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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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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섬기는 조건
lhyunsik

주님을 섬기는 조건 조회 : 5 스크랩 : 0 날짜 : 2004.10.05 08:49 주님을 섬기는 조건 요 12:20-26 20 명절에 경배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어떤 헬라인들이 있더라. 21 그러므로 이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로 가서, 그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자, 22 빌립이 와서 안드레에게 말하니, 안드레와 빌립이 다시 예수께 말씀드리더라.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받을 시간이 왔도다. 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영생에까지 보존하리라. 26 누구나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의 종도 거기에 있으리니, 누구나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시리라. 우리의 일생이 정말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드려져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는 길로 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생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는 참된 헌신의 삶을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늘 우리는 두가지 문제에 대해 분명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우리가 어디에 일생을 드리는가 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푯대를 분명히 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한 달 이상 계속되는 동일한 주제는 우리의 일생을 하루 하루 닥치는 환경 아래서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푯대를 정하고 길을 가야 하는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어떠한 목적으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구원이후에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를 구원하신 지혜롭고 권능있으신 우리 구주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자마자 주님께 물어보았던 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려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정한 우리들은 주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주님의 보혈은 우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줍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러한 길을 가기 위한 예비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그러한 길을 사모하여 가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서너가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한가지 한가지가 매우 중요한 것들이어서 이 부분을 다룰 때에 참으로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중 한가지는 먼저 진리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홀히 하고서는 결단코 진리의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되며, 하나님이 말씀만이 진리이고, 사실이며, 실제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우리를 속이며 미혹하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말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진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그 중 또 한 가지는 바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모든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시작하셔서 그 모든 일들을 완성하실 위대한 분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한 번 더 다루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순간 결여된 것은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은 지금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게 하신 그러한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생명은 구원받기 전까지 우리가 소유한 옛생명과 매우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의 생명은 그 본질이 부패하고, 이기적이며, 천한 인간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 받은 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생명은 그 본성이 거룩하며, 고귀한 하나님의 부활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까? 과거에 우리가 가진 생명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영이 죽은 인간은 결코 영이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세 번이나 걸쳐서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로마서 1장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나의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시니, 나의 기도에 쉬지 않고 항상 너희를 말하며, "(롬 1:9). 나의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실 뿐 아니라 그 성령과 교제할 수 있고 그분의 지시나 명령을 따르고 감지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다음은 로마서 7장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붙잡혔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부터 구제되었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법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롬 7:6). 우리는 밖에 있는 어떤 율례를 따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영의 새로움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도들의 섬김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구해냄을 받았으며, 이는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12장입니다.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우리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야 하는 일은 바로 주님의 일이며,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필요한데, 바로 영 안에서 내는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가장 소용이 없는 것은 육신의 열심입니다. 자기 열심은 자신을 높여서 교만케 만들기에는 유용한지 모르겠지만, 결코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섬길 수 있는 분도 아니며 또한 섬김이 필요하신 분도 아닙니다. "또한 무슨 필요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되는 것도 아니시니, 이는 그분이 친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심이라"(행 17:25). 뭔가 부족한 것이 없으며 스스로 자족하신 하나님이시며,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섬길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섬김을 받아주신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 힘든 고역을 감당하는 의무가 아니라 영예로운 특권입니다. 섬김이 사실상 필요없는 분이 우리에게 섬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정말 우리 주님은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벌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 생각하더라도 한 명의 천사가 땅끝까지 날아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불순종하며 어리석고 연약한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이 아닙니까? 복음전파의 어리석음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이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선호하신 것입니다. 천사에게 맡기면 언어를 배우는 고생도 할 필요도 없는데, 주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고귀한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천사들도 흠모할만한 일입니다. 