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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1)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다는 아니지만 현역 군인들 만이 아니라 많은 제대군인들도 전문 도적질과 강도질로 훈련이 되어서 집에 돌아와서는 기차역과 장마당, 등지에서 날쌔고 민첩하게 사람들의 장사물건과 식량 배낭 들을 훔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우리 옆집에는 둘째아들이 금방 군대에서 제대되어 왔는데 그 전에는 죽도 못 먹고 계속 우리집에서 쌀을 꿔 먹으며 살다가 둘째아들이 제대되어 오자마자 더 이상 쌀 꾸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는 매일 저녁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고 갑자기 생활이 달라졌다. 그 아들은 직업이 도적질이었는데 매일 밤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온다. 그리고 그의 엄마는 장마당에 나가서 아들이 훔쳐 온 물건을 팔았다.

 노동자들은 공장의 기계와 부속품을 떼어내어 팔거나 전깃줄, 철도레일, 등 동, 철, 금속제품이라면 닥치는대로 뜯어내어 국경지대에 가서 팔았다. 중국 밀수꾼들은 특히 동이나 알루미늄을 많이 사갔는데 그 외 희귀금속들을 많이 걷어 갔다. 여자들 긴 머리카락도 꽤 비싸게 팔렸다.

 장마당에는 “꽃제비”들이 엄청 많았는데 그들은 5살~15살 사이의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들이다. 그 아이들 부모들은 식량구입을 나갔다가 몇 달이고 소식이 없는 애들, 혹은 부모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갔거나 돌볼 어른들이 없는 애들이 장마당에 뛰어나온 것이다.

 처음엔 그들은 두 손으로 구걸을 하다가 사람들이 잘 주지를 않자 훔치거나 뺏어 먹으며 목숨을 유지했다. 사람들이 떡을 사 먹거나 음식을 사 먹으면 옆에 살금살금 다가가서 휙 잡아채고는 저 멀리 도망간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휙 잡아채고 달아나버린다. 너무 빨라 그들을 쫓아가면 옆에서 다른 꽃제비들이 남아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훔쳐가기 때문에 쫓아갈 수도 없었다. 그나마 약삭빠른 애들이나 장마당에서 훔쳐 먹기라도 하지만 순하고 맘 약한 애들은 집에서 엄마 기다리다가 3일 만에 굶어서 죽는 애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5.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급기야 사람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장마당에 나앉았다. 김일성 시기부터 농민시장은 열흘에 한번씩 열렸지만 공업품을 팔지 못하게 단속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 중국에서 밀수로 건너온 옷가지들과 상품들도 장마당에서 많이 팔렸는데 비사회주의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단속했다. 중국산 공업품은 자본주의 날라리 사상을 퍼뜨려온다고 팔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공업품 장사군들은 단속을 피해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서 몰래 팔거나 숨어서 집에서 팔기도 했다. 그러면 물건을 살 것처럼 접근을 해서 집에 있는 물건가지 다 빼앗아 갔다.

 장마당 단속하는 그룹을 “6.4그루빠”로 불렀다. 김정일이 6월 4일에 자본주의적인 모든 행위를 단속하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6.4그루빠”이다. 그들 역시 빼앗은 물건은 본인이 챙겨간다. 또는 자기들 상관들한테 뇌물로 바친다. 그들도 그런 것 없이는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시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 악질 단속원이 되버렸다.

 그런데 이들에게 맞설 명분이 인민에게 생겼다. ‘배급도 안 주고 장사도 못하게 하고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생계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장마당을 중심으로 해결하므로 만인이 판매원이자 구매자가 된 시장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점에서 우리는 엄혹한 현실에 두려웠고 우리도 언젠가 저들처럼 굶어 죽지 않으려면 뭔가 큰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1996년 가을에 같은 공장에 다니는 제대군인과 결혼을 했다. 우리 공장은 그나마 다른 공장들과는 달리 군부대 기업이라 군수물자에서 배급 쌀을 가끔씩 주기도 했고 수산물을 가져다 생활에 보태기도 하기 때문에 다들 00수산사업소 총각들을 사윗감이나 신랑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공장 총각들은 인기가 많았는데 나도 그런 이유에서 그와 결혼했다.

