마의 박해와 죽음의 위험과 비진리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끈질긴 생명력을 우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물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그 주된 이유였지만), 형제 사랑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형제 사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계 3:7-10 필라델피아란 “형제의 사랑”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형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합니다. 한국식 기독교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도 따돌림받기 일쑤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 땅에서 나타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고 행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지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누구를 사랑하시려고 합니까? 11절을 다시 주목하십시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분명히 성경은 단정합니다. “있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가운데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은, 마귀의 일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머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비방과 거짓말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토론토의 유 목사도, 처음에는 크리스챤 중고등학교에 대해서 비판하더니, 이젠 그 말은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이송오 목사에 대한 비방과 거짓말로 사람들을 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입니다. 왜 모르는지 아십니까? “이는 그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그 어두움’이 무엇입니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이, 눈을 멀게 해서, 자신이 어두움 가운데 있고, 어두움을 행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만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8 [너희가 한때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라.]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고, 빛 가운데서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지금 속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두움이며,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지금 빛의 자녀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결과로 구속받은 빛의 자녀들 맞습니까? 우리는 모두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비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숨 쉴 수조차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어두움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어두움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두움 가운데 있고, 행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두움이 그 사람을 속이고 결국 실족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있어야 하며,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이 명확히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천천히 읽고 마치겠습니다. 2. 형제 사랑 ( 김 익현형제) 우리가 새로운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올바른 복음을 기쁘게 전하는 것을 본다면 그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그에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가 올바른 진리를 전파한다면 그와 교제를 나누고 싶고, 함께 우리 주님에 대해, 주님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사랑을 오해하여서 왜 교회에서 형제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 하십니다. 형제들아 다른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의 다른 형제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할 때 우리는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원하고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형제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우리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놀라운 증거는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을 사랑하듯이 성경은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또한 이처럼 크게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갈보리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형제들을 사랑하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거슬러 짓는 개인의 모든 죄악의 자리에는 시기와 교만이 있습니다. 시기심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로부터 신실한 사역자들까지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커다란 죄악입니다. 이것은 다른 형제들을 방해할 뿐 아니라 자신을 죽이게 되는 무서운 독약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병은 성장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걸리는 질병입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까지 소화시킬 수 없었음이요, 아직도 그러하니라.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 노래방에 가서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는 그리스도인들만 육신적이 아니고 바로 교회안에 있으면서 형제들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가득 차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과 시기로 가득 차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들이 육신적인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럴 때면 즉시 시기와 질투가 나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뭐라고 특별한 체하는 거야? 저만 성경을 알고 있나? 좀 너무 광신적이야’ 우리가 겪는 많은 어려움이 다른 그리스도인들, 즉 우리의 형제자매들로부터 옵니다. 시기하는 자들이나 교만한 자들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형제들을 향해 시기심을 품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헤매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빛 가운데 거합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스스로 눈이 멀게 되며 더 이상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형제들과 비교하여 그들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진심으로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여 그가 주님안에 올바르게 행하여 주님 앞에 큰 칭찬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시기하는 것만큼, 미워하는 것만큼 나쁜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두 가지 죄는 바로 시기와 무관심의 영입니다. 형제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며, 잃어버린 죄인들을 향한 마음도 더욱 순수하게 불타오르기를 원합니다. 3. "형제 사랑"(살전 4:9-12) 2004/12/18 2004.03.07 오전설교 요한일서는 29구절에서, 51개의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도 요한의 서신서 다운 면모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39구절에서, 57개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의 ‘사랑’은, 조금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더 강조되어 있는 반면, 요한일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간의 사랑을 더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무려 20번이나, 형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나도 ‘사랑’에 대해서 많이 듣고, 많이 알고, 또한 많이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 우리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랑’이, 가장 많이 오해되거나, 왜곡되고,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3:18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리로 하자.] 저는 여러분이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서로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가깝고, 나와 친하고, 나의 친족이고,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믿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용납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물론 저는 진리를 타협하거나, 비진리를 수용하고 용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을 사랑하셨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용서하셨습니다. 또한 도저히 아들들로 받아들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4:9,1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고, 인간의 사랑을 논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희생이 없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변질 될 수 있는 육신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 사랑을 받은 자들로써, 서로 그 사랑을 나누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먼저 받은 것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의정부성경침례교회도 서로에 대한 사랑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외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외부 사람이란,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충분히 그렇게 보여졌고, 좋은 소문이 퍼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합당하니, 이는 너희 믿음이 그처럼 크게 자라고, 또 너희 모두가 각기 서로 사랑하는 것이 풍성함이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케도니아 지방까지 형제 사랑을 행하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데살로니가는 한 도시이고, 마케도니아는 데살로니가를 포함하고 있던 지역, 지방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면을 칭찬하고, 더욱더 많이 하기를 권했던 것입니다(10절). 하나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가, 다른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듣는다면, 바로 이러한 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칭찬을 받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고, 마을 노인들을 위해 경로잔치도 열어주고, 문화센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을 마련해 주고,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전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런 일들로 칭찬을 들을 때,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과연 주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일들을 칭찬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 3:14-19 절 찾아 읽을 것. 