하늘의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특권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2장 26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누구나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시리라." 주님을 섬기는 것은 참으로 영예로운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사람은 지금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일반 기독교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아무나 주님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주님이 있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유대땅에 가시면 주님을 섬기는 종들도 유대땅에 가야 합니다. 돌에 맞아 죽는 위험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주님이 갈릴리에 가시고, 주님이 겟세마네에 가시고, 주님이 베다니에 가시고,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일단은 함께 있어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방금 읽은 요12:26을 전체를 한 번 읽겠습니다. "누구나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의 종도 거기에 있으리니, 누구나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시리라." 주님을 섬기는 방법은 어찌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주인이 있는 곳에 종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라." 주님을 섬기고 싶으면 주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의 일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주님은 승리의 입성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외치는 가운데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을 헬라인들까지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헬라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군중의 환호성에 들떠서 주님곁으로 모였지만 주님은 자신이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호산나를 부르던 이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것을 주님이 아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고 따르려는 이유가 일신의 안락과 성공과 축복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빵을 먹을 수 있다면 주님의 이름에 환호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냉담하며, 오히려 대적합니다. 예수님 믿고 뭔가 세상의 일들이 잘 풀리고, 자식들이 잘되고, 사업이 번성하고, 질병이 나으면 그들은 호산나 부르면서 환호를 합니다만 그 반대의 경우가 되면 그들은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주님 곁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합니다. 당신이나 십자가를 지시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매장되고 묻혀야만 다시 살아나며, 다시 살아날 때에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부활과 한가지입니다. 영광은 반드시 고난과 한가지입니다. 주님이 헬라인들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씀은 {인자가 영광받을 시간이 왔도다.}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환호하는 그러한 일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밀은 다시 자신의 생명을 되찾을 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생명을 더 많이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밀알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천군천사의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호산나 외친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한 알의 밀에 대해 말씀하신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영생에까지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섬기려면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이십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가야 할 길도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이전에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들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려는 자들은 주님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누구나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계신 곳이 영문 밖 십자가의 장소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자기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길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도록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주님의 생명은 서로 반목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석의 N극과 N극이 서로 밀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갈 5:17)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미워함을 당하든지 주님의 생명이 미워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주님 곁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만이 "그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13:13). 자아가 부인되면, 주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 또는 자아의 완전한 부서짐의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자아의 저항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부수시고, 그런 다음 사용하십니다. 용사 기드온은 휘하 병사들에게 적 진영 주위에 둘러 선 채 나팔 소리에 맞추어 손에 든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명령했다. 항아리가 깨지자 그 속에 들어있던 횃불이 밖으로 빛을 발했다(판 7:16-22). 하나님의 빛은 그릇이 깨어질 때 가장 밝게 빛을 발한다. 여인이 주 예수님께 향유를 붓기 위해서는 먼저 그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야 했다. 옥합이 깨어질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에 가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세상 안에 머물면서도 진영 밖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길 싫어하면서도 나름대로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 이전에 주님을 따라 진영 밖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을 따라야 한다. 사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주님과 함께 잇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께서 열둘을 정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내보내어 전파하게 하시며"(막 3:14). 내보내어 전파하는 일을 하기보다 먼저 필요한 일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갈보리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사복음서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또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주님을 따르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이 십자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분명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나무 십자가가 아니다. 이 십자가는 그분의 제자들이 날마다 져야 하는 그 무엇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주님이 가셨던 바로 그 갈보리의 길을 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유익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했듯이, 이 십자가는 주님을 위한 수치와 고난과 희생을 포함한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이 부르심이 다시 기록되었다. "누구라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2)는 말씀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할 뿐 아니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의 계획은 단순하고 쉽습니다. 