 북한은 결혼을 하면 본인 의사에 따라 퇴사하는데 나도 결혼 후부터 전업주부가 되었다. 우리가 결혼 후 작은 방을 세 얻어 살기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신랑은 1년간 평양 아파트 건설에 “돌격대"로 가게 되었다. 신랑이 떠나고 나서 나는 임신이 됐음을 알게 되었다. 혼자 집세를 내면서까지 셋방을 살 필요가 없어서 나는 다시 친정집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분사료를 만들어서 식량을 바꾸는 것이 한창 유행이었다. 어분사료는 물고기나 조개껍질 등을 가루로 내어 축산 농장에서 축산 사료용 통강냉이를 바꿀 수 있었는데 물론 중국산 통강냉이였다. 각 축산이나 목장들에서는 사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짐승 사료용으로 나 온 통 강냉이를 어분사료와 바꿔서 쓰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함께 구루마를 끌고 해변가를 다니면서 파도에 밀려나 온 조개나 굴 껍질을 주우러 다녔고 생선뼈나 대가리, 조개껍질, 삼바리, 파도에 밀려나온 다시마뿌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다풀들을 닥치는 대로 수거해서 햇볕에 말리고 가축 사료로 만들었다.

 사료를 만들어서 식량 바꾸는 곳에 가면 바로 바꿔주지는 않고 적어 놨다가 한 달 정도 있다고 받기도 하고 두 달 정도 또는 아주 떼이는 경우도 많다. 기간이 오래 걸리지만 일단 받기만 하면 몇 백kg씩 받게 되므로 꽤 할만한 장사였다. 중간에 기다리는 동안에 엄마와 나는 다시마 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북한의 다시마 특히 나진, 선봉지역의 다시마가 색깔이 짙고 두껍고 맛이 좋았다. 그걸 사서 다시마를 소다를 넣고 푹 삶으면 다시마는 녹아서 걸쭉하게 액체만 남는다.

 그리고 베 천에 넣고 손으로 눌러서 즙을 짜낸다. 그걸 짜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온몸을 다 던져서 짜고 또 짜고, 베 천이 너무 보드라우면 잘 짜여지지 않지만 그 대신 면발이 부드럽고 보기에도 좋았다. 정말 그걸 짜는데 온 집안 식구가 10분씩 교대로 달려들어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큰 대야에 찬물을 준비하고 거기에 염화수를 섞어 넣는다. 이때는 이것이 몸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몰랐고 당장 그런 걸 따질 형편이 못되었다.

 염화 수를 구할 곳은 오직 한군데인데 바로 내가 일했던 직장에 가면 얻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깡통 바닥에 못으로 구멍을 송송 내고 그 안에 다시마즙을 쏟아 부으면 뚫린 구멍으로 즙이 내려가면서 찬물에 들어가는 순간 굳어지면서 국수 면발처럼 길게 늘어진다. 그걸 한번 씻어내면 다시마 국수가 된다.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삶은 다시마를 베천에 넣고 손으로 짜내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다시마만 빼면 정말 영락없는 국수다. 거기에 파와 마늘, 고춧가루를 살짝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국수와 양념을 만들면 장마당에 싣고 가서 판다. 다시마 국수는 한 그릇에 5원씩 팔았는데 싸고 양이 많아 5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 먹었다. 그나마도 장사가 좀 되다가 몇 달이 지나면서 배탈을 앓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우리는 염화수가 몸에 치명적임을 느끼게 되어 당장 중단했다. 또한 다시마 즙을 짜내는 것이 너무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정말 구수한 된장국 한 끼 배불리 먹어보는 것도 소원이었다. 집에 된장, 간장이 없는 지 몇 년이 됐는지 까마득하다. 그래서 나와 엄마는 간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살 수도 없어 어느 날 콩으로 간장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엄마가 생각해냈다. “엄마! 우리 한번 해보자. 콩 1Kg 만 사서 해 보지 뭐”

 메주콩을 단지에 넣고 푹 삶고 다 익으면 염산을 넣는다. 염산에 삶은 콩은 녹아 버리고 그것을 채에 받아서 찌꺼기는 버린다. 그러면 밤 갈색의 액체만 남는데 거기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맛간장이 된다. 간장 맛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란 우리는 간장을 더 많이 만들어가지고 농촌으로 돌아다니면서 쌀과 통 강냉이로 교환했다. 땔나무와 메주콩을 사는 본전을 빼고도 남는 장사였다.

 염산은 엄마가 학교에 찾아가 화학선생님한테 한 병을 얻어왔는데 그 한 병이면 오래오래 쓸 수 있었다. 역시 엄마는 천재처럼 뭐든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잘 생각해 냈다. 나중에는 그것도 곧 그만뒀는데 그 이유는 도시보다 시골사람들이 쌀이 없어서 더 많이 굶어 죽어 나가니 그들에게 간장은 사치였고 소금도 사 먹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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