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51 전체: 178,925 )
형제사랑의 원칙
lhyunsik

형제사랑의 원칙 어제 저는 우리가 베뢰아 교회같이 고귀하여 어떤 사람의 말이라도(심지어 사도 바울일지라도) 성경을 직접 펴서 그런가하여 살펴보고 상고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온 마음을 다하여 영접하여 그 말씀대로 살기를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그 말씀이 살아있는 씨앗이기에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에서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연합한다면 그분이 직접 공급하시는 자양분을 통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며, 오늘도 말씀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 저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말하고 싶습니다. 이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가장 큰 칭찬을 받은 교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빌라델비아라는 이름 자체에 그 교회가 칭찬을 받은 근원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필레오(아가페와는 또 다른 사랑)와 델피아(형제)가 결합한 합성어로 형제사랑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능력이 충분해야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그러한 생각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아 내가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해서야...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능력이 있다면 모든 마귀의 세력을 이기고 남을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적은 능력을 가진 형제들이 모여있는 교회가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빌라델비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처럼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켜냈습니다. 무엇이 그 원인인지 성경은 직접 말을 하지 않지만 그 교회의 이름이 우리에게 답을 해줍니다. 무엇입니까? 형제사랑입니다. 형제사랑은 적은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어 지옥의 문을 이기게 하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경은 단 한번도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나 지혜나 의나 거룩함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매우 낮고 비천하며 능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번도 교회를 가리켜 천하고 능력이 없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 자신이며 주님의 몸이기 떄문에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주님을 비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정말 한없이 부족하고 형편없으며 겨우 구원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결코 주님을 섬길만한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개개인이 주님과 결합할 때에 주님은 그들을 성령의 하나됨으로 묶으시고, 주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새 생명의 본성 안에서 서로를 형제요, 지체로 여기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형제사랑입니다. 그 외에 인위적으로 서로 친절히 대하고 악수하고 웃는 것이 형제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약간의 경조사를 챙겨주고 아플 때 심방해 주는 것이 형제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매우 잘 하면서도 형제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형제사랑이 없는 곳의 특징은 시기와 다툼과 분열입니다. 성경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형제사람이 충만한 교회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 세상에 그런 교회가 어디 있어? 사람들 사는 데가 다 그렇지... 말로는 다 그렇게 말하지..."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여러분의 지적이 맞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모두들 말로만 사랑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참되게 그렇게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다른 특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사랑 한가지를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쉽게 알 수 있고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형제사랑이 없는 교회가 거룩할 수 있습니까? 형제사랑이 없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형제사랑이 없는 교회가 복음과 선교에 모든 것을 집중하겠습니까? 이러한 부분들이 부족한 것 때문에 애통해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도 있고 은사도 많고 여러가지 뛰어난 점들이 많지만 그들 안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그들은 오늘날 현대교회처럼 저급한 일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고상한 일로 인한 분열이다 하더라도... 바울이냐 게바냐 아볼로냐 하는 다툼이었습니다)을 대할 때 바울은 이 한 가지마나 보더라도 그들이 육신적이며 영적인 어린 아기들이라고 단정하여 말했습니다. 그만큼 이러한 문제가 심각한 것임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형제사랑이 없는 교회는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적한 대로 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해로움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서로 미워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서로 남의 흠을 잡고 뒤에서 서로 욕하고 비난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허다한 허물들을 덮는 형제사랑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누가 무엇을 잘못하고 그래서 못마땅해하고 함께 하고 싶지가 않고 내가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만 어울리는 그러한 곳은 결코 나 자신의 죄를 위해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음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철저히 알아야만 100 데나리온 빚진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별 허물이 없는 사람이고 잘 행하는데 누구누구는 문제가 있다는 그러한 시각은 참으로 위험하며, 주님의 용서를 알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의 교리를 가지고 겸손히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그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판단하여 용서하지 않는 자들을 그들이 올바르게 행할지라도 주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주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도 없이 함부로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자비도 없고 사랑도 없는 심판만을 행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죄를 미워하신 만큼이나 우리들을 사랑하셨기에 자신의 생명을 대신 주신 것입니다. 모든 죄를 다 자신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의 중심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중심은 따지고 판단하며 내가 낫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우리는 배우지 못한 것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참되게 배운 자들은 형제의 죄를 덮어쓸 줄 압니다. 내가 비록 잘못하지 않더라도 형제와 함께 비난을 달게 받습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이 보여주신 어린양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십자가의 영이며, 복음의 영입니다.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따르지 않고 오직 지식으로 배워 머리로 판단하는 자들은 결코 형제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생명 속 뿌리깊게 박힌 것이 자기 사랑, 자기 만족, 자기 고집, 자존심, 자아임을 우리는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을 향해 선한 마음으로 다가서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할 때 조차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그러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정도의 선한 일을 넘어선 참된 형제사랑...참된 형제의 하나됨을 배울 수 없습니다. 어느 때에는 너무나 놀랍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어느 때에는 조그만 문제 하나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봐야만 합니다. 특히나 우리의 힘으로 형제사랑을 실천하고자 애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욱더 자신이 겉으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순수하지 못하며, 때때로 너무나 형제로 인해 속상해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미워하는 사람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한 주님의 사랑...