아무런 공로나 선행이 없이도 진지하게 죄로부터 마음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시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절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며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공짜가 아니며 대가를 치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쉽게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쉽게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쉽게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무리들에게 "비용"을 계산할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분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기를 주님께서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들은 세상적 야망을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복종시켜야 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이익보다 오는 세상의 실제들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아야 했다. 영원한 미래와 비교해 볼 때, 이 땅에서의 생명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를 분명히 인식해야 했다. 주님께서는 망루를 세우는 것과 전쟁을 준비하는 왕을 비유로 들면서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결정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주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박해와 시련과 슬픔을 약속하셨다. 그들은 우선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우리 다같이 누가복음 14장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눅 14:33).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비용이다. 그리스도께 전부를 드리거나 아니면 비웃음을 사며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뿐이다. 그가 먼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만 명으로 그 두 배가 되는 상대방의 병력을 무찌를 수 있겠는가 계산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다. 만일 먼저 선전포고를 해놓고 양편의 군대가 서로를 향해 진군할 때 다시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인가. 이제 남은 방법은 백기를 들고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뿐이다. 주님은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금은 좋은 것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맛을 내리요? 그렇게 되면 땅에나 퇴비더미에도 적합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내다 버리느니라"(눅 14:34-35).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일생의 목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아무 쓸모가 없어, 다만 내던져져 사람들의 발아래 밟힐 뿐이다(마 5:13).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채 자신의 안위와 즐거움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을 따르는 것은 그 맛을 잃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될 때 그의 생애는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람의 발에 밟히며, 웃음을 사고 멸시와 조롱을 당한다. 세상은 그러한 그리스도인을 조롱하며 "이 사람이 망루 짓는 일을 시작만 하고 완성은 못했구만. 거듭날 때는 떠들썩하더니만 이젠 우리와 마찬가지구만."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의 끝에 이처럼 말씀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주님께서는 어떤 강한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을 자주 덧붙이셨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셨다. 사람들 중에 더러는 말씀을 들을 때 임의로 해석하여 명백한 주님의 명령을 거스릴 것을 아셨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엎드려 받을 사람들이 얼마간 있을 것을 아셨다. 주님은 이 길이 좁은 길임을 아신다. 모두가 다 우르르 몰려들어 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니라 각자가 비용을 계산하고 가야하는 좁은 길임을 아셨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이러한 초정을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초청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 것은 가장 복된 일이다. 그는 참되게 비용을 계산한 자이다. 비용을 계산한 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오카스인들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아버지, 원하시면 제 생명을 취하소서. 가져다가 당신의 불에 사용하시옵소서. 저는 그것을 제것으로 따로 두지 않겠나이다. 그것은 제것이 아니니이다. 그것을 가지소서. 주님, 전부를 주님이 취하소서. 이 세상을 위해 제 생명을 모두 불사르시옵소서! 피는 주님의 희생단에 부어질 때에만 가치가 있나이다." 오카스 인디안 족속에서 사역하다 1956년 그들에게 살해당한 선교사 짐 엘리오트(Jim Elliot, 1927-1956)가 휘튼 대학의 학생 시절에 쓴 일기에 기록되어 있던 고백이다. 주님을 참되게 섬긴 많은 종들이 다 이와 같았다. 그들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밀알이 되기를 원했다(요 12.24). 주님을 따르는 삶은 그 자체가 큰 상(賞)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주님을 따르는 장면이 마 4:19-20에 나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니,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주를 따라가더라."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주께서 또 다른 두 형제를 보셨는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으로,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더라. 주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이 즉시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남겨 두고 주를 따라가더라"(마 4:21-22). 주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육체를 입고 계셔도 우리는 동일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다 합당한 대가를 치루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주 많은 재산을 포기하지 못했기에 주님을 따르지 못했던 부자 청년이 간 뒤에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갖게 되겠나이까?" 베드로에게도 그물과 배는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 청년만 어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무식하니까 앞뒤재지 않고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떤 시람도 자신이 가진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본 자들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면서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만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두었습니다. 방금 인용했던 주님을 따랐던 선교사 짐 엘리오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일시적인 것을 바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주님도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일백 배로 받을 것이요, 또 영생을 상속받으리라." 오늘 본문인 요한 복음에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영생에까지 보존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라는 말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참으로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지금 성문밖에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그의 수치"를 함께 진 사람은 그분의 영광도 함께 질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유업의 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줄 앎이니,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음이라"(골 3:24). 주님을 섬긴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높이실 것이며, 그에게 면류관을 주어 유업의 땅을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나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시리라." 기도하시겠습니다. 김 익현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