페리 록우드는 “진리를 희생시켜 가며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교회의 성장이 더 중요하고, 진리가 전파되는 것보다, 자신들의 교회가 욕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보다, 교회가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자선, 봉사, 희생 등등)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예수님이 아닌 교회에 관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원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고 인정해 주길 바랍니다. 교회가 이러한 흐름에 타협하고, 거짓을 용인할 때, 세상 지향적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반면, 성경대로 믿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 듣기가 무척이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바라는대로 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일부러, 의도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자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이웃과 다투거나,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제시하면, 그 때부터 세상은, 성경대로 믿는 교회를 이상하게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그러한 면에서 성경대로 믿는 교회는, 세상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칭찬을 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다른 지역교회)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혼들을 구령하고, 비진리와 타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를 제시하고, 성도들 간에 형제 사랑을 행함으로써 칭찬을 듣고, 격려를 받는다면, 얼마나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격해 하시겠습니까? 과연 우리 의정부성경침례교회는, 주 하나님과 다른 지역교회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알고 칭찬하듯이, 의정부성경침례교회도 하나님의 칭찬의 대상인지, 아닌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으니....”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서신서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32구절, 36단어). 심지어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참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진 서신서에는, 사도 바울의 평가에 비해 “사랑”이란 단어가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13구절, 15단어). 그 이유는 분명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에서, ‘사랑’이란 말을 많이 사용된 것이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형제 사랑이 너무나도 잘 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사랑’을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에 관해서 따로 쓸 필요가 없을 만큼, 형제 사랑에 있어서는 거의 완전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실로 이것을 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물론 본문의 사랑은 구제를 의미합니다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교회에게도 사랑을 실천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일 3:17 [누가 세상의 재물을 가졌는데, 자기 형제의 궁핍한 것을 알면서도 그를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겠느냐?]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사랑을 어떻게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너희가 하나님께 몸소 배운” 사랑이었던 것입니다(9절). 하나님께 몸소 배웠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웠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몸소 사랑을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이 말은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몸소 사랑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배움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다는 의미는, 생명이며, 부활이며, 사랑이 모두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배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지체들과, 지금의 우리와 다른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배운 대로 서로 사랑한 것이고, 우리의 모습은 배운 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차이일 것입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형제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더 할말이 없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몇 가지 권고를 합니다. 1. 더욱더 많이 하고 사랑은 단 일회성 행사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총선 때나 시장에 돌아다니고, 서민들의 생활을 챙기지만, 성도의 실천은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을 함께 지낼 “또 다른 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달리는 말에 더욱 힘차게 채찍질을 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형제 사랑에 관한 한, 더욱더 많이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계명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느니라.”(요일 4:21). 형제 사랑에 부족함이 있었다면, 사랑하십시오.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면, 더욱더 행하십시오. 왜냐하면 형제 사랑은 우리가 영원히 행해야 할 계명이며, 또한 주님께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너희는 조용히 하고 여기서 조용히 하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형제 사랑에 대해서, 자신들이 여기 저기 떠들고 다니는 것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 사랑을 너무 잘하고 있고, 그 형제 사랑을 더욱더 넘치게 하지만, 그것을 조용히 행해야지, 그 사실을 자랑꺼리 삼아, 여기 저기 떠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준수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 특별히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하라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목적과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용히 하라는 것은 복종과 순종과 겸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은 여자들에 대해 조용할 것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 14:34 [너희의 여자들을 교회 안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 그들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였으니 율법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다만 복종할지니라] 딤전 2:11 [여자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게 하라] 오늘 본문의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성경이 교회가 사랑을 행하는 데 있어서, 조용하게 하라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세상에 대한 봉사 활동을 자신들의 교회 선전에 악용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 사랑이 오히려 교만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조용히 행하십시오. 마 6:1-4 찾아 읽을 것. 3. 자신의 일을 행하며 너희 손수 일하도록 힘쓰라.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이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빌 2:21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느니라.] 구분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자신의 일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지적하고 손가락질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교회 안에서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살후 3:11,12 [우리가 들으니,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여 전혀 일하지 아니하고, 참견 잘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자들에게 명하고 권하노니,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해야할 당연하고 마땅한 일을 해야 합니다. 요일 3:16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노니, 이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음이라. 따라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교회에서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행하셨듯이, 먼저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 상대방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행한 것 자체만으로, 이미 사랑을 베푼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투정부리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투정부리셨습니까?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사랑을 행하려면, 주님의 인내와 자비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송오 목사님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 3년 전, 4년 전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다. 과연 그 사람이 사랑이 있는 사람인가? 육신이 살아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 육신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옛날 이야기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옛날 잘못이나, 허물이 보입니까? 진짜 사랑하면 그 모든 것들을 감싸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면, 잘못이나 허물‘만’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다” 저는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오늘날 교회들에 분명히 필요한 말인 듯 합니다. 프레드릭 스판하임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는, 가장 많이 아는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이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보이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요일 4:20) 형제 사랑에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칭찬을 듣는 의정부성경침례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