특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위해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감당한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해야지 우리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고상하게 희생을 하고 형제를 위하는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일 때에는 결코 참된 형제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저 형제는 이러저러하니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를 따져서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실 그러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며, 형제와 지체가 되는 것이고, 그러할 때에 우리 각자가 비록 부족해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많은 지식이 있고 은사가 있고 열심도 있지만 형제사랑이 없는 육신적인 교회)를 향해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을 전하기 원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부활하사 영광을 받으신 주님만을 찬양하며 이미 자신이 그러한 영광과 부활 안에 있는 것처럼 꾸미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결단코 부활의 영광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하며 그들의 허물까지 덮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같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은 흉악한 죄인인 우리들에게 그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말하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죄악으로 찌든 이 세상에는 정말 상처입고 마음이 닫혀 어떠한 진리에도 냉소적인 그러한 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또 더 큰 상처를 입을까 정말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죄인들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모였지만 아직도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러한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참된 사랑으로 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앞선 형제, 자매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맛보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유일한 장소가 지구상에 있다면 그것은 교회라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있다면 누가 그곳을 가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은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배워서 형제들을 위해 자신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형제들을 기꺼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라도 친절히 대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인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러나 형제사랑은 정말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경건에 형제의 우애를 형제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는 말씀처럼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맺을 수 있는 거의 가장 높은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주장과 판단들을 다 내려놓고 형제를 사랑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자신의 자아는 철저히 판단하여 버리고 형제들의 자아나 잘못들은 용납해야 합니다. 그것을 반대로 하는 일이 종교의 일이며 그래서 종교인은 자신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형제의 눈에 티끌을 잡아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재판이며, 그들의 눈에는 어떠한 사랑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옳다고 여기는 주장에 빠져서 자신이 형제를 미워하는 일을 하면서도 의로운 일을 한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데에 빠져서 마땅히 생명을 내놓아 사랑해야 하는 형제들을 원수처럼 취급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무섭고 두려운 일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형제에게 무자비하게 행하는 자들에게 자비 없는 심판이 주어질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날에 자비가 심판을 이길 것임을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 한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할텐데 우리는 스스로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모든 주님의 사역은 이와 같은 교회의 기초 위에...단순하게 말하자면 형제사랑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주 안의 형제들을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눈이 먼 소경과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아니 더 먼저 주님의 참된 사랑에 완전히 젖어들지 않으면 결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형제가 너무 심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자기 사랑을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공과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 특히 형제들을 용납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데 매우 필수적이며 가장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형제사랑을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왜 그 형제를 위해 주님께서 보혈을 흘리며 구원하셨는가 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참되게 사랑할 때만이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주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입니다. 주님이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명령하신 가장 중요한 계명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더욱 더 커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자칫 속을 수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참된지 거짓된지를 미리 체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명입니다. 빌라델비아 같은 교회에서만이 모든 형제들의 은사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습니다. 형제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작은 형제나 자매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형제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일(사역) 중심으로 이끌려 능력있는 형제와 그렇지 못한 형제를 차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지체는 교만하게 만들고 반대로 어떤 지체는 낙심하게 만듭니다. 어떤 지체는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어떤 지체는 아무 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체는 자신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여겨 다른 지체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약한 지체는 자신이 너무나 가치가 없어서 자신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결합하여 더욱 더 교회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러한 모임으로 전락합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에 그가 주장한 것이 만인제사장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재 2004년까지도 참된 만인제사장의 교회를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목사의 호칭을 뺀다하더라도 여전히 모두의 은사가 발휘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호칭이 아니라 참된 형제사랑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더 약한 형제가 더 존귀함을 입는다는 말씀이 진리가 됩니다. 형제사랑 가운데 서로 격려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축할 때 모두가 일어나서 주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합니다. 교회는 목사가 섬기는 곳이 아닙니다. 몇몇의 앞서 있는 형제들, 집사들이 섬기는 곳도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도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니골라파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참되게 이곳이 주님의 교회라고 믿습니까? 무엇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섬김입니까? 그것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에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보혈로 구원받은 형제의 가치를 알고 서로가 주님을 머리로 붙들고 지체가 되어 하나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모두가 주님 안에서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빛이 되어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 갈보리침례교회 ( 수련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